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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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푸코의 책은 흐릿한 경계결말을 알 수 없음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학교 1학년때 멋도 모르고 성의 역사를 읽다가 고생한 기억이 있다. 오생근씨가 번역한 감시와 처벌”은 그나마 읽기가 수월했던 것다. 그런데, 무슨 철학자가 역사적인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지그래도 사변적인 다른 철학서들보다는 생생한 실증적 사실들이 있었기에 역사학을 공부하는 나로써는 즐거운 추억이었다. 몇 개의 강의와 일부 서적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실증적으로 쓰여진 그의 주장들은 빙산의 일각이고, 수면아래 가려져 있으면서 그의 주장들을 떠받혀 주는 것은 광범위한 서양 근현대 철학과, 사회과학과 의학지식에 대한 이해와 의심과 불만이다. 한국사도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에는 푸코를 철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소화하기에는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어느덧 10여년이 흘러, 이제 한국에도 저자와 같은 역사학자가 푸코를 통해 한국사를 접근한다고 하니, 한국사가 더욱 풍부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난해한 푸코의 주장을 저자는 쉽고 진실되게 풀어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쉽다. 물론 푸코의 모든 사유를 다 언급했거나, 푸코 철학의 한계와 대안 등을 제시한 책은 아니지만, 푸코의 삶의 궤적을 한국의 역사학자가 따라가다 보니, 푸코의 개인적인 모습과 프랑스의 근현대사를 엿볼수 있고, 나아가 저저가 꿈꾸는 삶의 지향성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푸코의 문제의식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약간 아쉬운 점은 5장에서 푸코의 문법을 한국 근대화에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시론으로써 많은 역사적 실증과 기존 역사학의 성과에 대한 재해석과 차이짓기를 통해서 좀더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단지 그의 문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들을 배우려고 노력한 점이 느껴진다. 아래에 저자가 푸코를 평가한 데로 그도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실천을 해야 되는지 고민한 흔적을 이책의 제5, 6장에서 느낄 수 있다

푸코는 삶과 사유와 글이 일치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사유의 고행과 자기훈련은 그에게 애초부터 내면 단련을 넘어 글로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p.39)

  저자는 임상역사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실천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이 괘종시계처럼 고장나면 건전지 갈고, 폭잡한 기계장치를 드라이버로 뜯어서 부품을 고치는 그런 존재와 다른 마음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써, 역사학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나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영웅과 거대서사(grand narative)에 매물된 역사접근 방법은 연구자와 국가권력이나 사회집단에게는 의미가 있을 지 모르지만, 하루하루를 자신의 삶속에서 의미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역사를 처음에는 호기심을 갖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다가 어느덧 과학적으로 재구성된 역사적 진리 앞에서 독자자신이 역사로부터 타자화되고 결국, 역사를 멀리하게 되어, 자기에 대한 성찰의 수단으로써 역사학을 이용하지 않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일반 독자는 역사를 떠받치는 존재가 되어 버렸고, 역사학자는 일반독자 혹은 민중들이 떠받쳐야 되는 역사적 사실, 나아가 개인이 보이지는 않는 역사적 덩어리 단위들의 진리들을 안내해주는 선지자들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을 지울수 없다.  

독자의 고민 : 역사는 재미가 없고, 나 삶과 관계가 너무 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저자의 고민 : 역사를 통해 내가 진리를 발견했는데, 독자들은 왜 내 마음을 모르지….

  생산과 소비가 나누어지는 것은 인문학적이지 못하다. 그가 말한데로 우리 모두 임상역사학자이 다. 개인과 가족 혹은 자신에게 의미있는 공동체의 역사를 반추해 본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좀더 명징하고 객관화 시키기 위해서 여러 전문 역사가들이 쓴 역사책에서 주장하는 진리들을 이용한다면, 비록 남을 위해 글을 쓰는 경우는 없겠지만 내 삶을 치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6장 실존적 역사쓰기를 읽는 동안 내 개인과 관련된 소소한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장과 2장을 통해 우리는 한 인간으로써 푸코의 내면을 만날 수 있었다. 거대한 사상가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노력해도 어찌할수 없는 개인의 성품과 개성을 운명처럼 안고 삶아가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안스럽게 그리고 내 자신 혹은 우리 모두 각각 그러한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푸코의 실존적 삶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무의식은 생애를 거치며 반복되건만 늘 낮설기만 한 것으로 구조회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좀처럼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한 어설프고 불우한 영혼의 외로움이, 마리화나에 취했을 때의 몽롱함이, 내면의 것을 타인에게 주고자 하나 주지 못하는 자의 고독함이, 엘리트로서 책임져야 할 것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고 싶어 할 때의 답답함이, 동생애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문명 사회라고 토로할 때의 쓸쓸함이, “에이즈에 걸린 것 같습니다하고 나지막이 스승에게 말할 때의 허무함이 있었다. (p.54)
푸코는 의사의 외침이 아니라 그 밑에세 침묵하고 있던 광기에 주목했다. 의사의 외침을 가능하게 한 광기의 침묵에 주목한 것이었다. 광인은 이성적 존재인 의사 뒤에 가려져서 이성적 담론의 질서인 의학의 표면 아래에세 침묵하는 존재였다.(p.72)

그리고 3장과 4장을 통해서 자신의 노력과 전략으로 철학자로 성공의 길을 챙취한 후, 그가 보여준 사회적 실천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실천이 어떻게 적용되는 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해야 되는지 잘 보여지고, 그속에서 그의 사상이 단련되고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17~18세기에는 계몽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새로운 가치가 대두되었는데,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일반화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토대로 한 발전을 추구했고, 계몽주의는 이성의 자율성,
종교적 독단 거부, 관용, 자유, 평등, 진보와 같은 가치를 추구했다. 역사에게 칸트, 로크, 루소 등은 계몽주의 사상가로 화려하게 기억된다. 이들 사상가에 비하면 구빈원의 관리들은 역사의 주변주에 산재한 지식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실무를 담당하며 부르주아적 가치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므로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한 일이다.(p.79)
푸코는 고통스런 타자였지만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회에 책임을 지려고 한 교사였다.(p.120)
권련이란 실체나 속성이 아니며, 나아가 무엇의 범주에 속하지도 누가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서로 관계 맺게 한는 어떤 힘의 기능인 것이다. 또는 전략적 위치의 집단적인 효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푸코에게 권력이란 다른 것에 의해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엇을 생산한는 동인이다.(p.143)
푸코는 개인을 자유의 근거가 아닌 일상적 사회 수호 권력의 근거이자 서식처로 봤다. 이것은 마치 노동 가치론의 관점에세 선 마르크스가 개인(노동자)의 노동력을 노동 가치의 서식처로 분석한 것과 유사하다.(pp.146-147)
그런데 왜 타인은 타인을 지켜보고 국가는 개인을 간섭하는가? 그것은 마치 자본가가 왜 노동자를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을 반복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노동자의 노동력은 노동 가치의 근거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서는 자본 축적의 서식처가 될 뿐이다. 일상적 사회 수호 권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 끊임없이 비정상적 타자로 분류되면서 사회 수호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p.148)
우리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재고해야 한다. 사회 수호권력은 개인을 타자화하면서 세련되게 자기 증식을 거듭했다. 그것은 독재자, 정치가, 자본가, 관료들의 정치, 경제 권력이 아닌 합리성의 영역에세 일상화되는 권력이기 때문에 사회 각 방면에 다양한 정부를 수립했다. 문제는 민주성의 결핍을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채운다는 점이다.
~행복과 인간다움의 요체는 정치 사회적 제도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전문적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 척도에 있다. 개인의 주체성은 표준적인 정상을 향한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계몽 권력이 표준을 정해 개인의 삶을 그에 봉착시키려고 할 때 개인은 자신이 표준과 어떻게 다른지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문화를 꽃피우려고 한다. 문화는 모든 인간은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말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합리성과 전문성으로 강화되는 그런 류의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잠시 내려놓고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청해야 한다. 푸코의 정항도 그런 맥락에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p.153)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경찰을 없애야 한다!(p.155)
진리란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어서 누가 그것을 잘 만들어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기 자신의 영역에세 말하는 것일 뿐이다.(p.160) 

철학의 문제는 현재의 문제이며, 현재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오늘날의 철학이 전적으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철학은 역사에 내재하는 정치이며,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역사이다.-미셸 푸코,<<말해진 것과 쓰여진 것>>(p.179)
그렇게 되면 비로소 개인의 역사를 저항의 수단으로써의 이데올로기로만 국한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맥락에세 제기되는 이데올로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p.182)
푸코의 역사는 역사학과의 역사에서 인간학의 역사로 울타리를 넓힐 때 가능한 것이다. ‘권력-전문 지식의 운영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는 근대 사회라는 역사상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한 행복한 실증주의자가 고고학적 사료 접근을 통해 인간학의 역사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p.224)

 
생각날 때 다시 읽어 보기 위해 의미있는 귀절들을 이렇게 옮겨 본다. 주체-타자화-임상역사가-프랑스 과학사에 흐르는 실증적형이상학의 전통-불연속적 연사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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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김기봉 지음 / 푸른역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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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언급한데로 사회과학을 접목한 한국의 1970~80년대 역사학은 한국사회에 있어 시대의 변혁과 미래에 대한 조망을 위한 중요한 학문이었다. 역사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열망이 어느덧 시들어 지는 1990년대부터 역사학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찻잔속의 태풍처럼 대중 혹인 일반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계속되는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역사학도 별만 다를 처지가 없다. 인기없고 영향력 없는 오늘날의 역사학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 이 책은 비록 9년전에 쓴 책이지만, 그당시에는 참신했을 것 같고, 지금쯤이면 합당한 평판을 가질만한 생각과 의견으로 포스트모즘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역사적 관점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이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이제야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한때 역사학을 공부했었던 학도로 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고민들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역사를 접한다는 것은 단지 옛이야기를 듣는 다는 즐거움을 넘어서 내 개인에 대한 실존적 고민과 맞다아 있다. 어떠한 한 시대의 구조와 환경속에 조건되어진 개인, 혹은 집단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외부와 반응하고 어떤 것을 꿈꿔오고 좌절하고 성취하며, 혹은 타협하면 살아왔느냐가, 오늘날 이 시대륻 습관처럼 살지 않으려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참고와 위안 혹은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단지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현재중심적이고 목정성과 단선적 인과율로만 역사를 다루는 폐단을 한국사 연구에 남겨준 e.h.카의 모던 역사학은 수정되어야 한다.  

20세기 단선적 연사관에 의문을 품고 여러 시도를 하였던 서구 유럽의 여러 역사학자들의 고민들과 연구 사례를 통해 지금 우리가 배우가 이해하고 있는 언어로써의 역사학이 문화사적인 이해로 바뀌여 함을 저자는 말해주고 있다. 저자의 역사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에 존경을 보낸다. 읽은 동안 여러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구조와 여러 인물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기존 역사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던 역사적 영웅이든, 아니면 일상적인 사람들이든...   오늘을 보여주는 일반 tv와 영화와 다른 집단 기억 혹은 추억 속에 있는 과거들을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해주었고, 그러다 보니 기존에 눈여겨 보지 못했던 다른 인물들과 환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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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과 오늘의 민중신학 - 죽재 서남동 서거 25주기 추모 논문집
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엮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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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써 민중신학에 관심이 있다. 안병무교수님의 책을 몇권 구해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서남동 선생님의 글은 그동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남동 교수님이 주장하신 여러 견해들은 사실 내 자신도 기독교 신항 생활을 할때마다 고민하는 것들과 관련된 주제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기독교라는 외래종교가 어떻게 한국사회에 토착화 되어야 할지나, 로마제국주의하에서 정치권력에 저항했던 예수를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어떻게 다시 기념하고 생각해 봐야 할 지 말이다. 서남동 교수님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현실속에서 신앙의 실존적 고민을 통해 민중신학을 내어놓았던 1세대이다. 그리고 갈수록 기독교 본리의 정신이 사라지고 희석화되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속에서 나는 이책을 접하게 되었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서남동목사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책이었다.  

우리는 죽재 선생이 던지고 간 민중신학담론의 중요한 주제들, '현존적 그리스도','성령론적 공시적 해석','두 이야기의 합류','한의 사제','민중의 자기초월과 구원','민중의 인식론적 특권','민담의 사회변혁적 동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해석학적 전회','이단신학자들의 정당한 복권','기독교의 제3형태로서 과학문명' 등은 갈릴리의 생명적 복음으로써 박제화되고 교리화되고 권력화된 역사적 중교로서의 기독교를 개혁하자는 열정이었다. (P.314)

죽재 선생의 비판적 신학지성을 통해 우리가 배운 '그리스도인의 자유혼'에 의하여, 우리는 오늘의 자본주의적 보편적 세계질서로서의 잘못된 세계화란 극복되어야 할 반복음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반민중적이고, 반생명적 문명형태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새롭게 등장한 21세기 경제적 제국주의는 미국, 유럽공동체, 일본의 금융자본과 기술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경제, 문화제국주의이다. 이에 맞서서 또 다른 신제국주의적 세력의 단합 특히 중국, 러시아, 중동국가들의 단합이 지구촌을 무기경쟁과 지역분쟁의 갈등으로 몰고 갈 조짐을 우리는 직시한다.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한 작은 나라들과 개발도상의 국가들은, 세계금융자산의 지배를 받게 되고, 군사적 경쟁과 무기구입을 강요받으며, 경제적인 빈부의 양극화를 강요받게 된다.(P.315) 

21세기 대한민국은 많은 경제적 우여곡절 끝에 거의 1세계 사람들과 동일한 경제적 혜택을 볼수있는 계층들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1세계를 쫓는 사람들에게 자꾸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는 독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의 증식을 목적으로 시작된 세계화의 확산속에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넘어서 세계시민으로써 우리들의 물질적 풍요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다른 나라의 시민들을 생각해 본다. 현재의 모습이 적어도 기독교인으로써 민중의 왕이 셨던 예수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아님을 우리는 민중신학의 눈으로 바라볼수 있게 해주었다.  

적어도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써 기독교를 갖고자 한다면, 비록 민중신학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민중신학을 통해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민중의 아품을 알고 그에대한 치유를 성토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어쩌면 민중은 인기가 시든 이름인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개성을 강조하는 시민이라는 말이 민주화 이후 많이 쓰이고 있다. 사실, 시민과 민중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 시민은 중상층을 강조하고 있으면, 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중시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시민에 대한 이해의 확산속에는 결국 민중과 만나게 된다. 시민으로써의 자유를 꿈꾸는 나는 이책을 통해. 내 자신이 외면할 수 없는 민중신학을 만나고, 민중들의 한이 풀리는 하나님 나라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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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예수 -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길희성 지음 / 현암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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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예수"라는 책제목에서 보듯 기독교와 불교 사상을 종합해 보려는 시도이다. 저자가 기획강연회를 통해 발표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것인데, 쉽게 읽힐 있는 대중서는 아니지만, 어려운 종교적 이야기와 사상들을 평이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모든 종교의 껍데기를 벗어던지면, 본질은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읽을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 ,  여러 사상들이 공존하고 소통해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그런데 서구로부터 전래된 천주교 기독교 사상은 전래된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한국화가 덜 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특히, 동양종교로 대표되는 불교와 서양종교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각각 가지고 있는 관심과 목적들이 다른 선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되고 앞으로도 계속 평행선을 달릴 것처럼 동양종교들과 서양종교들간의 소통이 한국사회에는 없다특히 근대사회에서 종교는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보니, 굳 비합리적인   신념체제에 대한 교류를 사상적으로 고찰해 보는 시간이 적었던 것도 있었고, 어차피 종교는 종교집단을 통해서 유지되고 계승되기에 서로 인간의 유한성이나 존재의 근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서로 협력해댜 한다는 생각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 겠다는 생각만이 남무하는 것 같아 안타갑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의 한계일뿐, 기독교와 불교가 담지하고 있는 진리 자체의 한계는 아닐 것이다. 종교를 제례의식이나 문화로써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의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의 비교 분석을 보다보면, 새로운 종교적 지평을 가질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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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 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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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부로델이 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방대한 책을 번역한 책이었는데, 내용은 어려웠지만, 번역은 매우 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근대의 태동에서부터 완성이 일국사의 범위에서 도식이 된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는 풍토속에서 그 책은 나에게 색다른 시각을 주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자생적 근대화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완성에 고민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어떤 정형화된 모델을 찾았다. 그것이 대부분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주의 제도의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비교함으로써 어떤 정형화된 근대화의 과정의 모델을 만들고 이 모델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어떠했는지 비교하는 경우가 한국사에서는 있어왔다.  

  이를테면, 영국 젠트리의 발전, 즉 부농의 발전, 인클로저운동, 가내수공업, 선대제, 공장제 기계공업, 산업혁명, 방직기, 철도의 발명, 등.. 한편 사회적으로는 농민들이 분화되고, 상업이 발달하여서 임노동자가 생기다가 부르주아와 플로레타리아가 생겨서, 계급갈등, 시민혁명, 대의 민주주의.,,그런데 너무 역사를 단순화 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부르델은 근대의 시작을 단지 일국사에서 시작하지 않고, 국제적 자본의 이동에서 보았다.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르네상스의 시작하여 네델란드, 영국 등 자본의 이동으로 파악함에따라서 근대를 보는 지평을 넓혀 주었다.  

  이책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읽기전에 이책을 읽으면 어렵게만 느껴지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좁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해 매우 평이하게 쓰려고 했지만, 내용은 알차다. 또한 여러 그림들이 그 시대의 모습들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이해를 돕고 있다. 참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여러 단편들 속에 소개되어 있어 우리의 역사적 상식을 높여준다. 노예무역, 차, 염료, 해적, 인삼, 일본도, 동인도회사...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고 읽는 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이책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되돌아 본다면,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이 매우 반인류적이었다는 내용을 차지하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일국사적 관점으로 자국의 경제적 발전을 꿈꿔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근대의 발전은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들과의 경쟁과 협력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인류의 평화와 번영 속에서 자국의 발전을 꿈꾸는 세계 시민적 자세와 그러한 열린 세계 인식과 역사 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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