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어린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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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잃은 다섯 살 다비드와 우연히 다비드를 보호하게 된 시몬에게 항구도시 노비야는 낯선 곳이다. 이 둘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로 왔다. 다비드, 시몬이란 이름도 그들 이름이 아니다. 주어진 이름이다.

다비드의 어머니로 이네스가 이 둘 사이에 끼어듦으로써 세 사람은 가족 아닌 가족이 됐다.
' "...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가 어떻게 내 아이일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겠죠. 부탁드리건대, 의심하는 마음은 거두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저 아이를 보세요. 당신의 마음이 무슨 얘기를 합니까?" (p. 113)'

시몬과 이네스는 마치 다비드를 낳은 부모처럼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노비아에서 집, 일터 등 많은 것을 제공해 준 덕분에 그럭저럭 평온한 삶을 지내지만,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다비드가 학교에 가면서 이들 셋의 삶은 위기를 맞는다.

'"오히려 그들이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다. 네가 특별한 아이라서 그래. 특별한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야." (p. 290)'

여느 아이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다비드를 노비아 사람들은 전문적 보살핌을 위해 푼토 아레나스에 보내려고 한다. 이곳은 인간이 만든 규칙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의 위한 시설이다. 결국 시몬, 이네스, 다비드는 노비야로 오기 전 그들이 살던 곳을 떠났듯이 노비야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또 다른 디아스포라 삶을 그들은 찾아나선다.

'"그래, 너와 이네스와 후안과 볼리바르와 나지. 우리는 이렇게 말할 거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새로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머물 곳을 찾고 있습니다."
"그다음은요?"
"그게 다야. 머물 곳을 찾아 새 삶을 시작하는 거지." (p. 375)'


항구도시 노비야, 이곳에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과거 기억을 씻어내고 새 삶을 살기 위해 온 시몬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시몬을 당황스럽게 한다. 당연히 느껴야 할 욕망도 없고, 남녀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노비야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쿳시는 사후세계를 암시했지만, 이 책을 번역한 왕은철 작가는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다.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는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디아스포라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됐다. 나만 해도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낯선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어서 왕은철 작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곧 환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환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 385, 옮긴이 해설)'

환대란 무엇일까. 인류학자 김현경 교수에 따르면,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 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p. 207)'

시몬과 이네스는 다비드에게 '절대적 환대'를 했다. 마치 요셉과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보여준 환대와 흡사하다. 절대적 환대란 김현경 교수를 말을 다시 한번 빌리면, 아기가 태어날 때 누구인지 묻지 않듯이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아이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환대', 상대방이 적대감을 보여줄지라도 '복수하지 않는 환대'를 일컫는다.

하지만 노비야 사람들이 다비드에게 보여준 환대는 다소 부분적이다. 장소는 내어줬지만 따로 관리해야 할 사람으로 다비드를 분류했다. 다비드는 누군가를 태울 시간도, 태운 자리도 없지만,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우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고 이네스를 협박할 정도로 모든 사람을 환대한다. 그런 다비드를 노비야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셉의 형제들은 동생 요셉을 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을 찾아온 형제들을 요셉은 환대했다. 세월이 흘러 애굽에 정착한 유태인을 애굽 사람들이 환대하지 않자 유태인들은 하나님이 환대를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디아스포라 한다.

2000년 전 요셉과 그 형제들의 후손인 유태인들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절대적 환대가 가능한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런 예수를 유태인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결과 그들은 유럽인들로부터 환대 받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때 유태인들은 그곳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요셉을 환대하지 않았듯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듯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환대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다움'을 무시하고 인종 청소를 하고 있다.


우리들의 환대는 어떤가. 일꾼으로 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느 정도 환대한다. 하지만 이주하려는 외국인들에게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유태인을 보고서도 환대하지 않으면 우리도 환대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기를, 내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를 내어주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타인을 사람으로 그리고 누군가에게 장소가 되어주는 환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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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이원정 지음 / 양양하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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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헨델이 만든 오페라 <리날도(Rinaldo)>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 영화 <파리넬리>를 보면서 전설적인 카스트라토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 그 장면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지금도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던 서른 즈음이었을 때가 생각난다. 모든 게 슬펐다. 그래서 듣고 또 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슬퍼졌다.

노래 가사처럼 내 운명은 비참함으로 가득 찼고, 한숨짓게 만드는 나날뿐이었다. 슬픔과 고통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 내 모습을 남들이 봤다면 청승 떤다며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울고 나면 말로만 듣던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찾아왔다. 한동안 그런 일상에 중독됐었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남자와 늘 물속에 잠겨 있는 아이
죽은 자의 피를 증류하는 연금술사와 달빛이 눈부셔서 잠 못 드는 외톨이. (p. 142 작가의 말)'

이들을 기록한 이상하고 슬픈 한 편의 시, <감정술사>는 이원정 작가가 쓴 첫 소설이다. 생화학을 전공했다. 전공하는 동안 해온 실험을 통해서 피를 증류해 슬픔을 걷어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일까?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비에 젖지 않는 연금술사 남편에게 투명한 증류기를 선물로 남긴다. 이 증류기로 영원히 썩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도 남겼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방식으로 슬픔이 없는 생명을 탄생시켰다. 완벽한 모습으로, 순금처럼. (p. 56)'

슬픔을 지녔기 때문이었을까? 늘 젖어있던 아들이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감정술사는 죽은 아들의 피를 증류 플라스크 안에 쏟아붓고 양초에 불을 붙여 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의 피는 남김없이 증류되어버렸다.

'"달빛은 왜 나의 밤을 밝히는 걸까요?"
"달빛은 밤을 낮이라고 믿거든." (p. 119)'

달빛의 눈부심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외톨이 아이. 그 아이는 '이토록 우아하고 묵직하게 가슴을 할퀴는 통증의 정체를 깨닫는다. (p. 139)' 슬픔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한다. 감정 표현이 유난히 많은 우리말을 배우면서 '내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 속 감정은 작가 자신을 기록한 것이라고 밝힌다.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겼던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고도 말한다.

서른 중반이었던 나는 <울게 하소서>를 들으며 뭔지 모를 슬픔에 잠긴 나날에 이름을 붙인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타르시스 경험했을 테고. 알지 못했던 감정을 지닌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움으로써 그 감정에 이름이 생기자 선명하게 감정을 바라보게 됐을 것이다.

'폭로당하고 싶은 슬픔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견뎌낼 힘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p. 142 작가의 말)'

증류하는 과정은 뒤섞인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의 감정을 찾아 명명식을 치르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야 그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감정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작가 이원정이 모든 감정을 영감으로 증류하듯이 감정에 이름을 부여했던 작업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면 모든 감정을 품을 수 있다. 지우고 싶은 감정은 없다. 감정을 행복이나 불행으로 덧씌울 수도 없다. 슬픔마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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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세트 - 전2권 (한정판 케이스 + 조정래 작가노트)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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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를 해볼까? 사랑의 목적은 뭘까. 사랑하는 것이다. 덜도 더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 그러니 사랑 이야기가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리더라도 그렇다. '바보같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생이라면, 사랑은 바보같이 두 사람이 서로를 찾아 헤매는 일이다.' 결혼은 찾아 헤맬 필요 없음을 뜻한다. 같이 살며 매일 보는데 뭐~ 찾아헤맬 일이 어디 있겠나.

인터뷰에서 조정래 선생이 한 이야기다. 어느 날 독자가 '선생님은 왜 역사, 사회 등 무거운 주제만 다루고 사랑 이야기는 쓰지 않는지' 묻더란다. '내가 그랬나?' 싶었단다. 또 다른 독자가 묻기를 '사랑 이야기를 못쓰는 것은 작가로서 불구 아닙니까?'

'나는 슬픈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 슬픔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근원을 소설의 주제로 삼아서. (p. 13 작가의 말)'

여든 살 넘어 조정래의 마지막 장편이 사랑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고, 이왕이면 슬프고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십 년 넘게 굴린 끝에 탄생한 소설이 <서리꽃>이다.


윤소이와 이재이의 사랑 이야기는 왠지 스마트폰으로 숏츠를 보며 결혼하기도 전에 관계를 갖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았다. 대사 톤도 마찬가지다. 유럽여행에서 서로 각방을 쓰는 모습에선 순수와 함께 올드한, 마치 조정래 선생 청춘시절에나 있을법한 사랑이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요즘에 어울리는,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랑 이야기, 다시 말해 인스턴트 식으로 소비되는 사랑 이야기로는 조정래 작가 자신이 품은 사랑 이야기를 담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정래 작가는 <서리꽃>을 쓰기 위해 프랑스, 네덜란드로 반 고흐의 그림을 따라 취재 여행을 다녀왔다. 화가의 꿈을 키워지만 가난으로 그 꿈을 포기했던, 그림을 향한, 조정래 작가의 사랑을 <서리꽃>에 담았다. 이루어진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형 반 고흐가 가진 화가의 꿈을 위한 동생 테오의 희생적인 사랑도 이재이와 윤소이 관계를 통해 <서리꽃>에 담았다. 희생이 빠졌다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윤소이의 꿈을 막은 가난을 보았음에도 거침없이 부를 버리고 사랑하는 이의 꿈을 택하는 이재이의 현실을 초월하는 사랑이야말로 조정래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요즘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그런 사랑말이다. 마치 천민자본주의와 야합하지 않는 사랑, 당신들 이런 사랑을 보기는 했어?라고 외치는 듯하다.

영원한 사랑은 또 어떻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이룰 거야 하며 당당하게 보여주는 영원한 사랑. 우리 머릿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사랑이어서 오히려 신선하다.

'독자들께서 슬픈 사랑 이야기 <서리꽃>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찾아주신다면, 수술로 기력이 떨어져 후반으로 갈수록 사흘거리 몸살을 앓아 예정보다 두 달이나 늦게 소설을 끝낸 작가에게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p. 13 작가의 말)'

조정래 작가가 <서리꽃>에 숨겨놓은 사랑 주제를 잘 찾았는지 모르겠다. 한때 익숙했던 사랑 이야기였지만 어느새 낯설어진 사랑 이야기. 희생이 뒤따른 헌신적 사랑이었음에도 이루어질 수 없어서 슬픈 사랑 이야기, 내 마음 한편에 아직까지 조금 남아있어 아련한 사랑 이야기, <서리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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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낯설게 보기 - 우리는 어떻게 죽고,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박혜윤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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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에서 김라합 번역으로 펴낸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죽음을 떠올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곡기를 끊고 7주 후 스스로 의지로 숨을 거뒀다. 이때 나도 곡기 끊는 걸 죽는 방법으로 생각해 두었다.

철학 하는 간호사 박혜윤 교수의 <죽음 낯설게 보기>는 그때 막연했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 책은 저자가 임상과 철학을 오가며 사유한 기록이다.

'연명의료와 돌봄, 임종처럼 죽음을 앞두고 만나는 사건은 물론, 고립사와 안락사 등 다양한 죽음의 모습까지 폭넓게 다룬다. (저자 소개 글에서)'


'죽음을 낯설게 보자'는 박혜윤 교수의 제안은 삶과 생명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깨우고자 함이다. 그동안 지나쳤거나 막연하게 바라보던 삶과 죽음을 좀 더 선명하게 보자는 것이기도 하고.

가족을 울리는 자살, 집에서 죽는 당연함이 과거가 돼버린 병원 임종의 현실, '자연스러운 죽음'을 전혀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는 연명치료,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리다'는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존재, 뇌사 기증자까지 저자가 보여주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다양한 광경은 그 죽음 하나하나에 나를 대입해 보게 한다.

죽음을 앞둔 몸을 펼쳐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설명 대신 그저 스스로 '뒤처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기력이 있고 없음이 곧 존엄의 척도는 아닐까? (p. 119)'

허물어진 존엄에 더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 몸이 내 몸이라면 조력자살 또는 스스로 곡기를 끊는 단식존엄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스페인 안락사 법을 통과시키는데 강력한 동력이 된 라몬 삼페드로의 말처럼 '삶은 권리이지 의지가 아니 (p. 151)'니까 말이다.

저자가 세 번째로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 공동체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다. 삶이 고립된 고독사, 진정한 집을 상실하고 손님처럼 살다가 떠나는 현대판 객사, 비극의 사무적인 마침표인 무연고 장례가 '죽음이 마치 죽어버린 시대'가 죽음 다루는 방식들이다.


수많은 삶과 죽음을 마주했던 박혜윤 교수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면 이런 물음이지 않을까?
'당신의 죽음은 어떻게 매듭지을 것인가.'
그가 제안한 '낯설게 죽음을 보는' 방식으로 대답해 보려 한다.

내가 죽는 과정에서 내 아내와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아내도 나로 인해 고생할 만큼 했고,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 내게 줄 기쁨은 다 주었다. 당연히 연명치료도 거부한다. 타인의 의지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삶은 권리'라는 말에 공감한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고 조력자살이란 선택이 굳어졌다.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더라도 말이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환경 조성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어 실현 불가능한 것이 단점이긴 하다.

스콧 니어링은 '사람이 산다는 건 결국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했다. 같은 생각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이야기가 시작됐지만, 이야기 끝맺음은 내 삶을 내 선택으로 쌓았듯이 내 방식으로 마치고 싶다.

그래서 맺은 결론은 이렇다. 내 생각대로 내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곡기를 끊어 내 삶을 마감하기로. '먹지 않을 자유'까지 처벌하는 하는 나라는 없다고 하니까. 물론 많은 행운이 뒤따라야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치매에 걸리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곡기를 끊을 의지가 필요하다.

내 스스로 의지로 삶을 매듭짓기를...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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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법 버스기사 같나요? - 사회적 기업가에서 버스기사로 다시 삶을 운전하기까지
강희정 지음 / 브로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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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가진 젊은 교우의 트럼펫 찬양으로 어제 주일 예배 헌금 시간은 좀 특별했다. 왼쪽 팔뚝이 유난히 가늘었다. 그 손을 트럼펫에 묶고 다른 편 손가락으로 밸브를 눌러가며 연주했다. '전공자가 되기 위해 비장애인보다 얼마나 더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갑자기 울컥했다.

'독기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잠시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영혼을 망가뜨린다. 실패는 혼자 감당할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볼 때 더 아프다. (p. 147)'

저 청년도 독기를 품고 연습했겠지? 그러지 않았기를. 강희정 작가의 말처럼, 실패했을 때 주변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원했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테고, 청년은 독기를 품은 만큼 더 아프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인생 2막, 두 번째 인생... '퇴직 후' 또는 '60살이 넘어서'와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앞선 다음 '두 번째 인생'이란 말이 뒤따라올 때도 있다. 이를테면 이 책을 쓴 강희정이 맞닥뜨린 인생. 인생 2막, 두 번째 인생 앞에 '사업 실패', '40살 이란 나이에'가 앞에 붙는 경우라면 대부분 자의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때 두 번째 인생에 들어서기란 '퇴직 후' 또는 '60살이 넘어서'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독기 정도는 품어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강희정 작가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했다. 사회도 바꾸고, 문화도 바꾸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Let us love,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를 실천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그 좋은 꿈이 이뤄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업은 실패했다. 생계를 위해서 두 번째 인생이란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젊은 여자가? 버스 운전을? 강희정은 물음표로 가득한 두 번째 인생을 선택했다.

'매일 같은 길을 달리는데도 하늘은 늘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그래서인지 출근길 풍경은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p. 16)'

강희정의 에세이 <안녕하세요, 제법 버스기사 같나요?>는 '퇴직 후' 또는 '60살이 넘어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보다 일어서는데 몇 배나 힘들었을 강희정의 두 번째 인생 이야기다.

또한 이 이야기는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일에 대한 기록이자,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다. (p. 7)'

수고하고 땀 흘리면서 삶을 다시 이해하는 이야기다. 변화를 겪는 이야기다. 굿워크플래닛이란 사회적 기업을 하다 망한 강희정이 아닌 그냥 강희정을 찾은 이야기다. 사랑이란 상대의 편에 서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걸 깨달은 이야기다.

그래서 'Let us love'를 'Let me love'로 바꾼 이야기다.
'우리 함께 사랑하자가 아니라, 먼저 내가 사랑하겠다는 말.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한 명을 사랑해 보겠다는 작은 다짐 (p. 220)'을 하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담긴 강희정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그 두 번째 인생을 바라보는 60대 중반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이 있다. 이번엔 독기를 품지 말기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는 하되, 세상을 사랑하기는 하되, 독기만큼은 품지 말기를.

예배시간에 트럼펫 찬양을 드렸던 청년처럼, 몇 배는 더 힘들게 시작했을 두 번째 인생일 거란 짐작이 들어서 그렇다. 운전석에 앉아서 수많은 풍경을 보듯, 나를 바라보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하며 바라보듯, 힘 빼고 여유를 갖기를.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없어도 타인의 편에 서 보고 그렇게 하루하루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사회적 기업가로서 일을 계속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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