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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평점 :
두 해 전, 조카의 쌍둥이 아이 첫돌을 축하하려고 신라호텔에서 가족이 모였다. 로비에 앉아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천장에 반짝거리는 것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역시 외국 정상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많이 썼나 싶었다. 아니었다. 박선기 작가의 작품으로 '조합체 시리즈' 중 하나였다.
'형태가 고정돼 있는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약한 바람 한 줄기에도 어김없이 흔들립니다. 항상 우리 곁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을 작품으로 보여준 거죠. (p. 117)'
문화부 기자로 일했던 이선아 작가는 <걷다가 예술>에서 공원이나, 호텔 로비, 백화점 그리고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예술작품과 그 작품세계를 안내한다.
광화문 흥국생명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 작품을 보면 누구나 '아 이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원래 작품명('노동자')에서 알 수 있듯이 <해머링 맨>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해머링 맨>이 반복적으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은 쉴 새 없이 일하는 현대인을 뜻한다. 삶의 무게(망치를 든 오른팔만 4톤)가 만만치 않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p. 17)'
2014년과 2022년, 잠실 석촌호수에 떠 있던 18미터 높이의 노란색 <러버 덕>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작품으로 '평등'이라 메시지가 작품에 담겼다. 강서구 마곡의 <LG아트센터 서울>는 여느 공연장처럼 보이지만 '노출 콘크리트', '빛', '물'로 알려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이다.
원래부터 놓여있던 것처럼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시청역 프레스센터 앞 거대한 철판과 돌 네 개. 우리가 자랑하는 예술가 이우환의 대표 연작인 <관계항 Relatum-만남의 탑>이다.
'그래서 이우환의 세계에서 돌과 철판은 서로 형제 관계입니다. "돌과 철판의 만남은 자연과 문명의 대화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내 작품"이라는 게 그의 얘기입니다. (p. 105)'
천안 아라리오 조각광장에 가면 초라한 행색으로 서 있는 6.5미터 높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부러진 다리에 자선기금 모금 상자를 든 조각상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채러티>다.
'하지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는지 체념한 듯한 표정이죠. 허스트는 이를 통해 자선이 갈수록 외면받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합니다. (p. 153)'
이렇듯 우리는 오고 가는 일상에서 예술작품을 만난다. 건축주가 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의 일정 비율(보통 1% 이하)로 미술장식품을 설치하는 (당초 권장사항이었지만 1995년부터는 의무로 바뀐) 법 덕분이다.
작품에는 작가의 집념과 고뇌가 녹아있을뿐더러 처절하게 찾아낸 작가의 창작세계가 담겨있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예술품에서 가치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신라호텔 로비에 있던 나처럼 작품인 줄 몰라보고 인테리어 취급을 한다면 말이다. 작품이 선사하는 소중한 순간을 놓친 셈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작품세계를 알고 나면, 거리의 예술작품에서 뜻깊은 순간을 갖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처럼 작품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라호텔 로비에 전시된 박선기 작가의 작품 <조합체 130121>,
너비 7미터에 달하는 공간에 투명 낚싯줄에 매달린 5만여 개 아크릴 비즈가 공기의 흐름에 나부끼며 은하수를 연출하는 듯하다. 박선기를 '숯의 작가'로 부른다. 자연을 상징하는 숯을 낚싯줄에 매단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낚싯줄에 매달린 비즈가 은하수라면 숯은 수묵화水墨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