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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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불꽃놀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 부드럽고 매혹적인 형형색색의 불꽃이 어둠 속으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금세 그 속에 잠겨 사라져 버리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안타깝게 그리고 더 빠르게 사그라져 버려야만 하는... (p. 70, 크놀프에 대한 나의 회상)'

직장을 한 번도 옮기지 않은 채 하나의 직업을 가졌던 나는 불꽃놀이 같은 삶을 부러워한 적이 많다. 그렇다고 그 삶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면? 분명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과 내 본성 사이에 간격은 너무나 멀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꾸리는 삶이 나와 가깝다.


<크눌프>는 세 개의 이야기다. 젊은 크눌프가 폐병으로 입원한 병원에서 퇴원한 후 무두장이 친구 집에서 머물렀을 때 이야기인 '초봄', 화자와 크놀프 사이의 대화와 감정을 담은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리고 병이 깊어져 죽음을 앞둔 크눌프가 고향을 찾아와 과거를 떠올리며 신과 대화를 나누는 '종말'로 구성됐다.

무두장이 로트푸스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으며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크눌프에게 자신의 삶을 뻐기며 방랑과 무위도식을 이제 그만두라고 충고하지만,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며 사는 크눌프를 질투한다. 그런 로트푸스에게 크눌프는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일 뿐이라면서 부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고는 두 살짜리 아이가 있지만 입양돼 손을 잡아보거나 키스를 해주어도 안되는 고독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놀프와 같이 방황했던 화자 '나'는 고독과 외로움에 갇혀있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방랑하는 크놀프의 삶 그리고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그의 삶에 가치를 느낀다.

'크눌프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 (p. 79, 크놀프에 대한 나의 회상)'

고향으로 돌아온 크놀프는 친구인 의사 마홀트에게 방랑하는 삶이 시작된 계기를 고백한다. 열두 살 때 만나 사랑했던 두 살 많은 프란치스카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크놀프는 약속을 믿지 않았고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가 됐다.

프란치스카가 자신의 기다림을 헛되게 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크눌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 사람들과 그곳의 모습 모두 변했다. 아름다운 젊은 날에는 사랑받았을지 모르나 이제 남은 건 나이 들고 병들어 혼자 남은 크놀프뿐이였다.

'그 길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 내내 그는 어긋나고 뒤엉켜버린 자신의 삶 속에 깊이깊이 빠져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질긴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나 위로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병마가 그를 다시 덮쳤다. (pp. 128, 129, 종말)'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자책하며 크놀프는 신을 찾아 나섰다. 어떤 기회도 살리지 못한 이룬 것 없는 실패한 삶이었다. 계획도 목표도 없었다. 남들처럼 살지도 못했다. 오답투성이 인생을 신께 내보이며 한탄했다.

신은 크놀프에게 이루지 못한 것을 질책하는 대신 크놀프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줬다.
'"보아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 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 (p. 134, 종말)'


불꽃놀이 같은 삶을 부러워했던 건 타인의 삶과 나를 비교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내가 끊임없이 뭔가를 이뤄냈다고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타인의 속도와 맞추느라 나만의 속도로 나아갈 여유가 없다. 나만의 방식으로 살려면 고독을 견뎌야 했다. 난 그 고독이 두려웠지 싶다. 그래서 사회가 정해준 틀에서 벗어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아온 삶에 만족하나... 크놀프를 동경했을 뿐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지만 오답투성이 삶인 건 크놀프와 다름없다.

요즘 기독교인으로서 내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 자주 생각한다. 내 삶과 나를 화해시켜주는 존재다. 위로받고 싶을 때, 나와 다툼이 벌어졌을 때... 찾아가는 존재다. 너만의 방식대로 살아온 삶, 그 자체로 존귀하다고 말해주는 분, 크놀프가 만났던 그분이다.

'... 크눌프와 같은 인물들은 나에겐 매우 매혹적이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유용한 사람들처럼 해를 끼치지는 않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닐세. (...) 또한 내가 독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 연약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일세. '
- 1954년 1월 에른스트 모르겐탈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p. 141)'

헤르만 헤세가 애정했다고 하는 크눌프는 불꽃놀이 같은 삶을 살았다. 크눌프는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시인이고 휘파람 불며 노래했다. 내면의 음성대로 살았다. 밝은 성품과 여러 가지 재주로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어딜 가나 그는 사랑받고 환영받았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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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최정애 옮김 / 비트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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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유로 유럽 내 반유대주의가 형성됐다. 그런 반감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에 의해 인종 청소라는 학살로까지 이어졌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의 유대인에 대한 역사적 부채감은 이스라엘이 일으키는 전쟁을 비판하는데 주저하게 만들었다.


'나는 안젤름 키퍼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 대해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p. 69)'

비트윈은 노르웨이 출신의 사유하는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세 번째 에세이 <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를 <나는 이래서 쓴다>, <뭉크를 읽는다>에 이어 출간했다. 2014년 어느 날, 크나우스고르는 안젤름 키퍼의 전시를 찾아 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예술 세계에 물음표를 갖게 된다. 안젤름 키퍼에게 편지를 썼다. 만남이 이루어졌고 5년여 동안 동행하며 키퍼의 예술 세계를 탐구한다.


안젤름 키퍼는 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직전에 태어났다. 그가 속했던 사회 공동체는 전쟁을 일으켰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하지만 키퍼는 자라면서 그 누구에게도 이 공동체가 저지른 만행을 듣지 못했다. 독일군 장교였던 아버지마저 전쟁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키퍼는 그의 작품으로 이 침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 책 편집자는 후기에서 키퍼의 작품과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를 잇는다. 소설 속 주인공 한나는 나치에 협력한 전범으로 최고형이 선고되는데도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유럽에서 당했던 비인간적인 차별과 학살에 몇 배나 더해 앙갚음이라도 하듯 팔레스타인 사람을 죽인다. 이를 지켜보면서 유럽은 침묵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침묵하듯이 말이다.

침묵에는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뉘우치려는 마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런 침묵이 지금 중동지역에서 벌어지는 참혹함을 결과로 가져왔다.


크나우스고르는 키퍼에게 언제부터 그림에 납을 사용했는지 질문한다. 이어서 납을 사용하게 된 계기도 묻는다.

'다른 그림들은 납이 여러 가지 무늬로 굳혀진 형태였다. 대부분 거칠고 파편화된 인상을 주었고, 무언가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 폭력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어쩌면 생물학적인 것도 넘어선, 광물적인 폭력이었다. 이 그림들은 돌무더기와 금속 더미들의 폭력과 맞닿아 있었다. (p. 54)'

한편 납은 폭력과 더불어 통제 밖에 있을 때는 아름다움을 만들기도 한다.

'그림 위로 납을 붓는다는 것은 분명히 그림에 대한 통제를 놓아버리고 완성된 결과를 우연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우연은 눈 결정이 아름다운 무늬로 얼어붙게도 만들고, 아이가 밟은 웅덩이의 얼음이 아름다운 무늬로 금이 가게도 만들며, 푸른빛이 도는 녹색 곰팡이가 빵 위로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며 퍼져나가게도 만든다. 이 모두가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pp. 54, 55)'

크나우스고르는 '모든 예술은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을 다룬다. (p. 55)'라고 말한다. 키퍼는 물감과 납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다른 어떤 것을 다루려고 했을까. 납은 중세 시대 연금술사들에게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재료였다.

키퍼는 독성을 지닌 무거운 납으로부터 폭력을 감추려는 부모 세대의 침묵을 본듯싶다. 납을 그의 예술 세계로 가져온 이유는 납이 금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일 거고. 침묵을 깨고 뉘우칠 때 부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제야 납은 다른 어떤 것, 아름다운 금이라 할만한 것이 된다.


키퍼는 세 가지 풍경, 숲과 강과 평원을 반복해서 그렸다. 숲은 민족주의와 폭력으로 결합된 나치즘같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강과 평원은 다르다.

''강'은 변화무쌍하며 늘 흐르고 있고, 경계가 있는가 하면 또 동시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키퍼의 작품 속 강은 밝고 색이 화려하며, 어쩌면 변화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평원'은 열린 것이자 무대이며,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격전지이기도 하지만 밀밭이기도 하다. 사람은 없지만 실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죽음이기도 하다. (p. 88)'

안젤름 키퍼는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언제까지 부채감을 가지고 침묵할 것인가. 전쟁을 보고도 침묵할 것인가. 죽음을 앞에 두고도 한나처럼 비밀을 드러내지 않을 것인가. 납이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야만 부어놓은 납이 흘러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듯 부채감을 들어낸 자리에 정의가 들어선다고...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장소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장소 말이다.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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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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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왈 공자왈'이란 말의 쓰임새는 탁상공론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이론을 비웃을 때다. <맹자>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과연 맹자의 말이 그럴까?'였다.

맹자는 제14편 <진심 하> 9장에서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내와 자식을 물론 그 어느 누구도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며 솔선수범을 말한다. 그리고 맹자 자신도 먼저 행동으로 보여준다. 제국의 왕들 앞에서 자신의 이론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음 물론 절대 쫄지 않는다. 대장부大丈夫로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몸소 실천한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말로 하기 어렵다. 그 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데, 곧게 길러서 해치는 것이 없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 기는 정당함과 도리에 들어맞아야 하니, 이렇지 않으면 (호연지기가) 위축된다. (pp. 108, 109 <공손추 상> 2장)'

왕 앞에서 역성혁명론을 말하면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 맹자의 모습은 맹자와 맹자의 말을 '공자왈 맹자왈'로 폄훼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했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로움을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고 하며, 잔적殘賊 한 사람을 '한 사내'라고 하니, 한 사내인 주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었지,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p. 83 <양혜왕 하> 8장)'

맹자는 느닷없이 우물로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 구하려는 불인지심不忍之心, '사람들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p. 122 <공손추 상> 6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성선설을 인간의 본성으로 사단四端을 설명하는 맹자의 시선이 따뜻하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로움(義)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혜(智)의 단서다. 사람이 이 네 가지 단서(四端)를 가지고 있음은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pp. 122, 123 <공손추 상> 6장)'

그러니 사람, 한 나라의 백성은 왕에게 인仁과 의義라는 왕도정치의 실현 대상인 것이다.
'"노인장께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p. 34 <양혜왕 상> 1장)'

왕 노릇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자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p. 59 <양혜왕 상> 7장)'도록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 주고 충분히 부모를 섬길 수 있고 충분히 아내와 자식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여민동락與民同樂, 왕과 함께 즐길 대상이기도 하다.
'"혼자 음악을 즐기시는 것과 다른 사람과 음악을 즐기시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왕이) 말씀하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 (...)
"...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백성과 함께 즐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백성과 함께 즐기신다면 (훌륭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pp. 66, 67 <양혜왕 하> 1장)'

<양혜왕 상> 7장에서 제나라 선왕은 종의 틈에 피를 바르는 의식에 끌려가는 소가 벌벌 떠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한다. 이 일로 백성으로부터 선왕이 오해를 받자 맹자는 왕의 측은지심을 백성이 모르고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고 그 마음을 백성에게 베풀라고 조언한다.

2024년 12월 내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와 베네수엘라를 농락하고 이란을 무참히 폭격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란 자에게서 측은지심이란 걸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인仁과 의義를 갖춘 왕도정치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없다. 그들도 그들이지만 그들 앞에 맹자처럼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도 이 시대의 비극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나 힘을 가진 깡패가 세계를 제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알다시피 맹자孟子의 본이름은 맹가孟軻이다. 이름 끝에 자子가 붙은 건 그가 스승이기 때문이다. 2400년 전 스승의 가르침이 현재도 유효한 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과 그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의 사유와 맹자의 호연지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2400년 전에 쓴 <맹자>를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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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삶의 언어가 될 때 - 고요히 나를 회복하는 필사의 시간
김종원 지음 / 큰숲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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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래 글을 낭독하고 필사한 후 철학을 내 삶의 언어로 만드는 하루를 시작해보자.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지금
나는 힘들고 우울한 시기를 만난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무너지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며,
멈춘 게 아니라 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
철학은 반드시 내 삶의 언어가 되어
앞으로의 나날을 빛낼 것이다." (p. 6)'

인문학 멘토 김종원 작가의 가이드에 따라 철학자의 글을 사색하고 그 글을 종이 쓴 다음 질문과 함께 내 삶의 언어로 삼아보는 작업을 한 지 십여 일이 넘었다.

퍼스널 컴퓨터가 내 책상에 등장하고부터 글을 쓰는 일이란 메모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요즘 필사하면서 내 글씨를 살펴보게 됐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있나. 자세히 볼수록 더 그렇다.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손떨림으로 내 마음대로 선이 그어지질 않는다. 삐뚤빼뚤...

천천히 써보라는 조언에 그렇게 해보지만 천천히 쓸수록 더 글씨가 흐트러지고 만다.

어쩌겠나. 그래도 열심히 필사해 보려고 한다. 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집중할 수 있어서다. 요즘 여간해서 집중하질 못한다. 책을 읽을 때도 딴 생각이 들어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다. 글을 쓸 때만큼은 손떨림도 잡아보려 애쓰고 선도 똑바로 그어보려고 하다 보니 온전히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문장을 곱씹어 보게 된다.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방황을 성장의 도구로 만드는 괴테의 글,
'그는 훗날 자신의 성장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짧게 압축해서 말했다. "나는 뜨겁게 사랑했고, 그리고 아팠고, 그리하여 배울 수 있었다." (p. 14)'

내 운명을 사랑하도록 하는 니체의 글,
'"내가 항상 누군가에게 귀로 들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한 것처럼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얼음 덮인 산꼭대기 위에서
고요히 살아가는 것이다." (p. 94)'

그리고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할 나만의 언어를 찾도록 안내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글...
'"당신이 아는 것만이 사실이며,
사실의 합이 당신이 살아갈 세계다.
우리는 아는 것 이상의 세계는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p. 175)'

손이 떨리고 글씨는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쓰다 보면 그들의 철학이 내 삶에 언어가 되겠지. 그리고 나이 들어 떨리는 손을 잡아주듯이 내 삶도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아주겠지... 필사하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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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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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군지를 설명하시려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때려 죽게 내버려둔 채 떠났다. 그 길을 지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그를 피해 반대쪽으로 지나갔다. 그 길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그를 불쌍히 여겨 여관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120쪽)의 이야기이다. (p. 130, 옮긴이의 글)'

빌 펄롱은 조금 더러운 석탄 배달을 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이다.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과 함께 사는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다. 다섯 딸아이 모두 제각각 재주도 있고 또 운도 좀 따라서 그리 가난하지 않게 펄롱은 나름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지만 펄롱은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다. 새벽까지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 44)'

마을에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웃들 그리고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펄롱의 마음은 불 펀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 갔다가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우리 딸들? 이 얘기가 우리 딸 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펄롱이 물었다.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이런 생각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아일린이 말했다.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 아일린은 초조한 듯 잠옷의 자개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pp. 55, 56)'

아내 아일린은 펄롱이 수도원 일에 끼어들까 봐 걱정돼 딸아이들이 피해볼 수 있으니 잠자코 있으라고 주의를 준다. 침묵하고 안정을 택할 건지 여자아이 세라를 수도원에서 구해 낼 것인지 펄롱은 고민한다.

펄롱의 어머니는 열여섯 살부터 미시즈 윌슨의 집안일을 하며 지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펄롱을 낳았지만 미시즈 윌슨은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를 내쫓지 않고 계속 일하도록 했을뿐더러 크리스마스가 되면 펄롱의 선물을 챙겨주며 따뜻하게 대해줬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p. 120)'

도움을 받고 자란 펄롱은 세라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펄롱은 세라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한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왜 강도를 만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았을까. 그 누구보다 먼저 돕는 일에 나서서 실천해야 할 종교 지도자가 아닌가. 그 사람이 도와줘야 할 유대인인지 죽게 놔둬도 되는 적대적 관계의 사마리아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는 해석한다. 도와줘야 할 이웃도 구별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에게 도와줘야 할 이웃은 누구나였다. 차별하지 않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 1996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로마 가톨릭 수도회가 실제 운영한 곳이다. 학대, 감금, 강제 노역 등 법을 무시한 잔혹행위가 벌어졌다. 희생당한 여성과 아이들이 3만 명에 이른다. 그 사실을 소설 속 펄롱의 이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왜 침묵했을까.

돕는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 본체만체할지 아니면 도와줘야 할지 갈등을 겪는다면, 그 이유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차별 말이다. 도와주었다가 막달레나 세탁소가 있던 마을 사람들처럼 내가 당하게 될 불이익이 두려워 침묵했을까?

작가 안보윤은 그의 에세이 <외로우면 종말 (작가정신)>에서 일상의 무너짐은 사소한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반대로 한 사람의 일상이 바로 서는 것도 사소함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엊그제 지인이 추천해서 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허무주의 상징하는 에브리씽 베이글에 맞서 저항하는 다정함의 상징으로...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인형 눈알, 구글리 아이를 내세우더라.

차별이든 침묵이든 그 사소하다 여길 만한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은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 것이다. 왜?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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