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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 ㅣ marmmo fiction
장강명 외 지음 / 마름모 / 2025년 4월
평점 :
모태신앙이기 때문일까? 내겐 경외심이 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일어나면 혹시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앞서곤 한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도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뭔가를 꿰맞추려고 한다. 우연을 우연으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샤먼에 빠지기 싶다는 설명과 함께.
'다들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말하는 와중에 내가 '불륜 카페'에 대해 아느냐며 썰을 풀었다. (...) 각자 어딘가에서 들은 불륜 사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우리 같이 불륜 앤솔러지나 해볼래요?" 하고 말했다. (p. 219, 작가의 말, 정강명)'
'금지된 사랑'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는 우연히 탄생했다. 지난해 봄, 북토크 후 정아은, 장강명, 차무진, 소향, 정명섭 다섯 작가와 마름모 출판사 대표 고우리, 이렇게 여섯이 모인 뒤풀이 자리에서 장강명 작가가 불쑥 꺼낸 제안에 모두 의기투합했다.
늘 그렇듯이 그때 한 약속을 지킨 작가는 없었다. 하지만 고우리 대표의 참신함과 잔인함이 돋보인 원고 독촉이 주효했다.
'12월 2일이 되자 고우리 대표가 마름모의 여러 SNS 계정에 4월에 커피점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고 그 아래 '이 작가님들을 모아서 앤솔러지를 준비 중이다. 그런데 입고일이 지났는데 왜 원고를 안 주시지' 하고 썼다. (p. 221, 작가의 말, 정강명)'
장강명은 <투란토트의 집>에서 오페라 투란토트 스토리를 곁들이며, 스물아홉 살 청년에겐 사랑일 수 있지만, 희망 자체를 꿈꾸지 못하는 상대방에겐 느리고 쓸쓸하게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는 금지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차무진의 <빛 너머로>에서 어머니는 자식의 성욕을 해결해 주려고 수녀인 누나의 도움을 받아 억울함에 세상을 떠도는 지박령까지 이용한다. '인간성 앞에서 그 어떤 제도와 관례와 종교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공노식 씨는 깨달았다. (p. 108, <빛 너머로>)'
소향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에서 (불륜이지만) 진짜 사랑이 복수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급기야 정명섭의 <침대와 거짓말>에서 불륜은 살인이라는 인간의 잔인성을 불러온다.
'금지된 사랑' 즉 '불륜'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지금 나의 배우자 또는 연인과 시작된 사랑처럼 우연히 말이다. 다만 사랑과 불륜의 '우연'이 다른 건, 정당성의 결여다. 운명만이 그 부족한 정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운명이란 해석만이 나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
<투란토트의 집>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은 자신이 섹스 파트너임을 알았지만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사는 투란토트를 구하듯, 자신을 섹스 파트너로 삼는 그녀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할 운명의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여긴다.
<빛 너머로>에서 지적 장애 2급인 자식을 둔 어머니와 수녀 누나, 모두 운명이다. 운명인 걸 어떡하나. 세상의 제도나 종교도 어찌 못하는 성욕을 혼백을 깨워서라도 풀어줘야 하는 운명일 뿐이다.
<포틀랜드 오피스텔>속에서 불륜을 저지른 '나'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자신과 싸움을 한다. 배반의 고통에서 '나'가 벗어나는 방법은 반복된 우연을 운명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우연이 반복된다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p. 132, <포틀랜드 오피스텔>)'
<침대와 거짓말>에서 아내를 살인한 동성 불륜이 선택한 운명의 다른 이름은 본능이다.
'"알았어요. 보스한테 말할게요. 그리고 김규찬이 경찰한테 자수하면서 그랬대요."
"뭐라고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사랑한 게 잘못이냐고." (p. 209, <침대와 거짓말>)'
우연을 그냥 우연일 뿐이다. 우연에 갖은 이유를 갔다 붙여 정당성을 갖추려는 의도 자체가 '금지된 사랑'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계획한 불륜 앤솔러지는 네 명의 작품으로 마무리되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지난겨울 정아은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올봄에 만난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에 정아은 작가의 글이 없는 이유다. 우연! (네 명의 작가와 고우리 대표는 정아은 작가의 죽음에 어떤 이유를 찾지 않는다. 슬퍼하며 그를 추모할 뿐)
우리는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지나치며, 헤어지기도 한다. 우리 삶은 우연으로 가득하다.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사랑은 어쩌면 한 번뿐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이 한 번뿐이듯이... 삶이 한 번으로 족하듯 운명도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금지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무속에 빠지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