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제국의 몰락 - 엘리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집대성한 엘리트 신화의 탄생과 종말
미하엘 하르트만 지음, 이덕임 옮김 / 북라이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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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엘리트층에 속하기 위해선 영향력 있는 대규모 조직의 최상위에 올라 있거나 엄청난 자본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선 단순한 돈을 넘어서 자본은 매우 중요한데, 자본은 돈만으로는 얻지 못할 권력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일인 저자, 엘리트 제국의 몰락이란 책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됐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세계적 권위자가 말하는 엘리트주의가 궁금했다. 엘리트주의가 무엇인지, 어디서 기원을 했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무슨 특징을 갖는지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책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아쉬웠다. 다양한 사례와 통계를 인용했지만, 핵심 주장에 대한 반복적인 근거에 불과했다. 또한 그 사례들이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사회에 한정돼 있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나에겐 쉽게 와닿지 않았다. 적은 사례라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색다른 논지들이 나오면 더 좋을 것 같다.



엘리트와 권력의 정의적 연관성은 어떤 사람이 엘리트에 속하고 어떤 사람이 속하지 않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기준이 되며, 개별 엘리트 간 위계질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산업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엘리트들은 주로 경제, 저이, 행정 및 사법 분야에 포진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의 발전을 위한 중대한 의사 결정을 담당한다.

책 내용 역시 제목인 엘리트 제국의 몰락과 어울리지 않았다. 제목 위에 적혀있는 "Wie die Eliten di Demokratie gefaehrden?"이 책에 내용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엘리트주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이 책은 엘리트주의로 표상되는 권력자들의 사고와 행태를 고발한다. 그들은 과연 민주적인 삶을 사는가? 모든 국민이 국가, 사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그들이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소수와 다수 모두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만을 위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의 탈세는 정당화하면서, 국가가 걷는 세금에 대해선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엘리트들의 모습을 보며 분노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자본을 갖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사회나 다수의 사람들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탈세, 정경유착, 비리 등을 보면서 서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기대가 많았는데, 한순간 깨져버렸다. 그들 역시 자본과 권력에 물든 존재에 불과했다.



똑같은 관점을 갖고 있고 인식이나 판단력, 생각의 범주가 같은 사람들은 간단히 말하자면 비슷한 특정 습관을 갖고 있어서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서로 잘 알아볼 수 있다.




책 표지 가장 위에 적힌 Die Abgehobenen은 독일어로 너무 곱게 자라서 일반 사람들의 고생과 삶에 대해 아예 모르고 현실성이 없고 근거 없이 잘난척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 비판하는 엘리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많은 자본과 풍부한 배경을 지닌 엘리트들과 그 외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다르다. 이들은 같은 세상을 살아도 다른 세상을 산다. 또한 같은 사건을 봐도 다르게 해석한다. 엘리트들에게 경제력이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에 불과하다. 열정적으로 노력하면 돈이든 권력이든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다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은 능력뿐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많은 영향력을 지니는데, 엘리트들은 모든 걸 다 지니고 있다. 모든 걸 채워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만이 힘들 뿐이다.



그들에겐 사회와 국가란 자신의 이익만을 보장해주면 되는 조그만 개념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규제를 가하는 국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규제는 그들의 자산, 이득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파이만 넓히는 것이 최우선이다. 전체의 파이가 어떻게 배분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이 과연 사회정의인가? 작가는 이러한 엘리트주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또한 엘리트들의 행태를 바로잡을 국가의 모습을 바라고 있다. 엘리트들이 주를 이루는 권력 체제에서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이 펼쳐지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선 소수만을 위한 세상이 돼선 결코 안된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선 그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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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백 - 갑질로 어긋난 삶의 궤도를 바로잡다
박창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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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전부터 인간이 나이 들면서 현명해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접하는 세상의 폭이 좁아져 편협해지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늙고 싶지 않았다. 아니 비록 나이가 들지라도 젊게 사유하며 살고 싶었고, 세상의 진리를 직접 몸으로 체득하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었다.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과연 인간 존엄성이 존재하는 걸까? 계급, 자본의 차이에 따라 인간 존엄의 정도는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평등하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박창진 사무장의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익히 들어 친근하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의 피해자. 재벌의 갑질에 피해를 입은 희생자. 플라이 백은 박창진 사무장의 땅콩 회항 사건 전말부터 대한항공 삶을 다룬 책이다. 언론이나 타인의 입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사건 발생 후, 그가 직급을 강등 당하고, 목에 혹이 나고, 조현아 부사장은 회사에 다시 돌아오는 뉴스를 봤을 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피해자는 그 문제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고 있는데, 피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세상인가? 그들은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마치 그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어차피 자신들의 일이 아니면 처음과 같은 관심을 안 갖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일이 처음 알려졌을 때보다 분노와 관심이 덜하다. 언론의 관심 역시 줄어들면서, 언론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감당은 모두 피해자들에게 돌아간다. 이 책이 나왔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론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이 사건을 알리는 모습이 한편으론 멋있었다. 아마 그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주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금방 잊혔을 것이다. 또한 그는 피해자

인 듯 피해자 아닌 삶을 살아가며 고통받았을 것이다. 피의자들은 그 사건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뿐이다.



나쁜 짓 하지 않고 회사서 인정받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착하고 순진한 박창진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 누구도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인간 박창진이 있다.



회사는 어떤 일이 터지면 원인에 대한 고찰은 하지 않고 누군가를 징계할 궁리만 한다. 그러므로 서둘러 희생자를 찾아야 한다. 그들 눈에 실수한 직원은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이며 호되게 혼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수시로 채찍을 휘둘러 직원들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게 해야 한다.

박창진은 누구보다 회사에 충성을 받치고, 회사의 구성원으로 자긍심이 있었던 사람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자신에게 회사가 중요하듯 회사에 역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회사의 부품에 불과했다. 말썽을 부리면 쉽게 갈아치우는 부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 부품이 어떻게 되든 주인을 개의치 않는다. 새 부품으로 갈아치우면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못 본 척 외면해왔어 것이다. 오래전 격변의 봄을 지나면서 내 동기를 비롯한 직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직에서 도려내는 걸 봤으면서도, 수많은 불합리한 처사를 두 눈으로 목격했으면서도 외면했을 뿐이다. 나름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여기고 절대로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과 귀를 닫고 살아왔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회사는 나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쓸모 없어지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신기루는 완전히 사라졌다.



누구는 남의 이야기에 왜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갖냐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에게 어차피 뻔한 얘기 할 텐데 왜 읽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뻔한 얘기다. 사건 피해자의 피해 받고 희생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항상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나의 친구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우리 역시 피해 받고 희생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고, 아무리 잘하려고 발버둥 쳐도 깨지지 않는 창은 존재한다. 또한 우리의 삶이 누군가를 위한 삶일 수 있다. 우리 삶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박창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을 절실히 보여준다. 내가 만약 박창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조현아를 비롯한 회사의 말에 순종하며 나의 목소리를 죽이지 않았을까? 과연 나에게 용기가 있을까?



이 사건이 터지기 전의 박창진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나에겐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열심히 하루를 잘 살면 돼. 문제 일으키지 않고 시키는 것 만 열심히 하면 돼. 과연 이것이 존엄한 삶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누군가의 수단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수단으로서 우리가 종종 존재하기도 한다.



박창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목리를 낼 용기를 준다. 세상은 정의롭지만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우리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소리를 낼 때에만 세상은 변한다. 그 목소리가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 우리가 연대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린 누구나 박창진처럼 될 수 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박창진일 수 있다.



플라이 백. 비행기를 되돌리는 회항을 일컫는 용어다. 이제 막 출발한 비행기에서 강제로 내려야 했던 그날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내 삶을 되찾기 위해 다시 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번 뒤틀린 삶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기 위한 내 비행의 기록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주체성을 찾고자 열심히 플라이 백 중이다.



플라이 백. 회항. 이 사건에서 회항은 불법이었지만, 지금 그가 하는 플라이 백은 응원하고 싶다. 잘못된 걸 알았을 때, 다시 돌아가 출발을 준비하도록 하는 플라이 백. 잘못을 알고서도 되돌아가지 않으면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하다. 펑, 모두 다 죽고 만다. 지금의 플라이 백은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나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도로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동차와 같다. 안갯속에 어떤 것들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계속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잔인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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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서가명강 시리즈 2
홍성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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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창의 융합형 인재. 21세기 교육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역량이다. 세상은 조각들의 단순 합이 아니다. 조각들은 서로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는다. 아무리 따로 떼어내려 해도 이들을 끊어낼 수 없다. 하지만 과거 인간들은 세상을 자신들의 조각으로만 바라봤다. 다른 조각이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다른 조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조각에만 몰두했다. 세상은 이 조각들의 유기적 복합체이므로, 각각의 조각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기엔 한계가 있다. 또한 개인이 다른 조각을 알지 못한다면, 그 조각의 힘을 빌릴 수도 없다. 더군다나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오로지 자신의 조각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문제 상황을 일으키기도 한다.



크로스 사이언스라는 제목과 같이 이 책은 과학기술자의 입장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보여준다. 이 책은 서울대에서 인기 있는 강의를 토대로 쓰인 책이다. 서강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이 어떤 즐거움을 줄지 궁금했다. 또한 21세기와 4차 산업혁명에 화두가 되고 있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어떤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을지도 기대됐다.



과학기술학자의 관심은 시민들에게 과학의 어려운 내용을 얼마나 쉽게 전달하는가에 있지 않다. 그보다 과학기술자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우리 삶과 너무나 긴밀하게 연관돼 있고, 더 나아가 인류의 생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다양한 과학 활동, 과학 정책, 과학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런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이 책은 각 장이 마치 다큐멘터리나 지식 채널 e와 같았다. 특정 화두에 대해 과학기술학자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영화나 책에서 나타나는 과학적 지식과 사태는 현실과 괴리된 것들이 아니다. 홍성욱은 문화의 영역에서 나타난 과학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주고 어떤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설명해준다. 정말 많은 책과 영화가 이 책에서 등장한다. 대부분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 깊이 공감은 못했지만,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읽었다.



그중 개화기나 일제강점기 문학에서 나타난 과학기술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과학기술은 진보하며, 그에 대한 태도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과거 조상들이 높게 평가하고, 기이하게 여겼던 과학 기술은 지금의 우리에겐 평범하고 익숙한 대상이다. 또한 우리에게 현재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미래엔 지극히 평범해질 수 있다. 예컨대, 과거엔 전기, 열차, 전화기조차 비범한 기술이었다.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인데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AI와 로봇의 발전을 바라보는 양가적 태도와 비슷하다. 우리는 로봇과 AI가 발전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삶에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란 걱정과 두려움 역시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단순히 과학기술을 과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문학의 힘을 빌려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이유다.



이 책을 읽은 후에 과연 내가 융합형 인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과학자의 입장에선 인문학을 접근하기가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인문학,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나에겐 과학은 공포의 대상이다. 진입장벽이 높아 보이고, 도전하기도 전에 먼저 겁을 먹고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문학은 교양으로 바라보는데, 과학은 교양의 영역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교양으로서 접근하기 쉬운데, 과학은 교양보다 좀 더 전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학 역시 교양이 될 수 있고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책이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에서 나타나는 과학적 사건을 접하고, 이를 내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더 공부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과학 역시 교양이 되는 세상, 그래야 융합형 인재들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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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아저씨 - 좌충우돌 자영업 생존기
마정건 지음 / 청년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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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삶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을 부추길 수 있겠구나. 고단한 현실에 내몰리면 없는 자들끼리 마구 두들겨 패겠구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들은 저 먼 곳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고 있는데 을끼리 또는 을과 병이 피가 튀는 전쟁을 벌이겠구나.

문방구 아저씨라는 제목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아침마다 군것질이나 준비물을 사기 위해 문방구를 찾던 기억이 난다. 500원이면 불량식품 다섯 개를 살 수 있었다. 그땐 100원, 200원이 정말 크게 느껴졌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문방구 주인아저씨 아주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이 책에서 사지도 않을 거면서 물건을 주물 거리는 아이가 나였고, 100원, 200원 하는 물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아이 역시 나였다. 책의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우린 문방구 주인아저씨 아주머니를 생각한 적이 있던가?



요즘 불경기라는 말이 시도 때도 없이 들린다. 사회적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언론에서 자영업자들의 고난을 많이 다루고 있다. 내 주변엔 자영업자가 없기에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언론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전부다. 이 책은 조금이나마 자영업자들의 삶과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방구 아저씨로 표상되는 저자는 문방구에서 느끼는 고충을 풀어내고 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의 회사원이었던 그는 현재 5년 차 문방구 아저씨다. 어떤 사정인지 잘 모르겠으나. 문방구를 시작하기란 그나 그의 가족에게 모두 힘든 일이었다. 사회적 인식, 새로운 경험, 자본 등 그가 해치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가 묘사하는 고객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얼굴이다. 어떤 고객은 무한히 긍정적이고 그에게 힘을 준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몇몇의 고객은 그의 문방구 생활을 고달프게 한다. 갑의 정신이 무장된 사람들. 누군가에게 을인 사람도 또 누군가에겐 갑이 된다. 나 역시 당했기 때문에 그걸 다른 누군가에게 갚아주려 한다. 갑질 당한 것이 어느샌가 자신에게 내재돼 본인 역시 갑질을 행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분명히 자신도 갑질을 당했을 때, 화나고 슬퍼했을 텐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다. 학교 근로를 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같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근로를 하고 있을 때 어떤 학생은 그들은 고객, 나는 서비스 제공자로 생각한다. 마치 자신들이 마음껏 나를 대해도 되는 것처럼 무례하게 행동할 때가 있다. 아직 사회에 나가지 못해 많은 경험은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갑질이 내면화된 사람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이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상처가 된다.



자영업자를 시작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책 같다. 자영업과 관련된 사람이 읽기엔 흥미로운 자기계발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엽을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저자와 공감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나중에 자영업을 꿈꾸기 때문에 자영업의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가 자영업을 대하는 태도가 자신보다 외부에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을 느꼈다. 자영업은 모든 것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다. 책임감이 막중하기에 자신을 풍랑에서 지킬 존재 역시 자영업자 본인이다. 회사라는 테두리가 아니라 자신을 몸소 받치는 것이 자영업이다. 분명 국가의 제도나 정책에 따라 사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업의 성공은 국가가 아닌 자영업자 본인의 몫이다. 국가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펼쳐도 자영업자가 실패할 수 있고 그 반대가 될 수 있다. 과연 이 저자는 다른 문방구 아저씨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시간이 축적되며 노련함이 생겼겠지만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섬세한' 열정을 퍼부었는지 등 책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이 궁금하다. 국가의 섬세한 정책에 바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섬세한 노력을 간과하면 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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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 그들 - ‘그들’을 악마로 몰아 ‘우리’의 표를 쟁취하는 진짜 악마들
이안 브레머 지음, 김고명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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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주의는 연결을 가능케 함으로써 공포를 유발한다. 전 세계적으로 사상과 정보가 즉각적으로 흐르는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연결해 교육 협력 상거래의 기회를 새롭게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분노의 원인이 늘어나고 있고, 그 분노를 널리 알릴 방법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으며, 시위를 찍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이 새롭게 나오고 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테러는 낯선 이름과 얼굴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있다.

파편화가 가능한 인터넷의 특성은 이른바 필터 버블을 탄생시켰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편향성을 뒷받침해주는 견해와 정보를 취하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함으로ㅆ 위안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 되는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다양성을 존중한다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면 다른 편이 된다. 나와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 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자행한다. 이안 브레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정치에 대해 비판을 한다. '우리'가 아닌 타자들은 '그들'로 대상화될 뿐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세계화와 장벽. 규제와 자율. 성장과 분배. 한의학과 양의학 등. 우리가 이분법의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이라는 큰 맥락에서 대상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우린 우리가 최선이라 여기는 대상에만 함몰돼 다른 가능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우리'의 주도권, 당위성만 합리화하고 '그들'을 깎아내리기에 바쁠 뿐이다.

자신과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학교에서 우리는 같이 있으면 편한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닌다. 성인이 돼서는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반겨줄 것 같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 세상에 대한 뉴스와 정보는 자신과 비슷한 견해를 내비칠 것으로 예상되는 텔레비전 채널, 라디오 방송국,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입수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해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은 필터 버블이다.

우린 사회 전체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불이익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린 종종 '우리'앞에 놓인 이득에만 눈이 멀어 이 사실을 잊는다. 이분법은 세상을 효율적으로 보기 위한 틀에 불과하다. '전체'를 쪼갠다고 전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린 그 틀에 현혹돼 전체를 잊는 일을 반복한다. 우리와 그들이 반드시 적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옳다고 그들이 틀린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우리와 그들은 화합하고 모두 옳을 수 있다. 필터 버블에 현혹돼 우리와 그들을 갈라놓는 일을 더 이상 없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받으며, 확실성은 부재한다. 살아남기 어려워진 시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짓밟고 부정해야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충분히 같이 살아남을 수 있고, 화합할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와 다른 그들을 악마화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들과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지금의 불안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화합이 이상적이지만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든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자만 봐 대상의 빛을 못 볼 수 있다. 이때 상대가 본 빛을 무시하며 배척할 수 있다. 하지만 화합은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빛과 그림자를 보는 눈은 화합을 통해 가능하다. 또한 빛과 그림자를 봄으로써 우린 화합할 수 있다. 이는 빛과 그림자를 포용하는 세상에 사는 인간이기에 가능하다.

현재의 정치적, 기술적, 사회적 변화를 생각해볼 때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 직장, 공공장소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유도할 장려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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