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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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왈 공자왈'이란 말의 쓰임새는 탁상공론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이론을 비웃을 때다. <맹자>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과연 맹자의 말이 그럴까?'였다.

맹자는 제14편 <진심 하> 9장에서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내와 자식을 물론 그 어느 누구도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며 솔선수범을 말한다. 그리고 맹자 자신도 먼저 행동으로 보여준다. 제국의 왕들 앞에서 자신의 이론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음 물론 절대 쫄지 않는다. 대장부大丈夫로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몸소 실천한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말로 하기 어렵다. 그 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데, 곧게 길러서 해치는 것이 없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 기는 정당함과 도리에 들어맞아야 하니, 이렇지 않으면 (호연지기가) 위축된다. (pp. 108, 109 <공손추 상> 2장)'

왕 앞에서 역성혁명론을 말하면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 맹자의 모습은 맹자와 맹자의 말을 '공자왈 맹자왈'로 폄훼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했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로움을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고 하며, 잔적殘賊 한 사람을 '한 사내'라고 하니, 한 사내인 주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었지,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p. 83 <양혜왕 하> 8장)'

맹자는 느닷없이 우물로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 구하려는 불인지심不忍之心, '사람들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p. 122 <공손추 상> 6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성선설을 인간의 본성으로 사단四端을 설명하는 맹자의 시선이 따뜻하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로움(義)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혜(智)의 단서다. 사람이 이 네 가지 단서(四端)를 가지고 있음은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pp. 122, 123 <공손추 상> 6장)'

그러니 사람, 한 나라의 백성은 왕에게 인仁과 의義라는 왕도정치의 실현 대상인 것이다.
'"노인장께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p. 34 <양혜왕 상> 1장)'

왕 노릇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자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p. 59 <양혜왕 상> 7장)'도록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 주고 충분히 부모를 섬길 수 있고 충분히 아내와 자식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여민동락與民同樂, 왕과 함께 즐길 대상이기도 하다.
'"혼자 음악을 즐기시는 것과 다른 사람과 음악을 즐기시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왕이) 말씀하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 (...)
"...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백성과 함께 즐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백성과 함께 즐기신다면 (훌륭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pp. 66, 67 <양혜왕 하> 1장)'

<양혜왕 상> 7장에서 제나라 선왕은 종의 틈에 피를 바르는 의식에 끌려가는 소가 벌벌 떠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한다. 이 일로 백성으로부터 선왕이 오해를 받자 맹자는 왕의 측은지심을 백성이 모르고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고 그 마음을 백성에게 베풀라고 조언한다.

2024년 12월 내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와 베네수엘라를 농락하고 이란을 무참히 폭격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란 자에게서 측은지심이란 걸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인仁과 의義를 갖춘 왕도정치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없다. 그들도 그들이지만 그들 앞에 맹자처럼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도 이 시대의 비극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나 힘을 가진 깡패가 세계를 제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알다시피 맹자孟子의 본이름은 맹가孟軻이다. 이름 끝에 자子가 붙은 건 그가 스승이기 때문이다. 2400년 전 스승의 가르침이 현재도 유효한 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과 그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의 사유와 맹자의 호연지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2400년 전에 쓴 <맹자>를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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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삶의 언어가 될 때 - 고요히 나를 회복하는 필사의 시간
김종원 지음 / 큰숲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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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래 글을 낭독하고 필사한 후 철학을 내 삶의 언어로 만드는 하루를 시작해보자.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지금
나는 힘들고 우울한 시기를 만난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무너지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며,
멈춘 게 아니라 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
철학은 반드시 내 삶의 언어가 되어
앞으로의 나날을 빛낼 것이다." (p. 6)'

인문학 멘토 김종원 작가의 가이드에 따라 철학자의 글을 사색하고 그 글을 종이 쓴 다음 질문과 함께 내 삶의 언어로 삼아보는 작업을 한 지 십여 일이 넘었다.

퍼스널 컴퓨터가 내 책상에 등장하고부터 글을 쓰는 일이란 메모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요즘 필사하면서 내 글씨를 살펴보게 됐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있나. 자세히 볼수록 더 그렇다.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손떨림으로 내 마음대로 선이 그어지질 않는다. 삐뚤빼뚤...

천천히 써보라는 조언에 그렇게 해보지만 천천히 쓸수록 더 글씨가 흐트러지고 만다.

어쩌겠나. 그래도 열심히 필사해 보려고 한다. 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집중할 수 있어서다. 요즘 여간해서 집중하질 못한다. 책을 읽을 때도 딴 생각이 들어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다. 글을 쓸 때만큼은 손떨림도 잡아보려 애쓰고 선도 똑바로 그어보려고 하다 보니 온전히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문장을 곱씹어 보게 된다.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방황을 성장의 도구로 만드는 괴테의 글,
'그는 훗날 자신의 성장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짧게 압축해서 말했다. "나는 뜨겁게 사랑했고, 그리고 아팠고, 그리하여 배울 수 있었다." (p. 14)'

내 운명을 사랑하도록 하는 니체의 글,
'"내가 항상 누군가에게 귀로 들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한 것처럼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얼음 덮인 산꼭대기 위에서
고요히 살아가는 것이다." (p. 94)'

그리고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할 나만의 언어를 찾도록 안내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글...
'"당신이 아는 것만이 사실이며,
사실의 합이 당신이 살아갈 세계다.
우리는 아는 것 이상의 세계는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p. 175)'

손이 떨리고 글씨는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쓰다 보면 그들의 철학이 내 삶에 언어가 되겠지. 그리고 나이 들어 떨리는 손을 잡아주듯이 내 삶도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아주겠지... 필사하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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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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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군지를 설명하시려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때려 죽게 내버려둔 채 떠났다.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그를 피해 반대쪽으로 지나갔다. 그 길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그를 불쌍히 여겨 여관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120쪽)의 이야기이다. (p. 130, 옮긴이의 글)'

빌 펄롱은 조금 더러운 석탄 배달을 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이다.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과 함께 사는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다. 다섯 딸아이 모두 제각각 재주도 있고 또 운도 좀 따라서 그리 가난하지 않게 펄롱은 나름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지만 펄롱은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다. 새벽까지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 44)'

마을에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웃들 그리고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펄롱의 마음은 불 펀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 갔다가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우리 딸들? 이 얘기가 우리 딸 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펄롱이 물었다.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이런 생각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아일린이 말했다.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 아일린은 초조한 듯 잠옷의 자개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pp. 55, 56)'

아내 아일린은 펄롱이 수도원 일에 끼어들까 봐 걱정돼 딸아이들이 피해볼 수 있으니 잠자코 있으라고 주의를 준다. 침묵하고 안정을 택할 건지 여자아이 세라를 수도원에서 구해 낼 것인지 펄롱은 고민한다.

펄롱의 어머니는 열여섯 살부터 미시즈 윌슨의 집안일을 하며 지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펄롱을 낳았지만 미시즈 윌슨은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를 내쫓지 않고 계속 일하도록 했을뿐더러 크리스마스가 되면 펄롱의 선물을 챙겨주며 따뜻하게 대해줬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p. 120)'

도움을 받고 자란 펄롱은 세라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펄롱은 세라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한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왜 강도를 만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았을까. 그 누구보다 먼저 돕는 일에 나서서 실천해야 할 종교 지도자가 아닌가. 그 사람이 도와줘야 할 유대인인지 죽게 놔둬도 되는 적대적 관계의 사마리아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는 해석한다. 도와줘야 할 이웃도 구별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에게 도와줘야 할 이웃은 누구나였다. 차별하지 않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 1996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로마 가톨릭 수도회가 실제 운영한 곳이다. 학대, 감금, 강제 노역 등 법을 무시한 잔혹행위가 벌어졌다. 희생당한 여성과 아이들이 3만 명에 이른다. 그 사실을 소설 속 펄롱의 이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왜 침묵했을까.

돕는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 본체만체할지 아니면 도와줘야 할지 갈등을 겪는다면, 그 이유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차별 말이다. 도와주었다가 막달레나 세탁소가 있던 마을 사람들처럼 내가 당하게 될 불이익이 두려워 침묵했을까?

작가 안보윤은 그의 에세이 <외로우면 종말 (작가정신)>에서 일상의 무너짐은 사소한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반대로 한 사람의 일상이 바로 서는 것도 사소함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엊그제 지인이 추천해서 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허무주의 상징하는 에브리씽 베이글에 맞서 저항하는 다정함의 상징으로...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인형 눈알, 구글리 아이를 내세우더라.

차별이든 침묵이든 그 사소하다 여길 만한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은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 것이다. 왜?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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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책상이 뒤집혀 있었다
세이야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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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영화 <더 글로리>를 보고는 어느덧 이십 대 후반이 된 두 아이에게 중고등학생 시절에 학폭 경험이 있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물었어야 할 질문을 이제서야... 하는 후회와 함께 미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아들아이는 뭐 딱히? (그냥 귀찮아서 말을 안 하는 것일 수도...) 하는 표정이었다.

딸아이는 학폭은 없었고 친한 친구였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무리 지어 따돌림 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딸아이는 쿨하게 그러든지 말든지 다른 아이와 놀았고 그 아이도 떠나면 또 다른 아이와... 이런 식으로 해결한 모양이었다 (딸아이 성격이 그렇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두 아이가 참 고마웠다.


<어느 날 책상이 뒤집혀 있었다>는 일본의 인기 코미디언인 세이야의 자전적 소설이다. 학창 시절에 겪었던 따돌림과 폭력에 맞선 이야기다.

'흰 와이셔츠에 배어든 카레 국물처럼, 열여섯 살 아이들의 새하얀 마음에 들러붙은 '이상한 아이'라는 인상은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남았다. 학교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따돌림은 이런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p. 16)'

고등학교 입학 첫날, 이시카와의 실수 아닌 실수 한마디로 따돌림이 시작됐다. 다음날 교실에 들어서니 책상이 뒤집혀 있었다. 얻어맞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해 수치스럽고 머리카락도 빠졌지만 나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란 생각을 하며 견디며 지냈다.

이시카와는 어른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끼어들 경우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힐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극제 행사 소식을 접한 이시카와는 자신의 콩트 창작 능력을 발휘해 따돌림 반전의 기회로 삼기로 한다.

'그건 괴로운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고독과 외로움, 누군가가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즉 약함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자신의 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이를 업신여기며 안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단 괴롭힘 문제는 복잡한 것이며,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p. 137)'

이시카와는 콩트를 준비하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괴롭혀온 구로카와의 사정을 듣게 되면서 그를 불쌍히 여긴다. 문극제 당일까지 구로카와의 방해가 있었지만 지혜롭게 대처해 마침내 최우수상을 받으며 기나긴 따돌림이란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난다.


'"집단 괴롭힘은 당하는 쪽에도 원인이 있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압도적으로 괴롭히는 쪽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 137)'

영화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가 들어보니,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장 많이 듣고 상처받았던 말이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는 말이었단다. 그래서 '어, 나는 잘못 없어'라는 말을 사명처럼 이해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항상 학폭 사건을 대할 때마다 당한 아이에게 주목해왔다. 그러다 보니 가해자는 어느새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고는 피해자에게 한다는 말이 '쟤도 문제가 있었네...'

자칫 따돌림에 맞서 당당하게 극복한 작가 세이야의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느라 '그래 세이아처럼 했으면 괜찮았을 일을...'라며 또 눈길을 피해자에게 돌릴까 걱정된다. 먼저 가해자에게 향했어야 하는 눈길인데도 말이다.

<더 글로리>를 본 아내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 학폭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항상 열변을 토한다. 당한 아이를 생각하면 아무리 학폭 가해자가 어리더라도 용서해 주면 안 된다고.

간단치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가해자를 주목해야만 학폭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야 학폭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가해자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다가가 품어줘도 늦지 않다. 자꾸만 피해자에게 '그때 좀 더 강했어야지'라는 닦달은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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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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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개그맨이란 말을 썼다고 알려진, 지난해 가을 우리 곁을 떠난 전유성 씨의 일화가 생각난다. 인사치레로 하는 '형~ 언제 밥 한 번 먹어요.'라는 말을 하면, 날짜 잡자고 덤벼들곤 했다고 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 말을 상대방 의도대로 오역誤譯하며 '밥 한 번 먹지 않는' 세태를 꼬집으며 정역定譯으로 대들은 셈이다.


지금까지 번역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번역하며 살아갈 기세인 황석희 번역가가 일상에서 겪은 오역 이야기를 에세이 <오역하는 말들>에 담았다. 전유성 씨의 개그 같은 삶처럼 재밌기도 하고 페이소스도 묻어난다.


지난해 가을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빠진 적이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깊이에의 강요>가 있는데 제목이 영 마음에 걸렸다. '5월에의 초대'처럼 그럴듯해 많이 쓰지만 <우리말 바로 쓰기>를 쓴 이오덕 선생에 따르면 '~에의'는 일본말 'への'를 직역한 병신말이다. '5월로 초대합니다'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어색한 말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깊이에의 강요'라는 제목이 꺼림직해 우리말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원제가 궁금했다.

'Der Zwang zur Tiefe'

''깊이(Tiefe)를 향한(zur) 강요(Zwang)' 마지막에 비평가가 했던 말을 '강요' 대신 '강박'이라는 의미를 선택해 직관적으로 바꿔 본다. (...) '강요'와 '강박', 두 단어 중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 뉘앙스가 다르다. 그게 뭐 그리 다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번역가의 입장에서 두 문장은 뉘앙스만이 아니라 아예 의미가 다르다. (...) 다만 내가 번역한다면 '깊이에의 강요'가 아니라 '깊이를 향한 강박'으로 할 거라는 거지. 짧은 내 식견엔 그편이 독자의 오독을 막기에 더 좋은 길이다. (pp. 81, 82)'

'깊이를 향한 강박', '~에의'가 빠지고 나니 얼마나 맘에 들던지 황석희 번역가가 너무 고마웠다. 아무 생각 없이 일본말을 우리말로 정역하다 보니 우리말이 오염됐다.


아내와 눈물 콧물 빼며 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대사다.
'엄마 애순은 궁상맞은 생활을 타박하는 딸 금명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처럼 살지 마. 근데 엄마는 엄마대로 행복했어. 엄마 인생도 나름 쨍쨍했어. 그림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다고." (p. 167)'

자식들은 부모님 삶은 불행하다고 섣불리 단정 짓곤 하는데 황석희 번역가는 이를 제멋대로 해석한 오역이라고 지적한다. 부모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석희 번역가가 고생하며 사신 어머니께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와 결혼할 거냐고 물었단다. 절대 안 한다는 어머니의 대답이 서운해 속마음을 담아 노골적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나랑 모자 사이로 못 만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엄마는 잠시 뭔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 미안한 듯 입을 뗐다.
"너는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엄마한테서 태어나야지. 내가 너무 못해 줬어."
말문이 막혔다. 농담이 나오질 않았다. (p. 199)'

황석희 번역가는 이 말을 번역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의 말이 너무 뻔히 읽혀서 번역하는 것조차 미안했기 때문이다.


영화나 뮤지컬을 번역하는 황석희 번역가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무수한 말들은 각자의 언어로 번역하면 살아간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내와 대화에서 가장 많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다.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감정이나 상황을 파악하지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채 내 멋대로 해석한 오역에서 빚어진 말이다.

'깊이에의 강요'처럼 어떤 오역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다. 또 때론 황석희 번역가의 어머니 말처럼 굳이 번역하지 않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분개해야 할 때도 있다. 적대시하고 불신에 사로잡혀 악의를 가진 오역을 만났을 때다.

부득이 오역이 필요한 때도 있다. 상대방을 보호하고 갈등을 피하고자 할 때 선의를 가진 오역이 그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오역은 절대적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라며 아내에게 따질 게 아니라 내 나름 오역하면 된다.

음~ 무슨 오역이 적당할까? 어렵다. 세상에서 아내가 하는 말을 번역하는 게 제일 어렵다. '지금 뭐 할 건데?', 빤히 쳐다볼 때... '뭐 잊어버린 거 없어?', '그럴 줄 알았어', '할 말 없어?'... 어떤 대답이 이어져야 할까.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쳐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러고는 잘 때 번뜩 생각난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대신 '내가 당신을 이해하는 게 서툴지? 난 왜 그게 늘지 않을까?' ??? 뭥미? 실패다. 오역 참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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