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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땀 ㅣ 소설향 앤솔러지 1
김화진 외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8월
평점 :
고등학생 시절이었나? 향香자의 음과 훈을 묻는 시험 문제가 있었다. 나를 비롯한 제법 많은 아이들이 '냄새 향'이라고 적었다. 비슷하다고 생각해 맞는 답으로 해달라고 선생님께 사정했지만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냄새가 향기이면 똥 냄새도 향기냐?"
작가정신의 소설향 앤솔러지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초록 땀>. '색'과 '향'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김화진, 문진영, 이서수, 공현진, 김희선, 김사과 여섯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를 담은 책이다.
색이라는 주제...
우리는 무지개를 7가지 색깔로 본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문화권별로 6가지 또는 5가지 색깔로 무지개를 보기도 한다. 무지개 색깔이 6가지, 5가지라니, 우리가 볼 때 그런 인식은 어색해 이상하기까지 하다.
김화진의 <초록 땀>에서 '나'는 숨 쉴 때마다 혀를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른다. '숨 문제'가 있는 '나'는 사무보조 아르바이트 보영과 친해지면서 보영이 '초록 땀'을 흘린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보영은 초록 땀이 흐를 때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재빨리 손수건으로 닦아 숨긴다. 그런가 하면 초록 땀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초록 땀을 유리병에 담아 판다. 보영이 남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는 '땀 문제'에 갇혀있지 않기로 마음먹자 '초록 땀'은 소원을 들어주는 '행운'이 된다.
이서수의 <빛과 빗금>에서 색은 정치를 상징하며 사람들 사이에 빗금을 그어놓는다. 하지만 색은 빛이 있어야만 드러난다. 빛이 없다면 색을 식별하고 분류할 없음을 사람들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색보다 빛을 먼저 보라고."
승주가 도통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빛이 뭔데?"
빛은… 빛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야. 입자나 파동, 광선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식상하지만 사랑과 온기라 표현할 수 있고, 식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노려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온기라고 말할 수도 있어. (p. 128, <빛과 빗금>)'
김희선의 <뮤른을 찾아서>에서는 색을 식별하는 빛마저 흡수해버리는 블랙이 있다. 블랙의 세계에서 할 일은 내 기억 속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사라진 색깔, 흡수되지 않는 색깔, 뮤른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반사되는 빛, 즉 흡수되지 않는 빛이다. 거부당한 색을 보고 '사과는 붉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과는 빨강을 제외한 모든 색이다. (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작가정신, p. 435)'
향이라는 주제...
'냄새에 대한 감각은 지극히 정확할 수 있지만, 어떤 냄새를 맡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냄새는 침묵의 감각이고, 냄새에는 언어가 없다. (...) 우리는 숨 쉴 때마다 냄새 맡는다. 눈을 가리면 보이지 않고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지만, 코를 막고 더 이상 냄새를 맡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작가정신, p. 19)'
"냄새가 선을 넘지"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했다면 문진영의 <나쁜 여행>에서 냄새는 너와 나의 '구별 짓기'를 한다. 냄새로 누구는 밀어내고 또 다른 냄새를 가지고 내 품으로 뛰어드는 누군가는 끌어안는다.
공현진의 <이사>에서 정체 모르는 악취는 불안을 일으킨다.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이기에 냄새를 알 수 없어 불안은 공포가 된다. 드디어 언젠가 맡아본 냄새라는 걸 알아낸 해오는 그 냄새의 정체를 알지만 우진은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라 여전히 그 냄새를 알 수가 없다.
'우진은 해오와 같은 냄새 속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냄새 속에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p. 170, <이사>)'
김사과의 <전기도시에서는 홍차향이 난다>에서는 미래도시에 가득한 향을 말한다. 홍차향만 남고 모든 향이 사라진다면, 낙엽의 달고 씁쓸한 향, 냉기 서린 죽음의 냄새 등등... 하나씩 사라진다는 건 사랑하는 연인도 이웃도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사라질지 모르기에 '어떤 것은 사라지면 안 된다. 아니 사라질 수가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p. 250, <전기도시에서는 홍차향이 난다>)'
똥 냄새도 향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냄새 향'을 정답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에게는 무지개 색깔이 6가지, 5가지다. 누군가는 아는 냄새를 누군가는 모른다. 각각 추억에 따라 냄새도 색깔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후각이 아내보다 덜 예민한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런 내 후각이 어떤 때 유리하고 어떤 때는 불리하다. 하지만 어떤 때 유리했는지 어떤 때 불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경험이 없어 인식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다.
어떤 색깔을 좋아하나. 보라색? 어떤 사람은 그 색깔을 싫어한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니 보라색이 내게 장애물로 작용할리 없다. 그저 언제나 내겐 행운의 색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