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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읽는 그림 - 수천 년 세계사를 담은 기록의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12월
평점 :
이동진 평론가는 서양사를 연표로 정리하는 자리에서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1789년 프랑스대혁명 두 사건을 꼭 알아둬야 할 연도로 꼽았다. 연도로 역사를 바라볼 때 좋은점은 동시대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건 연도를 외우면서 시험공부할 때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다.
역사와 미술사, 현대미술을 공부한 김신지 작가의 <시간을 읽는 그림>은 역사를 담은 '기록화'를 중심으로 펼치는 세계사다. 최초 문명의 시간부터 중세,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삶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새의 날개로 역사의 큰 강을 따라가면서, 곤충의 더듬이로 강가의 풀잎과 그 위의 이슬방울까지 느껴 보고자 한다. 여러 분야를 폭넓게 보는 것과, 작은 부분을 세밀히 관찰하는 것은 서로 보완적이다. (p. 9)'
앞서 말했던 연도를 꼭 외워야 할 만큼 중요한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그림은 어떻게 압축해 담아놓았을까?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어떻게 역사를 읽어나갈 수 있을까.
대략 14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르네상스는 지적 활기와 탐구 정신으로 새로운 대륙과 해로를 탐색하는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유럽과 아메리카라는 두 대륙을 이었다. 그 결과 유럽인은 부와 번영의 기회를 얻었지만 아메리카 민족 앞에는 수탈과 억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럽은 문명, 아메리카는 야만'이라는 시각이 필요했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은 아즈텍의 인신공회라는 폭력적인 관습을 동원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잔혹성을 두드러지게 기록했다. 대표적 기록물로 <플로렌스 코덱스>, <코덱스 마글리아베키아노> 등이 있다.
또한 두 대륙이 맞닿으면서 이른바 '콜럼버스 교환 (Columbian Exchange)'이라는 '먹거리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에는 감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의 일상이 표현되어 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대표적인 작물 가운데 옥수수와 함께 감자는 기근에 시달리는 서민의 식단을 해결하는 작물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약 4천 년 전부터 메소아메리카 원주민이 재배하고 채취했던 카카오도 유럽에 전해졌다.
'16세기 아메리카에 도착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이 즐기던 카카오를 유럽에 가져갔다. 유럽인은 쓴맛의 카카오 음료에 설탕이나 꿀, 계피를 넣어 맛을 냈다. (...) 1657년, 런던에는 최초의 초콜릿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이 값비싼 이국적 음료는 상류 사회에서 유행했고, 초콜릿하우스는 부유층의 만남의 장소로 번성했다. (pp. 200, 201)'
프랑스 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1789년을 기점으로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이르는 10년에 걸친 역사적 과정이다. 세계사를 다시 쓰게 만든 프랑스 혁명을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기록했다. 다비드나 들라크루아는 위대한 빛으로 묘사했지만, 다른 화가들은 폭력과 광기로 이 시대를 그리기도 했다.
'찰스 디킨스는 그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프랑스 혁명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그는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과 혁명에 수반된 폭력과 혼란을 동시에 언급하며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가장 좋은 시기였고, 최악의 시기였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시대였고, 불신의 시대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p. 221)'
프랑스 혁명은 식탁의 민주화도 이뤄냈다. 정치적 평등이 맛의 평등으로 이어졌다. 귀족의 몰락은 귀족 개인 요리사의 일자리까지 없애버리는 결과를 빚어냈다. 대신 이들은 레스토랑을 열어 뛰어난 요리 솜씨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덕분에 귀족들만 즐기던 미식의 세계를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됐다. 시작은 프랑스 최초의 레스토랑으로 여기는 수프 판매상 A. 블랑제의 '부용' 레스토랑이었다. 19세기 뒤발 부자는 이 레스토랑에서 대중적 음식을 판매함으로써 '부용 뒤발'이라는 체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끈 이야기는 '달러 공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달러 공주'들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미국의 부유층 가문이 딸을 재정난에 빠진 유럽 귀족과 결혼시켜 사회적 지위를 얻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결합을 통해 유럽 귀족은 몰락을 피할 자금을 확보했고, 미국의 신흥 자본가는 유럽 상류 사회로의 입장권과 귀족 작위라는 상징 자산을 손에 넣었다. (pp. 339, 340)'
일제강점기 하와이 이민 1세대 한국 남자들과 사진을 교환한 다음, 결혼하여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을 가리켜 '사진 신부'라고 했다. '달러 공주' 가운데 널리 알려진 콘수엘로 밴더빌트와 레이디 랜돌프 처칠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사진 신부가 떠올랐다. 왤까?
미국 철도 재벌 밴더빌트 가문의 딸 콘수엘로는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와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었지만 무시당한 채 강요로 이뤄진 결혼이었다. 윈스턴 처칠의 엄마 레이디 랜돌프 처칠 역시 부유한 금융가 집안 출신이었지만 사랑 없는 불행한 결혼을 했다.
'사진 신부'와 '달러 공주'를 연관짓게 된 나의 생각은 이 둘 모두 시대적 산물이 낳은 결혼이란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사진 신부들 가운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등지고 머나먼 이국 땅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테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던 1492년 조선은 성종 시대로 경국대전이 완성된 해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조선의 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했다.
머리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역사를 연표로 살펴볼 때 매력은 역사적 시간의 동시성을 보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림으로 보는 역사는?
'기록화 속에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 슬프거나 추한 이야기 등 인간의 모든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 기록화는 과거의 삶에 관한 것은 물론,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준다. 정치적 사건, 전쟁, 위대한 과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보여 주지만,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도 드러낸다. 우리는 그 시절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땠는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도구와 기술을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p.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