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인디아 - 엉뚱발랄 15인의 발칙한 보고서
하정아 지음 / 나무수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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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유연해지는 곳, 인도

여행의 낭만보다 인생의 참맛이 느껴지는 곳,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인도다. <그래! 인디아>는 장기 인도여행 중인 작가가 인도에서 만난 열다섯 명의 여행자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다. 국적도 나이도 모두 다른 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저마다의 시각으로 생생한 인도체험담을 들려준다. 똥이 진창으로 널려있는 거리, 사기꾼에 가까운 호객꾼과 흥정꾼들, 따스한 마음을 가진 현지인, 절대빈곤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등등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 속 인도의 모습은 아주 생생하리만큼 사실적이었다.

수많은 여행지를 제쳐두고 다름 아닌 인도를 택했던 그들이지만 예상과 다른 인도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거나 화가 나는 때도 있었다. 특히 서비스를 강요하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시달렸던 일은 거의 모두가 공유하는 경험이었다. 갑자기 달려들어 안마를 해주거나 사진의 모델이 되어준다는 핑계로 여행자들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일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또한 멋대로 안내해서 짐을 부려놓거나 제값 이상의 돈을 요구하는 사례 역시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겪는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게다가 여행지 인도는 너무나도 불결한 여행하기 힘든 장소이기도 했다. 정비 되지 않은 길에는 항상 소의 배설물이 있고, 인도 사람들은 맨발로 그 길을 활보한다. 만약 비라도 내리는 날은 그 거리는 온통 똥이 넘실거리는 진창이 되고, 누구라도 피할 수없이 그 거리를 걷게 된다면 오물로 샤워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또 국토가 넓은 인도에서 도시와 도시 사이를 여행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제대로 된 경비를 지불하는 것부터 차편의 시간을 확인하는 일 그리고 탈 없이 여정을 마치는 일까지 정말 고된 노역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책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인도 여행을 즐겁게 만끽하고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처음에는 '인도가 원래 이런 거였어?' 하고 반문하며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불쾌한 경험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경험조차 인도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몇몇 현지인의 따뜻한 손길에 정을 느끼면서 인도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다른 여행자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만과 짜증을 희석시키고, 모르고 지나쳤던 인도의 좋은 면을 알게 되기도 한다.

어느 곳이든지 여행의 행복은 여행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곳이 인도와 같이 여러 종류의 힘듦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떠날 때의 설렘이 돌아올 때의 아쉬움보다 크지 않도록 낯선 삶에 뛰어든 여행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여행 중에는 항상 뜻밖의 일이 생기고 곧잘 계획이 어긋나기도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이런 일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불쑥불쑥 타인의 삶이 농밀하게 다가와 나를 어딘가로 이끄는 것,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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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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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의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는 서울이란 시공간 속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솔직담백한 서울얘기가 담긴 책이다. 일과 결혼 등의 이유로 서울에 머무르며 서울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그들은 지방에 살고 있는 나보다도 더 서울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거대도시이자 한 나라의 모든 게 집중되어 있는 도시, 서울. 과연 그들이 느끼는 서울은 어떤 곳일까?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외국인들은 인터뷰 형식으로 자신이 어떻게 서울에 오게 됐으며 서울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서울에 오게 된 이유는 그들의 국적만큼이나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 서울에서 느끼는 아쉬움만큼은 공통된 것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서울은 무분별하게 오로지 '새것'만을 쫓아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옛것의 고풍스러움과 세월의 흔적, 눈에 보이는 시간의 기록들은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거나 관광용으로 포장된 채로 남거나 아님 대부분의 경우처럼 헐리고 부수어졌다. 재개발, 뉴타운이란 이름 아래 서울은 늘 공사 중이며 여유 없고 삭막한 공간만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이지만 한 명의 서울사람으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이런 개발붐은 반갑지 않다. 자신들이 좋아했던 서울의 매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발전을 위한 개발은 분명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개발의 과정이 공공디자인이나 도시의 어울림, 과거 역사와의 공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한다면 그것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과 가치는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새 건물을 짓는 개발과정 역시 옳지 못하다.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짓는다고 과연 서울의 도시 브랜드가 상승할까? 지금의 서울시장이 줄기차게 외쳐대는 도시 브랜드는 중앙행정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한 목소리로 아쉬워하는 서울 이야기에는 지방에 사는 나 역시도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 반면에 수도 서울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이색 카페와 신선한 느낌의 예술 공간이었다. 역시 서울에 모든 게 집중돼 있다 보니 이런 참신한 공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중에 꼭 한번 가보리라 하고 마음에 새겨두었다.

서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이제 우리나라 사람만을 위한 곳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게 해 주었다. 서울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다 더 멋진 도시가 되길 바라는 많은 외국인 '서울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의 바람과 나의 희망처럼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이 더욱 살기 좋고 멋스러운 곳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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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를 리뷰해주세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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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민주주의 온도는 몇℃인가?

누구나 아는 것처럼 99℃의 물이 100℃가 되면 기포가 생기며 끓기 시작한다. 이러한 물리적 변화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예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보통 결정적인 무언가를 발하도록 촉구하거나 변화를 이끌어내는 내용이다. 100℃의 물은 '끓는 물'이기 때문에 온도를 재지 않아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100℃에 이르지 못해 끓지 않는 물은 그 온도가 50℃인지 90℃인지 직접 재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이상이 충만함을 우리가 끓는 물을 보듯 행동을 통해 보여주지 않으면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끓는 물에 가까운 감정을 소유했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그런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화 <100℃>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분을 다뤘다. 독재를 향한 자유의 외침이 빨갱이 짓으로 낙인찍히고, 탄압과 유린의 이유가 되었던 그 시절의 모습이 만화를 통해 재현되었다. 학생들은 물론 일반시민들과 종교계까지도 모두가 들고 일어섰던 당시의 폭발적인 '끓음'은 이 땅에 민주주의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수없이 많은 학생들이 짓밟히고 끌려갔으며 일부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까지 당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날로 늘어났으며 학생들의 외침이 거세질수록 정권의 탄압과 횡포는 극에 달했다.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었던 그들, 이길 수 없었음에도 끝까지 저항했던 그들의 노력으로 민주주의를 모르던 사람도, 투쟁을 멀리했던 사람들도 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끓음은 6.10 민주항쟁이라는 희대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촉발시켰다. 그리고 비로소 권위주의적 횡포로 권력을 탐하던 군부독재 세력을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하게 이른다. 차갑게 식어간 어떤 이의 목숨, 남아 있는 사람을 대신해 잡혀간 누군가의 희생으로 민주화를 향한 불길은 거세졌고 마침내 모두가 끓어올랐던 것이다. 우리 모두의 힘으로 독재의 밭을 갈아엎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국민 모두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오늘 날 다시금 거센 저항과 위협에 직면해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일념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그 때의 경험은 이제 옛일이 되었고, 20여년의 세월은 많은 국민들을 그저 속으로 분을 삭이고 마는 방관자로 만들었다. 작은 집회마저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일삼으며 어떤 식으로든 국민을 통제하려 드는 작금의 상황은 우리가 다시 한 번 민주주의를 위해 팔을 걷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여론을 믿지 않고 국민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안하무인식의 행동에는 국민 모두의 힘이 담긴 행동이나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개개인의 참여의식과 적극성이 요구된다. 우리가 또 한 번 100℃로 끓어올랐을 때 민주주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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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병실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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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마음을 파고드는 투명한 이야기

오가와 요코의 <완벽한 병실>은 그녀의 초기작들을 모아 놓은 단편집으로 이제 막 등단한 작가의 풋풋함과 의욕이 느껴지는 작품집이다. 초기작임에도 극도로 절제된 묘사에 등단부터 여간내기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작품 속에서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주요 대상이 병약하고 부실한 인간이라는 점이 왠지 모를 의아함을 갖게 했다. 아무래도 초기작인 만큼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다는 전력이 작품에 묻어나는 거겠지만 상해가는 음식처럼 서서히 사자(死者)로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오싹하리만큼 사실적이고 냉철하게 묘사해 내는 것은 그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인간의 몸을 향한 집요할 정도의 섬세한 관찰력은 어쩌면 그녀의 작풍을 이루는 모태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츰 시들어가는 인간의 몸, 기력이 떨어져 제 구실을 못하는 인간의 몸은 [완벽한 병실]과 [호랑나비가 부서질 때]에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음식물 섭취라는 인간의 본능조차 거부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몸은 우리에게 큰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완벽한 병실]에서 남동생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그녀 역시 점차 무력해져 가는 동생의 몸을 보면서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멸균과 소독으로 삭막하리만큼 깨끗한 병실이 그녀에게 안정을 줄 정도로 그녀는 변하고 상하는 모든 유기물조차도 극도로 꺼려한다. 쇠약한 몸으로 요양원에 간 할머니의 부재와 생명이 자라고 있는 자신의 몸 사이에서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는 [호랑나비가 부서질 때]의 그녀 역시 '몸의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인간의 몸을 향한 관찰이 타인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 [식지 않는 홍차]와 [다이빙 풀]이다. 물론 이 두 작품에도 변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있기는 마찬가지다. [식지 않는 홍차]의 그녀는 차갑게 식어버린 홍차처럼 동거하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한 상태에서 옛 친구와 만난다. 잊었던 친구와의 만남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지만 반대로 남자 친구와의 관계는 불만만 쌓여간다. 동거라는 편한 관계에 있다 보니 처음에 가졌던 다정함이나 배려는 어느새 사라졌던 것이다. [다이빙 풀]의 그녀는 고아원 원장 부부의 외동딸로 원생들과 함께 자랐다. 남다른 성장배경으로 무의식적이면서도 맹목적인 사랑과 의식적이며 태연한 악의를 가진 그녀는 뒤틀린 감성의 소유자지만 오히려 동정이 가는 인물이었다.

변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누구나가 갖고 있는 공통된 감정이다. 병으로 몸이 약해지는 것이나 노화나 임신으로 몸에 변화가 오는 것, 처음에 품었던 다정함이나 사랑 같은 감정이 느슨해지는 것,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던 소중한 추억이 깨지는 것 모두 경험하고 싶지 않은 배제의 대상이다. 하지만 누구도 원치 않는 이러한 상황이 소설 속 그녀들에게 찾아왔고, 작가 오가와 요코는 적응과 방황의 기로에서 서성이는 그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완벽한 병실에서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고 싶어 하며 식지 않은 홍차에 감동하고 맹목적인 사랑과 악의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변화에 대한 불안을 넘어 극도의 위태로운 상태에 있음이 분명하다. 이 순간 [다이빙 풀]의 쥰처럼 손 내미는 누군가가 있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이다. 사람 사이의 고통 결국 사람만이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과 변화로 인한 무력감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따스한 손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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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이야기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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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홀린 기묘한 이야기

 시종일관 발랄하고 유쾌했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소설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인지 <여우 이야기>도 재치와 재미가 넘치는 그런 류의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좀 난해하기도 하고, 전설이나 괴담에 가까운 내용에 적잖이 당황했다. ’교토작가’라는 별명처럼 이 소설도 ’교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괴기스럽고 기묘한 내용 때문인지 느낌상으로는 소설의 공간이 어느 호젓한 마을이나 깊은 산골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여우 이야기>는 전에 읽었던 작가의 소설에 비교해 다소 이질적이었고, 판타지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소설이었다.

 <여우 이야기>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 ’방련당’이라는 특이한 공동품점이 등장한다는 점을 빼면 각각의 단편은 독립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 생각하면 이 단편집은 하나의 소설임이 분명하다. 첫 번째 단편 [여우 이야기]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할뿐더러 문제의 방련당과 그 여주인이 전면에 나오는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이다. 특히 이 단편의 마지막 장면은 소설의 네 번째 단편과 이어져 기묘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다. 두 번째 단편 [과실 속의 용]에도 방련당과 여주인 나쓰메 씨가 등장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단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주인공이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거짓말’을 해서 편안함을 느낀 뒤로 줄곧 거짓말을 하게 된다. 중요한 건 이 선배라는 사람에게서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청자가 없다면 거짓말도 소용없다는 그의 말에서 독자가 없다면 소설도 소용없다는 작가의 고백이 느껴졌다.

 세 번째 단편 [마]에서는 소설의 기괴함이 정점에 달하게 된다. 이 단편엔 아이들이 키웠다는 이상한 짐승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 짐승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보초와 경계를 서지만 습격은 멈추질 않는다. 형체를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짐승과 사람의 혈투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도대체 그 짐승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단편 [수신]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생전에도 갖가지 기행을 일삼았던 할아버지, 게다가 의문이 풀리지 않은 몇 가지 사건도 있던 터라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할아버지의 과거사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모임이 돼버렸다. 그리고 여지없이 등장하는 ’방련당’. 과연 할아버지가 숨기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할아버지의 저택에 숨겨진 비밀은? 정말 소설은 마지막까지도 궁금증과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든다.

 기묘한 물건과 동물이 등장하는 괴기스러운 사건을 다룬 <여우 이야기>는 역자의 표현대로 말로 표현할 길 없는 기묘함과 신비로움이 매력이자 향기인 소설이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다 읽고서도 뭔가 남아 있는 듯한, 그래서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던 소설이었다. 한편 <여우 이야기>에는 ’비와 호의 수로’라는 공간이 종종 등장한다. 선배라는 사람이 노트를 주운 곳이자 아이들이 제방 너머로 그 짐승을 죽이려 했던 곳, 그리고 할아버지의 저택과 은밀히 연결된 곳이 바로 비와 호의 수로다. 수로는 물이 다니는 곳이고, 소설에서 물은 종종 ’정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소설에서 ’비와 호’도 어쩌면 그런 의미도 쓰이진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 정화의 대상은 인간의 이기나 탐욕이 되는 것일까? 정말 어느 것 하나도 정답을 알 수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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