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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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마론(1941~)이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삶은 독일 역사의 분단, 통일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 1941년 베를린 출생, 분단 후 서베를린에 살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951년 동베를린으로 이주, 동독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교육을 받고 대학에서 연극학과 예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76년 전업 작가가 된 후 1981년 첫 소설 <분진>을 발표한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동독과 서독의 분단 상황, 특히 동독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주로 썼고, 1988년 임시비자를 받아 서독 함부르크로 이주해 통일이 될 때까지 머물다가 현재는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1996년 발표한 <슬픈 짐승>은 '모니카 마론의 작품 세계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소설'(p.198 작품해설)로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과거 자신의 사랑을 회상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동독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의 고생물학자인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발작을 하다 실신하게 된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발작을 겪고 나서 그녀는 생물학자로서 믿었던 진화론에도 의심을 품게 되고 심적으로 불안감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죽을 수도 있었던 내가 삶에서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p.20)는 결론을 내리게된다.


그리고 1년 후, 그 사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나'는 서독 출신의 프란츠를 만난다. 

박물관 내 거대한 브라키오사우루스 모형이 내려다보는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동물이군요." 라는 말과 함께 다가온 프란츠.


결혼해서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녀의 삶은 그 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한다. 남편과 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프란츠와 만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삶은 오직 프란츠로만 가득차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듯 나는 혼자서 계속 프란츠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행복과 불행, 구원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이 한 단어, 프란츠뿐이었다. 오늘까지도 내내 그러했다. (p.123)


 

프란츠는 유부남이다. '나'를 찾아왔다가 밤 12시 반이 되면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프란츠의 아내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프란츠가 아내와 여행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훔쳐보며 그들의 관계는 잘못됐고 베를린 장벽이 없었다면 '절대로 그녀는 그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여행을 떠난 후 '나'는 그의 여행 동선을 상상하고 그들이 머무는 호텔방, 그들의 육체관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극도로 불안해한다. 프란츠가 떠나고 홀로 남은 그녀는 '지독한 고독의 감정'을 느끼며 그가 머물만한 호텔들 여기 저기로 전화를 거는데, 그야말로 사랑에 집착하는 한 여자의 처절한 모습이다. 


프란츠를 만나기 전,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에서 살았을 때 '나'는 고생물학자로서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에 가서 시조새의 발자국을 보길 간절히 원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곳에 가는 것을 미룬다. 장벽 안에 갇혀 있었을 때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은 오직 꿈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동경의 장소였지만 이제 그곳은 누구나 갈 수 있는 현실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오직 프란츠의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슬픈 짐승>은 사랑에 관한, 그것도 한 여자의 처절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의 회상 속에는 사랑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삶도 있다. 

베를린 장벽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고 통일을 맞이한 세상은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통일이 되고 정치적 야망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하는 사람, 분단으로 헤어졌던 옛사랑이 다시 돌아오자 24년을 함께 산 아내를 떠나는 남편, 분단 시절 서독으로의 탈출을 도와준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통일이 되자 사랑없는 결혼을 청산하고 자유를 찾는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권태기에 서로 대화도 없던 부부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서로를 '감사 가득한 결탁'이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게 됐다는 점이다. '이혼 소송 중 다수가 취소'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지칭했던 것을 단단히 움켜'쥔다. 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낯선 세계는 보기만 해도 권태감이 밀려오는 남편, 아내의 얼굴을 친숙하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기는 하나 동서독의 통일과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 가운데 드러나는 사회적인 혼란과 개인의 불안을 함께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나'가 보여주는 처절하고 광적인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한 사람의 그동안의 억눌린 몸부림이 아닌가 싶다. 

사랑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고 했던 여자, 그러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마저도 파괴해야 했던 여자...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그녀는...슬픈 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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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5 17: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All or Nothing 이네요 ㅎㅎ 체제의 혼란과 이에 따른 사랑이야기라니 관심이 가네요. 슬픈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 ^^

coolcat329 2021-04-25 17:46   좋아요 4 | URL
네~~사랑이아기를 통일 독일을 배경으로 보여준 점이 이책의 특별함인거 같아요.이 책 두껍지 않은데 천천히 읽게 되는 책이었어요. 문장을 자꾸 곱씹게되고 그래야 이해가 되는거같고...ㅎ
짐승은...책속에 화자가 이런말을 해요. 짐승은 지옥에 안간다고...

얄라알라 2021-04-28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녀는...슬픈 짐승이다.

coolcat님 댓글을 읽고 나니, 아하 ‘ ‘ 작은 따옴표.
소설 속에서 ‘짐승‘ 단어가 자주 나오나봅니다.

저는 늘 소설 읽기에 야박해서 이렇게 소개해주시는 글들로 훌륭한 나침반 삼습니다.

coolcat329 2021-04-28 17:37   좋아요 1 | URL
‘짐승‘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진 않아요.☺
사랑, 특히 문명에 의해 ‘아직 교화되지 않은‘ 청춘의 사랑, 그 사랑을 중년의 나이에 하게된 한 여자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고 하고 싶네요. 그래서 짐승이라는 이미지와도 통하는게 있어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