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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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은 커피 통 뚜껑을 열고 커피가 한 숟가락밖에 남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p.7)


이 소설의 첫문장이다.


75살의 퇴역 대령과 만성 천식 환자인 아내가 사는 콜롬비아 북부, '한 숟가락' 남은 커피는 노부부의 현실이다. 콜롬비아 커피는 얼마나 유명하고 맛있는가...그러나 1950년대 콜롬비아 민중들의 삶은 우리가 마시는 커피처럼 향기롭지 않다.


대령은 50년 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10월은 대령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달이다. 이 소설의 1장에는 '10월'이라는 말이 8번 나온다. '10월 이었다', '10월 이군', '음산한 10월', '10월이에요' 등...대령은 10월만 오면 '배 속에 짐승들이 있는 것 같은 느낌'(p.16)이 든다. 

이 가난한 대령과 10월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콜롬비아 역사와 관련이 있다.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약 천일 동안 콜롬비아에서 집권 보수당과 자유당 간에 내전이 있었는데, 이를 천일전쟁이라고 한다. 대령은 이 천일전쟁에 자유당 소속 군인으로 참전해 싸웠는데, 정부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200명의 혁명군 장교에게 여비와 보상금을 약속'(p.37)하며 1902년 10월 24일 금요일, '네에를란디아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1899년 내전이 일어난 달도 10월,1902년 연금을 댓가로 정부에 항복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한 달도 10월...대령에게 10월은 잊을 수 없는 달이고, '도착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p.7)이다. 

대령이 50년 넘게 기다리는 것은 바로 평화 조약 때 약속한 그 연금 지급을 알리는 편지이다. 


"내 동료들은 모두 편지를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이건 동냥을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분골쇄신했습니다."(p.37)


대령은 매주 금요일, 오지 않는 편지를 기대하며 우편선이 정박하는 항구로 가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아요." 라는 우체국장의 차가운 말 뿐.


대령에게 연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다. 젊은 시절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운 자신의 신념에 대한 보상이자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난하니까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연금 자격 인정 절차에 8년, 수혜자 명단에 포함되는데 6년이 걸렸고 이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대령은 1902년 10월 24일, 그날의 항복을 후회한다. 그날의 항복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생각한다. 


'편지에 대한 희망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대령에게 가난과 만성 천식으로 하루하루 힘든 아내는 수탉을 팔아 치우라고 한다. 이 수탉은 '비밀문서를 유포한다는 이유로 아홉 달 전에 투계장에서 총탄을 맞아 벌집이 된 아들의 유산'이다. 수탉을 팔면 당분간은 생활고를 겪지 않을텐데도 대령은 "석 달만 있으면 투계 시합이 열릴 테고, 그러면 더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거요."(p.46)라며 자신은 굶어도 수탉에게 줄 먹이를 챙긴다. 


아내는 "우리 입에서 빵을 치우고 그것을 수탉에게 주는 건 죄예요."(p.47), "체면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아야 해요."(p.65) 라며 수탉을 팔지 않는 대령을 비난하지만, 대령은 아들의 유품이자 1월에 열릴 투계시합을 기다리고 있는 마을 젊은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늙고 아픈 몸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노부부의 모습은 애처롭다. 

"우리는 산 채로 썩어 가고 있어요." (p.11) 아내는 말한다. 기다린 세월을 봐도 정부에서는 연금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 변호사는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대령은 단호하다.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작은 것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p.41)


오로지 기다리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대령에게 기다림은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에게 기다림은 시시포스가 굴러떨어지는 돌을 밀어올리는 행위이고,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부랑자가 오지도 않는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며, 화창한 날의 내일을 기다린다. 몸이 아프면 몸이 얼른 낫길 기다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의 종식을 기다린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런 모든 기다림 속에는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거라는 희망이 내재되어 있기에 우리는 기다리며 살아간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언젠가 코로나가 사라질거라는 희망...기다림은 모두에게 이런 의미가 있다.

대령에게 기다림은 현실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며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리고 대령에게는 쌈닭이 있다. 닭을 팔면 한 3년은 그럭저럭 끼니 걱정 안하며 살 수 있음을 대령은 안다. 그러나 대령은 아들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자 마을 청년들의 희망, '기면 상태'에 빠져 있는 마을을 깨어나게 할 투계 대회에 출전할 쌈닭을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싸워 이기지 못했지만, 이 쌈닭만큼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은 바로 대령이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다. 

대령은 집에서는 야위고 무기력했던 닭이 투계 연습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용기가 솟아남을 느낀다. 두 손에 안아든 수탉의 '뜨겁고 강한 고동'에 몸서리를 치며 생각한다. '자기 손에 그토록 생동하는 것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p.85)고...


이 소설에는 콜롬비아 군사 정권 하의 암울한 민중들의 삶이 곳곳에 묘사된다.

소설 초반에 마을 청년이 죽어 장례식에 가는 장면에서 대령은 "이 장례식은 중요한 행사지. 오랜만에 보는 자연사 아니오."(p.11)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례 행렬이 경찰 막사 앞을 지날 수 없다'는 말에 장례 행렬이 방향을 바꾸는 모습은 평범한 한 청년의 죽음도 눈치를 봐가며 슬퍼해야 하는 계엄 하에 있는 콜롬비아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문은 검열을 받아 온통 유럽 소식들로만 가득차 있고 국내 사건은 비밀리에 유통되는데 대령은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최선의 방법은 유럽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우리가 유럽으로 가는 거요.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될 거요." (p.33)

대령의 아들도 비밀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의심만으로 조사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이런 어두운 콜롬비아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힘없는 민중들, 그 가운데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며 수탉이 투계 시합에서 당당하게 승리해 모두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대령의 세상을 향한 작은 저항은 애처롭지만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대령의 말은 절대 잊을 수 없는데, 소설 처음에 나온 콜롬비아의 그 맛있고 향기로운 커피와 대조가 되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는데, 1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담백한 문장에 많은 것이 압축된 꽉 찬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백년의 고독'을 읽으려고 한다. 조금 긴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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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19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닭 한마리가 무려 3년을 끼니걱정 안하게 한다는게 놀랍네요 ㅎㅎ 이 책 서점가서 한번씩 보고 제목이 궁금했었는데, 그런 의미였군요^^ 민음사 시리즈 좋아하는데 읽어봐야 겠습니다~!

coolcat329 2021-05-19 21:00   좋아요 2 | URL
일반닭이 아니라 싸움닭이라서 가격이 좀 나가는가봐요. 우승하면 닭 주인에게 20%떨어져요 ㅎㅎ

근데 이 책은 거의 반이 해설입니다 ㅠ 참고하셔요~~

바람돌이 2021-05-20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러운 리뷰로 이 책 급 관심이 가네요. 저 제목 볼때마다 무슨 뜻이지 했는데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라니.... 보관함으로 또 슝하고 넣어 놓습니다. 백년의 고독은 전 항상 도입부 읽다가 악 하면서 넣어놓고 또 시도하다가 넣어놓고 하던 책이라 진짜 저에겐 숙제같은 책이에요. coolcat329님 리뷰를 보면 아마 또 시도해보지 않을까 싶네요. ^^

coolcat329 2021-05-20 06:47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백년의 고독...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