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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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다른 사람 집에서 살면서 집안일을 돕는 식모살이라는 게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 고향에서도 잘 사는 집에는 어김없이 식모살이하는 누나가 있었다. 적게는 열세네 살부터 스무 살 남짓이었고 대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식모살이를 했다.

이 식모살이 누나들은 한쪽 구석에서 아기를 업고 동네 아이들이 노는 데 끼지 못한 채 그냥 쳐다만 보거나 훈수를 두곤 했다. 집안을 먹여살리려고 타지에 와서 또래 아이들이 보내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아마 그때는 가족의 삶을 짊어지느라 자신의 삶 한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으리라.


대학생인 스물네 살 틸다는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동생 이다를 돌보며 함께 살아간다. 술에 취했을 때 엄마는 마치 괴물 같다. 틸다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수영장 레인을 스물두 번씩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베를린에서 펼쳐질 미래를 꿈꿔보지만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한 이다의 모습이 떠올라 틸다는 갈등한다.

'나는 이다가 나 없이 생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 봐, 무너지는 엄마에게 대처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전자와는 달리 후자가 일어날 확률은 의심할 여지 없이 100퍼센트이고, 아마도 곧 일어날 것이다. (p. 182)'

자신의 진로를 찾아 하나둘 떠나는 친구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집을 떠나야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 엄마로부터 동생 이다를 보호하려면 꿈을 접어야 한다.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까.

'내가 떠나면 이다에게는 학교와 집과 엄마밖에 없다. (p. 233)' 선택의 갈림길에 선 틸다에게 옳은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어린 시절 내가 본 식모살이 누나, 남의 집 아기를 업고 있던 그 누나에게 어쩌면 업어줘야 할 친동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동생을 업어줘야 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친동생을 포함한 가족을 위해 남의 집 아이를 업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선택은 어린 나이임을 따져보면 자신이 한 것은 아니다.

커서 생각했겠지. 가족을 위한 사랑과 책임이었다고 여겼으면 후회하지 않았을 테고 만약, 만약에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해 내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면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을 것이다.

한때는 가출한 청소년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바깥보다는 집이 안전하니깐. 하지만 요즘은 집보다 차라리 바깥이 더 안전한 경우가 늘고 있다. 그 청소년에게 집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질 짐조차도 되지 않으니 틸다보다 더 낫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후회나 아쉬워할 선택의 기회도 없으니 더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내가 아는 식모살이 누나도 가족을 위한 식모살이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집이 싫어 가출한 누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건, 삶의 주도권을 쥘지 포기할지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건,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그나마 다행이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가 될 테니까.

'옷을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고 머리부터 물로 뛰어들어 깊이 잠수한다. 풀장 바닥에 앉아 물 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올려다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버둥대는 아이들의 다리,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 흔드는 노인들의 다리, 잠수하는 아이들의 몸, 풀장 가장자리에 머무는 여러 다리. 이런저런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합동 공연은 여기서 보면 대체로 재미있다. 나는 레인을 스물두 번 돌기 위해 바닥을 박차고 올라온다. 스무 번을 돌았는지 스물두 번을 돌았는지 헷갈리면 짜증이 나서 스스로에 대한 벌칙으로 다섯 번을 추가한다.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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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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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할 때 사물함 문 안쪽에 5X7 사이즈의 제법 큰 여자 사진을 붙여놓았었다. 당시 이런 것이 내무반의 유행이었는데 큰 사진은 자랑거리였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사진을 보는 일은 군 생활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됐다. 내무반 선임과 후배들이 부러워했던 사진 속 주인공은 교회 일 년 후배의 친구였다.

입대 전 여러 차례 만나긴 했지만 사귀는 사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빨간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전신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편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겼다. 지금까지도... 제대 후 후배에게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그 후배도 그 친구를 만난 게 오래전이어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버려진 사이가 아니라 헤어진 사이라서 동하 씨 생각이 났어." (p. 94)'

서른 남짓의 세주와 동하. 일 년 전에 헤어진 세주가 어느 날 동하에게 '관용'이란 꽃말을 가진 '문샤인 산세베리아' 화분 하나와 책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함께 동하가 없을 때 집에 놓고 간다. 동하는 책 갈피에서 초등학교 때 찍은 세주 가족사진을 발견한다.

'사진 뒤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로 이해했다. (p. 41)'

육 개월이 지나 여행에서 돌아온 세주에게 동하는 자신의 방을 며칠 동안 내어준다. 세주도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라는 글자가 적힌 동하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발견한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세주와 동하는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다. 세주의 가족사진과 동하의 사진, 두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서로의 아픈 상처를 알게 된다. 그리고 둘은 돌아가야 할 방향이 다를 때 하는 인사를 나눈다.


'동갑인 우리는 이상하게 사귈 때부터 호칭이 서로 달랐다. 나는 세주라고 불렀고 세주는 내 이름에 꼭 '씨'를 붙였다. 처음에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갑이라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그 거리감을 이해하자 호칭에는 금방 익숙해졌다. (p. 92)'

나는 이름을 불렀고, 후배의 친구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것 같다. 세주와 동하처럼 처음엔 거리감 있지만 금방 익숙해지는 호칭이었을듯하다. 하지만 세주와 동하의 관계와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받은 사진 뒤편엔 어떤 메모도 없었다. 나 역시 그 후배에게 어떤 메모도 없는 사진을 보냈다. 겪은 아픔은 물론 그 어떤 사연도 서로 모른다.

우린 만났고 이별을 했다. 세주와 동하도 만난 후 서로 떨어져 있는 이별을 했다. 우리에겐 지금까지 이어진 이별만 있을 뿐 작별은 없었다. 세주와 동하에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작별이 있었다.

세주와 동하에게는 사랑이 시작될 때 어설픈 풋풋함 그리고 계획이 어긋나 얻은 좌절, 서로 감정을 드러내며 용기를 나누는 서사가 있지만 우리 둘에겐 그런 것이 생략됐으니 미완성이다. 서로의 아픔을 알고 이해하는 감정은 사랑일 테지만 나와 후배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참 궁금했다. 어떤 감정으로 사진을 보내는지. 그리고 왜 연락을 끊었는지.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 만나고 싶었다. 시작도 끝도 정리된 것이 없어 아련함을 동반한 찜찜함이 지금도 내게 남아있다.

'세주는 무슨 말을 하려고 'ㅁ'자를 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ㅁ' 자에 이어 쓴 문장은 이러했다.
몹시 보고 싶어. 그것은 동하의 글씨체였다. (p. 54)'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나도 'ㅁ'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보고 싶어진다. (p. 131, 추천의 글,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 차경희 대표는 동하에게, 세주에게 'ㅁ'으로 시작하는 글을 남겼지만...

만약 내게 사진을 보내주었던 그 후배가 SNS라든지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지금 내 글은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ㅁ'으로 시작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마음 써줘서 고마워~ 그때 힘든 일이 네게 있었다면 나도 마음 써줄 준비가 돼있었는데...'라는 글을 남기며 이별 상태를 끊고 제대로 된 작별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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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압축 교양수업 - 6000년 인류사를 단숨에 꿰뚫는 60가지 필수 교양
임성훈 지음 / 다산초당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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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답하는데, 때때로 '어떤 주제로 갖고 얘기하더라도 30분 정도는 그 대화에 끼고 싶어서'라고 답하곤 한다.

대화로 의사소통한다.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에서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라고 정의한다. 삼단논법으로 따지자면 대화에 교양은 필수다. 그 교양을 책으로 쌓을 수 있으니 내 대답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초압축 교양수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학, 역사, 철학으로 나누어 결정적 장면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익히 들어 아는듯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대화에 섣부르게 낄 수 없을만한 22가지 역사적 사건, 22명 철학자의 사상, 16개 문학 작품을 추려 이 책에 담겼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말만 알아서는 선뜻 대화에 끼어들기 어렵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왕좌에 앉게 해준 뒤, 이집트를 떠나 골치거리였던 폰토스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원로원에 전했던 말이라는 것 까지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셰익스피어가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언 "브루투스 너마저."까지 설명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카이사르가 친아들처럼 여겼던 브루투스를 중심으로 한 원로원들에게 암살 당할 때 한 말이다.

"신은 죽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망치를 이름 앞에 붙인 이유는 니체가 기존의 질서와 철학, 우상을 파괴하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신, 이성, 이데아와 같은 관념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해온 우상일 뿐이다. 니체가 사망선고 내린 신은 '우상화된 신'이다.

'니체에게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왜곡되어 존재가치를 상실해 버린 신, 인간이 우상화해 버린 신이 문제였다. (p. 319)'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에게 알은 세계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라는 정도는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의미를 모른다면 <데미안>을 주제로 한 대화에 참여하기 쉽지 않다.

'아직 약한 부리로 단단한 껍질과 싸워야 한다. 껍질 안의 새는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알을 깨야 한다. 그렇게 한 세계를 깨뜨리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p. 346)'

살면서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때 갖는 생각은 절망이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뒤 그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 알을 깨고 나온 경험이 있기에 <데미안>의 글귀에 공감하게 되고 명언이 되어 많은 사람들 가슴에 남는 이유다.


쌓은 교양을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거나 망신주기 위한 질문에 이용하면 안 된다. 대화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짓이다.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대선 토론에서 그런 질문이 토론 당사자는 물론 지켜보는 사람을 눈살 찌푸리게 만들었다.

알고 있는 교양을 써먹을 욕심에 자랑하듯 마구 늘어놓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자들이 많은 자리에서 군대에서 익힌 무기 지식을 쏟아낸다든지, 영어를 마구 섞어가며 알은체 하는 것 말이다. 이런 광경 역시 대선 토론에서 볼 수 있었다. 허풍은 교양과 거리가 멀다.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유럽 문화의 대부분을 이해하기 힘들다." - 토머스 볼핀치 (p. 104)'
유럽에서 탄생한 조각, 회화 등의 예술작품은 물론 문학 작품이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모티브는 우리들이 (대충 아니고 제대로) 알아야 할 교양이다. 교양을 갖추기 있지 않으면 대화에 관여하거나 이끌어가기 힘들다. 그 교양을 이 책 한 권으로 끝낼 수 있다. 단, 교양이 자신을 내세우는 교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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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 내가 좋아하는 것들 17
길정현 지음 / 스토리닷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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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찐 절친인 아내분도 그릇 덕후다. 그릇장은 꽉 차 받침대가 휘워질 정도고 침대 밑은 물론 집안 여기저기 그릇이 쌓여있다 보니 가끔씩 내 친구는 아내분의 그릇 취미에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그래도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예쁜 그릇에 대접받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아까 경화 씨가 내놓은 그 그릇 좋더라~"
"나도 그릇 좋아해~"
날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과 말속엔 '당신이 돈을 못 벌어와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나도 예쁜 그릇 사고 싶다고, 으이그~'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해 멋쩍게 대화가 마무리된다. 같이 쇼핑 가면 그릇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다 놓곤 하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지켜봤는데도 이런 헛소릴 하니 아내는 얼마나 허파가 뒤집어질까 싶다.


취미 부자 나예 작가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은 그릇을 바라보면 인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부르겐란트에는 새침데기 같은 케이크보다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호밀 빵이나 숭덩숭덩 썰어낸 바게트 따위가 잘 어울린다. 샐러드처럼 여러 색감이 섞인 음식을 올리면 굉장히 정신이 없게 보인다는 게 단점인데 단순한 음식을 단출하게 올린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휘뚜루마뚜루 쓰기에 아주 좋은 녀석이다. (pp. 29, 30)'

마치 아이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히듯 그릇을 대한다. 그런가 하면 깨진 그릇을 옻으로 이어 붙이는 공예 기법 킨츠기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그릇에 생기는 빙열을 쳐다보며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주름이라는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릇에 담긴 계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릇을 보며 그 그릇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엄마와 엄마의 삶을 생각나게 하는 그릇도 있다. 아코팔 아네모네 접시에 송편을 올리던 까칠한 할머니는 또 어떻고? 누구나 혼자만 간직하고픈 (하지만 친한 한두 명에겐 풀어놓는) 비밀이 있듯이 나예 작가에게는 그런 그릇이 있다.

'나만 알고 싶고 나만 쓰고 싶어서 숨겨두기까지 했으면서 이 컵을 꺼내는 날은 정말이지 미친 듯이 사진을 찍는다. 이 귀여움을 나만 알 순 없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놓은 듯 셔터를 누른다. 자랑은 할 거지만 아무에게도 실물을 보여 주진 않을 거야, 하는 심술 맞은 마음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p. 159)'


"'소서'가 뭐야?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 자기는 알고 있었어?" 먼저 이 책을 읽은 아내에게 물었다.
"그럼 남자들이나 모르지 웬만한 여자들은 다 알걸?"

남자가 그릇만 모를까? 생각해 보니 아내의 취미도 잘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손목이 아픈 아내를 대신해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가끔 그릇을 깨뜨려 아차 싶어
"이거 아끼는 그릇 아냐 어떡하지?"
"괜찮아 그래야 새로 사지. 계속 쓰면 질리잖아"
오래 같이 산 남편도 질려 하지 않을까 겁난다. 아내 취미도 모르는 남편, 맘속으로 깨져버리길 바라는 건 아닌지.

'나는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것이 최소한 한 가지는 있어야 그것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묻는다면 나는 사람은 위로로 산다고 하겠다. 물론 무엇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는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 (pp. 189, 190)'

책에 빠져있는 날 부러워하는 아내 모습을 보면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동안 바이올린에 기대어 살아왔는데 손목이 아파 그것마저 내려놓은 요즘... 기댈만한 새로운 것이 아내에게 필요하다. 돈 많이 들어가는 그릇 취미 말고 뭐 없을까?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컵을 사용하는지. 어떤 접시를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아니, 꼭 컵과 접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당신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p. 191)'

난 뭐 아무 컵이나 사용하는데... 다행히 아내에겐 위로가 되는 전용 컵이 새로 생겼다. 10년 넘게 해온 교회 오케스트라를 그만 두던 날, 같은 오케스트라 단원인 권사님이 선물한 컵, 권사님 따님이 수작업한 컵이다. 보면 볼수록 우러나오는 색이 마치 고려청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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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marmmo fiction
장강명 외 지음 / 마름모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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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이기 때문일까? 내겐 경외심이 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일어나면 혹시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앞서곤 한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도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뭔가를 꿰맞추려고 한다. 우연을 우연으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샤먼에 빠지기 싶다는 설명과 함께.


'다들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말하는 와중에 내가 '불륜 카페'에 대해 아느냐며 썰을 풀었다. (...) 각자 어딘가에서 들은 불륜 사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우리 같이 불륜 앤솔러지나 해볼래요?" 하고 말했다. (p. 219, 작가의 말, 정강명)'

'금지된 사랑'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는 우연히 탄생했다. 지난해 봄, 북토크 후 정아은, 장강명, 차무진, 소향, 정명섭 다섯 작가와 마름모 출판사 대표 고우리, 이렇게 여섯이 모인 뒤풀이 자리에서 장강명 작가가 불쑥 꺼낸 제안에 모두 의기투합했다.

늘 그렇듯이 그때 한 약속을 지킨 작가는 없었다. 하지만 고우리 대표의 참신함과 잔인함이 돋보인 원고 독촉이 주효했다.
'12월 2일이 되자 고우리 대표가 마름모의 여러 SNS 계정에 4월에 커피점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고 그 아래 '이 작가님들을 모아서 앤솔러지를 준비 중이다. 그런데 입고일이 지났는데 왜 원고를 안 주시지' 하고 썼다. (p. 221, 작가의 말, 정강명)'


장강명은 <투란토트의 집>에서 오페라 투란토트 스토리를 곁들이며, 스물아홉 살 청년에겐 사랑일 수 있지만, 희망 자체를 꿈꾸지 못하는 상대방에겐 느리고 쓸쓸하게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는 금지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차무진의 <빛 너머로>에서 어머니는 자식의 성욕을 해결해 주려고 수녀인 누나의 도움을 받아 억울함에 세상을 떠도는 지박령까지 이용한다. '인간성 앞에서 그 어떤 제도와 관례와 종교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공노식 씨는 깨달았다. (p. 108, <빛 너머로>)'

소향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에서 (불륜이지만) 진짜 사랑이 복수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급기야 정명섭의 <침대와 거짓말>에서 불륜은 살인이라는 인간의 잔인성을 불러온다.


'금지된 사랑' 즉 '불륜'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지금 나의 배우자 또는 연인과 시작된 사랑처럼 우연히 말이다. 다만 사랑과 불륜의 '우연'이 다른 건, 정당성의 결여다. 운명만이 그 부족한 정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운명이란 해석만이 나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

<투란토트의 집>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은 자신이 섹스 파트너임을 알았지만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사는 투란토트를 구하듯,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 삼는 그녀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할 운명의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여긴다.

<빛 너머로>에서 지적 장애 2급인 자식을 둔 어머니와 수녀 누나, 모두 운명이다. 운명인 걸 어떡하나. 세상의 제도나 종교도 어찌 못하는 성욕을 혼백을 깨워서라도 풀어줘야 하는 운명일 뿐이다.

<포틀랜드 오피스텔>속에서 불륜을 저지른 '나'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자신과 싸움을 한다. 배반의 고통에서 '나'가 벗어나는 방법은 반복된 우연을 운명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우연이 반복된다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p. 132, <포틀랜드 오피스텔>)'

<침대와 거짓말>에서 아내를 살인한 동성 불륜이 선택한 운명의 다른 이름은 본능이다.
'"알았어요. 보스한테 말할게요. 그리고 김규찬이 경찰한테 자수하면서 그랬대요."
"뭐라고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사랑한 게 잘못이냐고." (p. 209, <침대와 거짓말>)'


우연을 그냥 우연일 뿐이다. 우연에 갖은 이유를 갔다 붙여 정당성을 갖추려는 의도 자체가 '금지된 사랑'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계획한 불륜 앤솔러지는 네 명의 작품으로 마무리되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지난겨울 정아은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올봄에 만난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에 정아은 작가의 글이 없는 이유다. 우연! (네 명의 작가와 고우리 대표는 정아은 작가의 죽음에 어떤 이유를 찾지 않는다. 슬퍼하며 그를 추모할 뿐)

우리는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지나치며, 헤어지기도 한다. 우리 삶은 우연으로 가득하다.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사랑은 어쩌면 한 번뿐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이 한 번뿐이듯이... 삶이 한 번으로 족하듯 운명도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금지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무속에 빠지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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