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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말들의 편 가르기, 차별의 말들 - 무심코 쓰는 말에 숨겨진 차별과 혐오 이야기
태지원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4월
평점 :
'가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 글을 남긴다'라며 작가 표범 씨가 사회복지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2018년 SNS에 올려 화제가 됐던 일화다.
'어느 날 교육봉사센터에 한 시민의 항의가 들어왔다. 그는 돈가스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동네의 기초생활수급 대상 어린이가 와서 밥 먹는 광경을 봤다. 가격대가 낮지 않은 유명 체인점이었는데, 누나와 둘이 와서 한 사람당 한 메뉴씩을 시켜 먹는 것을 보고 기분이 불쾌해 항의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pp. 149, 150)'
"저 비싼 돈가스를 나눠 먹어야지, 각자 하나씩 먹네?"
항의 전화를 한 어른(이라 할 수 없지만)이 한 말이다.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건 '가난한 사람은 불쌍하고 부족하게 보여야 한다'는 가난에 대한 편견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가진 식권으로는 가격이 모자라, 아이들을 예쁘게 본 음식점 주인이 공짜로 돈가스를 준 것이었다.
사회 문제와 인권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온 태지원 작가가 이번에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에 숨겨진 '차별과 혐오"에 관해서다. 정상, 등급, 완벽, 가난, 권리, 노력, 자존감, 공감이란 여덟 개 키워드를 중심으로 차별의 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차별의 말을 환대의 말로 바꾸려면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저자는 편가르는 날 선 말이 '생각의 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인지적 편리함을 추구해왔다. 살아남으려면 적인지 우리 편인지, 판단이 빨라야 했다.
'덕분에 마주하는 상대를 판별하기 위한 틀을 장착하게 됐다. 상대의 피부색이나 눈빛, 출신 지역이나 민족을 보며 범주화하면 가까이해야 할 이와 멀리해야 할 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잣대는 갈수록 다양해졌다. 성별, 연령대, 민족, 인종 등으로. (p. 5)'
'생각의 틀' 속에 차별이 숨어있어 나도 모르게 편견과 혐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이런 나는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흔한 질문이다.
"너 어디 살아?" 초등학교 아이들마저 하는 질문이다. 어디에 산다는 대답 하나로 재산 등급이 까발려지고 계급이 형성된다.
"그러게 왜 이태원엔 놀러 가서..."
"가난해서 키울 능력도 없으면서 애는 왜 낳나"
"바쁜 출근 시간에 거동도 불편한 사람이 왜 돌아다녀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나"
"맘만 먹으면, 왜 일할 데가 없어. 게으른 거지"
"그런 쓸모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마"
"너 T야? 왜 그리 공감 능력이 없냐?"
'세상에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명확한 선이 있을까? 그 선은 누가 만드나'라는 식의 해석과 시선으로 새로운 질문을 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사라진다.
달동네 사는 사람은 모두 실패 등급을 받아야 하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뭔가.
'미국 작가 수잔 케인은 자신의 책 <콰이어트>에서 행복과 성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건넨다. "삶의 비결은 적절한 조명이 비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브로드웨이의 스포트라이트가, 누군가에게는 등불을 켠 책상이 그런 장소일 것이다." (p. 69)'
이태원에서 노는 사람을 가치 없다고 평가하면서 애도의 자격까지 박탈해도 되나. 노는 시간 없는 빡빡한 삶만이 정답은 아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을 마구 지워도 되나. 그들도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이다.
'비장애인이 숨 쉬듯 누리는 일상 속 권리, 이것이 단순히 비장애인을 위한 성역으로 남게 되면, 결국 누군가에게는 그 화살이 돌아온다. 장애인, 교통약자, 노인이 될 미래의 나와 가족을 위한 당연한 권리가 되어야 한다. (p. 176)'
게으르다고? 주어진 여건과 타고난 것이 제각각인데 무조건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하는 것이 옳다는 능력주의 경쟁 시스템의 잘못은 없는 건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타인을 쓸모없다고 폄하할 수 없다.
공감하는 능력이 모든 걸 해결하는 만능키가 아니다. 감정은 금방 시들해지고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집단에 속해야 안심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속성은 따돌림당하는 사람을 볼 때 내가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다수 집단이기를 바란다. 상대적으로 소수 집단을 좋지 않게 보고 차별의 선을 긋는다. 하지만 소수 집단에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속해 있는 등 여러 사람이 섞여있다. 바꿔 말하면 선택에 따라 혹은 조건이 바뀌면 나도 소수 집단에 속하게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언제든 나도 소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의 틀'을 가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