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은 전쟁이 없던 시절의 일상을 행복으로 바꿔놓는다. 전쟁 중 일상은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 불행 속에는 사랑할 수 없는 비극도 포함돼있다. 전쟁은 사랑을 방해한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전부인데 말이다.

"...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휴가 중인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지. 두어 가지 약속 날짜와 우연한 이름 하나밖에 적혀 있지 않은 종이쪽지와 같아.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p. 221)'


<개선문>은 독일 정부로부터 국적을 박탈 당한 레마르크가 미국 망명 시절인 1946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작품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비롯한 이전 네 작품 전체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쟁 기운이 감도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인 외과의사로 게슈타포에게 추적당하던 친구 둘을 도주시켰다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고문 받던 중 탈출해 파리에 불법 입국한다. 피난민이 돼버린 라비크는 베베르를 비롯한 프랑스 의사의 수술을 몰래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라비크는 파리 거리에서 술에 취한 이탈리아 출신 배우 조앙 마두를 만난다. 라비크의 친구 러시아 귀족 출신 모로소프는 클럽 세라자드에서 10년째 일하는 도어맨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라비크는 세라자드에 조앙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전쟁이 몰고 올 불안은 이 둘의 사랑을 서로 다른 색깔로 만들어 놓았다.

'"상관이 있지. 사랑이란 같이 늙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런 건 전 몰라요. 사랑이란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걸 말하지요. 그건 알아요." (p. 193)'

삶의 의지를 잃고 불안에 떨 때 라비크는 조앙이 일어서도록 도움을 줬다. 그런 이유로 조앙은 라비크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조앙에게 라비크는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다. 반면 라비크는 사랑하는 조앙과 같이 늙어갈 자신이 없다. 삶의 뿌리가 잘려버린 피난민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그가 정착할 곳은 없다.

신분이 들통나 스위스로 추방당한 사이 조앙은 다른 남자와 동거하며 지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라비크는 조앙과 결혼은 피난민이 절대 누릴 수 없는 생활이란걸, 서로 상처만 주게 될 뿐이란 걸 알았다. 라비크는 조앙을 불안 속에서 건져냈지만 라비크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앙의 사랑을 받아들여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기회를 애써 외면했다.

'"라비크, 우린 이대로 살아야 하나요?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나요? 같이 살면서 우리 물건을 갖고, 밤에도 안전하게 함께 살 수는 없을까요? 이런 트렁크나 공허한 나날, 언제까지나 정들지 않는 이런 호텔 방 대신에?"
라비크는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어이 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닥쳐오리라 예기하던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 그것이 우리 생활이라고 생각하나?" (p. 238)'


하케에 대한 복수심이 라비크에게서 떠난 적이 없다. 게슈타포 하케는 고문으로 라비크의 친구 둘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연인 시빌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망각.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그것은 공포와 위안과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 망각이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어느 누가 완전히 망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기억의 잔재. 더 살아갈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p. 54)'

하케가 한 일을 망각할 수 없었다. 과거를 잊을 수 없어서 다가오는 조앙의 사랑, 헤그시트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하케를 살해해 복수를 완성했다. 비로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헤그시트룀은 미국으로 떠났고, 동거인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조앙은 숨을 거두며 라비크의 곁을 떠났다.


'"불법 입국이지?"
"그렇습니다."
"왜?"
"독일에서 도망 왔습니다. 서류를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성은?"
"프레젠부르크."
"이름은?"
"루트비히."
"유대인이오?"
"아닙니다."
"직업은?"
"의사."
그 사람은 적었다. "의사?" 하고는 쪽지 한 장을 집어 들고 보았다. "라비크라는 의사를 알고 있소?"
"모르겠는데요." (pp. 614, 615)'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파리는 더 이상 라비크의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이제 라비크로 살아갈 수조차 없다.

전쟁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휘황찬란한 영광을 지닌 개선문이 빛을 다 잃지 않고 그나마 희미할 때, 불안한 마음에 고독 속에 앉아있을 게 아니라 사랑을 했어야 했다. 기대어오는 조앙의 사랑,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손길을 내미는 헤그시트룀의 사랑, 베베르와 모로소프의 돕는 우정, 다리를 잃은 잔노를 비롯해 뤼시엔, 롤랑드 등 라비크 주변 사람들이 보내온 감사의 사랑... 이 모든 사랑에 의지해 불안에서 벗어났어야 했다.

모로소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라비크는 파리 경찰 트럭에 실려 파리를 떠난다.
'트럭은 와그람 거리를 달려서 에트왈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아무 데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광장에는 짙은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p. 617)'

전쟁이 시작되고 개선문마저 암흑 속에서 사라진 시대에는 사랑으로부터도, 우정으로부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도 모두 절연당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남의 말로 서로 얘기해왔다. 지금 비로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자기 말을 쓰고 있었다. 언어 장벽은 무너지고 두 사람은 지금까지보다 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Baciami(키스해 주세요)......."
그는 그녀의 바싹 마른 뜨거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었어, 조앙...... 언제나..."
"Sono...... stata...... perduta...... senza di te(당신이 안 계시면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더욱 고독한 사람이었을 거야. 당신은 모든 광명이었으며, 기쁨과 슬픔이었어...... 당신은 나를 흔들어주었고, 내게 당신과 나 자신을 주었어. 당신은 나를 살아가게 한 거야." (p. 606)'

그러니 지금, 빛이 사라져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암흑 상태가 되기 전에, 불안을, 과거를 핑계 대며 남의 말로 얘기할 게 아니라 온전히 나를 보여주는 자기 말로 사랑해야 한다. 현재의 일에만 정열을 쏟는 조앙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이 짧은 인생이 단 한 번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마구 지나가버리잖아요..." 그녀는 두 손을 따뜻한 바위에 놓았다. "저는 대단치 않은 여자예요. 라비크, 저는 역사적 시대에 살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세상만사가 이렇게 귀찮고 괴롭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뿐이에요" (p. 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읽는 그림 - 수천 년 세계사를 담은 기록의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동진 평론가는 서양사를 연표로 정리하는 자리에서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1789년 프랑스대혁명 두 사건을 꼭 알아둬야 할 연도로 꼽았다. 연도로 역사를 바라볼 때 좋은점은 동시대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건 연도를 외우면서 시험공부할 때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다.

역사와 미술사, 현대미술을 공부한 김신지 작가의 <시간을 읽는 그림>은 역사를 담은 '기록화'를 중심으로 펼치는 세계사다. 최초 문명의 시간부터 중세,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삶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새의 날개로 역사의 큰 강을 따라가면서, 곤충의 더듬이로 강가의 풀잎과 그 위의 이슬방울까지 느껴 보고자 한다. 여러 분야를 폭넓게 보는 것과, 작은 부분을 세밀히 관찰하는 것은 서로 보완적이다. (p. 9)'


앞서 말했던 연도를 꼭 외워야 할 만큼 중요한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그림은 어떻게 압축해 담아놓았을까?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어떻게 역사를 읽어나갈 수 있을까.

대략 14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르네상스는 지적 활기와 탐구 정신으로 새로운 대륙과 해로를 탐색하는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유럽과 아메리카라는 두 대륙을 이었다. 그 결과 유럽인은 부와 번영의 기회를 얻었지만 아메리카 민족 앞에는 수탈과 억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럽은 문명, 아메리카는 야만'이라는 시각이 필요했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은 아즈텍의 인신공회라는 폭력적인 관습을 동원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잔혹성을 두드러지게 기록했다. 대표적 기록물로 <플로렌스 코덱스>, <코덱스 마글리아베키아노> 등이 있다.

또한 두 대륙이 맞닿으면서 이른바 '콜럼버스 교환 (Columbian Exchange)'이라는 '먹거리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에는 감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의 일상이 표현되어 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대표적인 작물 가운데 옥수수와 함께 감자는 기근에 시달리는 서민의 식단을 해결하는 작물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약 4천 년 전부터 메소아메리카 원주민이 재배하고 채취했던 카카오도 유럽에 전해졌다.
'16세기 아메리카에 도착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이 즐기던 카카오를 유럽에 가져갔다. 유럽인은 쓴맛의 카카오 음료에 설탕이나 꿀, 계피를 넣어 맛을 냈다. (...) 1657년, 런던에는 최초의 초콜릿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이 값비싼 이국적 음료는 상류 사회에서 유행했고, 초콜릿하우스는 부유층의 만남의 장소로 번성했다. (pp. 200, 201)'

프랑스 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1789년을 기점으로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이르는 10년에 걸친 역사적 과정이다. 세계사를 다시 쓰게 만든 프랑스 혁명을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기록했다. 다비드나 들라크루아는 위대한 빛으로 묘사했지만, 다른 화가들은 폭력과 광기로 이 시대를 그리기도 했다.

'찰스 디킨스는 그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프랑스 혁명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그는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과 혁명에 수반된 폭력과 혼란을 동시에 언급하며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가장 좋은 시기였고, 최악의 시기였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시대였고, 불신의 시대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p. 221)'

프랑스 혁명은 식탁의 민주화도 이뤄냈다. 정치적 평등이 맛의 평등으로 이어졌다. 귀족의 몰락은 귀족 개인 요리사의 일자리까지 없애버리는 결과를 빚어냈다. 대신 이들은 레스토랑을 열어 뛰어난 요리 솜씨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덕분에 귀족들만 즐기던 미식의 세계를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됐다. 시작은 프랑스 최초의 레스토랑으로 여기는 수프 판매상 A. 블랑제의 '부용' 레스토랑이었다. 19세기 뒤발 부자는 이 레스토랑에서 대중적 음식을 판매함으로써 '부용 뒤발'이라는 체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끈 이야기는 '달러 공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달러 공주'들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미국의 부유층 가문이 딸을 재정난에 빠진 유럽 귀족과 결혼시켜 사회적 지위를 얻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결합을 통해 유럽 귀족은 몰락을 피할 자금을 확보했고, 미국의 신흥 자본가는 유럽 상류 사회로의 입장권과 귀족 작위라는 상징 자산을 손에 넣었다. (pp. 339, 340)'

일제강점기 하와이 이민 1세대 한국 남자들과 사진을 교환한 다음, 결혼하여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을 가리켜 '사진 신부'라고 했다. '달러 공주' 가운데 널리 알려진 콘수엘로 밴더빌트와 레이디 랜돌프 처칠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사진 신부가 떠올랐다. 왤까?

미국 철도 재벌 밴더빌트 가문의 딸 콘수엘로는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와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었지만 무시당한 채 강요로 이뤄진 결혼이었다. 윈스턴 처칠의 엄마 레이디 랜돌프 처칠 역시 부유한 금융가 집안 출신이었지만 사랑 없는 불행한 결혼을 했다.

'사진 신부'와 '달러 공주'를 연관짓게 된 나의 생각은 이 둘 모두 시대적 산물이 낳은 결혼이란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사진 신부들 가운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등지고 머나먼 이국 땅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테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던 1492년 조선은 성종 시대로 경국대전이 완성된 해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조선의 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했다.

머리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역사를 연표로 살펴볼 때 매력은 역사적 시간의 동시성을 보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림으로 보는 역사는?

'기록화 속에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 슬프거나 추한 이야기 등 인간의 모든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 기록화는 과거의 삶에 관한 것은 물론,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준다. 정치적 사건, 전쟁, 위대한 과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보여 주지만,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도 드러낸다. 우리는 그 시절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땠는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도구와 기술을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p.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대선은 부정 선거가 확실하다."
시위대 속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분이 한 말이다. 인터뷰어가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남들이 다 그러던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아리스테이데스의 도편추방 일화를 전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아리스테이데스에게 도자기 조각을 내밀며 이름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적어 넣을 이름을 묻자 '아리스테이데스'라고 말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도자기 조각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고는 물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습니까?'"
시골 사람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게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공정하다고들 하니까 지겨워서 그럽니다." (p. 229)'


<카이로스 극장>은 한겨레신문 기자를 지냈던 고명섭 철학 저술가가 철학과 역사를 렌즈로 삼아 카이로스의 눈으로 우리 시대가 써낸 정치 드라마의 격류를 조망한 책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해인 2022년 3월부터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그 이듬해 2025년 9월까지 신문과 잡지에 쓴 글들을 모았다.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윤석열이 '사익을 공익으로 무능을 유능으로 포장'한 정치꾼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무 쓸모 없는 자가 국가를 이끌 적임자라고 속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기만'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플라톤의 묘사처럼 '이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그런 자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 (p. 59)'를 한 집권 세력이었다. 플라톤은 묻는다. 이런 자들은 조타수가 아니라 '하늘을 보며 별점이나 치는 수다쟁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사이비 조타수가 키를 잡으면 배가 난파할 수 있다는 경고도 플라톤은 덧붙였다. 플라톤의 경고대로 결국 윤석열 정권은 계엄이라는 내란을 일으켜 스스로 침몰했다.


'이때 스펜서에게 '가장 잘 적응한 자'는 '가장 우월한 자'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적자생존이라는 스펜서 원리는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한다는 우승열패,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이로 삼는다는 약육강식을 내장한다. (p. 156)'

다윈이 생각한 적자,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자 자'라는 의미와 거리가 먼 스펜서의 '약육강식'이란 말은 강자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위세를 떨친다. 상대편이 아니라 힘없는 쪽에 잘못이 있다는 논리는 마침내 2023년 윤석열의 3.1절 기념사에 침략당한 우리가 문제였다는 제국주의 논리로 등장했다.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 제104주년 3.1절 윤석열 대통령 기념사 중에서'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억이 무수한 '나'를 관통해 전체를 이루면 집단의 기억이 된다. 그 집단의 기억이 역사다. (p. 202)'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인식이 달라진다. 제국주의 지배에 맞서 싸운 항일독립군이 아닌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하는 자들의 논리가 순국선열을 기억하자는 3.1절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를 바꿔치기하면서까지 일제강점기에 했던 부역자 노릇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런 집권 세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윤리의식마저 저열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12.3 내란 1년을 하루 앞둔 국무회의에서 내란에 대한 결처한 진상조사를 거듭 강조하며 쿠데타 등 국가폭력을 저지른 자는 '나치 전범을 처리하듯'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이다. 일제 부역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반윤리적이고 반상식적인 세력이 남아 어떤 반성도 없이 지금도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못하도록 훼방놓고 있지 않은가.


'아리스테이데스 추방에 찬성한 그 시골 사람은 문자적 문맹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문맹이기도 했다. 고대 아테네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 (p. 230)'

윤석열이 대통령 직무를 수행했던 3년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쉽게 저급한 선동정치의 먹이가 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민주주의 체제는 내부에 자기 파괴적 요소도 품고 있어 시민들이 정치적 문맹 상태에 있을 때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탈선한다는 역사적 교훈도 체험했다.

'크로노스가 타임(time)이라면, 카이로스는 타이밍(timing)이다. 역사의 뜻에 비추어볼 때 반드시 잡아야 하고 반드시 뚫고 나가야 하는 순간이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p. 20)'

지금이 시민들이 정치 문해력을 갖춰야 할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더 이상 정치인의 거짓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만과 속임수로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짓을 막으려면 시민 스스로 거진과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남들이 다 그러던데?"
판단을 남에게 맡기는 이런 말을 할 게 아니라,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판단 능력을 내가 갖춰야 정치가 정치답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을 위한 독서 모임 -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나의 첫 번째 연습실
김민영 지음 / 노르웨이숲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모임에 참여해 볼까 하는 마음이 조금 있긴 했지만 하지 않았다. 모임에서 꼰대 소릴 들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줌으로 하는 독서모임 제안을 받고 특별한 인연도 있고 해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1년간 토론할 책 라인업은 문학 작품으로 짜였다. 문학작품을 워낙에 읽지 않았던 터라 걱정됐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독서모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매달 문학을 읽다 보니 문학의 맛을 알아버렸다. 게다가 아내까지 덩달아 문학에 빠졌으니 더할 나위 없다.


독서모임에 자신이 붙어 모임을 늘려볼까 하던 차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독서 모임을 하라고 어떤 설득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독서 모임을 왜 해?라는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생각'의 차이가 일어납니다. 혼자 읽기란 혼자 생각하기와 같지만, 함께 읽기란 함께 생각하기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더 넓고 깊은 생각으로 가는 길목의 말 하기 연습이 바로 '독서 모임'인 것입니다. (p. 19)'

1장에서는 왜 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을 읽긴 읽었는데 어떻게 정리할지 몰라서 고민된다면 2장에서 도움받을 수 있다. 3장은 잘 듣고 잘 말하는 법을 알려준다. 실생활에도 적용 가능하니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4장에서는 독서 모임에서 곤란한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좀 더 깊고 풍부하게 독서를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다.

'홀로 읽기가 내 방이라면, 함께 읽기는 광장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으로 나가는 첫 번째 문이 바로 독서 모임입니다. (p. 34)'

500여 개 독서 모임을 만들고 진행한 저자의 꿀팁이니 그가 전해주는 경험담 모두 솔깃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이거다 싶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우리 삶은 각양각색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태피스트리 (tapestry)입니다. 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 만든 직물처럼 사건의 종류도 형태도 저마다 다릅니다. 철학자 이진경은 에세이 <삶을 위한 철학 수업>(문학동네, 2013)에서 "우리의 삶은 사건을 통해 크게 구부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pp. 226, 227)'

이야기 속 인물이 변화를 겪게 된 사건을 찾아보고, 독서 모임 이야기 주제를 (내 독서 모임 비타민처럼) 미리 정해 공유한다면 그 주제에 맞는 사건을 미리 메모해 둔다. 이를 바탕으로 독서 모임에서 사건 위주로 말한 다음 내 생각과 느낌을 이어서 말하라고 저자 김민영 작가는 조언한다.


줌 독서 모임을 마치고 나면 아내가 항상 하는 소리가 있다.
'방 밖에서 들으면 당신만 떠드는 것 같아.'
'너무 흥분해서 급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 과거가 떠오른다. 할 말이 많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입술에 달싹거린다. 그래서 꼰대 소릴 들을까 봐 아내는 항상 노심초사한다.

"비타민 멤버 여러부운~ 내 말이 길어진다면 꼭 이런 반응을 보여 주길 부탁해~ 김민영 작가의 꿀팁이야. 그래야 아내한테 더 이상 핀잔을 듣지 않아~"

'네, 네... 아, 네...
네. 잘 들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p. 196)'

오프라인에서 가끔 만나는 책 친구분들도 서슴지 말고 내 말이 길어진다 싶으면...
'어휴 저 꼰대~'라며 속으로 흉보지 말고 꼭 반응해 주시길...

어떻게~ 독서 모임 하나 더 할까?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오면서 저를 지켜준 것들을 꼽으라면 단연 독서 모임과 달리기라고 말합니다. 책이 좋아 시작한 독서 모임과 달리, 달리기는 하기 싫어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p. 4)'

좋아하는 걸 하나 더 하려면 싫어하는 것도 하나 해야하지 싶은데, 싫어하는 것... 뭘 해야 할까? 이것부터 정하고 독서 모임 늘리는 걸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기능 우울증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고장 나 버린 사람들
주디스 조셉 지음, 문선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는 내내 34년 몸담았던 나의 직장 생활이 떠올랐다. 퇴직 무렵 섭섭함이 앞서긴 했지만 그럭저럭 아무 문제 없이 직장 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읽어나갈수록 이 책은 내 직장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받은 비난은 수치심으로 변해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진급 때가 되면 나를 평가한 상사들에게 여러 번 배신감을 느꼈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에 힘들었고 어떤 때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프로젝트가 완성됐을 때조차 성취감이라는 기쁨도 제대로 느꼈던 적이 없었다. 나 혼자만 뿌듯해했을 뿐 인정받는데 인색했다. 희생을 마치 절대선처럼 여겼고 자랑삼기도 했다.

과장 시절 동네 사는 임원과 카풀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자동차 검사를 1년 동안 깜박한 그 임원은 그 기간만큼 면허정지 상태가 됐다. 뜻하지 않게 1년간 기사 노릇을 했다. 임원에게 일이 있으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약속 장소까지 동행한 날이 많았다. 직장 동료나 상사들은 임원과 친하게 지내는 나를 부러웠고 했다. 퇴근 후 내 시간이 사라진 걸 눈치 채지 못한 나는 은근히 즐겼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듯 모두를 위해 애쓰지만 정작 자신의 기쁨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 피로감, 무감각, 초조함을 '고기능 우울증 high-functioning depr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명확히 정의한다. (p. 7)'

34년 직장 생활 동안 '고기능 우울증' 상태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연구자인 주디스 조셉은 '고기능 우울증'의 뿌리를 트라우마, 무쾌감증, 마조히즘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말한 내 직장 생활을 살펴보면 이 세 가지가 모두 내게 해당된다.

책 49쪽 '나는 고기능 우울증일까?' 테스트 결과를 보면 내가 '고기능 우울증'을 달고 직장 생활을 했음이 좀 더 명확해진다. 퇴직 후 몇 년 동안 직장 생활 꿈이 악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자는 '고기능 우울증'으로 무너진 자아를 회복하여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존중하고, 모든 관계에서 기쁨을 발견하며, 삶을 즐거움으로 채우는 방법으로 '5V 원칙'을 2부에서 제시한다.

나를 받아들이는 힘 '인정 Validation', 감정 해방의 시작이 될 '환기 Venting', 내 삶의 기준 '가치 Values', 몸과 마음의 신호에 귀 기울이는 '활력 Vitals' 마지막으로 회복의 지도를 그리는 '비전 Vision', 이렇게 다섯 가지 V가 '5V 원칙'이다.


퇴직한지 4년 차인 지금은 직장 생활 악몽이 등장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주디스 조셉이 제시한 과학적 도구 '5V 원칙'을 나도 모르게 실천한 까닭일까?

스트레스의 원인을 곱씹어 본듯하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조금 이기적으로 변했다. 아직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나의 기분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축하하고 축하받는 쑥스러움도 많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제일 힘들었던 건 '자기 인정'이었지 싶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마다 억울했다. 인정하고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그 어리석은 나를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기보다는 그 문제나 생각에서 한 걸음 떨어져 일상생활을 이어가 보라고 권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메타인지 치료 Metacognitive Therapy, MCT의 기본 원리다. 메타인지를 통해 우리는 '자기 생각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훈련할 수 있다. (p. 168)'

'자기 인정'을 하기 시작한 건 책을 읽으면서였다. 책을 통해 메타인지 치료 중이다. 책은 나를 떨어져서 살펴보도록 만든다.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책이 알려준다. 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기억하자. 인생은 한 번에 끝나는 목표가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이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을 것이다. (...) 그 과정을 지치고 힘든 일로만 여기지 말고, 오히려 흥미로운 여정이라고 생각해 보자. 책 앞부분에서 내가 "고기능 우울증을 극복하면 당신의 삶에 어떤 가능성이 열릴까?"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제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과학적 도구와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기를 바란다. (p. 3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