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여인의 선물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해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무료 교통카드를 받으면서 '내가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길다는 사실 (p. 58)'을 실감했다. 아니 살아갈 날이 더 많으려나? ㅎㅎ 그렇더라도 반가움보다 쓸쓸함이 앞선다.

스콧 니어링이 100세가 된 1983년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그의 자서전에서 알게 된 다음 '나도 그렇게 해볼까?'라는 마음을 먹어봤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이유는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음에도 조력사를 긍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영화 <기차의 꿈>으로 알게 된 데니스 존슨의 소설집 <바다 여인의 선물>에는 그가 간암과 싸우면서 병상에서 완성한 다섯 편의 짧은 소설이 담겨있다. 결국 이 소설집은 그가 죽음으로서 유작이 됐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면서 '그 무엇도 건드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라는 쪽지도 함께 건넸다고 알려졌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억해 낸 과거에 대한 회상에 그 어떤 꾸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이 메모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 삶을 미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라본다면 기이할 것이다. 한 인생을 기리는 데는 필히 장식물이 동원된 단장이 필요한 법이다.

그 무엇도 건드리지 않아서인지 다섯 편 속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대단치 않다.

표제작 <바다 여인의 선물>에서 노년의 광고 작가는 지난날을 회상한다. 조각조각 떠오른 과거는 맥락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 참회의 대상마저 헷갈려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잘못이 무엇인지 갑자기 알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작별 인사를 위해 전화를 걸어, 나로 하여금 진심으로 참회하며 식탁 옆에 털썩 무릎 꿇게 만든 이 여자가 버지니아인지 제니퍼인지 알 수 없었다. (p. 23)'

<아이다호의 별빛>의 알코올중독자는 재활 시설에서 아버지, 누이, 연인 심지어 사탄, 교황... 등에게 횡설수설 편지를 쓴다. 망가진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빛을 찾아 헤매는듯하다.

<교살자 밥>에서 열여덟 살 딩크는 아내를 죽인 혐의를 받고 수감된 밥을 감방에서 만난다. 환각상태에서 딩크는 밥에게서 살인자가 될 것이란 예언을 듣는다. 허튼소리로 여긴 그 말이 딩크의 인생에서 실현되고 만다.

<무덤 위의 승리>의 화자는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리곤 자신이 죽은 후의 세상을 생각한다.

'아… 몇 주 전에 마린 카운티에 사는 내 친구 낸, 그러니까 죽은 로버트의 아내 낸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글을 읽을 무렵에는 어떨지 모른다. (p. 203)'

<도플갱어, 폴터가이스트>에 등장하는 시인 마커스 에이헌은 도플갱어와 폴터가이스트라는 초자연 현상에 빠져있다. 그런 집착의 결과는 우리 아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가짜라는 생각이 이르게 한다. 이 음모론을 증명하려고 한밤중에 삽을 들 뿐만 아니라 수천 달러의 돈도 서슴지 않고 쓴다.


단편집을 읽고 난 다음, 언제 어떻게 죽을까라는 생각에 이어 죽음을 앞둔 나는 어떤 회상을 할까? 상상해 봤다.

내 과거 역시 파편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게 그 사람이었나? 헷갈리기도 한다. <바다 여인의 선물> 속 광고 작가와 다르지 않다. <아이다호의 별빛>의 알코올중독자처럼 내 삶의 망가진 부분을 그 어떤 존재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서 고쳐놓고 싶은 욕망도 내 맘속에 있다.

죽음에 초연하다가 요즘 삶에 미련이 조금 생겼다.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삶이 궁금해져서이다. <무덤 위의 승리> 화자의 생각처럼 내가 죽은 다음에도 세상은 잘 돌아가겠지. 모두들 잘 살겠지. 그래도 궁금하다.

<교살자 밥>의 딩크, <도플갱어, 폴터가이스트>의 시인처럼 허황된 상념에 사로잡혀 공허한 내 삶의 한 부분을 메워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데니스 존슨은 죽음에 이르러 '산다는 게 기이한 여행을 견디는 일'이라고 여긴듯 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졌을 듯도 하고.

죽음을 앞두고 말이다. 내게도 데니스 존슨처럼 삶을 회상할 정신이 허락되는 축복이 따른다면... 데니스 존스과 같은 고민에 빠져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족에게 털어놓게 될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판본 데미안 -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이순학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이나 행동이 어른스럽지 않고 어린아이 같을 때 '유치幼稚하다'고들 말한다. 아이들 세계에 속한 아이들도 그렇게 느낄까? 그 세계 나름 그 아이들에게는 완벽한 세계다. 그 세계를 지나고 나서 보니 유치할 뿐이다.
.

'그곳에 두 세계가 얽혀 있었다. 세계의 양쪽 끝에서부터 나온 밤과 낮이. (p. 9)' 열 살 싱클레어가 사는 집에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었다.

밝은 세계에 살던 싱클레어는 어느 날 크로머를 만난다. 그로 인해 생긴 두려움 때문에 사과를 훔쳤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어둠의 세계를 알게 된다. 괴로워하던 중 데미안을 만나 카인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진실을 깨닫고 크로머가 속한 세계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해 학교 선배인 알폰스 벡을 만나면서 이번엔 싱클레어 스스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가 그 자신 안에 있었던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가 싱클레어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어둠의 세계를 멀게 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기게 만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 104)'

데미안이 보내온 쪽지 속 '아브락사스', 피스토리우스와 만남으로 아브락사스는 신이자 악마이고,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뿐아니라, 어떤 생각도 어떤 꿈도 제외하지 않는 신임을 알게 된다.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는데, 그 조그마한 사진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 꿈속의 모습이었다! 내 꿈에 나오는 얼굴이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얼굴이었다. (p. 152)'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인 끝에 싱클레어 안에 존재하던 여인, 에바 부인을 만났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가 싱클레어 앞에 놓여있었다. 전쟁이 발발했다.
.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시도하는 길이자, 좁고 긴 길이다. 지금껏 누구도 완전하고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나 그 길의 끝까지 가려고 애쓴다. (p. 8)'

유치했던 나는 삶이 내게 주는 과제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사력을 다해 풀어내려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여전히 남았다. 싱클레어가 만난 크로머, 데미안, 알폰스 벡,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그리고 금욕에 괴로워하는 크나우어, 에바 부인까지... 내게도 깨달음과 도움을 주는 이들 모두는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

칼 융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나(Self)'를 이루는 '자아(Ego)'이다. 에고는 페르소나와 셀프를 분리해서 보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궁극에 아브락사스의 세계로까지 나를 인도하는 존재도 자아이다.
.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쳤다. 알은 이 세계고, 이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p. 191)'

내가 깨뜨려야 할 세계도 있지만, 인생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내 알을 깨부셔 나를 새로운 세계에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유럽이 경험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처럼 말이다.

전쟁은 신이 살아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고, 과학이라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기대마저 허물어버렸다. 합리적이라 여겼던 세계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치한 세계가 되버렸다. 숙명이 지배했던 세계에서 나의 의지로 살아가야 하는 세계로 발을 옮기게 만든건 누구의 계획에도 없었던 전쟁이었다. 그런 면에서 <데미안>은 개인의 성장 서사이면서 인류 성장의 서사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지 않은 세계라고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던져진 상태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 힘은 질문에서 나온다. '카인은 정말 악일까?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 자체가 죄악일까?'

'"... 그래서 카인 자손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정반대로 설명한 거야. '표식을 지닌 자들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표식을 지닌 자들은 불길해서'라고 말이야. 사실 틀린 말도 아니야.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니까. 두려움 없는 강한 족속들이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니 얼마나 무섭겠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나날들을 보상받으려고 그럴듯한 별명과 전설을 붙여서 복수한 거야. 내 말, 이해하겠니?" (p. 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농축 디자인 스토리 - 공간의 문화적 디테일을 읽는 다섯 레슨 박진배 뉴욕 FIT 교수의 ‘공간’ 시리즈
박진배 지음 / 효형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전목마(merry-go-round 또는 carousel)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놀이기구다. 롯데월드 정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앞에 화려한 전구와 거울, 금빛 컬러로 장식된 회전목마가 빙빙 돌고 있다. 회전목마는 롯데월드 아니 전 세계 테마파크의 오브제 역할을 한다.

회전목마는 목마를 탄 사람은 물론,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까지 바꿔놓는 마법을 부린다. 모두 밝게 웃는다. 기회가 되면 꼭 살펴보길 바란다. 웃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대부분 손을 흔든다. 지켜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진배 교수의 <고농축 디자인 스토리>는 <공간미식가>, <공간력 수업>에 이은 '공간'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이 책에서는 공간의 진화와 그 속에 담긴 서사를 중심으로 5개 주제를 다룬다.

건물을 보수할 때 미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는 비계를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같은 명품 하우스는 그들을 상징하는 디자인 이미지로 통째로 포장해 공간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주제인 자연과 교감을 통해 만들어낸 공간으로 저자는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꼽는다. 나무, 물고기, 새, 너구리는 각종 야생이 살고 있는 곳으로 150년 동안 수많은 도시공원의 모델이 됐다.

어떤 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라이터, 세계 2억 명이 갖고 있는 지포 Zippo는 세 번째 주제, 디자인과 브랜딩으로 팬덤 형성 비결을 가진 사례로 소개된다.

오브제 스토리로 앞서 이야기 나눈 회전목마 외에 책의 서사가 눈에 들어온다. 책의 기능으로서 책의 삶, 그리고 책이 각색을 통해 연극, 영화와 같은 다른 형식으로 작품이 되는 삶, 여기에 세 번째 삶이 추가된다.

'장식품 기능이다. 1970년대 가정집 거실마다 전시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필두로 1990년대부터는 도서관 테마가 크게 유행,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무대나 상업공간을 꾸미는 디자이너들은 연극의 세트, 패션 부티크, 호텔, 레스토랑, 심지어는 술을 마시는 바도 책으로 장식한다. 책이 쌓인 공간의 지적 분위기가 그럴듯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p. 262)'

다섯 번째 주제, 도시에 예술적 요소를 더해 주는 공공디자인에 관해서는 마천루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시그램 빌딩은 뉴욕 최초의 마천루다. 38층 높이에 브론즈 프레임과 갈색 유리로 조화를 이룬 이 빌딩이 현재 뉴욕 빌딩 숲을 이룬 효시인 셈이다.

전엔 63빌딩이었지만, 지금 서울의 상징이 된 롯데타워는 123층에 555미터 높이로 수직 도시라 할만하다.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쇼핑하는 등 모든 게 가능하니 말이다.

고인이 된 롯데 신격호 회장의 꿈은 하루라도 좋으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서울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 꿈은 여러 사정으로 지연돼 이뤄내지 못했다. 또 하나, 타워 모습을 파리 에펠탑 형태로 했으면 했다. 하지만 이 꿈도 붓이 타워 외관 디자인으로 결정돼 물거품이 됐다. 서울을 대표할 마천루가 에펠탑을 베낀 거라니, 우리 정서가 동의하지 못한 결과다.

마지막 주제는 이제까지와 조금 다른 이야기로 AI 시대의 교육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강의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라이브 공연을 통한 학생들과의 소통이다. 지식은 책에도 있고 인터넷에도 수두룩하다. 실시간 대면 강의는 생각보다 강력한 상상력과 전달력을 지니고 있다. 평생 잊히지 않는 좋은 강의는 그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함께한다. 교수가 강단에 오르는 것은 배우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과 같다. (p. 339)'

AI는 절대 할 수 없는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란 생각도 들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가정법원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이명숙.이서원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 일이다. 전세살이 할 때 집주인 사정으로 1년도 안 돼 뒤 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어느 날 퇴근하면서 먼저 살던 동으로 습관적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아차 싶었다. 문을 열고 누구라도 나오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계단으로 뛰어내려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앞에 아내가 서있었다.
"자기, 앞 동엔 왜 갔어? 거기 만나는 여자 있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멈칫했다. 때마침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불륜 사건이 뉴스로 나오던 때였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 허겁지겁 앞 동에서 빠져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놀려줄 작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미리 나와 서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작심하고 계속 날 의심했다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를 활동하는 이명숙 변호사가 36년 넘게 접한 실제 법정 사례 가운데 43개를 뽑아 가족심리상담가 이서원 교수와 함께 들여다본 이야기가 <오늘도 가정법원에서 인생을 배웁니다>에 담겨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들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법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하한선을 규정한 공식이라면, 상담은 상한선을 끌어올려 주는 인생 공식이다. 이 책은 하나의 소송 사건을 '권리와 책임이라는 변호사의 시선'을 통해 하한선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예의와 태도라는 상담가의 시선'을 통해 어떻게 하면 상한선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p. 8 프롤로그)'

불륜을 감추려고 아이들을 결혼시켜 사돈이 되면서까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는 사건은 불륜의 끝판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이룬 가정 뒤에 돈이라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을 때 그 사랑이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사건도 소개됐다.

'이 사건을 겪으며 나는 생각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가? (p. 124)'

가족폭력을 키우는 건 포기하고 침묵하는 '학습된 무력감'이다. '아이들 때문에 참는다'라고들 말하며 이혼을 망설이지만, 그 인내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이 아니다. 아이들을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남편이 돈벌이를 위해 아내에게 성매매를 시키는 사건은 남자로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은 대기업 승진을 앞두고 세 아이가 있는 돌싱 남자를 받아들인 안민지 씨 사레다. 아이들은 친자식처럼 키우려고 불임 수술까지 했다. 미국에서 세 아이 유학 뒷바라지까지 하며 15년 동안 헌신했지만, 안민지 씨는 자녀 교육을 핑계로 남편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간 나쁜 아내가 돼버렸다. 남편이 재산까지 빼돌리며 이혼을 준비해 안민지 씨에게 남은 건 미국의 월셋집뿐이었다. 안민지 씨를 더 뼈아프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세 아이가 '새어머니가 우리를 학대했다'라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법은 이혼과 위자료라는 형태로 책임을 물을뿐 부부 또는 가족이 오랫동안 쌓아온 사연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법적으로 해결되더라고 상처는 남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라 더 아프고 깊다.

배우자와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그 가족 구성원을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 가정을 깨질 수밖에 없다. 신뢰가 자리 잡을 수 없다. 착각해서 앞 동에 갔다 오는 사소한 일을 아내가 불신의 눈으로 바라봤다면, 우리 가정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혼은 천천히 신중하게, 이혼을 재빠르게.' 한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절연을 매정하게 여기는 정서가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침묵과 인내가 더 문제를 키우고 상처를 깊게 만든다. 끝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법의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삶의 길이 시작된다. 온전한 인생이란 법의 길과 삶의 길이 함께할 때 시작될 수 있다. (p. 7 프롤로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평선 너머
벤자민 마이어스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북스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내를 만났고, 그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삶은 부부라는, 이전과 다른 풍경이었다. 이렇듯 아내와 맺은 관계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삶은 어디로 간 걸까? (p. 15)'

작가로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로버트 애플야드는 열여섯 살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막 끝난 1946년, 영국 탄광촌 더럼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광부의 삶을 살았다. 언젠가 로버트 역시 광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삶 이전에 탄광 마을 너머 바깥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소년 로버트는 알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하루하루 일하고 그 대가로 끼니를 때우며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노스요크셔 로빈 후드 베이 오솔길에 들어선 로버트는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람 덜시 파이퍼를 만난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이의 노부인, 지식은 많아 보이지만 거침없이 말하는 덜시와 로버트는 진솔한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던 중 오두막 옆 낡은 창고를 손봐주던 로버트는 로미 란다우라는 시인의 이름과 <앞바다 The Offing>라는 제목이 적힌 원고 뭉치를 발견한다.


아내 맺은 관계로 내 삶의 풍경이 달라졌듯이, 덜시 파이퍼 그리고 로미 란다우의 시와 관계를 맺은 로버트 애플야드의 삶 역시 다른 풍경을 맞이한다.


덜시와 로버트의 관계는 갈등 속에 파묻힌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에게 화해의 실마리를 준다. 부모 세대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청년, 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줘야 할까.

'"운전을 못 한다니?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 진짜 아예 못 해요."
"진짜 운전이라는 걸 하는 사람도 있니?"
"음, 네."
"로버트, 솔직히 말이다. 200미터 남짓 떨어져 있고, 완전 내리막길이잖니.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바퀴가 그냥 알아서 구르게 놔두면 돼. 아주 쉽잖아. 네가 할 일은 완만한 모퉁이 몇 군데서 핸들을 조금 틀고, 가끔 경적을 울리는 것뿐이야. 아 참, 그리고 필요할 때 브레이크를 밟고." (p. 239)'

앞으로 닥칠 미래에 로버트는 겁먹었다. 덜시는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로버트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로버트와 다투려 하지 않고 끝없는 관대를 베푼다. 그 관대함이 그다음 그다음으로 이어지도록.

'"아직도 왜 이렇게 저에게 관대하게 베풀어주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덜시."
"말했잖아. 그게 내가 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아마 언젠가는 너도 그렇게 될 거야." (pp. 326, 327)'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그 분쟁을 통과한 이들의 기억 속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전쟁 후유증을 겪는 상황에서 로버트는 독일에 대해 적의로 가득 차 있다. 덜시는 독일 출신 시인 란다우와 맺은 관계를 이야기해 주며 그녀의 시를 로버트에게 권한다.

저자 벤자민 마이어스는 1976년 생으로 영국 더럼에서 태어나 그곳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설 속 주인공 로버트와 닮았다.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글은 운율에 서정을 갖춘 시처럼 다가온다.

저자는 1912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후, 시집을 발표해 명성을 쌓았고, 로빈 후드 베이 근처 바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로미 란다우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 속으로 데려온다.

소설 속 덜시는 '천사처럼 찰나에 밝게 타오르며 글을 쓴 다음, 자신의 민족이 파괴한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끝장내길 택한 비운의 독일인 시인 (p. 324)' 란다우를 로버트에 앞에 데려다 놓고 독일인과 화해를 그리고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 결국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건 몇 개 안 돼. 자유, 그리고 자유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 시, 어쩌면 좋은 와인 한 잔, 맛난 식사, 자연, 운이 좋으면 사랑을 얻을 수도 있겠지. 그게 전부야. 독일인을 전부 미워하진 마. 그들 대부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거든." (p. 62)'


탄광촌을 떠나온 소년은 친절한 어른을 만나 세상을 다른 풍경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시를 만나 미움은 버리고 사랑을 취한다. 그렇게 다른 풍경에서 자라 어른이 된 로버트 애플야드는 '"... 삶에 시가 부족해서." (p. 147)' 잘못된 이들을 위해 시를 쓴다.

우리 아이들이 발견한 '<앞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밀려가 저 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p. 302)' 그리고 노년을 앞둔 나는 퇴직한 다음 책을 만났고, 책 속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으며 요즘 또 다른 풍경으로 옮겨와 살아가고 있다.

"또 다른 풍경 속 삶은, 또 언제 시작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