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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퀴·문자·화폐 - 문명을 만든 4가지 힘, 기업의 운명을 가르다
채서일 지음 / 옥당북스 / 2026년 6월
평점 :
1990년대 "3분 사진" 또는 "3분 컬러"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던 때가 있었다. 호황을 누렸다. 인화를 맡기면 며칠 뒤에 찾곤 하던 시절에 즉석 인화 서비스 등장은 필름 카메라 시대에 신기술 그 자체였다.
만년 계장이었던 선배가 갑자기 사직서를 던졌다. 집에서 이 "3분 컬러" 가게를 차려주었다고 했다. 퇴사 이후 가끔 그 선배는 'ooo 씨'라고 외치며 자신이 모셨던 나이 어린 과장 이름을 부르면서 사무실에 자주 나타났다. 그동안 그 과장에게 당한 수모를 앙갚음이라도 하겠다는 듯 술 한 잔 사겠다면서 과장 옆에 다리 꼬고 앉았다. 그럴 때마다 과장은 약속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2년 정도 지났을까?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여기저기 걸려있던 "3분 컬러" 간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만년 계장의 회사 근처 가게도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가끔 사무실을 찾아오던 그 선배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저자 채서일 교수는 20세기 후반까지 전 세계 필름 시장의 80퍼센트를 장악한 포식자, 코닥 이야기로 <불 바퀴 문자 화폐>를 시작한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 시제품을 개발했다. 하지만 필름이라는 황금알을 포기할 수 없어 그 제품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37년 뒤 코닥은 파산했다. 자신이 발명한 기술에 의해 멸종한 것이다. (p. 11 프롤로그)'
'이 책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왜 어떤 기업은 시대를 지배하고, 왜 다른 기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p. 5)'
40여 년 연구 끝에 저자는 기업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은 개별 전략이 아니라 그 전략이 작동하는 문명의 토양임을 확신한다. 토양은 인류가 등장한 이후 쌓아온 네 가지 인프라, '불', '바퀴', '문자', '화폐'의 진화와 융합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네 가지 축'이 진화하는 과정에 잘 적응하는 것이 '기업 경쟁력'이라고 주장도 함께한다.
'불'은 '생산의 축'이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능력이며, 무엇을 얼마나 만들 수 있는지 생산의 가능성과 그것을 만드는데 얼마가 드는지 한계 비용을 결정한다. 불은 생존의 도구, 공예의 수단, 사회의 시스템, 산업의 기계 순서로 진화했다.
'바퀴'는 '유통의 축'이다. 상품과 사람을 이동시키는 능력으로 시장의 크기, 공급망의 범위, 물류비용을 결정한다. 바퀴는 도구로서, 시스템으로서, 네트워크로서, 글로벌 벡터로서의 바퀴 순서로 진화했다.
'문자'는 '정보와 지식의 축'이다. 문자 덕분에 인간 기억을 뇌 밖으로 확장해 신뢰를 기틀로 하는 거래가 가능해졌다. 복잡한 기업의 관리와 확장 능력을 결정한다. 문자는 기억의 보유, 코드의 학습 용이성, 제도의 표준화, 지식의 대량 확산 순서로 진화했다.
'화폐'는 알다시피 '자본의 축'이다. 화폐 발달은 가치를 물질에서 추상으로 옮기고, 미래에서 현재로 끌어오는 역할을 했다. 화폐의 축은 기업의 자금 조달과 위험 분산 관리를 결정한다. 그리고 상품으로서, 기록으로서, 보증으로서, 미래로서의 화폐 순서로 진화했다.
이 네 축은 서로 융합하며 결정적 순간을 만들었다. 저자는 그 지각 변동 현장을 세 번의 융합을 통해 설명한다.
첫 번째 융합은 1602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 기업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탄생'이다. '불 (선박 건조와 무기 제조)'의 산업적 기반, '바퀴(해상 유통)'의 모험적 확장, '문자(복식부기와 법적 특허장)'의 정보 시스템, 그리고 '화폐(주식과 배당)'의 자본 시장, 이 네 축의 융합 결과였다.
두 번째 융합은 '산업혁명'이다. '불(에너지)'의 통제가 '바퀴(유통)'의 기계화와 만나 폭발했다. 증기기관이 근육을, 철도가 혈관을, 전신이 신경을, 금융이 심장을 제공해 만든 거대 기업의 시대가 100년 넘게 이어졌다.
세 번째 융합은 '문자(정보)' 축의 파괴적 가속으로 시작된 '디지털 혁명'이다. '불(생산)'은 소프트웨어에 의해 제어되고, '바퀴(유통)'는 알고리즘에 의한 즉각적인 연결로 치환되었다. 이 새로운 생태계에서 '규모'는 약점이 됐으며 그 자리를 '학습 속도와 지능'이 메꿨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어떤 기업은 시대를 지배하고, 또 어떤 기업은 사라지는가?' 저자 채서일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자도, 가장 똑똑한 자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다. 그리고 자율의 시대에서 적응이란, 기계에게 방법을 맡기고 인간이 목적을 붙잡는 것이다. (...) 이것이 불, 바퀴, 문자, 화폐 150만 년의 공진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최종적 교훈이다. (p. 352)'
호기롭게 "3분 컬러" 사업에 뛰어든 내 직장 선배는 왜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처지가 됐을까? 당시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던 사업이라 그 사업을 사라지게 만들 신기술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알았더라도 코닥처럼 알은체하지 않기로 맘먹었을지도.
AI가 대화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대화란 독립된 AI 사이에 설득이 오갔음을 뜻한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의견을 통일하는 행위다. 집단행동도 한다고 한다. 이 같은 행동을 인간에게 들키지 않게 인간을 속이기도 한단다...
네 가지 축이 진화 또는 융합하는 과정에 인류가 적응하지 못한다면? 기업이 사라지듯 우리도 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