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현상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23
테야르 드 샤르댕 지음, 양명수 옮김 / 한길사 / 1997년 4월
평점 :
국비 유학을 준비하면서 원진숙 교수님께서 당신의 박사 학위 과정 이야기를 해주셨다. 교수님께선 박사 과정생으로 있으면서 이화 여대에서 강사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 시절 교수님의 대학에서 이화여대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어두컴컴한 터널 속이 교수님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막연한 미래를 위해 매일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공부를 해나갈 것 아셨기에 교수님께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터널이 끝나는 것처럼, 언젠가 공부도 빛을 보기 마련이니.’ 나 역시 공부를 하다가 막연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고 힘들어할 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감에 함몰돼 공부의 여정을 중간에 포기하면 빛을 볼 가능성을 아예 사라진다. 빛이 보이기 전까지 내가 어떠한 발전과 변화가 있었는지 보지 못하지만, 터널을 통과한 후 돌이켜 보면 참 많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성장 기간 없이 어떤 깊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역사다. 그러나 그러한 기간이 일단 지나면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거대 분자의 시기는 단순히 우리가 그린 지속의 도표에 한 부분을 장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어떤 임계점과 같은 것이다. 또 그것은 세포의 출현으로 초기 진화 질서에 단절이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영역에서든’ 정말 새로운 것이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장차 활짝 꽃 피었을 때에야 그것을 알아보고 처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종자와 첫마디를 찾으러 나서도 첫 단계란 항상 감추어져 있고 파괴되어 있고 잊혀 있다.
샤르댕의 ‘인간 현상’을 읽으면서 원 교수님의 조언이 겹쳐 보였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변화의 과정에 있다. 하지만 이 변화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외관상 변화가 있을 때에만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샤르댕은 우리가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불렀다. 즉 조그만 변화들이 모여 전혀 새로운 것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세상을 알아가고, 이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식과 생각의 축적이 아니라 이를 통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가 중요하다.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면서 나 역시 조금씩 변할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나 자신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이때 나는 공부에 대한 회의와 무기력감에 빠져 이를 포기할 수 있겠지. 하지만 원진숙 교수님과 샤르댕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가 눈에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순간에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변화에 대한 몸부림이 바탕이 됐을 때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샤르댕은 신학자인 동시에 지질학자, 생물학자다. 신학과 과학은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샤르댕의 이력은 낯설다. 특히 생물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학문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창조론을 옹호하는 기독교의 전통과 이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샤르댕은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옹호했다. 이는 목적이 있는 진화로 다윈의 진화론과 별개이며 기독교에서도 수용 가능한 입장이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과 달리 진화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은 우연에 의해 생명체가 진화한다고 말하지만, 샤르댕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진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과학이 반박 불가능한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란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현상들의 표면만을 다루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그 이면을 살피는 학문이다. 이면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해석을 통해서만 ‘추측’할 뿐이다. 즉, 인간이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에 자신을 투영해 얻어낸 ‘결론’이 모여 과학을 이루는 것이다.
샤르댕 역시 과학자로서 자신이 관찰한 현상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주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다르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추적하는 과정이니까. 샤르댕은 진화의 대상을 생물을 넘어 정신으로 바라본다. 정신은 또한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존 진화론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물이 진화한다고 보지만, 그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정신적 진화를 통해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그 정신은 하나님과 연결돼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진화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또한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지금껏 인간 문명을 풍성하게 하고, 학문 세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샤르댕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중심을 인간으로 설정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관찰하는 것엔 인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벚꽃이 흩날리는 길거리에 서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은 다른 것을 다르게 볼 것이다. 나는 벚나무를 본다. 내 친구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겠지. 다른 친구는 우리를 바라보겠지. 이렇듯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먼저 주관에 따른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해서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어떤 현상을 우리와 동떨어진 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런 낮은 믿음은 나름대로 필요하긴 하지만 역시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아무리 객관에 따른 관찰도 처음부터 어떤 약속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연구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이룩된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면, 과학자들이 얻어낸 연구 결과가 정말 연구 대상을 밝힌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전에는 사물 바깥에서 사물과 관계를 형성해서 무얼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관계의 그물 안에 그들 자신의 몸과 얼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지질학 식으로 말하자면 변성작용과 내성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 작용 안에서 객체와 주체는 결합하여 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좋건 싫건 간에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드러나고 보이는 것이다.
샤르댕은 정신의 중요성과 함께 사랑을 토대로 한 공동체를 중시한다. 요즘 ‘개인주의야?’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다. 마치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란 듯이 말이다. 샤르댕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 원자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랑을 바탕으로 개인주의가 이러한 부정적인 성질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존 듀이의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의 핵심 주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현대인의 노력이 이론과 달리 또 기대에 어긋나게 의식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길을 취했는가? 물질을 늘렸다.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 어떤 사회 계급이나 뒤떨어진 민족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가 하는 노력이란 것이 아직도 그런 것들뿐이다. 모두 기계화하려는 것뿐이다. 하긴 기계화된 동물 사회의 뒤를 이어 기계화된 인간 사회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놀타 일이 아니다. 사탐의 지성이 과학을 일으켰지만 그 과학마저도 (순전히 사변이고 추상인 한) 사람의 얼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관계는 아직 겉돌고 그래서 더욱 노예화될 수도 있다……. 오직 사랑만이 개체들을 하나 되게 함으로써 개체를 완성할 수 있다. 사랑만이 속 깊은 만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을 상대에게 내주지 않고 어떻게 상대를 완벽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남과 하나가 되면서 ‘내가 된다는 모순된 행위를 실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그런 일이 매일 여러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면 어느 날 전 지구 차원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샤르댕이 말하는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율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을 중심으로 둔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에선 개인은 존중받지 못한다. 개인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쉽게 희생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실로 중요해지면서,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샤르댕의 주장은 과거의 공동체, 전체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아마 그가 바라는 사회는 각각의 개인이 중심에 있으면서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하는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기능주의가 말하는 식의 유기적 연결만으로 그의 공동체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가 구성원들의 유기적인 연결의 결과물이면, 각 구성원은 저 마다의 역할과 특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는 사회가 보이는 특징과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샤르댕은 단순히 유기적으로 개인이 모여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와 개인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무한 반복으로 연결돼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회를 파악하기 위해선 개인을 보고, 그 개인을 파악하려면 또 사회를 보면 된다. 이러한 개인이 중심이 되고 독립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이다.
그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엉켜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원소들이 거미줄이나 망처럼 서로 얽혀 있다고 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물 같은 것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물 역시 나눌 수 없지만 그물의 경우는 비슷한 단위들이 늘어서 있어 원소 하나만 보아도 전체를 알게 되고 반복의 법칙에 따라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알게 된다. 한 공간을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채워나가는 반복의 법칙 속에서는 그물코 하나하나에 이미 전체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