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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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서머셋 몸이 '인물보다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의 전개가 재미있고 몰입도가 높다. 누군가 민음사 세계문학 중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주인공 키티는 남편의 지위(정부 세균학자)가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지 않는 현실, 무엇보다 사랑없는 지루한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매력남 찰스와 불륜관계에 빠진다.

이야기는 이 둘의 불륜 현장에서 키티가 어떤 인기척을 느끼며 깜짝 놀라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첫 장면, 첫 문장부터 흥미진진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p.15)

 

모든 불륜이 그렇듯 남편 월터가 알게 되고 매력넘치던 불륜남은 역시나 본색을 드러낸다. 월터는 자신을 배신한 키티에 대한 복수로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 오지마을에 책임자로 자원한다. 만약 키티가 따라가지 않겠다면 불륜으로 고소를 하겠다는 월터의 협박에  키티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야기는 오색의 베일 painted veil 처럼 다채롭게 전개된다.

 

허영으로 가득찬 키티라는 여인이 남편에게 불륜을 들키고 질병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오지에 가서 다양한 인간의 삶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지 깨닫는다는게 이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키티는 월터가 자기를 사랑했기에 스스로를 경멸한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건 부당해요. 내가 어리석고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해서 날 비난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요. 난 그렇게 자랐어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은 다 그래요. (...)난 그냥 예쁘고 명랑해요. 장터 노점에서 진주 목걸이나 담비 외투를 찾지 마요." (p.182)

 

사실이다. 키티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다. 야심많고 엄격한 그녀의 엄마는 출세에 대한 의지가 없는 하급 변호사인 남편을 경멸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이 오직 남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에 그를 출세시키기 위해 '가차없이 들볶는다'. 이런 엄마를 보며 자란 딸들은 아버지를 '수입의 원천 이외에 다른 존재로는 여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수단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것이다.

또한 엄마인 가스틴 부인은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딸들을 좋은 곳에 시집 보냄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 특히 두 딸 중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키티에게 '타산적인 애정'을 쏟았으니 키티가 이렇게 자란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서머셋 몸은 남편의 성공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을 하려는 당시의 여자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것 같다.

<달과 6펜스>에서도 남자만 바라보는 독립적이지 못한 여자들을 안좋게 생각하는 그의 생각이 드러났던게 언뜻 기억난다.

 

역병의 한 가운데서 이성을 잃지 않고 죽어가는 병사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수녀들을 보며 키티는 무한한 경외심과 알 수 없는, 그러나 자신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호기심으로 갔던 수녀원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키티는 수녀들이 남편인 월터를 존경하고 높이 평가함을 알게 되고 그동안 월터를 경멸했던 자신을 경멸스러워한다.

 

키티의 깨달음과 반성. 그리고 월터의 용서. 낯선 오지에서 둘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잘 살길 바라며 책장을 비교적 빠르게 넘겼는데...

삶의 의미, 진정한 의미의 통찰은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오는게 아니라고 서머셋 몸은 보여준다.

 

마지막 영국으로 돌아와 엄마는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아버지와 만나 나누는 대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어머니와 딸들의 욕망의 수단으로 집안에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에게 과거의 잘못을 보상할 기회를 달라고 다시 한번 사랑할 기회를 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 "전 희망과 용기가 있어요." (p.329)

 

첫 장면에서 자신의 불륜 현장이 들켰을까봐 조마조마 하며 깜짝 놀라던 그녀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희망과 용기를 가진 새로운 강인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은 참으로 기분좋은 결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결말이 유치하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은 건 바로 서머셋 몸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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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30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광팬입니다.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어요. 이것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한 여성의 변신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죠.
인간이 변하기가 어려운 것도 맞지만 얼마든지 변한 모습으로 새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봐요.

coolcat329 2020-08-30 17:41   좋아요 1 | URL
서머싯 몸의 광팬이신줄 몰랐네요. 앞으로 서머싯 몸하면 페크님 생각나겠어요.☺<면도날>도 가지고 있는데, 더 기대가 됩니다.^^

페크(pek0501) 2020-08-30 18:03   좋아요 1 | URL
면도날도 재밌게 읽었습니당~~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바랍니다. ^^

초딩 2020-09-05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베일을 읽으며, 안나 카레리나의 키티는 레빈과 참 밝았는데.. 라는 생각을 했어요.
베일은 잘 읽히고 잼있었고, 6펜스도 그림이야기라 좋았어요 ㅎㅎ
책들로 추억 돋는 중입니다~

coolcat329 2020-09-06 13:47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레빈과 월터가 진지하고 성실한 면에서 많이 비슷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