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25 - 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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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뱀의 해' 을사乙巳년의 키워드를 <트렌드 코리아 2025>는 'SNAKE SENSE'로 정했다.
'뱀처럼 날카로운 감각으로, 새로운 기회를 잡아채자. (p. 14)'


'DRAGON EYES' 2024년 첫 키워드는 '분초사회'였다. 시간의 가성비, 즉 '시성비'를 추구하는 초효율주의가 트렌드로 확산될 것으로 내다봤었다. 실제로 요약 콘텐츠의 증가 등 일상의 효율화가 이루어졌으며,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기업 업무의 효율화를 위해서 AI를 자유자재로 상용할 수 있는 '호모 프롬프트'의 역량이 중요해졌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불황형 소비가 두드러진 가운데, 기업은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상품이나 브랜드를 유연하게 확장하는 '스핀오프 프로젝트' 그리고 서비스의 가격을 조건, 시간, 대상에 따라 바꾸는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불황기 생존 전략으로 삼았다.

크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지루한 시간을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 다양한 활동에서 도파민을 그러모으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도파밍' 추구했으며, 모든 측면에서 완벽한 '육각형인간'을 욕망하며 이를 실현하는 데 시간을 쓰기도 했다.

고금리 고물가로 소비심리가 얼어붙다 보니 실패를 피하고 확실한 선택을 위해 시그니처가 힘을 발휘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제안을 따르는 '디토소비'를 했고, 각 지역은 소멸을 막기 위해 지역만이 가진 문화 시그니처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리쿼드폴리탄'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했다.

사회적으로는 정상 가족이란 틀을 벗어나 육아와 가사에 적극 가담하며 자녀와 정서적 교감을 중요시하는 '요즘남편 없던아빠'가 등장했으며, 돌봄이 사회적 논의가 되면서 돌봄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적 효과를 불러오는 '돌봄경제'가 발달했다.


'SNAKE SENSE' 2025년 첫 키워드는 '옴니보어 Savoring a Bit of Everything: Omnivores'다. 옴니보어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소비 스타일을 가진 소비자를 뜻한다. 길어진 수명과 세대별 인구구조의 변화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정관념과 전형성이 희미해진 결과로 빚어진 현상이다.

힘든 사회, 살아낸 것만으로도 대견한다.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아보하 Nothing Out of the Ordinary: Very Ordinary Da'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일상, '무난하고 무탈하고 안온한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를, '이주 보통의 하루'를 줄여 '#아보하'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p. 161)'

남과 똑같은 것이 싫다. 나다움을 추구하는 소비의 한 방법으로 개성을 더하는 커스터마이징 시도가 심상치 않다. 상품이나 서비스에 추가적이거나 부수적 요소인 토핑이 더욱 주목받아 새로운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시장, '토핑경제 All About the Toppings'가 기업을 기다리고 있다.

두려움을 갖고 AI 시대를 맞이하는 인간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기업과 상품이 선택받을 확률이 높다. 얼굴과 표정을 표현하고, 읽고, 만들어내는 '페이스테크 Keeping It Human: Face Tech'는 기술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우리를 해치려는 것들이 많아진 세상에서, 작고 귀엽고 순수한 무해함을 특성으로 가진 사물의 힘, '무해력 Embracing Harmlessness'은 우리 상처를 감싸줄 수 있으므로 생존에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5퍼센트에 다다름에 따라 인구를 비롯해 문화, 시장 등 여러 영역에서 한국적인 것을 정확하게 분류하기 쉽지 않다. 이분법을 적용할 수 없는 한국적 정체성에 '그라데이션K Shifting Gradation of Korean Culture' 개념이 필요해졌다.

빠르게 디지털화되지만 만지고 느끼려는 우리의 아날로그 본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오히려 체험하려는 욕구가 커지기에 특성 대상에 경험 가능한 물성을 부여함으로써 매력을 높이는 '물성매력
Experiencing the Physical: the Appeal of Materiality'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구온난화 시대는 끝났고, 지구가 끓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기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후감수성 Need for Climate Sensitivity'은 기후 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소비자, 기업, 사회 모두가 갖춰야만 한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았듯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 전략 Strategy of Coevolution' 선택은 변화무쌍한 생태계에서 필연적이다.

'작은 노력이라도 꾸준히 계속하면서, 실천 가능한 자신만의 밸류업을 시작하자. (p. 353)'
일반적인 성공 공식대로 획일적인 스펙을 쌓는 노력 대신, 나의 장점을 찾아 지금 도달 가능한 한 가지 목표를 세워서 실천함으로써 나다움을 잃지 않는 자기 계발의 새로운 패러다임 '원포인트업 Everyone Has Their Own Strengths: One-Point-Up'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각자 가장 나다운 성공을 찾는 것 말이다.


'아주 보통의 하루'를 줄인 '#아보하'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지쳐서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니. 그 행복만큼 불행해질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일까?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별일 없이 산다>라는 장기하 노래의 노랫말이다. 장기하가 2009년에 발표한 노래이니 15년 전부터 별일 없이, 별다른 걱정 없이,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사는 게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나 보다. 그때부터 우리 사회의 행복 담론은 차츰 바뀌어 2025년 트렌드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무색무취 일상을 감사하게 됐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으로 수상으로 한강 작품이 베스트셀러를 독차지하기 전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등 필사하며 읽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었다. 혼자 방에서 묵묵히 하는 필사, 무탈한 하루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하루 세 줄 감사일기도 마찬가지다.

퇴직한 다음 나의 일상이 그렇다. 하루하루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며 하루를 별일 없이 지내고 잠자리에 들 때 오늘 내게 주어졌던 하루를 감사한다.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면 그래서 불행하지 않았다면 감사할만하지 하지 않은가.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행복을 추구할 권리마저 소극적으로는 고통과 불쾌감이 없는 상태를 추가할 권리를 뜻한다. 물론 적극적으로야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추구할 권리이지만.

행복 회로를 돌려보자. 내가 별일 없이 지낸 하루에 감사하는 건, 그래서 행복했는지를 따지지 않는 건 행복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은 '병'이나 '건강'을 이야기하지 않고, 부자는 '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듯이, 불만이 없는 사람들은 굳이 '행복'을 묻지 않는다. 간절하게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p.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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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핀 - 세상은 이들을 따른다
세스 고딘 지음, 윤영삼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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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잠시 돌아보면, 내가 맡은 일에 열심이었다. 보통 출근시간 1시간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결근? 언감생심이다. 열이 펄펄 끓는 경우가 아니라면 출근했다. 쉬는 날도 출근했고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상사에게 대든 기억? 거의 없다. 튀어나온 못이 정 맞는 법이다. 항상 고개를 수그렸다. 온갖 모욕적인 언사에도 반응하지 않고 참았다. 그냥 회사의 일부라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대한 대가로 보상을 받으며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뼈를 묻은 결과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이 돼버렸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의 건물을 보면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린치핀>을 읽고 '내가 톱니바퀴였구나'라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회사라는 시스템의 일부가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 말이다.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순응하는 톱니바퀴가 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선택.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을 고정하는 작은 핀을 '린치핀'이라고 한다. 세스 고딘은 <린치핀>에서 관리자와 노동자라는 집단 이외에 새로운 집단, '린치핀'이 더 생각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 곧 들이닥칠 AI 시대에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즉 린치핀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라고 조언한다.

또 하나, 산업혁명과 함께 도입된 공공교육과 무상교육 시스템에서 우리는 순응하는 공장 노동자로 훈련받았다. 세스 고딘은 그런 시스템에 항복하지 말고 '세상에 소란을 피우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제 새로운 거래를 해야 한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때 보다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거래 말이다. 바로 재능과 창의성과 예술을 자신의 지렛대로 삼는 거래가 시작된 것이다. (p. 20)'

물론 우리는 톱니바퀴가 되도록 훈련받았다. 세스 고딘은 린치핀이라는 톱니바퀴로 살지 않아도 되는 길을 제시한다. 다행인 건 린치핀은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누구가 마음만 먹으면 그 길을 선택해 갈 수 있다. 나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계속 평범한 부품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비범함 인재, 린치핀으로 살 것인가.'

린치핀은 다른 사람의 지지나 허락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종류의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 훈련한다. 게임의 틀, 상호작용 방식 그리고 질문까지도 바꾼다.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차이'를 만드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린치핀은 선물을 자발적으로 주고 싶어 하는 열정과 새로운 방식을 활용하는 예술을 결합해 자신을 차별화한다.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정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진공상태에서 일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일한다. 그리고 린치핀은 겸손하다.

그 결과 '이제 사회는 우뚝 선 사람, 선물을 주는 사람, 관계를 맺는 사람, 두드러진 사람 (p. 449)', 대체불가 존재인 린치핀을 찾고 보상한다.


세계적 마케팅 전략가 세스 고딘의 대표작인 <린치핀>은 15년 전에 출간된 책이다. 세월이 흘러 챗 GPT의 등장으로 AI와 공존해야만 하는 시대가 눈앞에 있다. 산업혁명으로 노동 기반의 일자리가 없어진데 이어 정신노동 기반의 일자리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일자리를 놓고 AI와 경쟁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대, 세스 고딘이 15년 전에 마련한 '린치핀'이 되는 길은 지금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

익명이 되라는, 비인간화되라는 강요에 의해 이제까지 우리는 본성을 거스르며 살아왔다. 자~ 계속 순응하면서 평균 이상이 될 수 없는 값싼 인생, 톱니바퀴로 살 것인가. 내 앞을 가로막는 저항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예술가로 살 것인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AI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린치핀의 길을 걷는 것만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평화롭게 먹고살 수 있으며 우리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는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p.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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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투라 CULTURA 2024.11 - Vol.125, 한강 작가
작가 편집부 지음 / 작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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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달 남짓이나 됐다. 지난 10월 10일 저녁 여덟시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감동이란. 그 흥분에 이어진 행복감을 좀 더 느끼려고 쏟아지는 한강 작가와 작품과 관련한 기사, 동영상을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시들해질 무렵, 요 며칠 동안 다시 한강에 빠져들 수 있어 행복했다.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11월 호의 테마가 한강 작가였기 때문이다.


<쿨투라> 11월 호에는 평론가들의 다양한 작품 해석을 물론 한강의 동화, 한강 작품이 원작인 영화와 연극, 한강의 음악들, 번역가들이 한강을 바라보는 이야기, 인터뷰 등 한강 이야기가 가득하다. 한강의 작품에는 모든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녹아있어 구조주의, 역사주의, 에코 페미니즘 등 모든 이론으로 작품 해석이 가능하다고들 한다.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한강의 문학을 '소설의 육체'를 관통하는 시적 글쓰기의 여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세계문학과 우리 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10년의 시차를 한강 작가가 극복했다고 평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요인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마주하는 것과 한강 문장이 보여주는 함축성과 느릿함이라고 분석한다.

허희 문학평론가는 한강이 과거와 현재를 겹으로 살면서, 살지도 죽지도 않은 자들을 진혼하는 영매와 같은 역할을 문학적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시인 한강의 언어는 혀와 입이 있어도 혀와 입을 사용하지 않는 말, '혀가 없는 말'이라고 표현한다.

'한강의 시언어처럼, 한강의 소설 역시 죽은 자의 시선-목소리로 발화됩니다. 산 자의 세계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한 목소리를 붙잡는 것, 그것을 현전시키는 언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작가 한강의 각성입니다. (p. 43, 혀 없는 말 - 한강의 시적 문장에 부쳐)'

한강 작가가 동화를 썼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그림책 <천둥 꼬마 선녀 번개 꼬마 선녀> 작가 소개 글에 비가 무척 내리던 날 엄마가 되었다고 썼다. 어린아이가 무서워할지도 모를 천둥과 번개를 두 꼬마 선녀를 등장시켜 놀이라는 말로 안심시킨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흰 HYNN (본명 박혜원)'에 얽힌 에피소드도 알게 됐다. 한강의 소설 <흰>에 나오는 '내가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만을 건넬게'라는 구절을 통해 큰 울림을 얻어 활동명을 정했다고 한다. 가수 흰의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한강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가부장 또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에서 가해진 국가 폭력에 감각적으로 불복종한다. 또한 무사유를 강요하는 권력에 맞서 한강은 당연하게 여겨온 규범과 가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유달리 폭력에 민감한 편이라고 말하는 한강, 그래서 아우슈비츠 학살을 다룬 영화를 볼 때마다 토하곤 한다는 한강이 그 누구도 가보려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순수의 상태까지 내려가 처참하게 당한 피해자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래서 한강은 읽기가 힘들다.


'정의가 없는데.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p. 123, 다크 히어로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아내와 함께 정주행한 다크 히어로물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에서는 급기야 악을 심판하기 위해 악마가 내려온다. 악의 심판자로 국가 공권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비질란테에 환호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한다. 정의가 없는 세상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악을 심판하고 정의를 구현할 어떤 히어로도 없다. 지옥에서 온 악마가 히어로가 되는 세상, 악마를 내 편으로 삼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


그 밖에도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 전시, 부산영화제, 서울국제사랑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쿨투라>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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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생명의 지문 - 생명, 존재의 시원,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피 이야기
라인하르트 프리들.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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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축구 경기 전반전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심장외과 의사 프리들은 전화를 받는다. 칼이 아직 가슴에 꽂혀 있는 부상자가 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였다.

20대 중반의 남자 하미트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고, 몸은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 추위에 온몸을 떨었고 (...) 피는 산소를 운반할 뿐 아니라, 생명의 온기를 배달한다. 생명의 온기가 피와 함께 몸에서 빠져나갔고, 그것은 죽음을 향한... (p. 18)'


<피, 생명의 지문>은 인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피의 서사시라고 할만한 책이다. 저자 라인하르트 프리들 박사는 수천 개의 심장을 다룬 심장외과 분야의 선구자로 심장에 칼이 깊숙이 꽂힌 채 응급실에 실려 온 하미트의 수술과 회복 과정, 그리고 그가 칼에 찔린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피에 얽힌 모든 것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1부 '피'에서는 하미트처럼 외상을 당했을 때 피가 반응하는 응고, 면역, 치유 과정 등 의학 정보뿐 아니라 과학, 경제, 문화과 관련된 피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피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관통하여 흐르며 연결해 준다. 10만 킬로미터나 되는 동맥, 정맥, 모세혈관을 흐른다. 피는 뼈에서 비롯되고 피가 없으면 뼈가 마르는 순환하는 인과관계다. 피를 대가로 치러지는 전쟁에서 피가 권력과 잔혹함, 탐욕으로 거래되는 블러드코인으로 변질되는 것을 본다. 아무 근거도 없이 피가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피부와 상처가 아물었더라도 영혼의 상처로 남은 고통은 여전할 수 있다. 뇌나 심장이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여하는 호르몬 옥시토신이 고통을 줄여준다. 트라우마는 피에 지문을 남긴다.

'폭력의 트라우마는 세대를 거쳐 계속 대물림된다. 트라우마를 가진 부모의 자녀들은 종종 신체적, 정서적 폭력 속에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것을 자녀와 손자들에게 물려준다. 이것을 대물림된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p. 178, 179)'
명상, 신앙, 사랑, 희망이란 묘약으로 조각난 영혼이 온전해질 수 있다.

2부 '생명'에서는 피의 기능과 함께 스트레스, 공감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 피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태초에 흐름이 있었다! (p. 245)'
피는 심장의 펌프질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동한다. 피의 본질은 움직임이고 그 흐름으로 순환이 시작된다. 피의 흐름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피는 입술을 붉게 물들여 매력을 발산하며 파트너를 유혹한다.

우리 몸은 탄소, 수소, 산소, 칼슘 등 약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화학재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원자들이 상호 연결될 때, 죽은 물질에 불과한 것들이 스스로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고 유전자를 가진 기적과 같은 생명이 탄생한다. 호흡이 몸과 마음을 연결한다. 들숨은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숨결은 피를 타고 계속 전달된다. 호흡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세포에 활력을 준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는 일 호흡, 첫 숨을 쉬웠던 순간과 마지막 숨을 쉬게 될 날과 시간, 그 사이가 우리의 삶이다.

'피는 생명이고, 죽음이고, 흐름이다. (p. 336)'


의료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인 민영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건보 재정이 마르면 민간 보험으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이동하고, 병실 예약 특혜와 같은 차별화된 서비스가 더해지면 더더욱 민간 보험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의료 차별은 더욱 빠르게 가속화될 것이다.

'현대사회는 의료와 치유라는 공공복지를 환자의 질병에서 이익을 얻는 거대 기업에 넘겼다. 권력, 돈, 소유, 피에 대한 탐욕으로 찢긴 마음의 구멍을 물질적 재화, 풍요, 데이터가 메워 주리라 희망하는 사회다. (p. 262)'

피의 지문으로 우리 몸의 정보가 새겨진다는 글을 읽고 걱정이 앞섰다. 우리 피, 생명의 지문이 기업의 손아귀에 쥐어질 때, 우리 생명이 그들의 탐욕으로 이용될까 하는 걱정이다. 자본이 욕심을 채우는데 내 소중한 생명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죽음 또한 그들의 영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한다.

그래서 그 어떤 욕심으로도 오염되지 않고, 영혼의 상처마저 치유된 내 몸의 원소들이 내 생명이 다하는 날, 내 몸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가 다른 생명의 피의 흐름으로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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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파리
패신저 편집팀 지음, 박재연 옮김 / Pense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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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만 명이 사는 도시 파리,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치곤 적은 인구다. 하지만 이곳 파리가 프랑스 전체에서 차지하는 힘은 가장 큰 도시답다. 파리는 프랑스 전체 GDP의 3분의 1을 담당할 뿐 아니라 유럽에서 GPD가 가장 높은 도시다. 일자리도 4분의 1이 파리에 집중돼있다.

또한 파리는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센 강을 따라 콩코르드 광장에서 에투알 개선문에 이르는 샹젤리제 거리, 연 관람객 890만 명으로 세계 미술관 가운데 제일 많은 사람이 찾는 루브르, 퐁피두 센터 등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곳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여행책자에서 소개하는 뻔한 곳을 찾아가 사진에 남기며 여행한다면 그 도시의 진짜 여행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개념의 '북커진(북+매거진)' <패신저>는 진짜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 여행서'이다.

'장문의 에세이, 탐사 보도문, 프로프타주 문학, 시각적 서사 등 다양할 글을 통해 여러분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문화와 정체성, 공적 담론, 국민 정서, 핫이슈, 다채로운 기쁨과 아픔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뒷날개)'

<패신저>의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파리다.

우리가 예술적 관점에 바라보는 파리의 랜드마크 대부분은 정치권력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결과물이다. 지금은 민간 재단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보부르 효과일 뿐, 이들 건축물들은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을 기대하는 상품에 불과하다. 사회적 박탈감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시위대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곳으로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거리 샹젤리제를 택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도시 파리에도 편견과 폭력은 있었다. 중국계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그 대상이다. 이들 모두 프랑스인이지만 지금도 다양한 방법으로 프랑스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미식의 도시 파리에서 미슐랭을 받기 위한 도전이 아닌 계절을 대표하는 음식재료로 고급 요리를 선보이며 파리 사회의 미식 문화를 바꾸는 이들이 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성상 '파리지엔', 이젠 파리에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파리지엔의 신화가 없다면 파리는 어떻게 될까? 이 밖에도 파리에서 아프리카를 보여주는 콩고공화국에서 시작된 사페의 미학, 뜻밖에 불친절함을 겪고 얻는 파리 신드롬, 반인종주의와 반파시즘의 철학을 간직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팀 레드 스타 FC 등 파리가 품은 진짜 이야기가 <패신저, 파리>에 담겨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어서인지 열세 편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주목한 꼭지는 '두 건의 유대인 노파 살해 사건이 프랑스를 뒤흔든 방법'이었다.

'루시 아탈 Lucie Attal과 미레유 놀 Mireille Knall의 연이은 죽음과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논란은 종교에 대한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이 사건은 반유대주의에 의한 살인일까, 아니면 우파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기 위해 악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슬람 반유대주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일까? (p. 121)

두 살인 사건은 발생한 지 한참 지났지만 두 죽음을 여전히 정확히 규정하지 않아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1978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인종 또는 종교에 대한 인구 조사 수집이 불법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인종차별이나 인종주의적 폭력이 여전한듯하다.

인종혐오를 반유대주의로 세탁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이슬람인을 살인자로 의심하는 여지를 두고 이슬람이 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인종혐오도 마찬가지다.

'벤진은 이러한 비극의 또 다른 요인은 이른바 '공감대 형성'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누가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일례로, 국가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 전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반면, 노예 제도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는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p. 130)'


북커진 <패신저, 파리>가 파리의 뒷골목을 가이드 해주는듯했다.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과 고정관념도 깨주었다. 파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파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패신저>가 가이드 해줄 다음 도시가 궁금하다.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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