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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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강제로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p.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1884~1937)의 <우리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로서, 또 <멋진 신세계>와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가지는 위상은 높다. 

<우리들>은 1920년에 완성되었는데, 당시 볼셰비키 혁명 후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에서 이 소설은 발표될 수 없었고, 1924년 영역본에 이어 1927년 해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들>의 배경은 과학 기술이 정점에 달한 29세기 미래 세계이다. 200년 전쟁으로 인류의 80프로가 죽고, 남은 인간들은 인류가 그토록 염원하던 지상 낙원인 '단일 제국'을 건설했다. 

'녹색의 벽'으로 자연과 분리된 공간인 단일 제국은 비이성적인 것, 개인적인 것은 모두 억압하는 전체주의 국가로서, '나'는 없고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아닌 '......중의 한 개인'(p.15)으로 생각한다. 

단일 제국에서 자유는 범죄이자 '미개한 상태'(p.7)를 뜻하기에, '수학적 오류가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단일 제국에서 개인의 자유는 비밀 경찰인 '보안국'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이들은 모두가 번호로 불리고,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 건물에 살며 절대 권력자인 '은혜로운 분'의 통치를 받는다. 

수백 만의 구성원은 '시간 율법표'에 따라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하고 식사하고 산책을 한다. 또한 국가는 모든 번호들(단일 제국에서는 사람을 '번호'라고 부른다)의 성 호르몬을 분석하여 '각자에게 맞는 섹스 일정표를 산출'(p.33)해 준다. 성관계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이는 국가가 정한 신체 기준에 맞는 여자만 낳을 수 있다.


주인공 D-503은 우주선 '인쩨그랄'호의 조선 담당 기사이자 수학자로서 이성을 신봉하는 단일 제국의 충실한 '우리' 중 하나이다. 그는 단일 제국을 예찬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려고 하는데, 이 소설은 바로 그가 쓴 40개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이런 단일 제국의 모범 시민인 D-503이 I-330이라는 한 여성을 만나면서 사랑과 성에 눈을 뜨고 내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자신이 몰랐던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단일 제국에서 한낱 '번호'에 불과했던 D-503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다. 


내가 <우리들>을 읽으면서 놀란 점은 자먀찐이 이 소설을 쓴 1920년은 아직 스탈린 체제가 등장하기 전으로 '어떻게 작가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비슷하게 예측할 수 있었는가'이다. 

'은혜로운 분'에 버금가는 스탈린, 비밀 경찰 엔카베데의 감시, 공개 투표, 대숙청, 개인의 자유 억압 등이 훗날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과 너무나 비슷해서, 또 사람을 번호로 부르는 것은 나치 강제 수용소를 떠오르게 해서 놀랐다. 오늘날에 적용해도 맞는데, 현대인은 겉으로 보기엔 자유로워 보이나 자본주의의 감시 속에서 나도 모르게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틀 안에서 선택함으로써 인간의 결정권, 주체성을 침해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예언한 작품이 100년 전에 쓰여졌다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문장이 매우 상징적이라 이해하기 힘들었던 점은 조금 아쉽다. <멋진 신세계>와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준 소설이라 당연히 비슷한 수준으로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문장이 모호하고 상징과 은유가 많아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소설이었다. 각각의 단어가 무엇을 상징하며 그 숨겨진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느라 힘들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면 할수록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를 <우리들>은 보여준다. 자먀찐은 이성 만능주의와 과학 기술을 맹신하며 역사는 늘 진보한다는 신념을 가진 당대 소비에트 이상주의자들과 대립했다고 한다. 그런 이념들이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어떤 사회가 출현하는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이탈노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건강한 도시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곳이다. 유토피아와 가장 가까운 사회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곳이 아닌, 이성과 비이성, 투명과 불투명, 동질과 다양성, 문명과 야만, 미지수와 기지수, 엔트로피와 에너지가 공존하는 곳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질문하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은 혼란스럽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배워나가는 그 과정이 진정한 유토피아에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우리들>은 당시에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하고 풍자한 작품으로만 인식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의미가 풍부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로써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을 다 읽었다. 뭔가 뿌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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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03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은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완독자시군요 ㅋ 좀 어렵다고 하시니 겁이 납니다 ㅎㅎ 전 1984만 읽어봤습니다 ㅋ

coolcat329 2023-05-03 07:52   좋아요 1 | URL
세 소설 중 가장 강렬했습니다.

물감 2023-05-07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스토피아 좋아해서 읽어보고 싶은데 음 이해가 쉽진 않다니 망설여지네요. 저도 새파랑님처럼 1984만 읽었어요. 멋진신세계도 읽어야겠네요. 요즘 처음 보는 작가들만 도전하시는 쿨캣님, 계속 화이링 입니다 ㅎㅎ

coolcat329 2023-05-08 07:36   좋아요 1 | URL
물감님 디스토피아 좋아하시는군요~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같은 건 어떠신지요?
이 책 재미는 없습니다.🥱
다만 <멋진 신세계>와 <1984>에 큰 영향을 준 책이고, 집에 있어서 읽었네요.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시작하세요~! 쉬시니까 월요일 너무 좋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