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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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가 처음 내 관심 안으로 들어온 건 14세기 유럽 인구의 4분의 1 이상의 목숨을 빼앗아가버린 페스트가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를 통해 유럽에 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물론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이상한 질병이 칸의 군대 사이에 퍼져 병사들이 쓰러졌다. 칸은 지휘관에게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투석기에 실어 성벽 너머 도시 안으로 던지라고 명령했다. 카파 주민들이 병에 걸렸고, 증상이 칸의 병사들에게 나타났던 것과 비슷했다. 1347년 카파에서 출항한 배 한 척이 제노바로 향했다.

'데 무시는 여행 중에 선원들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렸고, 그들이 도중에 정박한 곳마다 - 즉 늦여름 콘스탄티노폴리스, 초가을 시칠리아, 1348년 1월 제노바의 - 항구에서 도시 중심부로 질병이 빠르게 번져나갔다고 보고했다. 타타르 군대를 괴롭혔던 바로 그 치명적인 질병이 이제 해상 항로를 따라 이탈리아 본토로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p. 176)'

흑해 최대 휴양 도시 소치가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는 편파 판정 의혹 속에 아깝게도 금메달을 놓쳤다. 다시 한번 흑해가 내 관심에 들어왔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흑해와 북카프카즈, 남부 러시아를 통합하는 전략적 투자였다. 소치는 아조프해에서 압하지야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남부 해안의 핵심 거점이 됐고, 올림픽 이후에도 정상회담과 문화 행사가 끊임없이 개최되는 푸틴 체제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p. 429, 옮긴이의 말)'


흑해가 내게만 관심밖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도 흑해는 세계의 끝자락이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흑해에 대해 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하나는 그 바다를 항해하려면 강철 같은 의지와 그보다도 더 강한 배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p. 42)'

국제학 전문가이자 유라시아 지역 연구 권위자인 찰스 킹 교수는 그의 책 <흑해>에 흑해 지역의 2,700여 년 역사, 주변 민족들의 역사와 문화, 정치를 하나로 엮어 간결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그 시대에 흑해를 지배했던 세력의 언어로 각 장의 제목을 삼았다. 기원전 700년부터 기원후 500까지 흑해 연안은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장악했다. 그때 흑해는 라틴어로 '폰투스 에욱시누스', 의미는 '환대하는 바다'이다. 그 이후 1500년까지 흑해의 주인공은 비잔티움과 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들이다. '큰 바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마레 마조레'가 흑해의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이 흑해를 장악했던 1500~1700년 시기의 흑해는 튀르크어로 '검은 또는 어두운 바다'를 뜻하는 '카라 데니즈', 1700이후 1860년까지 러시아 제국이 흑해의 새로운 패권국일 때 흑해는 '검은 바다'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초르노예 모레'이다. 근대화 시기부터 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소련 해체까지를 다루는 6장이 돼서야 비로소 영어 '흑해 Black Sea'가 제목으로 등장한다. 마지막 7장에서 저자는 흑해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그의 흑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동부 지중해와 흑해를 바라보는 서양인 대부분의 머릿속에 박힌 잘못된 이분법 세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이분법이고, 둘째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이분법이며, 셋째는 문명과 야만 사이의 이분법이다. (p. 418)'

흑해는 이분법의 '경계'로 여겨져 왔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계의 끝자락, 변방이었다. 하지만 찰스 킹이 각 장의 제목으로 삼은 다양한 언어의 흑해 이름으로 살펴봤다시피 흑해는 경계나 변방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곳이 아니었다. 시대마다 여러 문명권의 중심 무대였으며, 그 시기마다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었고 세계를 연결을 연결해 주는 바다였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흑해는 다시 한번 세계가 바라보는 곳이 됐다. 꽤 오래전부터 러시아는 흑해에 집착했다.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가 부족하다. 흑해만이 러시아 해양 진출의 길을 열어준다. 크림반도는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흑해를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튀르키예, 불가리아, 루마니아 그밖에 EU 회원국에게도 흑해는 갈등과 협력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알고 보니 흑해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략적 선택이 이루어졌고 또 앞으로도 이루어져야 할 바다였다.

'역사와 사회 연구에는 육지 중심의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사회생활이 땅 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대양과 바다, 강들은 단순히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과 교류라는 독특한 이야기들의 핵심 주역으로서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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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행동을 결정짓는 40가지 심리 코드
폴커 키츠.마누엘 투쉬 지음, 김희상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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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부분 '빠른 생각'으로 살아간다. 휴리스틱 Heuristic, 불확실하거나 여유가 없을 때 꼼꼼하게 따지기보다는 이제까지 경험이나 직관으로 어림짐작한다. 생존을 위해 휴리스틱이 효율적이라는 걸 우리 뇌가 학습한 결과다.

게다가 뇌는 게으르다. 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느린 생각'을 계속하면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빠른 생각으로 주장한 것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느린 생각으로 빠른 생각을 정당화할 궁리를 한다.

사상 최초로 심리학자인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커너먼이 그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펼친 내용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전제를 완전히 뒤집고 '인간은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커너먼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을 공부한 폴커 키츠와 마누엘 투쉬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우리가 왜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선택과 감정, 인간관계가 무의식적인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지 40가지 심리코드로 설명하는 책이다.

퇴근하고 잠실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할 때마다 '스티커 하나만 붙여주시겠어요?'라는 부탁을 하며 접근하는 청년을 만나곤 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심리코드가 바로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작은 부탁을 하는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 Foot-in-the-door technique'이다. 스티커를 붙이는 순간 경계를 풀며 마음의 문을 열게 돼 더 큰 부탁까지 들어주게 된다.

얼마 전 전 정부의 국무총리 내란 혐의 재판에서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왜 그런 중형을 선고했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죄목 가운데 하나로 국무총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 즉 비상계엄 선포를 적극적으로 저지했어야 할 '작위作爲' 행위를 하지 않은 '부작위不作爲'의 죄를 물었다.

'뇌는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더 낫다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게으른 탓에 이런 앎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일반화를 저지른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더 편안하게 여긴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자기 자신이 괴로울지라도 별다른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pp. 124, 125 부작위 편향)'

12.3내란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작위 하며 오히려 내란 세력에 가담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 재판장의 판단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꽤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대니얼 커너먼이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이 실험을 바탕으로 지적한 대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심리 코드에 따라 행동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우리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느린 생각'보다 '빠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걸 더 편하게 생각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말과 행동 뒤에 숨은 마음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선택을 잘못해 생기는 손해도 줄일 수 있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맡은 바 직무를 작위함으로서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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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현대지성 클래식 72
투퀴디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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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라케다이몬을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27년 전쟁을 일컫는다. 10년을 싸웠고, 7년간 불안정한 휴전 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10년간 전쟁을 벌였다.

라케다이몬은 아테나이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때 도시국가 에피담노스에서 코린토스와 케르키라 간의 내분이 일어났다. 코린토스는 라케다이몬에게, 케르키라는 아테나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라케다이몬이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됐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전쟁은 기원전 406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이었다. 라케다이몬이 아이고스포타모이에 정박 중이던 아테나이 함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아테나이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패배했다. 전쟁의 주도권은 라케다이몬으로 넘어왔고, 이듬해인 기원전 405년 아테나이는 라케다이몬에게 항복했다. 그렇게 27년간의 참혹했던 헬라스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중략)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아테나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 벌어진 페르시스 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급성장, 델로스 동맹을 이끌며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아테나이는 동맹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걷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동맹국들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전시 작전권을 거머지며 헤게모니를 확보했다.

미국의 트럼프가 떠오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나토에서 전시작전권을 가진 것이나 관세로 동맹국을 협박해 투자를 강요하며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모습이 아테나이와 닮았다. 아테나이를 향한 델로스 동맹국들의 불만은 쌓여간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아테나이에게 정면으로 대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미국의 횡포를 지켜보기만 하는 EU를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의 딱한 사정마저 델로스 동맹국들과 비슷하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각기 다른 상황과 입장에서 이루어진 명연설도 담았다. 페리클레스는 리더십으로 강한 아테나이를 만들었다. 전쟁 첫해 겨울 전사자를 추모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참고할 정도로 설득력과 생동감이 넘친다.

'우리는 검소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지혜를 추구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습니다. 부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행동을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가난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깁니다. (p. 195)'

아테나이 민주정의 가치와 공동체의 자부심을 강조하면서 연설을 시작해 전사자를 추모하며 유가족에 대한 보상 이야기로 연설을 맺는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3권 82장, 83장에 전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았다.

'사람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던 전통적인 용어의 의미마저 변질되었다. 만용은 충성스러운 용기로, 신중함은 품위를 가장한 비겁함으로 여겨졌다. 절제는 남자답지 못함에 대한 핑계로 치부되었고, 문제를 포괄적으로 보는 통찰력은 행동하지 않음으로 간주되었다. 난폭함과 성급함은 남성적 미덕으로, 정치적 음모는 정당방위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p. 312)'

투키디데스는 전쟁을 있은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전쟁에서 저질러지는 잔혹함에 대해 뚜렷하게 파악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전쟁은 협상하다가 안되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알기로, 신들의 세계든 인간 세계든 힘을 가진 자가 지배하는 것은 자연 불변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우리가 정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처음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기정사실로 물려받았고, 후세에도 영원히 존속하도록 물려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 법칙에 따라 행동할 뿐이며, 누구든 권력을 갖게 된다면 우리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들에게 벌을 받을 일은 전혀 없습니다. (p. 511)'

델로스 동맹 가입을 거부하는 멜로스 대표단에게 아테나이 사절단이 내놓은 정의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국제관계는 냉혹하다. 힘을 가진 자만이 정의를 말할 수 있다. 멜로스는 끝까지 아테나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 결과 '아테나이군은 멜로스의 주민들 중 성인 남자는 붙잡는 즉시 모두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아테나이인은 그 땅에 정착했고, 나중에 500명의 이주민을 보내 그곳을 식민시로 만들었다. (p. 515)'

우리나라 대통령은 지난해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국제사회가 각자도생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다루는 걸 보면 현시대의 세계가 기원전 420년대 헬레나 시대로 돌아간 것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다시 힘을 가진 자만이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시대로 돌아가버렸다.


(중략)


우리는 역사를 왜 읽는가. 역사는 인간의 본성이 되풀이되는 사건이고 그 과정에서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을 읽음으로써 앞으로도 거듭될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본성 가운데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도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전쟁 역사를 읽음으로서 왜 전쟁과 내전이 끊임없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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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의 문화사 - 사물의 생김새로 읽는 인간과 문명 이야기
서경욱 지음 / 한길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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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에 있는 테마파크 설계 당시 어느 것 못지않게 신경 쓴 것이 어트랙션 대기공간이었다. 인기가 많은 어트랙션의 경우 기다리는 시간 긴 만큼 신경 쓸 것이 더 많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해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동 동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든다든지, 대기공간 곳곳에 볼거리를 배치하는 등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를 총집합 곳이 대기공간이다. 뒤돌아보니 사물 형태의 다양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셈이다.


서경욱 교수의 <형태의 문화사>는 '우리 몸을 포함한 주변 사물의 형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다. (p. 8, 프롤로그)'

주변을 살펴보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귀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볼품없어서 '저건 왜 저렇게 만들었지?'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새도 있다.

맨홀 뚜껑이 둥근 이유는 알다시피 직경이 일정하여 어떻게 올려놓더라고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서리가 없어 아무리 무거운 철이라도 굴릴 수 있으니 옮기기도 편하다. 처음엔 세모나 네모 모양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거쳐 둥근 형태가 안전과 효율 측면에서 가장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과학과 문화라는 두 개의 큰 틀 안에서 사물의 형태를 설명한다. 과학적 틀을 통해 발생학적 원인을 보여주었고, 문화적 틀을 통해 그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서 다양한 학문과 이론을 소개하고자 했다. (p. 12)'

몸의 형태 가운데 얼굴은 눈, 코, 입의 형태가 만드는 무한한 세계다. 옛날부터 타인의 표정을 읽는 것은 인류에게 생존 문제였다. 우리 뇌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눈과 눈가 근육을 먼저 살펴 표정을 읽는다. 그래서 눈이 없으면 표정 읽는 것이 어렵다. 군대 조교들이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가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또한 눈, 코, 입이 똑바로 배열됐을 때 표정을 읽을 수 있도록 진화해, 누워있거나 물구나무 서 있는 경우 표정 파악에 애를 먹는다.

세상의 형태 중 집은 한 집단이 신체적 학습과정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강력한 매개체다. 우리 주거 형태 변화에서 나타난 '낮은 바닥 = 더러움 = 외부 = 신발'이라는 상징체계가 아파트에서 신발을 신어야 하는 화장실, 발코니, 현관과 같은 낮은 공간으로 이어진다.

문화 형태 측면에서 사물은 첫인상으로 오래 기억된다. 기업에서 남보다 먼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쿼티 배열의 자판이 어느 정도 불편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키보드 배열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선점 효과 때문이다.


우리 몸과 주변의 사물 형태를 잘 살펴보면, 인류가 자연의 형태를 관찰하고 그 특징을 활용해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그 형태에 우리 몸을 길들였다. 이제 곧 가전을 시작으로 모든 사물의 형태를 인공지능이 만들어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삶을 통해 인류가 얻은 지혜가 배제된 채 AI가 관여한 사물의 형태는 다수에게 초점을 맞춘 표준 형태일 여지가 크다. AI는 표준이 아닌 몸과 삶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꿈, 환상, 신화, 예술, 종교와 같은 물질 너머의 가치가 있다. (p. 408, 에필로그)'

물질 너머의 가치를 지키려면 과학과 함께 문화적 시각에서 사물의 형태를 바라봐야 한다. 저자가 사물의 형태를 과학과 문화라는 두 개의 틀로 설명한 이유다.

어트랙션 대기공간을 만들 때마다 느낀 건, 다양한 사람이 오는 곳이니만큼 배려를 담아야 좋은 공간이 탄생한다는 점이었다. 어른 중심이 아니라 어린아이, 장애인, 노인... 개인을 보살피는 배려가 담긴 공간. 그래서 더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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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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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권의 책이며 그것도 살아 있는 책입니다. (p. 9)'
딱 봐도 책인 건 알겠는데 (컬러풀해서 색다르긴 하다)...
살아있는 책이라니? 무슨 그런...
그렇다 치고 무슨 책인데?
'제 이름은 <여행의 책>입니다. (p. 9)'

여행책?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 음~ 널 읽어야 할 이유랄까?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가장 가뿐하고 은근하고 간편한 여행으로 당신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p. 9)'

어느 곳으로 날 안내하려고? 설렌다.
'우리는 이제부터 뭐랄까요...
어떤 강렬한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p. 9)'


베르나르 베르베르인지 베르베르 베르나르인지 항상 헷갈리는 동갑내기 작가. 꽤나 오랜 인연이다. 서른 갓 넘었을 때 사촌 동생 책장에서 <개미>를 발견하고 빌려 읽은 게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첫 만남이었다. 책을 덮고 든 생각은 '이거 뭐지?'였다. '개미 세계에서 살았나'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다음엔 <뇌>를 읽었고, <웃음> 그리고 <나무>, <파라다이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상상력 사전> 지난여름 <키메라의 땅>까지, 그의 상상력에 반해버렸다.

서른 남짓, 그때부터 베르베르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는 그는 나를 상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여행 책'이었다.


'그대는 나를 읽는 동안, 스스로를 어떤 다른 인물이 아니라 그대 자신으로밖에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그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 13)'

<나는 그대의 책이다>에서 베르베르는 공기, 흙, 불, 물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4원소 세계 여행은 나를 만나는 다름 아닌 나의 내면으로 떠나는 놀라운 상상 여행이다. 상상이라면 못 갈 곳이 없다.

'그대가 나를 읽을 장소로는 조용한 곳이 알맞을 것이다.
그곳은 좋은 파동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p. 20)'

베르베르가 길동무가 되어 이런저런 말을 걸어온다. 나의 정신세계, 나의 안식처, 죽음 또는 나 자신을 적으로 만나는 전쟁터,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세계... 그의 상상력을 따라 여행하다 보면 여행 끝에 만나는 건 나 자신이다. 이 세계와 우주 그리고 나를 잘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공기, 흙, 불, 물 각기 다른 컬러의 세계를 읽다 보면 그 색의 세계에 적응할 때까지 피로함을 느낀다. 하지만 피곤하지 않다면 여행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피곤함만큼 쉼은 달콤한 법이니,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고 삶이란 여정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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