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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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많으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다면 책 몇 권을 써도 남는다". 혹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엮는 사람이 있다. 바로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이다.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체험만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로 자신이 직접 겪은 일만을 쓰는 작가이다. 자신의 일생만으로 수많은 책을 써내려온 작가는 '삶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빈 옷장》 《세월》 《단순한 열정》 그 외 수많은 작품 중 그녀의 짧은 소설 『한 여자』를 펼쳐든다.

한 여자.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한 여자로 어머니의 일생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펼쳐 보이는 이 짧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펼쳐들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엄마의 인생을 딸이 과연 객관적으로 쓴다는 게 가능할까?

애증의 모녀관계. 끈끈하면서도 끈끈하기에 더욱 얽어매져 있는 이 모녀 관계가 단순히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도 그렇고 미셀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에서도 모녀 관계는 사나우면서도 다정한 애착을 보여준다. 과연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써내려갔을까?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 치매 환자였다.

 

소설은 어머니의 부고로부터 시작된다. 노인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룬다.

어머니는 이제 안 계시지만 저자는 글로써 어머니의 삶을 소환한다. 한 여자의 삶을 복기하고 되새긴다.

요양원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함께 방을 쓰던 어떤 여자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부고 또는 질병 앞에서 슬픔과 동시에 떠오르는 건 분노이다. 왜 저 사람은 살아있는데 우리 엄마만, 아빠만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인가.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에서 저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엄마의 부재 앞에서 동년배의 한국 아줌마를 보면서 분노한다. 짜증이 난다고. 부아가 난다고. 엄마는 세상에 없는데 이 생면부지의 여인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똑같은 방을 쓰는데 왜 우리 어머니만 죽었는가. 다른 사람들은 저자에게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소설 『한 여자』 는 그렇게 어머니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6년 프랑스 이브토에서 여섯 아이 중 넷째로 태어난 어머니. 엄한 어머니, 다감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고 그 당시 대부분의 삶이 그러했듯 교육은 겉치장에 불과했던 시대. 산업 혁명 시절과 맞물려 대규모 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자로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청년기 시절이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삶 또는 죽음이었으니,

둘이 되어 보다 쉽게 궁지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일 수도 있고

결정적인 곤두박질로 끝날 수도 있다.

 

한 여자의 삶. 나의 엄마도 그렇고 다른 대부분의 어머니들의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이야기가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쓰여진다. 희망, 또는 추락.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야기. 저자의 어머니 또한 그랬다.

현실에 안주하며 정착하길 바랐던 아버지, 더 높은 삶을 갈망한 어머니, 삶은 더 바라는 자에게 선택이 주어진다. 아버지의 안정보다 어머니의 갈망이 더 컸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시작한다. 이제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나가는 여자는 말한다.

"날 보고 자갈을 팔래도 팔 수 있었을걸!"

장사 하시는 어머니, 전쟁중에도 어린 딸을 산책시키기 위해 아주 잠깐의 찰나에도 유모차를 끌던 어머니.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붙들기 위해 변해가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모습은, 단순히 저자만의 어머니, 한 여자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한 여자의 삶은 보편적 여자의 삶을 그려나간다.

저자가 커가면서 자연스레 생기는 모녀간의 갈등. 시간이 주는 괴리. 담담하게 써내려가지만 그 사이의 여백을 딸이라면 느낄 수 있다. 그 여백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는 딸들만이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이 주려는 것으로 사랑받기를 바랐다.

 

책을 읽으며 나의 엄마와 저자의 어머니에게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였다.

아니 나는 비로소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야하겠다. 매번 내려갈 때마다 차 한 가득 음식을 퍼주시는 엄마. 그것도 모자라 며칠 후 택배 한 상자를 보내오는 엄마. 우리는 극성이라고 말하며 그만 주라고 말한다.

나는 엄마의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알겠다.

그 음식들이 사랑받고 싶다는 반어적인 표현이라는 걸. 사랑해달라는 표현이었음을 이제서야 알겠다.

끊임없는 헌신, 손주들을 돌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했던 한 여자. 하지만 세월은 한 여자의 희망을 서서히 그리고 급격히 무너뜨린다. 알츠하이머라는 무서운 지우개로 머리 속의 기억을 지워나간다. 한 여자는 그렇게 아이가 되어가고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간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도 문득문득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한 여자의 기억. 어머니는 삶을 잃어가는 중에도 가끔씩 인식하고 기억했다. 그렇게 삶의 끝자락을 한없이 붙잡았고 마무리해갔다.

이 책에는 어머니의 삶을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써내려간다. 제3자의 시선인 것처럼. 감정을 절제하고 한 여자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궁금해진다. 딸이라면, 여자라면 이 글들을 건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한 여자의 삶은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시대를 이겨낸 수많은 여자들의 삶이기도 했다. 자식을 위해선 뭐라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카멜레온처럼 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우리 모두의 삶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삶이 최고의 이야기'라는 걸 그렇게 증명해냈다.

이 소설을 읽고 아니 에르노의 다음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권하고 싶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나간 저자의 기록이 담긴 이 소설이 저자의 어머니와 저자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 믿는다.

 

노벨문학상은 아니 에르노 수상자에 대한 평을 "개인적 기억의 뿌리, 소외, 집단적 구속 밝히는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기억의 뿌리. 그 시작을 이 『한 여자』로 시작해 보는 것도 꽤 많은 도움이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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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한 편집자들 - 재테크 책 만들다가 저절로 업행일치 키키
이경희.허주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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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세상 사람들 다 돈을 잘 벌고 있네? 왜 나만 집 없어?

 


서울의 수많은 아파트를 보며 이런 말을 하지 않은 무주택자들이 있지 않을까? 10년째 전세 난민으로 살고 있는 나 역시 매번 전세 재계약할 시간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왜 이 많고 많은 집 중에 내 집은 없는 건지 한숨이 나오곤 했다.


열심히 일하는데 노동 소득으로는 어림없는 내 집 마련. 나와 같이 푸념만 하는 사람도 있지만 더 이상 안 되겠다며 두 팔 걷어부치며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고수가 아니다. 바로 출판사에서 재테크 책을 만들면서 책을 그대로 따라하고 행동한 『돈을 사랑한 편집자』들이다.


『돈을 사랑한 편집자』의 저자 이경희씨와 허주현씨는 출판사 편집자들이다. 출판사 박봉 월급에 두 사람이 마주한 건 집이 없는 현실. 신혼집을 구하면서 동년배의 집주인을 마주하며 돈 없는 자신의 현실이 더 비참하게 다가온다.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왜 자신은 세입자이고 다른 사람은 집주인인가. 회의가 차오른다. 이렇게 일만 하는 게 맞는 걸까? 고민을 하던 그들은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 어떻게? 바로 자신이 필요한 답을 줄 수 있는 저자를 섭외해 책을 만드는 것이다.


책은 협업작업이다. 원고는 작가가 쓰지만 원고를 다듬고 수정 보완하는 작업은 편집자가 한다. 그러니 편집자가 원고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자신에게 필요한 답을 줄 수 있는 재테크 책을 만들기로 한 시작은 좋으나 온통 신세계인 단어를 접하는 편집자는 이 떄부터 본격적인 재테크 공부에 들어간다. 창피함을 무릎쓰고 작가로부터 하나하나 물어가며 재테크의 첫걸음을 뗀다. 책에 배운대로 하나하나 실천해가며 기회를 타고 3000만원에 나온 집을 매수하는 등 본격적인 행업일치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들은 대출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막상 대출금의 연 이자를 계산해보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출이자와 아파트 상승분을 비교해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만든 부동산 책을 하나씩 대입해가며 투자의 길에 들어선 편집자들. 그들의 행보에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며 물어보지만 저자들이 깨달은 건 관심만 있지 행동하지 않는 주변의 반응이었다.


자신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하며 책에서 나온대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기회를 찾아 아파트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한 발 앞서나가는 데 주저했다.


물론 손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금 폭탄을 맞기도 하고 집 앞에 절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집을 구해 템플스테이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만드는 책대로 행동하며 나아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행동들은 다른 길로 나아갈 수있는 용기가 되어준다는 데 있다.


안정적인 것은 가장 불안정했다.

회사는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았고,

결국 회사라는 계급장을 뗴고 나 자체로 경쟁력이 있어야 했다.


 

 어느 연구소에서 실험을 했다. 온갖 물고기를 먹을 것을 주며 여유로운 환경에 있는 물고기와 물고기의 천적이 있는 어항의 물고기를 비교했다. 과연 어느 물고기가 더 오래 살까? 정답은 바로 천적이 있는 물고기였다. 위협상대가 있는 물고기는 살아남기 위해 생존능력을 발휘했지만 배부른 환경에 있는 물고기는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받아먹기만 하며 살아남는 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안정적인 환경이 가장 위험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비유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쓰이는 비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영혼을 갈면서도 매월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의 단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직장인들. 미생의 유명한 대사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진리처럼 생각하며 오늘도 영혼을 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상황이 영원할 수 없음을. 결국 회사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갈지만 그 자리에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무의 존재임을.


영혼을 바치지만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오지 않는 곳.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그들은 고민한다. 그리고 그들의 답은 Go이다. 어차피 불안정한 인생.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보자고. 그렇게 자신의 어항을 깨고 창업이라는 길로 나간다. 편집자이면서 재무설계자로, 공동대표로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한다. 자신을 위한 가장 큰 투자가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보면 무모하다 할 수 있지만 과감하게 첫 발을 뗸 저자들.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들의 행동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자신들이 만든 재테크 책을 만들고 배우고 행동하면서 얻은 소득이 바로 그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똑같은 책을 읽지만 누군가는 읽는 데 그치고 (바로 나다ㅠㅠ) 누군가는 행동한다. 그리고 그 열매는 극과 극 차이다. 저자들은 행동한 후자였다. 부동산 책을 만들면서 집을 사고 주식 책을 만들면서 테슬라에 투자하며 희비가 극명한 날들이지만 실천하면서 알게 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매번 일을 벌이는 그들. 떄론 손해도 보고 뒷처리에 급급하지만 그 과정 속에 하나하나 배워가며 오늘도 일을 벌이는 그들. 부동산과 주식을 열심히 보며 어떻게 지속가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저자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 아무 일이라도 만드는 게 인생의 진일보하는 길임을 실천을 통해 손수 보여준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 똑같은 물건이지만 그 결과는 확연하다. 책에 나오는 대로 따라했더니 삶이 달라지는 그들의 여정이 매우 코믹하게 그려져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본다.


내가 읽은 책들을. 내가 책의 내용을 따라하는 삶인가 아니면 읽고 덮는 데 그치는가. 이제 나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을 졸업하고 '아무 일이라도 만들어보자'하는 용기가 생긴다. 그래. 아무 일이라도 해 보자.

절망에 주저앉아 있기보다 다만 무언가라도 한다면

나는 인생이 기회를 준다고 믿는다.

기회를 안 주면 또 어떤가. 내가 만들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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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스트레인지 보이
이명희 지음 / 에트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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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도 이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할 것이다.

임신 26주 5일 만에 1.03kg 아이 출산. 오른손을 못 쓰는 편마비와 오른다리 까치발 뇌성마비 판정.

2016년 12월 네 살 아이 원인불명의 뇌손상으로 사지마비와 시력 상실...

상상할 수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장애를 짊어진 아이의 무게만으로도 겨우 적응해 나가는데 신은 또 다른 장애를 주신다. 사지마비와 시력상실. 하루 아침에 달라진 아이의 모습에 온 가족은 넋을 잃는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여전히 한 생명이 살아있기에. 그 생명의 부모이기에.

『마이 스트레인지 부모』는 중증 장애아의 엄마로 살아내기 위한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정답이 없는 삶. 어느 누구에게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이 막막함 속에서 아이와의 동반 자살, 죽음, 이혼, 도망 등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리라며 고뇌하던 그 시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매번 결정적인 순간 삶에 에 대한 미련이었다. 아... 그래도 나는 아직 살고 싶구나라는 걸 발견하며 다시 삶을 계속 이어간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살아본 적 없는 방식의 삶이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바로 부모의 역할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 살의 엄마는 두 살의 아이가 다르다. 매번 커가며 발달해가는 아이의 상태에 맞춰 부모는 역할을 달리 해야한다. 그 역할은 매번 낯설고 새롭다. 같은 아이임에도 어제의 아이와 내일의 아이는 다르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어느 땐가 아이가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그런 기대라고나 할까?

하지만 중증장애아의 부모는 다르다. 장애는 그 아이의 일부분이다. 평생을 함께하며 평생을 돌보아야 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이의 장애를 마주한다. 이 장애 앞에서 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거야라는 자기 부정에서부터 회피부터 인정해나가기까지 그 시간은 어느 누구보다도 길고 느리게 흐르기만 한다.

그래도 삶은 살아가기 위한 방도로 유튜브를 찍고 수영을 배우고 클라리넷을 배우고 직업상담사 시험 도전하는 삶 속에 저자는 장애아 엄마의 삶에서 저자 이명희로서 숨을 쉰다. 매우 귀한 이 짜투리 시간들이 저자를 숨쉬게 한다. 다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매일 매일의 삶이 살아가는 것이라기보다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다짐하는 삶.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힘을 주며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는 게 안쓰럽지만 아이의 장애와 함께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

그 안에서 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야만 네가 버틸 수 있다면, 그렇게 믿고 살면 된다고.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아이가 몸을 활처럼 뒤로 휘며

모든 것을 잃어가던 그 끔찍한 모습을 기억해주는 거라고.

그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혼자 다 겪어내고도

다시 네 곁에 살아 있는 그 아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답이 없는 삶. 아이의 평생 보호자로 평생 돌봄을 해야 하는 삶 속에서 저자의 분투기. 글과 그림만으로 그 채워질 수 없는 고뇌를 알 수 없다. 차마 이 종이에 담을 수 없었을 그 마음을 여백을 헤아리고 짐작해보려 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다. 감히 저자를 이해한다고, 힘든 거 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그저 저자가 지인들에게 힘들게 아이의 장애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저 저자의 일상처럼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 책에 어떤 동정도 아닌 저자의 이야기로 읽어나가는 것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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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에겐 목표가, 승자에겐 체계가 있다 - P112

1등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목표 달성이 아니라 체계를갖추는 것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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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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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했다. 맡은 임무가 있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소설들이 있다. 읽는독자들을 그 자리에 붙잡아두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큰 사건도 없이 단지 소설 속 현장으로 데려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소극장 연극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태연하게 연기를 하고 독자들은 가까이에서 인물들의 연기를 감상한다. 무대와 관람석에 경계가 없는 극장에서 보는 배우들의 연기는 생생하다. 박연준 시인의 소설 『여름과 루비』가 그렇다.

일곱 살 소녀 '여름'과 친구 '루비'의 길고 피로한 일곱살부터의 유년 시절이 팔딱팔딱 숨쉬는 소설이다.

일곱 살 아이 '여름'은 엄마가 없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고모 밑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자란다. 아빠는 있지만 왠지 아빠는 철이 없는 어린 아이같다. 아무리 고모라지만 남의 집에 있는 게 편할 리 없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눈치가 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어린 여자를 데려왔다. 이제 엄마라고 부르라고 한다. '여름'에게 새엄마가 생겼다. 새엄마가 생기며 작은 회사원의 생활을 하는 여름은 새로운 임무가 더 늘어만 간다. 이 피곤한 일곱 살 시절에 여름에게는 '비밀 친구'가 있다. 루비이다. 비밀리에 사귀는 친구. 루비에게는 자신의 고충을 말할 수 있다.

『여름과 루비』는 많은 사건이 없다. 단지 이들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일곱 살 아이의 시점에서 어른들을 본다. 아빠의 재혼, 새엄마와의 갈등, 고모의 이면적인 모습 등이 비춰진다. 어른들은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기도 하고 '넌 몰라도 돼'라면서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름은 말한다. 모르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라고.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어른들은 아는 척을 한다.

아이들은 지혜를 갖고 태어난다.

지혜를 잃어버리는 건 늘 어른들 쪽이다.

시인의 첫 소설이라서일까. 『여름과 루비』는 시적인 문장의 향연이다. 휘몰아치는 전개가 없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일곱 살 아이가 독자인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아름답다. 유년 시절을 버텨나가는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어른들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아이들의 세계. 아직 어리기에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아이들의 세계. 여름과 루비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그 헤어짐의 무게를 감당하는 마지막은 먹먹하다 못해 아련하기까지 한다.

어른들은 모른다. 여름과 루비의 유년 시절이 지나갔으니 이들도 그냥 다 잊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년은 현재를 헤집어놓듯이 유년 시절의 무게를 짊어지고 언덕을 유년에서 홀로 언덕을 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다. 내 아이의 눈에는 나의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아이들에게 유년은 어떤 시절로 기억되며 돌아올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여름과 루비』는 흥미진진한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으로 따라가며 문장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욱 좋은 소설은 없다. 책 모든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 이 책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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