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위한 독서 모임 -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나의 첫 번째 연습실
김민영 지음 / 노르웨이숲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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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 참여해 볼까 하는 마음이 조금 있긴 했지만 하지 않았다. 모임에서 꼰대 소릴 들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줌으로 하는 독서모임 제안을 받고 특별한 인연도 있고 해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1년간 토론할 책 라인업은 문학 작품으로 짜였다. 문학작품을 워낙에 읽지 않았던 터라 걱정됐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독서모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매달 문학을 읽다 보니 문학의 맛을 알아버렸다. 게다가 아내까지 덩달아 문학에 빠졌으니 더할 나위 없다.


독서모임에 자신이 붙어 모임을 늘려볼까 하던 차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독서 모임을 하라고 어떤 설득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독서 모임을 왜 해?라는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생각'의 차이가 일어납니다. 혼자 읽기란 혼자 생각하기와 같지만, 함께 읽기란 함께 생각하기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더 넓고 깊은 생각으로 가는 길목의 말 하기 연습이 바로 '독서 모임'인 것입니다. (p. 19)'

1장에서는 왜 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을 읽긴 읽었는데 어떻게 정리할지 몰라서 고민된다면 2장에서 도움받을 수 있다. 3장은 잘 듣고 잘 말하는 법을 알려준다. 실생활에도 적용 가능하니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4장에서는 독서 모임에서 곤란한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좀 더 깊고 풍부하게 독서를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다.

'홀로 읽기가 내 방이라면, 함께 읽기는 광장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으로 나가는 첫 번째 문이 바로 독서 모임입니다. (p. 34)'

500여 개 독서 모임을 만들고 진행한 저자의 꿀팁이니 그가 전해주는 경험담 모두 솔깃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이거다 싶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우리 삶은 각양각색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태피스트리 (tapestry)입니다. 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 만든 직물처럼 사건의 종류도 형태도 저마다 다릅니다. 철학자 이진경은 에세이 <삶을 위한 철학 수업>(문학동네, 2013)에서 "우리의 삶은 사건을 통해 크게 구부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pp. 226, 227)'

이야기 속 인물이 변화를 겪게 된 사건을 찾아보고, 독서 모임 이야기 주제를 (내 독서 모임 비타민처럼) 미리 정해 공유한다면 그 주제에 맞는 사건을 미리 메모해 둔다. 이를 바탕으로 독서 모임에서 사건 위주로 말한 다음 내 생각과 느낌을 이어서 말하라고 저자 김민영 작가는 조언한다.


줌 독서 모임을 마치고 나면 아내가 항상 하는 소리가 있다.
'방 밖에서 들으면 당신만 떠드는 것 같아.'
'너무 흥분해서 급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 과거가 떠오른다. 할 말이 많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입술에 달싹거린다. 그래서 꼰대 소릴 들을까 봐 아내는 항상 노심초사한다.

"비타민 멤버 여러부운~ 내 말이 길어진다면 꼭 이런 반응을 보여 주길 부탁해~ 김민영 작가의 꿀팁이야. 그래야 아내한테 더 이상 핀잔을 듣지 않아~"

'네, 네... 아, 네...
네. 잘 들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p. 196)'

오프라인에서 가끔 만나는 책 친구분들도 서슴지 말고 내 말이 길어진다 싶으면...
'어휴 저 꼰대~'라며 속으로 흉보지 말고 꼭 반응해 주시길...

어떻게~ 독서 모임 하나 더 할까?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오면서 저를 지켜준 것들을 꼽으라면 단연 독서 모임과 달리기라고 말합니다. 책이 좋아 시작한 독서 모임과 달리, 달리기는 하기 싫어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p. 4)'

좋아하는 걸 하나 더 하려면 싫어하는 것도 하나 해야하지 싶은데, 싫어하는 것... 뭘 해야 할까? 이것부터 정하고 독서 모임 늘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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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능 우울증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고장 나 버린 사람들
주디스 조셉 지음, 문선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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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34년 몸담았던 나의 직장 생활이 떠올랐다. 퇴직 무렵 섭섭함이 앞서긴 했지만 그럭저럭 아무 문제 없이 직장 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읽어나갈수록 이 책은 내 직장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받은 비난은 수치심으로 변해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진급 때가 되면 나를 평가한 상사들에게 여러 번 배신감을 느꼈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에 힘들었고 어떤 때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프로젝트가 완성됐을 때조차 성취감이라는 기쁨도 제대로 느꼈던 적이 없었다. 나 혼자만 뿌듯해했을 뿐 인정받는데 인색했다. 희생을 마치 절대선처럼 여겼고 자랑삼기도 했다.

과장 시절 동네 사는 임원과 카풀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자동차 검사를 1년 동안 깜박한 그 임원은 그 기간만큼 면허정지 상태가 됐다. 뜻하지 않게 1년간 기사 노릇을 했다. 임원에게 일이 있으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약속 장소까지 동행한 날이 많았다. 직장 동료나 상사들은 임원과 친하게 지내는 나를 부러웠고 했다. 퇴근 후 내 시간이 사라진 걸 눈치 채지 못한 나는 은근히 즐겼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듯 모두를 위해 애쓰지만 정작 자신의 기쁨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 피로감, 무감각, 초조함을 '고기능 우울증 high-functioning depr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명확히 정의한다. (p. 7)'

34년 직장 생활 동안 '고기능 우울증' 상태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연구자인 주디스 조셉은 '고기능 우울증'의 뿌리를 트라우마, 무쾌감증, 마조히즘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말한 내 직장 생활을 살펴보면 이 세 가지가 모두 내게 해당된다.

책 49쪽 '나는 고기능 우울증일까?' 테스트 결과를 보면 내가 '고기능 우울증'을 달고 직장 생활을 했음이 좀 더 명확해진다. 퇴직 후 몇 년 동안 직장 생활 꿈이 악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자는 '고기능 우울증'으로 무너진 자아를 회복하여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존중하고, 모든 관계에서 기쁨을 발견하며, 삶을 즐거움으로 채우는 방법으로 '5V 원칙'을 2부에서 제시한다.

나를 받아들이는 힘 '인정 Validation', 감정 해방의 시작이 될 '환기 Venting', 내 삶의 기준 '가치 Values', 몸과 마음의 신호에 귀 기울이는 '활력 Vitals' 마지막으로 회복의 지도를 그리는 '비전 Vision', 이렇게 다섯 가지 V가 '5V 원칙'이다.


퇴직한지 4년 차인 지금은 직장 생활 악몽이 등장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주디스 조셉이 제시한 과학적 도구 '5V 원칙'을 나도 모르게 실천한 까닭일까?

스트레스의 원인을 곱씹어 본듯하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조금 이기적으로 변했다. 아직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나의 기분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축하하고 축하받는 쑥스러움도 많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제일 힘들었던 건 '자기 인정'이었지 싶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마다 억울했다. 인정하고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그 어리석은 나를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기보다는 그 문제나 생각에서 한 걸음 떨어져 일상생활을 이어가 보라고 권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메타인지 치료 Metacognitive Therapy, MCT의 기본 원리다. 메타인지를 통해 우리는 '자기 생각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훈련할 수 있다. (p. 168)'

'자기 인정'을 하기 시작한 건 책을 읽으면서였다. 책을 통해 메타인지 치료 중이다. 책은 나를 떨어져서 살펴보도록 만든다.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책이 알려준다. 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기억하자. 인생은 한 번에 끝나는 목표가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이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을 것이다. (...) 그 과정을 지치고 힘든 일로만 여기지 말고, 오히려 흥미로운 여정이라고 생각해 보자. 책 앞부분에서 내가 "고기능 우울증을 극복하면 당신의 삶에 어떤 가능성이 열릴까?"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제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과학적 도구와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기를 바란다. (p.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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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력 : 숏폼 커머스 시장을 선점하라 - 숏폼 전도사가 알려주는 숏폼 커머스의 비밀
윤승진 지음 / 이야기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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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발 너무 편하고 좋아" 아내가 르무통을 신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디자인은 영 별론데?라며 마뜩잖게 말해도
"그래도 이만한 신발은 없어. 좋아. 하나 더 사고 싶어."라며 르무통 팬심을 드러낸다.

그다지 트렌트에 민감하지 않은 아내에게 르무통은 어떻게 왔을까? 출발은 숏폼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효철 군은 틱톡에 슬릭백 영상을 올렸다. 슬릭백 챌린지로 이어지면서 이 영상은 2억 뷰를 넘어섰다. 편하고 가벼운 신발이라는 르무통 콘셉트와 효철 군의 슬릭백 영상은 잘 맞아떨어졌다. 마케팅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르무통 효철' 숏폼으로 르무통은 광고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숏폼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시대, 숏폼이 소비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대에 오로지 숏폼만 연구하는 숏폼 전도사 윤승진 대표가 '숏폼 KOC(Key Opinion Consumer)'라는 시장 공략법을 이 책에서 제안한다.

숏폼이라는 메가트렌드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보여주며 왜 'Why' 숏폼 커머스 알아야 하는지, 무엇 'What'을 이해하고 준비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고 실행하기 위해 어떻게 'How' 해야 하는지를 실전 Tip과 Case Study를 곁들여가며 설명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 가운데 숏폼에 대한 오해 중 두 가지를 소개하면, 숏폼 영상이 짧으니 자칫 만들기 쉽고 저렴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숏폼의 본질은 '짧음'이 아니라 '압축'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 하나 숏폼을 광고처럼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다. 광고와 숏폼은 소통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숏폼은 댓글, 좋아요, 공유 등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사용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양방향' 미디어 (p. 127)'이다.


'숏폼은 메가트렌드입니다. 메가트렌드라 함은 특정 산업 영역에 머물지 않고 모든 비즈니스에 숏폼이 활용됨을 의미합니다. (p. 20)'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주류를 바꿔놓는다. 틱톡에서 시작한 숏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시장의 유통 질서를 '숏폼 커머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짰다. AI 기술 덕분이다. AI가 만든 알고리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찾고 있는 물건을 내 앞에 갖다 놓는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 맞지?'

모바일을 만지작거리며 여기저기 들락거리는 사이에 르무통 신발이 아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르무통 효철' 숏폼일지도 모른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다 보니 그 영상에 오래 머물렀을 테고, 어쩌면 '이게 뭐지'하며 클릭해 검색했을 수도 있다. AI 알고리즘이 아내에게 르무통을 더 자주 눈에 띄게 했을 것이다. 르무통을 신어보니 가볍고 편하다는 리뷰를 읽고 난 후 아내는 결심한다. 르무통 신발을 장만하기로...

이제 살 물건 찾아 돌아다니는 시대가 아니다. 숏폼 콘텐츠가 AI 알고리즘이 알려주는 고객의 관심사를 먼저 찾아가 상품을 사도록 부추기는 '관심 커머스(Interest Commerce)'의 시대다. 이게 바로 이미 메가트렌드가 돼버린 숏폼 커머스다. '필요(Needs)보다 '갖고 싶다(Wants)'는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며, 숏폼은 그 충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p. 28)'한다.


저자는 중국 트렌드를 국내에 소개하는 '비즈니스 학습 여행' 콘셉트로 2019년 여행사를 창업하고 잘 운영했지만,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때 기회도 발견했다. 중국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숏폼이 단순히 유행에 그치지 않고 메가트렌드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숏폼 비즈니스로 피봇팅을 결심한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숏폼은 '기회의 평등'을 만들어주었다. 저자가 코로나19로 태어난 숏폼에서 기회를 잡았듯이, 저자가 전해주는 숏폼 커머스 인사이트를 실행에 옮길지 말지... 그 결정만 남았다. 새로운 기술은 주류를 바꿔놓는다. 단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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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2025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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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 31일이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 후 말씀 카드를 뽑는다. 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지만 어쨌든 난 그 성경 말씀을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는 독서대에 놓고 마음으로 읽곤 한다. 올해 뽑은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다.


스물세 살 대학원생 스즈키 유이의 첫 장편소설로 올해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어는 독문학자의 괴테 명언 출처 찾기 여정'이다.

주인공 히로바 도이치는 괴테 연구 일인자다. 도이치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딸이 데려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무심코 집어 든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괴테의 명언을 본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누가 한 말인데?" 아키코가 물었다. 도이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꼬리표만 가리켰다. 그 문장 아래에는 'Goethe'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p. 19)'

괴테를 연구해온 도이치에게 이 글귀가 너무 생소해 괴테가 한 말인지 의심이 들었다. 물론 독일 사람들은 명언을 인용할 때, 누구의 말인지 모르면 '괴테가 말하기를'이라고 덧붙일 정도로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여기지만 말이다. 괴테 전집을 살펴보기도 하고, 알만한 사람들에게 메일로 그 말의 출처를 물어보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명언은 요약한 형태로 퍼지기도 하고, 옛날부터 있었던 글귀를 누군가 계속해서 인용해 전승형 명언으로 남기도 한다. 그리고 하지도 않은 말인데 누군가 그가 한 말이라 지어낸 위작형 명언도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건 루터가 한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도 마찬가 지야. 아무래도 루소의 <고백록>에 나온 일화가 미움받던 왕비와 연결된 듯해. (p. 76)'

도이치는 가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까지 찾아가 아내 아키코가 좋아하는 유튜버 베버 씨로부터 괴테 명언이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가 될 편지를 건네받는다.

'"자, 봐요. 이게 괴테의 편지예요."
베버 씨는 도이치에게 낡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
지난번 꽃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소 특이한 모양이지만 향기는 분명 장미와 비슷하니 참 신기했습니다. 친구에게 보여주자 이런 것도 꽃이냐며 놀라더군요. 하지만 실로 조물주의 사랑은 하나의 꽃에서 모든 꽃을 싹트게 했습니다. 그걸 알면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혼란 없이 뒤섞이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 괴테 (p. 216)'

이 문장을 베버 씨가 "조물주의 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 없이 뒤섞는다"라고 요약했을 테고, 중국인 명언 사이트 운영자가 조물주를 빼고 영어로 옮겼을 것이다. 그것을 미국 티백 회사에서 발견해 티백 꼬리표에 명언으로 실은 듯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하지만 이 편지가 괴테의 친필 편지가 맞는지 의심이 생겼다.

도이치는 티백 꼬리표에서 우연히 발견한 괴테 명언의 출처를 확실하게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승인 장인, 딸, 딸의 남자 친구, 아내 등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가진 다른 모습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그룹 이름 '롯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를로테로부터 비롯됐다. 창업주 신격호 회장은 괴테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우아하고 교양 넘치는 로테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듯, 롯데도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창업회사명에 담았다. 내가 PM으로 진행했던 뮤지컬 전용 극장 '샤롯데씨어터'의 극장 명도 마찬가지로 샤를로테의 이름을 빌렸다.

명언 인용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카피라이터이자 작가 박웅현은 1년에 30~40권 정도의 책밖에 읽지 않는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적게 읽는 편인데도 책을 많이 읽는다는 오해받는데 그 이유는 또박또박 끊어 책을 읽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인용하는 글이 많아서였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라는 프란츠 카프카 말에서 그의 책 <책은 도끼다>라는 카피가 탄생했다.


'도이치는 자신의 말을 결코 끝까지 믿지 못하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 말을 믿어줄 수 있었다. 그 말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설령 좋은 말은 모두 연기라 해도 그 안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연습하며 입에 붙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면 마침내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p. 239)'

나는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신독愼獨'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산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글귀가 괴테의 말이 맞는지 찾는 과정에서 도이치는 수없이 이 글귀를 되뇌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도이치에게 말의 출처보다 그 글의 새로운 의미가 앞섰을 것이다.

한 성경 구절을 내가 뽑음으로써 올 한 해 동안 그 성경 구절은 내게 특별함을 지닌다. 자신이 세운 회사 명에 소설에서 얻은 감명을 얹을 때 괴테의 글은 신격호 회장이 세운 회사의 직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카프카의 명언이 자신이 아끼는 책의 제목으로 탄생하기도 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나처럼 어떤 말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 좌우명으로 삼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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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무아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1
에밀 졸라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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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다.' 빌 게이츠가 한 말이라고 한다. '35살이 될 때까지 가난하다면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건 당신 자신의 탓이다.' 이 말은 마윈이 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성공한 사람인 빌 게이츠, 마윈이 말했다는 것만으로 '맞아~'라고 열광하면서 청년들 사이에 유통된다.

'부자 되세요'와 '노오오오오오력'을 강요하고 세뇌하던 신자유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자란 세대들이다. 이를 신봉하며 자란 청년들은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신세를 부모 탓도 아니고 환경 탓도 시대를 잘못 만난 탓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게으름이나 능력 부족 탓으로 쉽게 돌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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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아소무아르>는 "변두리 지역의 끔찍한 환경 속에서 야기되는 한 노동자 가족의 숙명적인 타락의 이야기이다. (p. 343, 작품 해설)'

제르베즈는 짐승을 도축하는 도살장과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병원 사이 허름한 봉쾨르 여관에서 파리로 함께 온 랑티에를 기다린다. 제르베즈는 한쪽 발을 절었고, 금발에 키가 크고 약간 마른 몸에 선이 고운 얼굴을 가진 스물두 살이었다.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랑티에와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의 엄마다.

랑티에는 에델과 바람이 나서 제르베즈와 두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제르베즈는 함석공 쿠포를 만나 결혼한다. 예쁜 딸 나나도 낳는다. 하지만 불행이 찾아온다. 열심히 번 돈으로 세탁소를 차릴 가게를 알아보는 가운데 쿠포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쿠포를 보살피며 돈을 다 써버린 제르베즈는 자신을 좋아하는 대장장이 이웃 구제에게 돈을 빌려 세탁소를 차린다.

세탁소도 잘 되고 잘 살아가던 중 또다시 불행이 찾아온다. 고주망태가 되어 목이 부러져 죽은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며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구포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콜롱브 영감이 운영하는 주점 아소무아르를 드나들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게다가 여기저기 떠돌다가 다시 나타난 랑티에를 집안에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쿠포와 랑티에는 제르베즈가 벌어온 돈을 뺏어 술과 여자로 탕진하며 제르베즈의 삶의 의욕마저 꺾어버린다. 마침내 제르베즈도 아소무아르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폭식하며 몰락의 길에 들어선다.

제르베즈는 구걸하며 몸을 팔려고 하지만 목이 어깨에 묻힐 정도로 추하고 뚱뚱한 베르베즈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다. 한편 춤을 추고 악을 쓰며 이상 증세를 보이던 쿠포는 제르베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저분의 아버지가 술을 마셨나요?"
"네, 선생님. 그냥 남들하고 똑같이 조금 마셨어요. 술에 취한 날 지붕에서 떨어져서 죽었고요."
"어머니도 마셨나요?"
"그럼요! 선생님. 그냥 남들하고 똑같죠. 아시잖아요. 여기서 한 잔, 또 저기서 한 잔, 그렇게요. 아! 가족들은 아무 문제 없어요. 형제 중 하나가 어릴 때 경련으로 죽은 게 다예요."
의사는 꿰뚫을 것 같은 시선으로 계속 제르베즈를 바라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인도 마시죠?" (...)
부인도 마시는군요. 조심하십시오.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보고 계시잖아요. 언젠가 부인도 죽게 될 겁니다." (p. 322, 아소무아르 2)

이따금 정신이 이상해져 쿠포 흉내를 내던 제르베즈, 굶주림에 어떤 모욕에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되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제르베즈에게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더러운 일을 시켰고, 더러운 걸 먹을 수 있는지 돈을 걸며 시키기까지 했다. 제르베즈는 먹어치웠다. 계단 밑 움막 같은 곳에 살던 브뤼 영감이 죽었고 그 자리는 이제 제르베즈의 차지가 되었다.

'그녀가 정확히 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하지만 사실 제르베즈는 비참한 가난 때문에, 엉망으로 망쳐 버린 삶의 불결함과 고단함 때문에 죽었다. 로리외 부부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그녀는 힘이 다 빠져서 죽었다. 어느 날 아침 복도에서 악취가 나자 사람들은 이틀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골방으로 들어가 보니 제르베즈는 이미 퍼렇게 변해 있었다. (p. 337, 아소무아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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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죽을 때 가난은 모두 너의 잘못'이라 말했던 빌 게이츠조차 자신의 성공을 두고 운이 좋았다고 한다. 원대한 비전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열세 살에 무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다룬 '1만 시간의 법칙'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었고, 정보화 시대가 막 시작되는 1970년 초에 스무 살을 향해가는 나이였다는 건 '시대'를 잘 만난 덕분이었다.

제르베즈와 쿠포의 삶에는 부모가, 환경이 그리고 시대가 그들에게 주는 운은 없었다. 빌 게이츠의 삶과 사뭇 다른 여느 하층민의 삶처럼 말이다. 이 둘은 원래 게으름뱅이로 주정뱅이로 태어나지 않았다. 살면서 어떤 일을 만나면서 그렇게 되었다.

부모가 물려준 가난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부모가 물려준 유전적 유산은 지독하게도 끈질겼다.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었다. 철거 중인 도살장 앞이었다. 건물 정면에 커다란 구멍이 있고, 그 안으로 아직도 피에 젖어 악취가 나는 어두운 안마당이 보였다. 한 걸음 더 내려가니 라리부아지에르 병원의 커다란 회색 벽이 나왔다. (...) 틈 하나 없이 단단한 전나무로 만든 문은 죽은 자들의 문으로, 마치 무덤의 비석처럼 근엄하고 적막했다. 제르베즈는 도망치듯 더 멀리 철로의 육교가 있는 곳까지 갔다. (p. 290, 아소무아르 2)'

다른 삶을 살기 위해 파리에 왔지만 제르베즈를 기다리는 환경은 짐승 같은 삶이 죽어나가는 도살장과 병원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거닐었던 거리도 그 거리였다. 파리에 올 때나 죽을 때나 제르베즈를 둘러싼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제르베즈의 눈에는 이상한 형태의 용기들이 달리고 끝없이 긴 관이 휘감겨 있는 증류기가 왠지 음산한 얼굴처럼 보였다. 증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안에서 뭔가가 숨 쉬는 것 같은 소리, 땅 밑에서 웅웅거리며 코를 고는 듯한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흡사 엄청나게 힘센 일꾼이 말없이, 음울하게, 밤에 할 일을 대낮에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 증류기에서는 소리도 나지 않고 불꽃도 일지 않았다. 구리는 광택 없이 칙칙해 보였다. 느리게, 하지만 고집스레 물을 내보내는 샘처럼 계속 돌아가며 땀을 흘렸고, 그 알코올 땀이 술집 전체를 채우고 바깥 큰길로 흘러나가 마침내 파리라는 거대한 구멍을 다 채워 버릴 것만 같았다. 제르베즈는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바보 같죠. 저 기계를 보니까 괜히 오싹해져요.... " (pp. 70, 71, 아소무아르 1)'

산업 사회 시대를 상징하는 기계마저 음산한 얼굴을 하고 제르베르를 가만두지 않았다. 하층민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몸을 쓰는 노동력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증류 기계는 아소무아르라는 술집 이름처럼 알코올로 사람을 때려눕혔다.

제르베즈와 쿠포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어김없이 '부모가 물려준 굴레'와 하층민에게만 주어진 열악한 '환경',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던 '시대'는 그들에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살만하다 싶을 때마다 불행으로 찾아왔다. 빌 게이츠에게는 적절한 때에 운명처럼 찾아왔던 부모, 환경, 시대란 행운이 제르베즈에게는 불운으로 변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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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꿈꾸던 것들이 기억났다. 마음 편하게 일하고, 먹을 게 있고, 조금 깨끗한 잠자리가 있고, 아이들을 잘 기르고, 매 맞지 않고, 자기 침대에 누워 죽고 싶었는데! 아, 정말 우습구나! 그 모든 소망이 어쩌면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 뭐 그리 대단 한 소원이라고! 3만 프랑의 연금을 받고 싶다든가 사람들이 날 존경해 줬으면 좋겠다든가, 이런 거창한 것도 아닌데! 아! 빌어먹을 인생은 아무리 욕심 없이 살아도 소용이 없구나! (p. 306, 아소무아르 2)'

너무나 비참한 제르베즈의 삶, 읽기 힘든 삶이었다. 깨끗한 잠자리, 아이들을 기르고, 매 맞지 않고, 자기 침대에서 누워죽는, 뭐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낭만이랄 것도 없는 그런 꿈은 끝내 제르베즈에게 허용되지 않은 삶이어서 그래서 차마 눈뜨고 보기조차 힘들어 애써 외면하고 싶게 만드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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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처지를 게으름이나 능력 부족으로 쉽게 돌려버리곤 하는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느 정도는 부모 탓, 환경 탓, 시대 탓을 해도 된다고... 너무 자기 탓만 하지 말라고... 가난이 내 탓만을 아니라고... '부자 되세요'나 '노오오오오오력'이란 프로파간다 쉽게 매몰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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