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백 - 갑질로 어긋난 삶의 궤도를 바로잡다
박창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오래전부터 인간이 나이 들면서 현명해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접하는 세상의 폭이 좁아져 편협해지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늙고 싶지 않았다. 아니 비록 나이가 들지라도 젊게 사유하며 살고 싶었고, 세상의 진리를 직접 몸으로 체득하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었다.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과연 인간 존엄성이 존재하는 걸까? 계급, 자본의 차이에 따라 인간 존엄의 정도는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평등하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박창진 사무장의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익히 들어 친근하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의 피해자. 재벌의 갑질에 피해를 입은 희생자. 플라이 백은 박창진 사무장의 땅콩 회항 사건 전말부터 대한항공 삶을 다룬 책이다. 언론이나 타인의 입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사건 발생 후, 그가 직급을 강등 당하고, 목에 혹이 나고, 조현아 부사장은 회사에 다시 돌아오는 뉴스를 봤을 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피해자는 그 문제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고 있는데, 피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세상인가? 그들은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마치 그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어차피 자신들의 일이 아니면 처음과 같은 관심을 안 갖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일이 처음 알려졌을 때보다 분노와 관심이 덜하다. 언론의 관심 역시 줄어들면서, 언론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감당은 모두 피해자들에게 돌아간다. 이 책이 나왔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론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이 사건을 알리는 모습이 한편으론 멋있었다. 아마 그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주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금방 잊혔을 것이다. 또한 그는 피해자

인 듯 피해자 아닌 삶을 살아가며 고통받았을 것이다. 피의자들은 그 사건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뿐이다.



나쁜 짓 하지 않고 회사서 인정받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착하고 순진한 박창진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 누구도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인간 박창진이 있다.



회사는 어떤 일이 터지면 원인에 대한 고찰은 하지 않고 누군가를 징계할 궁리만 한다. 그러므로 서둘러 희생자를 찾아야 한다. 그들 눈에 실수한 직원은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이며 호되게 혼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수시로 채찍을 휘둘러 직원들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게 해야 한다.

박창진은 누구보다 회사에 충성을 받치고, 회사의 구성원으로 자긍심이 있었던 사람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자신에게 회사가 중요하듯 회사에 역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회사의 부품에 불과했다. 말썽을 부리면 쉽게 갈아치우는 부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 부품이 어떻게 되든 주인을 개의치 않는다. 새 부품으로 갈아치우면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못 본 척 외면해왔어 것이다. 오래전 격변의 봄을 지나면서 내 동기를 비롯한 직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직에서 도려내는 걸 봤으면서도, 수많은 불합리한 처사를 두 눈으로 목격했으면서도 외면했을 뿐이다. 나름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여기고 절대로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과 귀를 닫고 살아왔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회사는 나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쓸모 없어지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신기루는 완전히 사라졌다.



누구는 남의 이야기에 왜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갖냐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에게 어차피 뻔한 얘기 할 텐데 왜 읽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뻔한 얘기다. 사건 피해자의 피해 받고 희생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항상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나의 친구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우리 역시 피해 받고 희생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고, 아무리 잘하려고 발버둥 쳐도 깨지지 않는 창은 존재한다. 또한 우리의 삶이 누군가를 위한 삶일 수 있다. 우리 삶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박창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을 절실히 보여준다. 내가 만약 박창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조현아를 비롯한 회사의 말에 순종하며 나의 목소리를 죽이지 않았을까? 과연 나에게 용기가 있을까?



이 사건이 터지기 전의 박창진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나에겐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열심히 하루를 잘 살면 돼. 문제 일으키지 않고 시키는 것 만 열심히 하면 돼. 과연 이것이 존엄한 삶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누군가의 수단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수단으로서 우리가 종종 존재하기도 한다.



박창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목리를 낼 용기를 준다. 세상은 정의롭지만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우리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소리를 낼 때에만 세상은 변한다. 그 목소리가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 우리가 연대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린 누구나 박창진처럼 될 수 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박창진일 수 있다.



플라이 백. 비행기를 되돌리는 회항을 일컫는 용어다. 이제 막 출발한 비행기에서 강제로 내려야 했던 그날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내 삶을 되찾기 위해 다시 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번 뒤틀린 삶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기 위한 내 비행의 기록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주체성을 찾고자 열심히 플라이 백 중이다.



플라이 백. 회항. 이 사건에서 회항은 불법이었지만, 지금 그가 하는 플라이 백은 응원하고 싶다. 잘못된 걸 알았을 때, 다시 돌아가 출발을 준비하도록 하는 플라이 백. 잘못을 알고서도 되돌아가지 않으면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하다. 펑, 모두 다 죽고 만다. 지금의 플라이 백은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나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도로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동차와 같다. 안갯속에 어떤 것들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계속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잔인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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