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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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내가 하는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일단 대답해 놓고 속뜻을 알려고 노력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다. 그런데 그냥 뭐 모르는 채 아니면 내가 생각한 대로 해석하고 지내도 우리 사이에 별일은 없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내 이런 상황과 비슷하다. 뭘 이야기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일단 대답해놓고 뭘 의미하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되는 작품이다. 뭐 꼭 뭔지 몰라도 아니면 내 나름대로 해석해도 괜찮다.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녁.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기를 쓰며 두 손으로 한쪽 구두를 잡아당긴다. 끙끙거린다. 힘이 빠져 그만둔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되풀이된다. (p. 9)'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내 삶과 닮았다. 기다림이 연속되는 삶. 어른이 되기를,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저녁을, 아침을 기다린다. 구름이 걷히기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친구를 기다린다. 그리고 여자를 기다린다. 결혼 전 백번 넘게 선을 봤으니 그 횟수만큼 나와 결혼할 여자를 기다린 셈이다. 무수한 시간을 기다리면 난 뭘 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뭘 타고 올지, 장소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저녁을 먹었을까? 난 어제 뭘 먹었지? 어제 몇 시간 잤지? 부장이 왜 날 찾았지? 뭐 사고 났나? 나 어릴 때 허벅지 찢어진 적 있었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치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렸을 뿐이다.

힘들게 노력해서 얻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걸 기다리면서 할만한 일이 별로 없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리는 수밖에. 뭘 한다고 해도 기다림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엔 변함없다.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 것, 그것을 위해 내가 마땅히 할 일은 없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오지 않아서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기다림을 멈추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다. …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p. 82)'

그런 고도는 무엇일까.
죽음...! 끝이 아닐까?

사뮈엘 베케트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뒤다. 신을 찾았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존재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이제 내 의지와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일만 내 앞에 남았다.

신조차 막지 못하는 전쟁,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전쟁이 끝나는 것일 테다. 전쟁의 끝이라는 고도가 언젠가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다림에도 의미가 생긴다.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 삶에도 죽음이란 끝이 있다. 희망이 생긴다. 끝이 있다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굴러떨어질 바위를 밀어 산꼭대기 올려놓기를 반복하지만, 언젠가 그 무의미한 일상에 끝이 있다면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고, 아이가 자라고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춘다는 걸 안다면, 친구가 온다는 걸 안다면, 그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기다림은 의미 있다. 나와 결혼할 여인이 온다는 걸 안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기다리더라도 그 기다림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다린다. 고도를... 죽음을... 끝을... 지금 내 삶을 지키며 의미를 찾으면서.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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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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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내가 하는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일단 대답해 놓고 속뜻을 알려고 노력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다. 그런데 그냥 뭐 모르는 채 아니면 내가 생각한 대로 해석하고 지내도 우리 사이에 별일은 없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내 이런 상황과 비슷하다. 뭘 이야기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일단 대답해놓고 뭘 의미하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되는 작품이다. 뭐 꼭 뭔지 몰라도 아니면 내 나름대로 해석해도 괜찮다.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녁.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기를 쓰며 두 손으로 한쪽 구두를 잡아당긴다. 끙끙거린다. 힘이 빠져 그만둔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되풀이된다. (p. 9)'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내 삶과 닮았다. 기다림이 연속되는 삶. 어른이 되기를,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저녁을, 아침을 기다린다. 구름이 걷히기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친구를 기다린다. 그리고 여자를 기다린다. 결혼 전 백번 넘게 선을 봤으니 그 횟수만큼 나와 결혼할 여자를 기다린 셈이다. 무수한 시간을 기다리면 난 뭘 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뭘 타고 올지, 장소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저녁을 먹었을까? 난 어제 뭘 먹었지? 어제 몇 시간 잤지? 부장이 왜 날 찾았지? 뭐 사고 났나? 나 어릴 때 허벅지 찢어진 적 있었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치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렸을 뿐이다.

힘들게 노력해서 얻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걸 기다리면서 할만한 일이 별로 없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리는 수밖에. 뭘 한다고 해도 기다림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엔 변함없다.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 것, 그것을 위해 내가 마땅히 할 일은 없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오지 않아서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기다림을 멈추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다. …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p. 82)'

그런 고도는 무엇일까.
죽음...! 끝이 아닐까?

사뮈엘 베케트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뒤다. 신을 찾았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존재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이제 내 의지와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일만 내 앞에 남았다.

신조차 막지 못하는 전쟁,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전쟁이 끝나는 것일 테다. 전쟁의 끝이라는 고도가 언젠가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다림에도 의미가 생긴다.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 삶에도 죽음이란 끝이 있다. 희망이 생긴다. 끝이 있다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굴러떨어질 바위를 밀어 산꼭대기 올려놓기를 반복하지만, 언젠가 그 무의미한 일상에 끝이 있다면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고, 아이가 자라고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춘다는 걸 안다면, 친구가 온다는 걸 안다면, 그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기다림은 의미 있다. 나와 결혼할 여인이 온다는 걸 안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기다리더라도 그 기다림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다린다. 고도를... 죽음을... 끝을... 지금 내 삶을 지키며 의미를 찾으면서.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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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내가 하는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일단 대답해 놓고 속뜻을 알려고 노력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다. 그런데 그냥 뭐 모르는 채 아니면 내가 생각한 대로 해석하고 지내도 우리 사이에 별일은 없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내 이런 상황과 비슷하다. 뭘 이야기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일단 대답해놓고 뭘 의미하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되는 작품이다. 뭐 꼭 뭔지 몰라도 아니면 내 나름대로 해석해도 괜찮다.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녁.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기를 쓰며 두 손으로 한쪽 구두를 잡아당긴다. 끙끙거린다. 힘이 빠져 그만둔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되풀이된다. (p. 9)'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내 삶과 닮았다. 기다림이 연속되는 삶. 어른이 되기를,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저녁을, 아침을 기다린다. 구름이 걷히기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친구를 기다린다. 그리고 여자를 기다린다. 결혼 전 백번 넘게 선을 봤으니 그 횟수만큼 나와 결혼할 여자를 기다린 셈이다. 무수한 시간을 기다리면 난 뭘 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뭘 타고 올지, 장소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저녁을 먹었을까? 난 어제 뭘 먹었지? 어제 몇 시간 잤지? 부장이 왜 날 찾았지? 뭐 사고 났나? 나 어릴 때 허벅지 찢어진 적 있었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치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렸을 뿐이다.

힘들게 노력해서 얻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걸 기다리면서 할만한 일이 별로 없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리는 수밖에. 뭘 한다고 해도 기다림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엔 변함없다.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 것, 그것을 위해 내가 마땅히 할 일은 없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오지 않아서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기다림을 멈추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다. …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p. 82)'

그런 고도는 무엇일까.
죽음...! 끝이 아닐까?

사뮈엘 베케트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뒤다. 신을 찾았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존재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이제 내 의지와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일만 내 앞에 남았다.

신조차 막지 못하는 전쟁,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전쟁이 끝나는 것일 테다. 전쟁의 끝이라는 고도가 언젠가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다림에도 의미가 생긴다.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 삶에도 죽음이란 끝이 있다. 희망이 생긴다. 끝이 있다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굴러떨어질 바위를 밀어 산꼭대기 올려놓기를 반복하지만, 언젠가 그 무의미한 일상에 끝이 있다면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고, 아이가 자라고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춘다는 걸 안다면, 친구가 온다는 걸 안다면, 그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기다림은 의미 있다. 나와 결혼할 여인이 온다는 걸 안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기다리더라도 그 기다림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다린다. 고도를... 죽음을... 끝을... 지금 내 삶을 지키며 의미를 찾으면서.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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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화폐들 그리고 비트코인
홍익희 지음 / 책과삶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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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농부가 재산을 팔고 별보배고둥 껍데기를 한 자루 받아서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고 하자. 그곳 사람들이 별보배고둥 껍데기를 받고 쌀과 집과 밭을 팔 거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여행이다. 화폐가 인간이 고안한 것 중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 신뢰 시스템임을 설명하려고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소개한 일화다.

덧붙여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 화폐라는 것도 증명한다.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일지라도 돈에 대한 믿음은 동의한다. 종교는 무언가를 믿으라고 하는 반면에, 화폐는 다른 사람들이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화폐는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까지도 효율적으로 협력하게 만든다. 화폐는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KOTRA에서 32년간 일했고 대학교수로 정년퇴직한 홍익희 저자는 "그 믿음은 앞으로도 계속 돈이 될 수 있을까?" (p. 10, 프롤로그)'라는 물음으로 이 책 <세상을 바꾼 화폐들 그리고 비트코인>을 시작한다.

기축통화로 작동하던 달러가 점점 신뢰를 잃어감에 따라 그 시대가 저물어 간다. 그 결과, 달러를 대체할지도 모를 비트코인이란 기술이 주는 신뢰는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이런 의문이 저자가 던진 물음을 성립하게 한다.

'화폐의 역사는 언제나 신뢰의 주체가 바뀌는 과정이었다. 왕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중앙은행으로, 그리고 이제 인간에서 알고리즘으로, 비트코인은 화폐의 본질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묻는다. "우리가 믿는 것은 진짜 내실을 갖춘 가치인가, 아니면 권력이 만든 숫자인가?" (p. 9)'

미국의 금 보유량이 세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금본위제를 폐지했고 미국은 달러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자산가에게는 부를 안겨주었지만 노동자들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화폐는 신뢰를 잃었고 불평등의 도구가 돼버렸다.

저항의 산물로 암호화페가 등장했다. 은행 대신 기술이, 사람 대신 프로토콜을 믿게 됐다.
'비트코인은 그래서 단순한 디지털 기술이 아니다. 신뢰가 떨어진 시대에 다시 신뢰를 세우려는 시도, 그것이 비트코인이었고, 화폐를 인플레이션의 도구가 아닌 '신뢰의 프로토콜'로 되돌려 놓으려는 최초의 실험이었다. (p. 72)'


돈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도구가 아니었다. 사회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돈은 인간의 욕망과 신념, 권력을 지배해왔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다음 소비를 부를 뿐이다.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 속에 그 욕망의 거래가 숨어있다. 욕망을 담보한 부채가 당장은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 같지만 그 자유가 곧 예속임을 목격한다.

돈은 권력과 전쟁의 승패도 갈라 왔다. 로마는 금화와 은화로 문명을 지탱했다. 네로 황제가 은화에 구리를 섞으면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뢰를 잃은 로마는 통화 시장 붕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화폐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라 신뢰의 제도임을 역사도 증명한 셈이다.


자, 이제 기술이 신뢰를 대체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이제까지 신뢰의 중심에 인간이 있었다. 사람을 믿었고 국가와 법이 책임지고 보증했다. 그렇지만 블록체인과 AI가 결합함으로써 '신뢰의 권한'이 인간에서 기술로 넘어가게 됐다.

'"누구를 믿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동으로 결정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는 시대가 된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문명적 전환, 곧 '인간 중심 질서의 약화'를 의미한다. (p. 330)'

저자는 화폐의 변천에 따라 신뢰의 역사를 탐구한 끝에 마지막 질문에 던진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p. 361)'

기술은 발전할 것이다. 언젠가 '신뢰의 권한'을 다른 발전된 기술로 넘길지도 모른다. 또 언젠가 달러가 신뢰를 잃었듯이 기술도 신뢰를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신뢰와 믿음 위에 쌓아온 우리들의 사회적 약속은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돈의 가치, 교환의 가치가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사이 신뢰에서 유지되 왔기 때문이다.

화폐가 어떤 형태로 변하든 화폐는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된다. 신뢰라는 토대 위에 화폐가 있어야만 낯선 곳으로 여행할 수 있고, 종교와 인종이 다르더라도 사회경제에 효율적 협력이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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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왕국 -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
데이비드 스펜서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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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는가. 우리 집 베란다에도 식물 여럿이 자라고 있지만 바라만 본다. 가끔 중얼거리는 말을 건네긴 한다. 하지만 식물이 알아들을 거란 생각으로 말하진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식물이 어떤 이야기를 내게 전해줄지 궁금하지도 않고 귀 기울인 적도 없다.

'식물학에는 식물을 동물보다 열등한 생물로 보는 이런 집단적 열등 콤플렉스를 지칭하는 '식물 맹시'라는 용어까지 있다. (p. 248)'

언제나 가만히 제자리에 있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라는 '식물맹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과 인간의 진화 역사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면?' <뿌리 왕국>의 저자인 독일의 식물생물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데이비드 스펜서가 우리에게 내놓은 질문이다.

게다가 곤경에 처한 우리 인간에게 그 어느 때보다 식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식량, 에너지, 주거를 위해서는 물론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로서, 팀 동료로서 그리고 멸종과 기후 위기, 제한된 공간 때문에 엄청난 독창성이 요구되는 어려운 미래에 맞서 싸울 동맹자로서 (p. 140)' 식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웅장한 진화를 아직 겪지 않은 태초의 식물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디작은 생명체였다. (p. 19)' 이랬던 식물이 어떤 기술을 습득해 현재 지구를 만들어놓았을까. 동물과 인간이 지구에 등장했을 때는 이미 식물이 지구를 소화하기 쉽게 씹어놓고, 가공하고, 다듬어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침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인간은 먹거리를 외부에 의존했지만 식물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공생을 택하기도 했다. 한자리에 뿌리내리고 살려고 동물을 지배하는 법도 익혔고, 특정한 것을 기억해 내는 능력을 갖췄으며, 매년 작은 죽음과 작별이라는 재생을 거듭했다.

'얼마 전에 나는 몬테네그로의 바르(Bar) 근처에서 '스타라 마슬리나'라는 아주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보았다. (...) 적어도 2,2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장 멋지게도 이 나무는 여전히 올리브를 생산한다! (p. 48)'

몸의 90퍼센트를 잃어도 식물은 살아남는다. 거의 죽었다가 부활하는 셈이다. 식물은 인간의 질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능력도 있다. 2000년 전 유대 지방의 누구와 비슷하지 않은가? 신을 숭배할지언정 식물의 지성과 진화적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 건, 순전히 인간이 가진 오만함 때문이다.

인간이 들을 수 없을 뿐 식물은 '화학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수다 떨며 식물의 성장, 동물의 행동, 토양의 변화 등 전제 생태계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 다양한 모양과 색깔로 수분을 위해 곤충과 새를 불러들이고, 씨앗을 퍼뜨리려고 잘 보이는 색깔의 열매로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도 끌어들인다.

식물 스스로 보호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광합성으로 만들 수 없는 독소, 효소를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불을 내기도 한다.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곤충을 끌어들여 활용하기까지 한다. 초능력에 가깝다.

'"(개미가) 악마의 정원을 만드는 것은 보금자리 구축의 한 예다. 개미는 다른 모든 식물을 죽여, 둥지를 틀 히수타 줄기를 더 많이 확보한다." 프레드릭손은 숲의 현재 성장률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악령의 정원은 800살이 넘었고, 300만 마리의 일개미와 1만 5,000마리의 여왕개미로 구성된 단일 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p. 161)'

식물 군집을 이루어 다양성을 유지한다. 독립적이면서 공동체를 이루면 강해진다는 사실을 식물은 터득했다. 단일 농작으로 생태계 다양성을 무시하는 인간보다 지혜롭다.


땅속에는 인간의 규칙과 다른 자연 규칙이 존재한다. 식물과 다른 구조를 가진 미생물과 논의하고 예측하고 계산할뿐더러, 어떤 것이 유용하고 방해가 되는지도 구분한다. 다른 손을 빌리기도 하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상품을 교환하기도 한다. 모든 숲과 밭, 심지어 베란다의 화분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식물은 인지능력을 가진 복잡한 생물이다.

인간과 다른 구조를 가진 식물, 식물이 그러했듯이 이제는 인간이 식물과 공진화해야 할 때다. 인간만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서로 다른 말과 규칙으로 생긴 오해를 과학의 힘으로 이해하며 풀고 상대방의 말과 규칙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다.

산책할 때 주변에 보이는 식물을 이제 상호 존중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식물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정보로 식물이 가진 초능력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자연보호라는 용어를 항상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인간 보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태계 서비스라는 쿠션의자에 함께 앉아서, 자신의 엉덩이를 걱정한다. 쿠션을 더욱 푹신하게 하고, 수선하고, 소중히 관리하면, 우리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제공해 주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연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p.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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