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단어들 - 삶의 장면마다 발견하는 순우리말 목록
신효원 지음 / 생각지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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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문턱에 다다랐다. 이제 곧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릴 듣게 된다. 우리말 표현에 '바삭하다'라는 말만 있을까? 그럴 리가. 감각으로 느끼는 게 제각각인 우리다. 듣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보삭하다', '보사삭하다', '포삭하다'가 그것이다. 가볍게 부스러지는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잘 마른 나뭇잎 밟는 소리를 나타낸 말 '버석하다'도 있다. (p. 44)'

우리만이 가진 감각과 감정을 알려주는 우리말이,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말이 빛을 잃어간다. 그 낱말을 줄곧 사용하며 닦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감각과 감정을 무심코 지나쳐왔다. 내비치지도 못한 체 말이다.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기에 힘쓰는 신효원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말을 나직하게 우물거렸다고 한다. '동글동글'이라고 입안에서 굴리니 마음이 둥그레졌고, '콩콩'을 읽으니 정말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걸 느꼈다.

웅얼거려보면서 작가가 찾아낸 숨어 있던 750여 개 순우리말 낱말들, 그 말에 저자의 사랑을 더해 <우리가 사랑한 단어들>에 담아냈다.

소리를 내는 낱말이 있다. '왜글대다', 된 밥알이 입안에서 '왜글왜글' 소리를 내며 데구루루 구르는 듯하다. 바람이 꽃을 피우듯 만들어낸 하얀 기운을 뜻하는 '바람꽃'이란 말은 아름다움 풍광을 자아낸다. '운김'이란 말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전해지는 따뜻함이 녹아있다.

'달콤하다' 보다 조금 여린 맛을 표현하고 싶다면 '달곰하다'를 쓰면 된다. 염려가 되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잔다는 뜻의 '사로잠'에서 왠지 모를 조바심이 느껴진다. 소리 내지 않는 웃음인 '볼웃음'에는 발그레한 양 볼에 즐거움을 한 입 가득 물은 아기의 웃는 표정이 보인다.

'큰 소리로 울면 속이라도 시원해질 텐데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시원하게 울지 못하고 울음을 참으며 흐느끼듯 울 때는 '늘키다'를 쓴다. 겉으로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울어야 할 때도 있다. 이렇게 속으로 우는 울음을 두고 '속울음'이라고 한다. 누구에게 들킬까 작은 소리로 우는 울음을 '잔울음', 울 힘조차 남지 않아 목이 잠긴 채 우는 울음을 '목울음'이라고 한다. (p. 168)'

죽기 살기로 어떤 일에 힘쓸 때 쓰는 '죽살이치다'란 말에는 목숨 건 애씀이, '소마소마하다'에는 초조함이 느껴진다. 듣기만 해도 재밌는 말도 있다. '실뚱머룩하다', 아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먹거리를 사줬을 때 아이의 반응이다. 귀여운 심술이 낱말에 묻어난다.

신효원 작가 좋아하는 순우리말은 뭘까. 마음의 본바탕을 뜻하는 '마음자리', 온전하게라는 뜻의 '소롯이' 그밖에 '돋되다', '내풀로', '또바기' 등을 꼽았다.


쉬운 우리말을 쓰는 걸 무식하다고 여기거나,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우리말 쓰기를 꺼려 한다. '앞으로 움직임을 잘 살피겠다'라고 하면 될 걸 '미래 동향을 예의주시하겠다'라고, '오랫동안 일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될 걸 '장시간 근로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말버릇은 상대방을 움츠러들게 하려는 짓이다. 스스로 전문가라는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심하다. 자신들만 알아듣는 일방통행인 말, 언어를 홀로 차지해서 지식을, 기술을 혼자만 누리려는 속셈이다.

그런데 이 책에 소개되는 우리말 대부분도 일방통행이긴 마찬가지다. 우리 감각이나 감정을 우리말처럼 잘 드러낼 말이 있을까? 우리와 같이 오랫동안 지내온 말이니 우리말은 곧 우리 자신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못 알아듣는다.

나부터 하나하나 꺼내서 써봐야겠다. 우리만의 감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내 마음을 살짝살짝 건드려주는 우리말을 말이다. 여러 말 필요 없이 서로 감정을 보여주고 볼 수 있은 우리말, 사라질까 두렵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은 앞당길 수 있도록 '욱걸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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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역사 1955 2025 - 시민과 더불어 써 내려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
박혁 지음 / 들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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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세와 간접세가 있다. 어느 세금을 높여야 할까? 국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까? 소극적 개입을 해야 할까. 개인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 맞을까? 제한하는 것이 맞을까. 사업가나 투자자와 임금 노동자 가운데 어느 쪽 이익을 우선해야 할까. 일자리 확대와 소득격차를 줄이는 것 중 어느 쪽에 힘을 실어야 할까. 차등적 분배와 균등적 분배 가운데 경제적인 면에서 어느 쪽이 정의에 가깝다고 생각하나.


민주연구원 연구원으로 일하는 박혁 정치학 박사의 <민주당의 역사 1955 2025>는 올해 창당 70주년을 맞이한 민주당 이야기다. 역사라고 하니 시간순으로 배열했을 것 같지만, 이 책은 탄생, 분열, 통합, 수난, 저항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민주당 역사를 펼쳐놓는다.

이승만 쿠데타부터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한 민주당 창당까지를 '탄생의 순간'에, 4.19혁명 후 신구파 분열부터 2015년 새정치연합 분열에 이르는 부끄러운 순간을 '분열의 순간'에, 1965년 민중당 창당부터 더불어민주당 출범까지를 '통합의 순간'에,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부터 지난해 1월 이재명 대표 테러까지, 모진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민주당이 보여준 용기와 끈기를 '수난의 순간'에, 1958년 보안법 파동부터 지난해 12월 윤석열 내란까지, 시민들과 같이 저항한 민주화 역사를 '저항의 순간'에 담았다.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해 태어난 나로서는 이승만 독재 정권 시절이 희미했다. 그런 이유로 이승만의 친위 쿠데타, 사사오입 등을 자세히 살펴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이승만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는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 내게 좋은 이미지로 각인됐었다. 그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리기까지 삼십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독재자였다는 걸 알아버리는 바람에 좋은 이미지가 이승만보다 빨리 깨지긴 했지만)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고, 오후 6시 국기 하강식과 함께 애국가가 울리면 가던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내게 유신헌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제도는 마냥 좋은 것이었다. 박정희는 어질고 인자하고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저항 끝에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는데,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민주계열은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도 진보 지지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김대중, 노무현에 이어 진보 대통령을 이어나가야 된다는 바람이었지만, 그때 역시 민주계열 분열이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주는 빌미가 되었다. 뼈아프게도 그 이듬해 노무현까지 잃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은 1952년 이승만의 친위 쿠데타에 이어 우리 헌정 사상 두 번째 친위 쿠데타를 벌였다. 박근혜를 탄핵한 '촛불 혁명'이 있었다면 이번엔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빛의 혁명'이 있었다. 철부지라 여겼던 청년들이 앞장서 윤석열을 탄핵했다. 국회는 국민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떨쳐 일어나 국헌을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 국민의 위대함과 슬기로움에 대한민국 국회는 감사하며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표합니다. (p. 576)'

민주당이 이재명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국회의장을, 당 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부침이 있었지만 지지자들은 정치 효능감을 맛보았다. 그 결과 민주당은 당원 중심의 당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뜨거운 가슴과 무거운 어깨로 민주당은 창당 70주년을 맞았다. 사람 나이 칠십을 흔히 종심(從心)이라고 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가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나이. 민주당의 70년도, 탄생하던 순간 품었던 그 마음을 따라 걸어온 시간이었다. (p. 582 나오며)'


첫머리에 말한 두 가지 선택 가운데 앞에 것을 더 많이 선택했다면 보수 성향이, 뒤에 것에 더 많이 고개를 끄덕였다면 진보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60대 중반인 내 나이를 감안하곤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내 경우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보수 성향이 강했고 나이가 들수록 진보적 이념에 더 가치를 두는 편이다.

독재 타도를 외친 20대를 지나 직장인이 되면서 정치와 소원해졌다.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라는 이명박의 신자유주의 프로파간다에 매몰됐었다. 박근혜의 탄핵과 함께 정신 차리고 정치 뉴스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민주당 문재인 정권 시절, 안심하고 다시 정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사용자 측에 서야 하는 위치이다 보니 더더욱 정치와 무관심한 척했다.

설마설마하다가 윤석열이 대통령이 됐을 때, 나는 정년퇴직 후 무직자로 첫해를 맞이했다. 앞으로 5년이 암담했다. 내 나이 또래 대통령치고는 너무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아들아이의 극우화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이십 대 후반의 아들은 (아빠와 다투기 싫어 내색은 안 하지만) 민주당을 싫어하는 듯하다. 오빠보다 한 살 어린 딸아이는 오빠와 반대편에 서 있다. 자신의 정치적 욕심만 챙기는 정치꾼의 남녀 갈라 치기가 내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앞으로 민주당의 숙제는 청년들을 품는 것이다. 특히 20대 남자아이들을 말이다. 더 이상 상대적 박탈감으로 소외감을 갖지 않도록, 더 이상 극우화되지 않도록, 부모를 잘못 만나 가진 것도 없는 아이가 더 이상 재벌 걱정을 하지 않도록 말이다.

정치적 이념을 같이하는 집단이 정당이다. 정당이 정권을 획득하려는 목적은 그 정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 정당은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유권자들은 투표한다. 투표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당을 택하는 행위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라는 방향성을 선택하는 것, 다시 말해 미래 세계의 선택을 의미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민주당이 좀 더 그 아이들에게 친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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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읽는 세계사 - 하트♥의 기원부터 우주로 띄운 러브 레터까지 1만 년 역사에 새겨진 기묘한 사랑의 흔적들 테마로 읽는 역사 10
에드워드 브룩 히칭 지음, 신솔잎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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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가장 오래된 입맞춤인 기원전 9000년경 아인 샤크리 연인상부터 남편과 아내의 결투 풍습, 하트의 기원, 데이팅 앱이라는 공개 구혼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관한 풍성한 이야기의 구상은 곁땀에 젖은 사과 조각에 얽힌 풍습에서 비롯됐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지방에 살던 여성들은 겨드랑이 사이에 사과 조각을 끼운 채 춤을 춘 다음, 땀에 흠뻑 젖은 사과 조각을 자신에게 결혼을 청한 남자에게 내민다. 호감이 있다면 남자는 기뻐하며 그 사과 조각을 먹는다. 사랑 이야기,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험난함을 예고한다.


사랑이란? 사랑은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을까? 이제까지 인류는 어떤 사랑을 해왔을까? 기상천외한 역사책을 주로 쓰는 에드워드 브륵 히칭의 <사랑으로 읽는 세계사>는 50가지 유물을 살펴보며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사연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2, 3세기경 <카마수트라>에서 이 책을 쓴 인도 철학자 바트야야나는 돈이나 제물을 위해 남성을 이용하는 데 불편해하지 말라고 여성에게 조언한다. 쓸모없는 남성을 떼어놓는 방법으로 "입술을 비틀며 비웃음을 보이고" "쿵쿵대며 걷고" "무시하는" 등의 행위도 소개해 놓았다.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불행한 부부들은 아내를 내다 파는 괴이한 관습을 택할 수 있었다. 아내를 사람들 앞에 세워두고 장점을 소개하며 공개 경매했다. 뭐 이런 일이 있나 싶지만, 웃음을 짓게 하는 해피엔딩 반전이 있다.

'괴이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여러 자료를 보면 이 관행은 실로 부부 모두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낙찰자'는 보통 아내의 연인일 때가 많았기에 다들 자유를 얻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셈이었다. ( p. 138)'

에도 막부 시설엔 춘화가 인기 절정이었다. 정부는 춘화를 금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춘화의 인기를 사그라들게 만든 건 에로틱한 사진술의 등장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면 둘은 더 불타오르지 않던가. 다른 연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더 현명할지도.

사랑하는 이의 심장, 치아 그리고 머리카락을 장신구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부채로 은밀한 감정을 전달하기도 했다. 사랑은 밀어로 속살일 때 에로틱하다.

'여성이 손가락으로 부채 끝을 만지면 '당신과 대화하고 싶다'는 뜻이고, 부채를 빙그르르 돌리면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경고, 한쪽 뺨에 가져다 대면 '사랑한다',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얼굴 앞에 두면 '나를 따라오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p. 281)'

기괴하고 충격적인 곁땀 사과 조각 이야기로 러브스토리를 시작했지만, 이 책의 마지막 스토리를 감동이다. 지구를 떠나 태양계를 지나가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과 아내 앤 드루얀이다. 둘은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싣고 갈 골든 레코드에 담을 음악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통화했다. 통화가 끝날 즈음에 드루얀은 칼 세이건에게 청혼했다.

'두 사람이 통화하고 이틀 후, 여전히 흥분에 들떠 있던 드루얀은 뉴욕의 벨뷰 병원에서 뇌전도를 녹음했다. "사랑에 푹 빠진 스물일곱 살 여성으로서 제 감정이 그 레코드에 담겨 있어요. 영원한 기록이죠. 적어도 향후 1억 년 동안은요. 제게 보이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지울 만큼 대단히 강렬한 기쁨을 주는 존재예요." (p. 318)'


내 사랑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그 사랑을 그리워하고 싶어서, 당신들이 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물론 그 사랑이 궁금하기도 하다. 사랑, 참 어렵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 잘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멈출 수가 없다. 사랑을 상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멈출 수 없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랑은 자연이 제공하고, 상상력이 수를 놓는 캔버스"다. 이 책은 그 예술의 캔버스 위에 수놓인 인류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들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p. 6, 추천사, 정우철 도슨트)'

1만 년 역사에 수놓은 사랑 이야기, 1만 년을 이어갈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 우리의 사랑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계속해서 우주탐사선에 실릴 사랑 이야기는 태양계를 넘어 끝없는 우주로,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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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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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잘못이 없고 나에게도 없지만 세상과 소통할 때 비로소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가장 부조리한 집단은 군대였다. 회사보다 더했다. 80년 초반에 군 생활은 지금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부조리가 심했다. 군 생활 일상이 부조리였다. 간부들은 쌀과 부식, 기름 등을 빼네 팔아먹었다. 명령 대부분은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었다.

졸병 때 작업 나가기 위해 타고 갈 트럭을 기다리며 서 있었더니 지나가던 선임이 니들 뭐 하냐며 차가 올 때까지 쪼그려뛰기를 시켰다. 사단장이 오는 길에 바큇자국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빗자루질을 했다. 사단장은 헬기 타고 왔다. 군대 부조리는 밤새 이야기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회사도 만만찮다. 승진하려면 실력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사히 제대하려면,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면 침묵하거나 부조리를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부조리를 인정해야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첫 문장)'

<이방인>은 이 첫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첫 문장에 소설 모두를 담았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낸다. 이웃 레몽과 별장에 놀러 갔고 거기서 또 만난 아랍인을 총으로 죽인다. 이 사건으로 뫼르소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카뮈는 <이방인>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p. 5 작가 서문)'

타는듯한 태양, 이마가 지근거렸다. 뜨거움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숨결을 실어 왔다. 불의 비가 쏟아지는듯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꽉 움켜잡았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우발적 살인이었다.

뫼르소는 묻는 말에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냈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지 않았을 뿐이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이 볼 때 뫼르소는 그들과 동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살인을 했는데도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판이란 사회적 시선은 뫼르소의 살인 행위보다 사람을 평가했다. 그 결과 우발적 살인은 계획적 살인으로 바뀐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 낯선 사람 '이방인'이 되는 사회다. 그 사회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실재하는 것을 말하고, 그의 느낌을 숨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사회는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p. 6 작가 서문)'


어차피 죽는 데 왜 살까? 죽음은 삶의 의미를 없애버린다. 어떤 가치가 나은 것이고 못한 것인지 죽음 앞에서는 그 기준마저 의미 없다. 이런 맥락에서 죽음만큼 부조리한 건 없다. 부조리한 죽음마저 애써 모른 체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 기대어 다음 생의 구원을 소망하며 살 텐가.

'잠시 후에, 그녀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슬퍼 보였다. (pp. 56, 57)'

뫼르소의 삶은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을 때 뫼르소는 죽음을 피하지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죽음을 받아들인다.

뫼르소가 이끌어 온 삶 내내 부조리했다. '그것이 내게 뭐가 문제인가? 다른 이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의 하느님이 내게 문제라고 여긴 것, 우리가 선택한 삶, 우리가 고른 운명, 단지 하나의 운명은 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에, (p. 157)'

모두 죽는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수도 있다. 억울하게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돼서 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삶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부조리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올려놓은들 죽음처럼 어차피 바위는 굴러떨어질 텐데. 살아가는 것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살해야 하나? 바위 올리기를 그만둬야 하나? 신이 주신 삶인데? 신이 내린 형벌인데?

뫼르소처럼 부조리한 삶과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를 가둬둔 것들에서 벗어나 보란 듯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죽지만, 굴러떨어지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런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 반항해야 한다.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영웅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이방인>을 읽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카뮈가 한 말이다. (p. 11, 역자의 말)'


그 뭣 같은 군 생활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거나 탈영했을지도 모른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시시때때로 바뀌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정년퇴직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내가 찾은 의미가 뭔지 모르겠지만 시시할 것 같다고?

<이방인>을 읽은 나의 대답은 '시시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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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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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가 꾼 악몽은 다니던 직장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분했다. 성실했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했으며 나름 실적을 개선하기도 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퇴직해야 했나. 억울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풀어냈다.

'샤랭통에서 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걸었다.... (p. 6)'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사라져 버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파란만장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누이동생마저 없었다.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아내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좋지 않은 일은 겪은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파리의 작은방을 얻었다. 보금자리로 여기며 은행 경비원을 살아온 조나단, 연말에 8천 프랑만 내면 그 방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p. 14)'

출근하려고 방문을 연 조나단은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공포를 느낀다. 조나단은 그날 끔찍한 하루를 겪게 된다. 30년 동안 흐트러짐 없던 그만의 경비원을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거지의 태평스러운 인생을 보니 화가 났고 질투가 일었다. 공원 벤치 나사에 걸려 바지마저 찢어졌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다. 세상을 나에게 왜 이러는가. 50대 남자의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p. 90)'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조나단은 내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천둥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p. 105)'


그래도 그 직장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아이들 학비를 보탰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한 덕에 쥐꼬리만하지만 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조나단이 공원에서 만난 거지처럼 남들이 자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지도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 줄 서거나 눈치 보면서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지나온 삶을 억울해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없지 싶다.

고작 비둘기에 놀라자빠져 악몽을 꾸는 셈이다. 그 비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수고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면 내게 다가올 가족, 친구도 있다. 하찮은 비둘기 따위에 왜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이 무너질까. 소유하려는 집착이 원인이다.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선 조나단 노엘은 빗물 웅덩이 한가운데서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찾아 철벅거렸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 있는 로카르 부인의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뒤 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p. 108)'

조나단이 어릴 때처럼 웅덩이 물을 철벅거리며 자유를 누리듯,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생각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내가 다니던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조나단이 자살할까 봐 마음 졸이며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조나단이 복도에 다다랐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도,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회사가 나오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퇴직 후 억울함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소중한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서.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너를 방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 (p. 19)'

비둘기는 또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갓 새에 지나지 않은 비둘기일 뿐이다. 곧 날아가 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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