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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은 전쟁이 없던 시절의 일상을 행복으로 바꿔놓는다. 전쟁 중 일상은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 불행 속에는 사랑할 수 없는 비극도 포함돼있다. 전쟁은 사랑을 방해한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전부인데 말이다.
"...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휴가 중인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지. 두어 가지 약속 날짜와 우연한 이름 하나밖에 적혀 있지 않은 종이쪽지와 같아.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p. 221)'
<개선문>은 독일 정부로부터 국적을 박탈 당한 레마르크가 미국 망명 시절인 1946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작품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비롯한 이전 네 작품 전체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쟁 기운이 감도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인 외과의사로 게슈타포에게 추적당하던 친구 둘을 도주시켰다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고문 받던 중 탈출해 파리에 불법 입국한다. 피난민이 돼버린 라비크는 베베르를 비롯한 프랑스 의사의 수술을 몰래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라비크는 파리 거리에서 술에 취한 이탈리아 출신 배우 조앙 마두를 만난다. 라비크의 친구 러시아 귀족 출신 모로소프는 클럽 세라자드에서 10년째 일하는 도어맨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라비크는 세라자드에 조앙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전쟁이 몰고 올 불안은 이 둘의 사랑을 서로 다른 색깔로 만들어 놓았다.
'"상관이 있지. 사랑이란 같이 늙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런 건 전 몰라요. 사랑이란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걸 말하지요. 그건 알아요." (p. 193)'
삶의 의지를 잃고 불안에 떨 때 라비크는 조앙이 일어서도록 도움을 줬다. 그런 이유로 조앙은 라비크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조앙에게 라비크는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다. 반면 라비크는 사랑하는 조앙과 같이 늙어갈 자신이 없다. 삶의 뿌리가 잘려버린 피난민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그가 정착할 곳은 없다.
신분이 들통나 스위스로 추방당한 사이 조앙은 다른 남자와 동거하며 지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라비크는 조앙과 결혼은 피난민이 절대 누릴 수 없는 생활이란걸, 서로 상처만 주게 될 뿐이란 걸 알았다. 라비크는 조앙을 불안 속에서 건져냈지만 라비크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앙의 사랑을 받아들여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기회를 애써 외면했다.
'"라비크, 우린 이대로 살아야 하나요?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나요? 같이 살면서 우리 물건을 갖고, 밤에도 안전하게 함께 살 수는 없을까요? 이런 트렁크나 공허한 나날, 언제까지나 정들지 않는 이런 호텔 방 대신에?"
라비크는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어이 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닥쳐오리라 예기하던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 그것이 우리 생활이라고 생각하나?" (p. 238)'
하케에 대한 복수심이 라비크에게서 떠난 적이 없다. 게슈타포 하케는 고문으로 라비크의 친구 둘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연인 시빌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망각.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그것은 공포와 위안과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 망각이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어느 누가 완전히 망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기억의 잔재. 더 살아갈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p. 54)'
하케가 한 일을 망각할 수 없었다. 과거를 잊을 수 없어서 다가오는 조앙의 사랑, 헤그시트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하케를 살해해 복수를 완성했다. 비로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헤그시트룀은 미국으로 떠났고, 동거인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조앙은 숨을 거두며 라비크의 곁을 떠났다.
'"불법 입국이지?"
"그렇습니다."
"왜?"
"독일에서 도망 왔습니다. 서류를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성은?"
"프레젠부르크."
"이름은?"
"루트비히."
"유대인이오?"
"아닙니다."
"직업은?"
"의사."
그 사람은 적었다. "의사?" 하고는 쪽지 한 장을 집어 들고 보았다. "라비크라는 의사를 알고 있소?"
"모르겠는데요." (pp. 614, 615)'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파리는 더 이상 라비크의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이제 라비크로 살아갈 수조차 없다.
전쟁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휘황찬란한 영광을 지닌 개선문이 빛을 다 잃지 않고 그나마 희미할 때, 불안한 마음에 고독 속에 앉아있을 게 아니라 사랑을 했어야 했다. 기대어오는 조앙의 사랑,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손길을 내미는 헤그시트룀의 사랑, 베베르와 모로소프의 돕는 우정, 다리를 잃은 잔노를 비롯해 뤼시엔, 롤랑드 등 라비크 주변 사람들이 보내온 감사의 사랑... 이 모든 사랑에 의지해 불안에서 벗어났어야 했다.
모로소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라비크는 파리 경찰 트럭에 실려 파리를 떠난다.
'트럭은 와그람 거리를 달려서 에트왈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아무 데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광장에는 짙은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p. 617)'
전쟁이 시작되고 개선문마저 암흑 속에서 사라진 시대에는 사랑으로부터도, 우정으로부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도 모두 절연당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남의 말로 서로 얘기해왔다. 지금 비로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자기 말을 쓰고 있었다. 언어 장벽은 무너지고 두 사람은 지금까지보다 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Baciami(키스해 주세요)......."
그는 그녀의 바싹 마른 뜨거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었어, 조앙...... 언제나..."
"Sono...... stata...... perduta...... senza di te(당신이 안 계시면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더욱 고독한 사람이었을 거야. 당신은 모든 광명이었으며, 기쁨과 슬픔이었어...... 당신은 나를 흔들어주었고, 내게 당신과 나 자신을 주었어. 당신은 나를 살아가게 한 거야." (p. 606)'
그러니 지금, 빛이 사라져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암흑 상태가 되기 전에, 불안을, 과거를 핑계 대며 남의 말로 얘기할 게 아니라 온전히 나를 보여주는 자기 말로 사랑해야 한다. 현재의 일에만 정열을 쏟는 조앙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이 짧은 인생이 단 한 번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마구 지나가버리잖아요..." 그녀는 두 손을 따뜻한 바위에 놓았다. "저는 대단치 않은 여자예요. 라비크, 저는 역사적 시대에 살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세상만사가 이렇게 귀찮고 괴롭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뿐이에요" (p.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