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왕국 -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
데이비드 스펜서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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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는가. 우리 집 베란다에도 식물 여럿이 자라고 있지만 바라만 본다. 가끔 중얼거리는 말을 건네긴 한다. 하지만 식물이 알아들을 거란 생각으로 말하진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식물이 어떤 이야기를 내게 전해줄지 궁금하지도 않고 귀 기울인 적도 없다.

'식물학에는 식물을 동물보다 열등한 생물로 보는 이런 집단적 열등 콤플렉스를 지칭하는 '식물 맹시'라는 용어까지 있다. (p. 248)'

언제나 가만히 제자리에 있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라는 '식물맹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과 인간의 진화 역사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면?' <뿌리 왕국>의 저자인 독일의 식물생물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데이비드 스펜서가 우리에게 내놓은 질문이다.

게다가 곤경에 처한 우리 인간에게 그 어느 때보다 식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식량, 에너지, 주거를 위해서는 물론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로서, 팀 동료로서 그리고 멸종과 기후 위기, 제한된 공간 때문에 엄청난 독창성이 요구되는 어려운 미래에 맞서 싸울 동맹자로서 (p. 140)' 식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웅장한 진화를 아직 겪지 않은 태초의 식물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디작은 생명체였다. (p. 19)' 이랬던 식물이 어떤 기술을 습득해 현재 지구를 만들어놓았을까. 동물과 인간이 지구에 등장했을 때는 이미 식물이 지구를 소화하기 쉽게 씹어놓고, 가공하고, 다듬어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침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인간은 먹거리를 외부에 의존했지만 식물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공생을 택하기도 했다. 한자리에 뿌리내리고 살려고 동물을 지배하는 법도 익혔고, 특정한 것을 기억해 내는 능력을 갖췄으며, 매년 작은 죽음과 작별이라는 재생을 거듭했다.

'얼마 전에 나는 몬테네그로의 바르(Bar) 근처에서 '스타라 마슬리나'라는 아주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보았다. (...) 적어도 2,2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장 멋지게도 이 나무는 여전히 올리브를 생산한다! (p. 48)'

몸의 90퍼센트를 잃어도 식물은 살아남는다. 거의 죽었다가 부활하는 셈이다. 식물은 인간의 질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능력도 있다. 2000년 전 유대 지방의 누구와 비슷하지 않은가? 신을 숭배할지언정 식물의 지성과 진화적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 건, 순전히 인간이 가진 오만함 때문이다.

인간이 들을 수 없을 뿐 식물은 '화학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수다 떨며 식물의 성장, 동물의 행동, 토양의 변화 등 전제 생태계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 다양한 모양과 색깔로 수분을 위해 곤충과 새를 불러들이고, 씨앗을 퍼뜨리려고 잘 보이는 색깔의 열매로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도 끌어들인다.

식물 스스로 보호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광합성으로 만들 수 없는 독소, 효소를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불을 내기도 한다.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곤충을 끌어들여 활용하기까지 한다. 초능력에 가깝다.

'"(개미가) 악마의 정원을 만드는 것은 보금자리 구축의 한 예다. 개미는 다른 모든 식물을 죽여, 둥지를 틀 히수타 줄기를 더 많이 확보한다." 프레드릭손은 숲의 현재 성장률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악령의 정원은 800살이 넘었고, 300만 마리의 일개미와 1만 5,000마리의 여왕개미로 구성된 단일 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p. 161)'

식물 군집을 이루어 다양성을 유지한다. 독립적이면서 공동체를 이루면 강해진다는 사실을 식물은 터득했다. 단일 농작으로 생태계 다양성을 무시하는 인간보다 지혜롭다.


땅속에는 인간의 규칙과 다른 자연 규칙이 존재한다. 식물과 다른 구조를 가진 미생물과 논의하고 예측하고 계산할뿐더러, 어떤 것이 유용하고 방해가 되는지도 구분한다. 다른 손을 빌리기도 하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상품을 교환하기도 한다. 모든 숲과 밭, 심지어 베란다의 화분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식물은 인지능력을 가진 복잡한 생물이다.

인간과 다른 구조를 가진 식물, 식물이 그러했듯이 이제는 인간이 식물과 공진화해야 할 때다. 인간만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서로 다른 말과 규칙으로 생긴 오해를 과학의 힘으로 이해하며 풀고 상대방의 말과 규칙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다.

산책할 때 주변에 보이는 식물을 이제 상호 존중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식물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정보로 식물이 가진 초능력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자연보호라는 용어를 항상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인간 보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태계 서비스라는 쿠션의자에 함께 앉아서, 자신의 엉덩이를 걱정한다. 쿠션을 더욱 푹신하게 하고, 수선하고, 소중히 관리하면, 우리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제공해 주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연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p.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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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 하다 앤솔러지 2
김솔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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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작가의 소설 <한복 입은 남자> 원작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를 관람하면서 2025년 마지막 날은 아내와 함께 마무리했다. 역사에서 사라진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미스터리를 다룬 창작 뮤지컬이다. 이 이야기는 '혹시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그림 속 남자가 장영실이 아닐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완성됐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 조선의 비차와 다빈치 비행기 설계도가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장영실은 역사 기록에서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탐험가인 명나라 정화 장군의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 다빈치를 만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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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두 번째 단편소설집 테마는 <묻다>이다. 김솔, 김홍, 박지영, 오한기, 윤해서 다섯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다.

김솔의 <고도를 묻다>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고도에 대해 묻는다. 왜 고도라 부르는지 (<고도를 기다리며>이야기를 해줬더니 딸아이도 같은 질문을 했다.ㅎ). 고도가 누군지. 고도를 만나면 어떻게 알아볼지. 왜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고도에 대한 물음을 갖고 묻는다.

김홍의 <드래곤 세탁소> 속 유나는 만나기로 한 날 사고로 죽은 정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계속 생각한다. 그런 유나에게 옻을 안 넣은 옻닭을 팔았던 드래곤 세탁소 주인은 뜻밖에 말을 한다.
'"답으로 사는 게 아니야. 물음이 있어서 사는 거지." (p. 87)'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인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 (p. 87)'

박지영의 <개와 꿀>의 주인공 수경 씨는 경계성 지적 장애인으로 전시장 지킴이로 일한다. 관람객들은 힌 가해 보이는 수경을 보며 이런 말을 한다. '개꿀이네. (p. 91)'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난 수경은 이른바 스스로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개꿀이란 소릴 마땅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내가 정상인 거냐고.

'(네. 괜찮아요.)
(네. 좋아해요.)
(네. 좋아요.)
질문은 달라도 답변은 매번 비슷합니다. (...) 제가 수용과 인정의 정답을 말하지 않으면 저는 틀린 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이 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으니까요. 그래서 제 귀는 어떤 질문도 달게 만드는 꿀 먹은 귀가 됩니다. (pp. 139, 140)'

오한기의 <방과 후 교실> 주인공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 주동이 받아온 공포 동화 숙제를 같이 하며 질문한다.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무서워하는 장소는 어딘지...

윤해서의 <조건>에서는 하나하나 모든 일마다 조건을 따져 묻는 우리에게 묻는다. 차마 대답할 수 없는 걸 묻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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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일까? 묻고 또 물어야 삶에 의미가 있다. 답을 해줄 사람이 없다고 따라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다. 삶에는 여전히 물을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음이 있어서 살아간다.

네 삶이 정상인의 삶이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나에게 개꿀이라고 한다면 들어마땅한 소리라며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니 누군가의 다름을 인정하고 틀렸다는 생각은 버리자.

서로 묻도 답해야 상대방을 알아갈 수 있다. 딸아이를 비롯한 가족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물을 때는 답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 차마 꺼내지 못해 답할 수 없는 걸 묻는 건 곤란하다.

세상이 내게 묻는다. 나도 세상을 향해 묻는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묻는다. 물음에서 뮤지컬 스토리가 탄생했듯, 묻고 답하는 삶이라야 내 삶의 스토리가 풍성해진다. 묻고 답하는 것이 삶이고 삶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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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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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 조카의 쌍둥이 아이 첫돌을 축하하려고 신라호텔에서 가족이 모였다. 로비에 앉아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천장에 반짝거리는 것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역시 외국 정상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많이 썼나 싶었다. 아니었다. 박선기 작가의 작품으로 '조합체 시리즈' 중 하나였다.

'형태가 고정돼 있는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약한 바람 한 줄기에도 어김없이 흔들립니다. 항상 우리 곁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을 작품으로 보여준 거죠. (p. 117)'


문화부 기자로 일했던 이선아 작가는 <걷다가 예술>에서 공원이나, 호텔 로비, 백화점 그리고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예술작품과 그 작품세계를 안내한다.

광화문 흥국생명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 작품을 보면 누구나 '아 이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원래 작품명('노동자')에서 알 수 있듯이 <해머링 맨>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해머링 맨>이 반복적으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은 쉴 새 없이 일하는 현대인을 뜻한다. 삶의 무게(망치를 든 오른팔만 4톤)가 만만치 않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p. 17)'

2014년과 2022년, 잠실 석촌호수에 떠 있던 18미터 높이의 노란색 <러버 덕>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작품으로 '평등'이라 메시지가 작품에 담겼다. 강서구 마곡의 <LG아트센터 서울>는 여느 공연장처럼 보이지만 '노출 콘크리트', '빛', '물'로 알려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이다.

원래부터 놓여있던 것처럼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시청역 프레스센터 앞 거대한 철판과 돌 네 개. 우리가 자랑하는 예술가 이우환의 대표 연작인 <관계항 Relatum-만남의 탑>이다.

'그래서 이우환의 세계에서 돌과 철판은 서로 형제 관계입니다. "돌과 철판의 만남은 자연과 문명의 대화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내 작품"이라는 게 그의 얘기입니다. (p. 105)'

천안 아라리오 조각광장에 가면 초라한 행색으로 서 있는 6.5미터 높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부러진 다리에 자선기금 모금 상자를 든 조각상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채러티>다.

'하지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는지 체념한 듯한 표정이죠. 허스트는 이를 통해 자선이 갈수록 외면받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합니다. (p. 153)'


이렇듯 우리는 오고 가는 일상에서 예술작품을 만난다. 건축주가 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의 일정 비율(보통 1% 이하)로 미술장식품을 설치하는 (당초 권장사항이었지만 1995년부터는 의무로 바뀐) 법 덕분이다.

작품에는 작가의 집념과 고뇌가 녹아있을뿐더러 처절하게 찾아낸 작가의 창작세계가 담겨있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예술품에서 가치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신라호텔 로비에 있던 나처럼 작품인 줄 몰라보고 인테리어 취급을 한다면 말이다. 작품이 선사하는 소중한 순간을 놓친 셈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작품세계를 알고 나면, 거리의 예술작품에서 뜻깊은 순간을 갖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처럼 작품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라호텔 로비에 전시된 박선기 작가의 작품 <조합체 130121>,

너비 7미터에 달하는 공간에 투명 낚싯줄에 매달린 5만여 개 아크릴 비즈가 공기의 흐름에 나부끼며 은하수를 연출하는 듯하다. 박선기를 '숯의 작가'로 부른다. 자연을 상징하는 숯을 낚싯줄에 매단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낚싯줄에 매달린 비즈가 은하수라면 숯은 수묵화水墨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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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서버
로버트 란자.낸시 크레스 지음, 배효진 옮김 / 리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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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수메르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는 신이 친구 엔키두를 죽이는 걸 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길가메시는 여행을 다니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속에 먹으면 영생에 이르는 불로초를 얻는다. 하지만 방심한 사이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 버려 영생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신은 인간에게 경고한다. 신만이 누릴 수 있는 영생을 원한다고? 그런 허황된 꿈은 버려라.


생명과학자 로버트 란자가 SF 문학의 거장 낸시 크레스가 함께 쓴 소설 <옵서버>는 양자 역학과 다중 우주론으로 영생이 가능할지도 모르는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여동생 엘렌과 힘겹게 살아가는 신경외과 의사 캐롤라인 소암스 왓킨스 (캐로), 병원 내 성추행 피해를 신고했다가 오히려 일자리를 잃게 되는 처지가 된다. 그때 전혀 알고 지낸 적 없는 노벨상 수상자인 큰할아버지 새뮤얼 왓킨스로부터 자신의 비밀 연구 프로젝트에 함께하자는 제안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이 연구 프로젝트의 목적은 죽음을 피하는 거죠? 단순히 물리학 실험이나 뇌 지도화 연구를 위해 다중 우주의 다른 분기에 들어가려는 게 아니잖아요. 박사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그 다른 다중 우주에서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박사님이 존재하는 분기를 '창조'하려는 것 아닌가요?" (p. 167)'

캐로가 해야 할 일은 뇌가 정보 처리하는 알고리즘을 변경하는 첨단 칩을 뇌에 심는 수술이다. 칩을 이식받은 사람들은 각자 의식으로 만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나 위로를 얻는다. 캐로는 마침내 아이를 잃고 괴로움 속에 있는 동생 엘렌에게도 칩을 이식하는 수술을 하기로 맘먹는다.

그리고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선 캐로마저 칩을 이식받고 죽은 다음, 자신의 의식으로 창조한 세계를 마침내 만난다. 새뮤얼 왓킨스가 죽은 다음 메시지를 보내온 그 새로운 세계, 과연 그 세계는 길가메시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도 없고, 삶마저도 두렵지 않는 그런 세계일까?


'그가 창안한 '관찰자의 우위성'이라는 이론은 (...) 그의 생물 중심 이론의 핵심은 물질과 진화가 의식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의식이 물질과 시간을 만들어냈다. 그 무엇도, 즉 지구도, 은하도, 부엌도, 심지어 우리 뇌조차도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 내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p. 446)'

이 소설의 공동 저자 로버트 란자는 생물중심주의 Biocentrism을 주장한다. '현실은 관찰에 의해 형성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다. 시간도 공간도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도구라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 두 입자가 얽혀 있다면, 하나를 측정할 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른 입자가 영향을 받는다는 '얽힘 현상'을 특징으로 한 '양자 역학'과 행동한 사람의 관찰을 포함해 어떤 행동이 관찰될 때마다 우주가 분기된다는 '다중 우주론'이 더해질 때, 오랜 시간 인간이 꿈꿔왔던 영원한 삶이 현실이 되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의식이 모든 걸 창조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창조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의 선택으로 내 삶을 결정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의식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현실을 무수히 바꾸며 살아간다.

실패로 절망스러운 현실에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서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가 빠져나오기도 하고, 부모 품에 의존하다가 독립하기도 하고, 모험의 세계에 뛰어들기도 하고.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가 깨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가 혹시 나비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비가 내 꿈을 꾼 건지도...

올해가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라고 한다. 100년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약 300년 전에 장자는 양자역학 개념을 과학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의식으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식으로 창조한 인간의 세계와 나비의 세계를 넘나들었겠지. 아니... 장자뿐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는 이미 자신의 의식이 창조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덧,
양자역학을 알고 싶다면 그 어려운 개념을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나가는 이 소설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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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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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전쟁이 없던 시절의 일상을 행복으로 바꿔놓는다. 전쟁 중 일상은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 불행 속에는 사랑할 수 없는 비극도 포함돼있다. 전쟁은 사랑을 방해한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전부인데 말이다.

"...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휴가 중인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지. 두어 가지 약속 날짜와 우연한 이름 하나밖에 적혀 있지 않은 종이쪽지와 같아.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p. 221)'


<개선문>은 독일 정부로부터 국적을 박탈 당한 레마르크가 미국 망명 시절인 1946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작품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비롯한 이전 네 작품 전체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쟁 기운이 감도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인 외과의사로 게슈타포에게 추적당하던 친구 둘을 도주시켰다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고문 받던 중 탈출해 파리에 불법 입국한다. 피난민이 돼버린 라비크는 베베르를 비롯한 프랑스 의사의 수술을 몰래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라비크는 파리 거리에서 술에 취한 이탈리아 출신 배우 조앙 마두를 만난다. 라비크의 친구 러시아 귀족 출신 모로소프는 클럽 세라자드에서 10년째 일하는 도어맨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라비크는 세라자드에 조앙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전쟁이 몰고 올 불안은 이 둘의 사랑을 서로 다른 색깔로 만들어 놓았다.

'"상관이 있지. 사랑이란 같이 늙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런 건 전 몰라요. 사랑이란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걸 말하지요. 그건 알아요." (p. 193)'

삶의 의지를 잃고 불안에 떨 때 라비크는 조앙이 일어서도록 도움을 줬다. 그런 이유로 조앙은 라비크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조앙에게 라비크는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다. 반면 라비크는 사랑하는 조앙과 같이 늙어갈 자신이 없다. 삶의 뿌리가 잘려버린 피난민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그가 정착할 곳은 없다.

신분이 들통나 스위스로 추방당한 사이 조앙은 다른 남자와 동거하며 지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라비크는 조앙과 결혼은 피난민이 절대 누릴 수 없는 생활이란걸, 서로 상처만 주게 될 뿐이란 걸 알았다. 라비크는 조앙을 불안 속에서 건져냈지만 라비크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앙의 사랑을 받아들여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기회를 애써 외면했다.

'"라비크, 우린 이대로 살아야 하나요?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나요? 같이 살면서 우리 물건을 갖고, 밤에도 안전하게 함께 살 수는 없을까요? 이런 트렁크나 공허한 나날, 언제까지나 정들지 않는 이런 호텔 방 대신에?"
라비크는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어이 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닥쳐오리라 예기하던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 그것이 우리 생활이라고 생각하나?" (p. 238)'


하케에 대한 복수심이 라비크에게서 떠난 적이 없다. 게슈타포 하케는 고문으로 라비크의 친구 둘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연인 시빌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망각.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그것은 공포와 위안과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 망각이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어느 누가 완전히 망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기억의 잔재. 더 살아갈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p. 54)'

하케가 한 일을 망각할 수 없었다. 과거를 잊을 수 없어서 다가오는 조앙의 사랑, 헤그시트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하케를 살해해 복수를 완성했다. 비로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헤그시트룀은 미국으로 떠났고, 동거인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조앙은 숨을 거두며 라비크의 곁을 떠났다.


'"불법 입국이지?"
"그렇습니다."
"왜?"
"독일에서 도망 왔습니다. 서류를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성은?"
"프레젠부르크."
"이름은?"
"루트비히."
"유대인이오?"
"아닙니다."
"직업은?"
"의사."
그 사람은 적었다. "의사?" 하고는 쪽지 한 장을 집어 들고 보았다. "라비크라는 의사를 알고 있소?"
"모르겠는데요." (pp. 614, 615)'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파리는 더 이상 라비크의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이제 라비크로 살아갈 수조차 없다.

전쟁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휘황찬란한 영광을 지닌 개선문이 빛을 다 잃지 않고 그나마 희미할 때, 불안한 마음에 고독 속에 앉아있을 게 아니라 사랑을 했어야 했다. 기대어오는 조앙의 사랑,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손길을 내미는 헤그시트룀의 사랑, 베베르와 모로소프의 돕는 우정, 다리를 잃은 잔노를 비롯해 뤼시엔, 롤랑드 등 라비크 주변 사람들이 보내온 감사의 사랑... 이 모든 사랑에 의지해 불안에서 벗어났어야 했다.

모로소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라비크는 파리 경찰 트럭에 실려 파리를 떠난다.
'트럭은 와그람 거리를 달려서 에트왈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아무 데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광장에는 짙은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p. 617)'

전쟁이 시작되고 개선문마저 암흑 속에서 사라진 시대에는 사랑으로부터도, 우정으로부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도 모두 절연당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남의 말로 서로 얘기해왔다. 지금 비로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자기 말을 쓰고 있었다. 언어 장벽은 무너지고 두 사람은 지금까지보다 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Baciami(키스해 주세요)......."
그는 그녀의 바싹 마른 뜨거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었어, 조앙...... 언제나..."
"Sono...... stata...... perduta...... senza di te(당신이 안 계시면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더욱 고독한 사람이었을 거야. 당신은 모든 광명이었으며, 기쁨과 슬픔이었어...... 당신은 나를 흔들어주었고, 내게 당신과 나 자신을 주었어. 당신은 나를 살아가게 한 거야." (p. 606)'

그러니 지금, 빛이 사라져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암흑 상태가 되기 전에, 불안을, 과거를 핑계 대며 남의 말로 얘기할 게 아니라 온전히 나를 보여주는 자기 말로 사랑해야 한다. 현재의 일에만 정열을 쏟는 조앙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이 짧은 인생이 단 한 번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마구 지나가버리잖아요..." 그녀는 두 손을 따뜻한 바위에 놓았다. "저는 대단치 않은 여자예요. 라비크, 저는 역사적 시대에 살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세상만사가 이렇게 귀찮고 괴롭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뿐이에요" (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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