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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남자
오세영 지음 / 델피노 / 2023년 12월
평점 :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이 있던 날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관객 수 900만 명을 돌파했다. 그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전두광의 대사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
1811년 12월 18일, 당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서북민 식자층과 굶주림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촌민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들어 올린 봉기의 횃불은 실패해 홍경래의 '난(반역)'이 됐다. 반면 1789년,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향한 제3계급(평민)의 불만에서 비롯된 봉기는 성공해서 새로운 정부와 사회를 건설해낸 역사적 전환점인 사건, 프랑스 대'혁명'이 됐다.
대원수 홍경래를 가까이서 호위하는 안지경은 난이 실패로 끝나자 쫓기는 신세가 돼버린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중 배질 홀 선장이 지휘하는 영국 배 알세스트 호에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배를 타고 고생 끝에 대서양의 외딴섬에 다다르게 되는 데, 그곳은 바로 나폴레옹의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이다.
"혁명과 민란은 다른 것이네. 민란은 억압에 일시적으로 항거하는 것이지만 혁명은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니까."
안지경은 당혹스러웠다. 하면 홍경래의 난은 폭동에 불과했단 말인가. (...)
경전은 백성을 위한 나라를 치자의 덕목으로 꼽고 있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나라는 다루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위민이 아니고 여민(與民)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많은 혁명이 구제도보다도 못한 신악(新)을 낳으면서 실패로 돌아갔지.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은 다르네. 새로운 세상을 열었으니까." (p. 181)'
그곳에서 나폴레옹을 만나 프랑스 대혁명을 공부하게 된 안지경은 홍경래가 실패한 여러 가지 이유를 짚어보며 프랑스대혁명을 이끌었던 제3신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마침내 안지경은 홍경래가 못다 한 혁명을 이루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향한다.
'방향은 분명히 하되, 시일을 두고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차분하게 백성들의 반응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프랑스대혁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와 레종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p. 311)
10.26 사건 그리고 그 당시 주도했던 자들이 혁명이라 부르던 12.12 사태의 한가운데 서서, 나는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내 인생엔 중요한 시기였겠지만 반란을 꾸민 자들에게 나의 고3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죽이는 혁명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듯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하나회라는 군인 집단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 이듬해 재수생이었던 나는 지하철역에서 검문 당할 때마다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바닥에 쏟아야 했고 일 년 내내 최루탄을 맡으며 공부했다. 여러모로 수치스러웠고 불편했었다.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불붙은 6.10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6.29선언을 이끌어내 민주주의가 찾아오는가 했지만 군사독재는 여전했다. 더디지만 민주주의는 성숙해져 갔다. 그러나 다시 역사의 퇴행이 시작됐다.
<베니스의 개성상인>, <자산어보>로 익히 알려진 오세영 작가의 <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남자>는 홍경래의 난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Fact에 작가의 상상력 Fiction을 더한 팩션(Faction)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두 사건 모두 억압에 반발해서 민중이 봉기를 한 비슷한 상황인데, 그 결과가 전혀 다름에 의문을 갖는다. 한쪽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한쪽은 비전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 그 차이다.
또 하나, 홍경래의 봉기가 실패로 끝나 '난'으로 기록된 것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소설을 통해 작가는 말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아직 미완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홍경래를 이어 안경직이 나타났듯이 양극화가 심화돼서 불만이 쌓이고 옷을 걸만한 작은 못이 벽에 생기는 순간, 혁명을 이어갈 인물이 계속해서 나올 테니 말이다. 어떤 집단이 가로막고 나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제3계급의 봉기는 끊임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