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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의 문화사 - 사물의 생김새로 읽는 인간과 문명 이야기
서경욱 지음 / 한길사 / 2026년 1월
평점 :
잠실에 있는 테마파크 설계 당시 어느 것 못지않게 신경 쓴 것이 어트랙션 대기공간이었다. 인기가 많은 어트랙션의 경우 기다리는 시간 긴 만큼 신경 쓸 것이 더 많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해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동 동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든다든지, 대기공간 곳곳에 볼거리를 배치하는 등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를 총집합 곳이 대기공간이다. 뒤돌아보니 사물 형태의 다양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셈이다.
서경욱 교수의 <형태의 문화사>는 '우리 몸을 포함한 주변 사물의 형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다. (p. 8, 프롤로그)'
주변을 살펴보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귀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볼품없어서 '저건 왜 저렇게 만들었지?'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새도 있다.
맨홀 뚜껑이 둥근 이유는 알다시피 직경이 일정하여 어떻게 올려놓더라고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서리가 없어 아무리 무거운 철이라도 굴릴 수 있으니 옮기기도 편하다. 처음엔 세모나 네모 모양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거쳐 둥근 형태가 안전과 효율 측면에서 가장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과학과 문화라는 두 개의 큰 틀 안에서 사물의 형태를 설명한다. 과학적 틀을 통해 발생학적 원인을 보여주었고, 문화적 틀을 통해 그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서 다양한 학문과 이론을 소개하고자 했다. (p. 12)'
몸의 형태 가운데 얼굴은 눈, 코, 입의 형태가 만드는 무한한 세계다. 옛날부터 타인의 표정을 읽는 것은 인류에게 생존 문제였다. 우리 뇌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눈과 눈가 근육을 먼저 살펴 표정을 읽는다. 그래서 눈이 없으면 표정 읽는 것이 어렵다. 군대 조교들이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가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또한 눈, 코, 입이 똑바로 배열됐을 때 표정을 읽을 수 있도록 진화해, 누워있거나 물구나무 서 있는 경우 표정 파악에 애를 먹는다.
세상의 형태 중 집은 한 집단이 신체적 학습과정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강력한 매개체다. 우리 주거 형태 변화에서 나타난 '낮은 바닥 = 더러움 = 외부 = 신발'이라는 상징체계가 아파트에서 신발을 신어야 하는 화장실, 발코니, 현관과 같은 낮은 공간으로 이어진다.
문화 형태 측면에서 사물은 첫인상으로 오래 기억된다. 기업에서 남보다 먼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쿼티 배열의 자판이 어느 정도 불편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키보드 배열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선점 효과 때문이다.
우리 몸과 주변의 사물 형태를 잘 살펴보면, 인류가 자연의 형태를 관찰하고 그 특징을 활용해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그 형태에 우리 몸을 길들였다. 이제 곧 가전을 시작으로 모든 사물의 형태를 인공지능이 만들어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삶을 통해 인류가 얻은 지혜가 배제된 채 AI가 관여한 사물의 형태는 다수에게 초점을 맞춘 표준 형태일 여지가 크다. AI는 표준이 아닌 몸과 삶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꿈, 환상, 신화, 예술, 종교와 같은 물질 너머의 가치가 있다. (p. 408, 에필로그)'
물질 너머의 가치를 지키려면 과학과 함께 문화적 시각에서 사물의 형태를 바라봐야 한다. 저자가 사물의 형태를 과학과 문화라는 두 개의 틀로 설명한 이유다.
어트랙션 대기공간을 만들 때마다 느낀 건, 다양한 사람이 오는 곳이니만큼 배려를 담아야 좋은 공간이 탄생한다는 점이었다. 어른 중심이 아니라 어린아이, 장애인, 노인... 개인을 보살피는 배려가 담긴 공간. 그래서 더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