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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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고골처럼 시대를 비출 수 있는 한국 작가는 누가 있을까? 독서모임에서 이야기 한 적 있다. 조금 전으로는 성석제, 김영하, 김훈. 요즘은 장강명, 한강, 황정은 작가가 우리의 물망에 올랐다. 더 있을 테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적겠지만.황정은 작가의 책을 도장 깨기처럼 읽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서평이니 리뷰니 관심이 없어놔서 그냥 읽은 것에만 의의를 뒀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적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내면 있으려나.


실로 오랜만에 황정은 작가의 책을 꺼낸 것은 단지 빨간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얇은 책들도 찾으면 있겠지만 굳이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언젠가 읽어야 할 소설이었기 때문이고, 글 다운 글을 읽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당연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것은 내 나라, 내 사회, 내 이웃의 일들이기 때문일까.


표지에 연작소설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제대로 안 보고 장편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야기가 끝나서 응 뭐지? 하고 다시 보니 연작 소설이네. 다른 소설처럼 단편이 여러 편 있는 게 아니고 중장편 두 개가 별다른 연쇄 없이 묶여있다. 겹치는 것은 세운 상가와 촛불시위다. 세운상가는 첫 번째 소설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촛불시위는 두 번째 소설에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한다. 첫 번째 소설인 <d>부터 살펴볼까.


제목이 왜 [디디의 우산] 인고 하니 주인공 d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인물의 이름을 짓지 않고 알파벳으로 이름을 표기할 때가 왕왕 있는데 보통은 대문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끝까지 d는 그냥 d다. 왜 d 인지도 궁금하지만 왜 소문자로 명기했는지 궁금했다. 아무튼 d는 우연히 dd를 사랑하게 된다. dd의 우산은 우중(雨中)에 d가 dd를 바래다주고 빌려 쓰고 온 우산이다. 소중한 것을 대여한 느낌이랄까, 안전을 보장받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dd가 죽는다. 왜 죽었는지도 모르게 갑자기 죽는다. d는 거의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진다.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집안의 온갖 사물을 부순다. 몇 달을 칩거하며 현대인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을 거부한 채 상실의 고통을 마음껏 탐닉한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 모두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매몰된 슬픔을 이야기 하는 것은 황정은 작가가 단연 최고인 것 같다. 읽을수록 너무 슬프다)


dd와 살던 집을 처분하고 고시원에 틀어박혀 세운상가에서 택배 일을 한다. d는 dd가 그립지만 예전처럼 폐인이 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이다. 황정은 표 인간극장 같은 느낌. d가 만나는 사람의 생애가 전개되는데 우리나라 전후 사회를 비추는 모습이랄까. 집주인 김귀자 할머니의 생애, 세운상가에서 음향기기를 고치는 여순녀의 삶, 길거리 리어카에서 음반을 판매하는 동창 박조배의 삶 같은 나지막한 읊조림이 생각 없이 2020년을 누리던 나를 1960년으로, 1970년으로, 2000년대로 사정없이 패대기친다. 아무렇게나 쏟아놓은 빨랫감을 분류하듯이 점차로 시대별 장면이 분류된다. 전쟁통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젖먹이 어미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에 아랑곳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삶으로, 그렇지만 곧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삶으로! 모든 젊은이가 부르짖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생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도시 빈자들의 삶으로 나는 점점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다. 오랜만에 마주치고 나니 또 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나는 왜 읽기만 하는가 하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잘 쓴다. 글쓰기 책도 아닌데 심장이 벌렁거린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지 진짜. 독자의 마음을 마구 흔들려고 쓰는 거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려고 쓰는 거지. 소설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몇 번 말해야 해?


두 번째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좀 더 사회 반영적이다. <디디의 우산>의 d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했는데 두 번째 소설의 '나'는 좀 더 사회적 동물로부터 출발하는 느낌이랄까.

1996년에 연세대에서 그런 시위가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중학생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로 만들어져야 관심 좀 가질까. 지나간 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나마 시험에 나와야 좀 외우지. 1996년대 나온 가요는 알아도 민주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그런 전근대적인 학대와 폭력이 자행됐었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째서 우린 이렇게 편하게 살아오며, 지나간 모든 희생을 이렇게도 쉽게 잊을까? 83년에 맡던 최루탄 냄새를 96년에도 맡고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 2014년에는 학생들을 실은 배가 뒤집혔고, 모두 구조했다고 거짓말했고, 어른들은 가만히 있으라 하고 도망 나왔는데. 농성하는 노인에게 물 대포를 쐈는데,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런데도 안락과 즐거움만 찾아서 그저 머무르기만 했던 내가 너무 미안했다. 책을 읽으면 내내 그렇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열심히 읽을까. 불편한데도.


나는 왜 이런 책을 좋아하고 읽을까 생각해봤다. 그건 미안해서다. 미안하니까 알고 싶어서. 알리고 싶어서.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기에. '너 알았니? 우리나라에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너 알았니? 나는 몰랐어. 그래서 미안해. 내가 어른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서 이제는 알려고. 알게 되었으니 좀 더 움직이는 사람이 되려고 말이야.'


두 번째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무기력에 관한 이야기다. 어차피 무언가 말하려고 할수록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지 말자.'라고 반대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d는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움직였던 사람이고, 움직이려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게 정의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d와 '나'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시대를 비추는 각각의 인물상이다. 소설을 끝맺을 수 없는 '나'. 읽고 싶은 책이 많지만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나'. 사회가 말하는 디폴트가 되지 못해서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 기준은 누가 정했느냐고 소리치고 싶지만 나 역시 이미 정해진 기준대로 40년 가까이 살아와서 그런지 그게 편하다. 미안해. 나도 아직은 어쩔 수가 없나 봐.


두 번째 소설은 '나'와 김소리와 서수경의 이야기만 걷어내면 거대한 서평집 같은 느낌이다. 중간중간에 섞어놓은 책 이야기가 놀랍다. 작가가 책을 엄청 읽는 사람이구나, 서재 이야기는 자기 서재 이야기겠구나 싶었다. 인용하는 책을 많이 읽어두어서 이해도 쉽고 좋았다. 못 읽어본 책은 반드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빨간색 책인 줄 알았더니 엄청 다채로운 색의 소설이다. 다만 좀 더 조도를 낮추고 채도를 내렸다. 좀 더 어둡고 습하다. 그렇지만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찾을수록 너무 안온하게만 살아온 나를 반성하게 되는 회초리 같은 소설이다. 읽지 않은 사람들은 꼭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 또 한 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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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건너는 집 특서 청소년문학 17
김하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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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서재에서 신간소설이 나왔다. 늘 그랬듯이 청소년 소설이다. 열두살 딸이랑 같이 읽었다. 그런데 청소년보다 어른인 내가 더 감동받았다. 재밌었다. 어려운 소설만 읽다가 만나서 그랬는지, 갑자기 나도 앞길이 창창한 청소년이고 싶었는지 정말 재밌게 읽었다.

하얀운동화, 파란대문, 빨간 우체통, 비밀, 중2 둘과 고2 둘, 문제



이 소설을 이해하는 몇가지 키워드다.

주요등장 인물은 넷 . 주인공이다. 선미와 강민, 자영과 이수.



네 명의 학생들은 모두 하얀운동화를 우연히 만나 신고 등교길에 할머니를 한 분 만난다. 할머니는 놀랍게도 이 들의 가벼운 인적사항을 알고 있으며 금요일 5시까지 오라며 하얀운동화의 비밀을 알려준다.



모르는 어른은 다 조심해야 하는 요즘 아이들의 의심은 당연하다. 아무리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해도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쉬이 따르기 어렵다. 하지만 기묘하고 놀라운 일들은 벌어지고 만다.



솔직히 말하면 타임리프 같은 거야말로 진짜 허황된 이야기다. 그렇게 가능하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재밌겠는가. 몇 가지 규칙만 지키면 과거로든 현재로든 미래로든 내가 원하는대로 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인생에 신중할 필요도, 후회하다가 깨닫고 발전하는 일도 없겠지. 가고 싶은대로 가면 되니까.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건 없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텐가.

이 책에서 가장 재밌었던 설정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이 집으로 들어온다는 설정이었다. 서울에서 두 명, 경기도에서 두 명. 등교길에 만난 파란문이지만 열리는 곳이 다르다. 그런데 들어오면 같은 집에서 만나는 것이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제각기 다른 고민과 상황과 여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 모든 일들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그럴 때 누가 따뜻하게 손 내밀어주면 어떨까? 따뜻한 음식과 나를 기다리는 안온한 공기와 나를 반겨주는 어떤 이가 있다면 살기가 좀 퍽퍽하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아예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행복할 것 같다. 그런 꿈의 공간이 바로 이 시간의 집이었다. 가장 부럽고, 가장 재밌는 설정.



작가 김하연은 따뜻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 같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전개에 이야기를 멈출 틈이 없지만 읽고난 후에도 계속 따뜻한 감성이 남아있다. 학원물이 아니지만 학원물 같다. 세태를 잘 아는 것도 같았다. (이야기가 좀 세기는 했다) 소설가가 구축한 세계 속에는 뉘우침이 있고 화해가 있다. 게다가 미래도 있다. 그래서 재밌다.
스포방지를 위해서 내용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찌질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네 명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이 땅의 청소년들도 저런 아름다운 관계를 만나서 무슨 일을 결정함에 있어 용기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보았다. 용감하기 정말 힘든 요즘 청소년들. 수 많은 고민 중에 있지만 아무도 만져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의지하기 어려워서 반항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도 이런 판타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그 따스함이 돼줄 수 있을까.



중2를 견디고 있는 나의 아이도 두려운 어떤 상황을 만난다면 홀로 표류하지말고 뜻밖의 안온한 공기를 만나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현재를 용감하게 견뎌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 읽어볼 시간 없나 자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 이런 깨달음은 자주오지만 청소년 소설로 인생을 배웠으니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돼봐야지!

어른판도 있으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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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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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사회가 본격 도래하게 되면 사라지는 직업군 중에 작가도 있다지? 에이 되겠어, 싶다가도 김주하 아나운서랑 똑같이 생긴 AI 아나운서를 보면서, AI가 적었다는 기사문을 읽어보면서, AI가 그렸다는 그림을 보면서 아 진짜로 오겠네. AI작가가 오겠어, 싶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아이퍽10] 이란 러시아 SF소설에서 마침내 그것이 도래한 미래사회를 만난 적이 있다. 그 AI는 추리소설가인데 실제로 인간처럼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조사하고, 탐정처럼 파헤쳐서 소설로 쓴다. 그 AI는 어벤져스의 비전처럼 현실성이 없다. 두렵기만 하고.

그런데 [갈라테아2.2] 은 도래한 인공지능이 어떤 일을 벌인다기보다는 '사람이 기계에게 언어를 훈련시킬 수 있을까?' 라는 전제로 출발하기 때문에 두렵고 무섭다기보단 기발하고 궁금하게 만든다. 



주인공 리처드 파워스는 작가의 이름이 그대로 투영된 작가 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소설적인 요소는 많이 들어가 있지만 그의 사랑과 문학에 대한 그의 고뇌는 일정부분 사실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여기서는 파워스라는 말 자체보다는 이니셜 P라고 지칭한다. 



 


이 소설을 끌어가는 커다란 이야기 주축은 셋이다.

첫번째는 획기적인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왜 만드냐는 물음에 외로워서라고 답하는 렌츠 박사의 엉뚱함과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처와 추억에 젖은 P의 고독함이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헬렌이 탄생하고 교육이 진화하는 과정이 이 글의 핵심이다.


두번째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마치 현재를 잠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연인 C와의 사랑과 이별도 이 소설을 끄는 핵심이 된다. 그 안에는 사랑과 더불어 P가 늘 고뇌하던 문학에 대한 갈망이 엿보인다. 또, 렌츠의 숨겨진 아내 요양원에 살고 있는 오드리의 등장도 독자에겐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였다. 렌츠는 대체 왜 이런 AI를 발명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해답. 


마지막은 인공지능 시대를 대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론으로 과는 과정이다. 이 부분이 사실 생각거리를 많이 던진다. 혼자 말하기엔 어렵고 여러사람과 논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P는 사랑했던 연인 C와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온다. 모교인 U대학에 취직했다가 고등과학연구센터에서 렌츠박사를 만난다. 렌츠는 영문학 석사 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다른 과학자들은 어렵다고 이야기해서 결국 내기를 한다. 1년 동안 인공지능에게 영문학을 가르치고 인간처럼 시험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그 시험지가 인간과 비교해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하면 렌츠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P는 얼떨결에 튜링테스트의 전개와 인공지능 학습을 맡는다. 그리고 임플리멘테이션 A에서 H까지 진화하는 네트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네트는 점전 발전한다. 결국 언어를 알고 책을 읽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공지능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문학을 가르치던 P가 인간적으로 인공지능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헬렌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마치 사람인양 대한다. 헬렌의 대사를 보면 이미 사람같았다. 모양은 그냥 컴퓨터인지 몰라도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미 컴퓨터이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업뎃 된 얼굴은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라면 헬렌의 원래 얼굴- 그러니까 컴퓨터- 를 보여주면서 이거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그 요구 자체를 묵살하던가. 그러나 P는 더이상 헬렌을 그저 기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P는 헬렌에게 거의 인성을 부여했지만 렌츠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완벽한 진화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헬렌을 절단했다. 일각에서 대두되던 '기계인권' 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나도 어벤저스에서 비전 죽을 때 많이 울었다) 과연 사람과 흡사한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을 죽게 하는 것이 도덕성의 결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각도로 생각해봐야겠지만 인형의 목을 잘라 놓는 것도 잔인해보이는데 나와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누었고, 나의 가르침을 사사한 인공지능을 자르고 붙이고 심지어 죽이는 (p.490) 건 부도덕이 아니더라도 정신적 건강을 해칠 것 같다.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오다니.나는 이 책이 너무 어렵다고만 생각해서 며칠을 끌었다. 헬렌을 만드는 과정들이 지난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헬렌과 P의 유대가 드러나는 순간 너무 재밌어졌다. 전개되고 밝혀지는 내용들이 흥미진진했다.결말은 좀 슬펐다. 모든 것을 깨달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한 일에 깜짝 놀랐다. 사람이라고 생각해 봤을 때 옳은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ㅠㅠ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책 [갈라테아 2.2] 였다. 1995년에 출간된만큼 지금하고는 25년의 차이가 있지만 다분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다.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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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해나 켄트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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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예전에 읽었던 마거렛 애트우드의 [그레이스]가 생각났다. 정황에 의한 수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었다. 해나 켄트의 화제의 데뷔작 [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사 해나 켄트는 교환학생으로 아이슬란드 북부에서 1년을 살면서 아그네스라는 여자를 알게 됐다. 아이슬란드의 마지막 사형수 아그네스. 두 남자의 살해에 가담한 실존 인물이다. 그의 이름과 사형집행일, 하인이라는 신분만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해나 켄트. 처음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묘사와 서사가 탁월하다.

이미 띠지가 스포일러다. 마지막 사형수라는 말 자체가 아그네스가 사형을 당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레이스]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 전개다. 초반에는 이상한 기시감이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해나 켄트가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노년의 대작가와 견줄 만큼의 서사력을 갖췄다는 반증이 된다. 그녀의 다음 소설과 세계 문학사에 끼칠 영향 등이 기대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그네스고 서술자는 장면마다 다르다. 아그네스의 독백을 제외하면 모두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장면마다 주요한 전개자가 따로 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용의자는 셋. 셋 다 재판을 받고 수형 되었지만 재정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형수 중 하나인 아그네스를 민가로 보내서 일을 시킨다는 결정이 났다. 엥? 감옥을 운영할 비용이 없어서 민가에 흉악범을 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지만 암튼 그러겠단다. 동네 사람들, 특히 집주인은 바들바들 떨었다. 남편은 공무다 뭐다 해서 밖으로 돌고, 집에는 딸 둘과 자기와 하녀뿐인데 너무 위험했다. 그러나 결정을 번복하기는 어려웠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형수를 받아들였는데 겉으로 보기에 흉악스럽기는커녕 여기저기 맞아서 멍이 들고,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한 옷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부랑아였다. 그래서 집주인 마르그리에트는 수갑을 끄르고 아그네스를 씻겨준다. 그리고 아그네스는 그곳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옛날 유럽 사회는 교구마다 관리하는 목사님이 따로 있었는데 아그네스는 부목사인 토티 목사를 요청했다. 토티는 두려운 마음과 죄인 구원의 사명감으로 요청에 응하지만 아그네스는 뚱딴지같은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러나 토티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를 쓴다. 어느날 군수 브뢴달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정말 아그네스가 잔혹한 살인자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아그네스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다 다르다. 누군가는 하나님께 범죄 한 악마 중의 악마로 보고, 어떤 사람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탓에 조금 불쌍하게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흉악범으로 보고, 어떤 이는 불쌍한 일에 연루된 똑똑한 하녀로 본다. 진실은 누가 알고 있을까? 진실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작가가 의도한 대로 아그네스의 외로움이 제대로 묻어났다. 곧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걸 알면서도 하인의 일을 감당하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끝내 억압된 채 죽음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그녀의 인생 말로가 너무 비참했다. 기껏해야 서른 중반인데... 그러나 살인 이전의 삶도 사형수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부모가 버렸고, 온갖 죽음과 멸시를 경험해야 했고, 성착취에 노출된 채 학대당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자꾸만 들려오는 아그네스의 이야기는 토티 목사를 힘들게 했다. 그는 독자를 대변해 아그네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싶어 하지만 군수마저 어리다고 무시하는 젊은 교구 부목사에게 그럴만한 힘은 없었다. 아그네스를 진정으로 도와줄 - 죽은 양 엄마 같은 -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아그네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왜 두 남자를 죽인 사건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다. 읽을수록 빠져들었고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결말이 정해진 소설이라는 게 때론 가독성이 떨어지게 할 수도 있는데 처음 쓴 소설이라기엔 서사가 상당히 힘이 있었다. 영화화 확정이라고 하니 영화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붉은 장미가 뚝뚝 떨어지는 뒤표지처럼 잔혹하고 슬픈 영화가 될 것 같다.


내면에서 아무리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고 외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결정되고 말아요.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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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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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특별히 귀한 것은 없다. 

선량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극도 뼛속까지 발라내진다. p.100


나는 일본 소설 알레르기가 있다. 선전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책을 안 읽어본 건 아니지마는 특히 요즘은 여러 번 실패해서 그런지 읽기 전부터 엽기 혹은 폭력이나 광기쯤은 염두에 두고 한숨 쉬고 입장한다. 당연히 [유랑의 달] 읽기 전에도 그랬다. 지독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라마다 가진 색채를 무시할 수 없어서 편견을 장착한 셈이다. 그런데 놀랐다. 이 책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그냥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보편적인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서라면 짓밟혀도 되는 개인의 사생활, 그리고 황색언론.


(줄거리 생략)


이 책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임과 동시에 황색언론의 폐해를 꼬집고 있기도 하다. 후미는 로리콘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몰렸다. 여기까지는 정황상 그럴 수 있다. 아홉 살 여자아이가 두 달을 열아홉 살 대학생 집에 감금돼 있었다고 믿는 순간, 후미는 소아성애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좋다. 그래서 복역했다. 그런데 사라사는 어떻게 됐을까? 사라사는 피해 아동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졌고, 그녀의 행보와 삶이 관심을 갖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포스팅돼 있었다. 사라사가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라고 동정표 섞인 손가락질을 받는 동안 그 누구도 사라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후미가 자기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말하면 스톡홀름 신드롬이네 뭐네 하면서 아예 믿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인 사라사의 사진이 웹상에 떠돌아다녔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 p.84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미스터리한 괴생물체나 유령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 소설은 가독성이 좋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문장이 아름답다. 번역을 잘한 건지, 작가의 원래 문체가 유려한지 너무 궁금하다. 또, 공감대가 많다. 진짜 인물 이름만 바꾸면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취업난, 아동학대, 황색언론, 상처받은 영혼 등 우리가 알고 나누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나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이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누면 좋겠다.

담겨있는 메타포도 좋다. 나는 사라사와 후미가 글라스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좋았다. 인간은 원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다. 그 유리잔 속에 담긴 음료는 인생이다. 깨지기는 쉽지만 얼마든지 조심할 수 있다. 그리고 글라스는 혼자보다는 둘이 좋다. 완전히 똑같지 않으면 어때, 두 사람이 마주 들 수 있는 잔이면 됐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정말 재밌었던 소설이다. 띠지의 표현대로 오래도록 읽힐 소설이다. 대단히 추천한다. 시대를 읽을 줄 알고, 사람의 마음을 만질 수 있는 작가라고 의심치 않는다. 다음 작품이 나오면 반드시 읽어볼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결심했던 소설 [유랑의 달]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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