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불복종 - 야생사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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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1849년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 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 에세이다. 그는 미국 정부가 멕시코 전쟁을 일으키고 노예 제도를 유지/고수하는 등 부당한 일을 자행하는 것에 대한 반항으로 6년 간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하룻밤 동안 감옥에 수감되는데, 이 때의 경험이 이 에세이를 만드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분량은 적지만 보다시피 주옥 같은 띵언으로 점철되어 있어 후세의 마하트마 간디, 영국의 노동 운동가들, 나치 치하의 레지스탕스 대원들,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우리나라 사상가인 함석헌 선생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과연 국가 권력에 대한 개인의, 아니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명저 중의 명저이자 고전(Classic)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작인 것이다. ... 여기까지는 상투적인 수사이고.



'공병기'라고 페친 분이 쓰는 소설이 하나 있다. 얼마 전에 거기에 수록된 비판을 하나 게시하셨는데 대저 이런 거였다.


"그는 대부분 '주장'을 하고 있어 모든 경험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야 하고, 그러려면 경험을 극적으로 판단하고 구성해 그 외 다른 요소는 일절 배제해야 했다. 가령 그는 남성들의 성욕이나 일체감 같은 것을 놀라워하거나 불쾌해한다.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옳은 삶을 고집하는 경향에다 솔직하기까지 해서 군대를 인간에게서 삭제하려는 건지 인간성의 일부를 삭제하자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요컨대 '공병기'는 대략 소설의 형식만을 취했을 뿐, 실상 논설문 자체라는 소리인데, 형식의 투박함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사례와 주장이 전도되는' 이중성을 까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작가의 주장이나 주제의식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은 맞지만 이야기가 주장을 위해 복무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다. 바로 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경우가 그렇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내 페친 같은 분이다. 그는 옳음(good)을 옹호하는 투사다. 아마도 철학을 했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순수했고, 인간 세상을 사랑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자연과 사회, 늘 마주하는 이웃사람, 나아가 인류 전반. 어쩌면 그의 본심이 퇴색되는 부분은 안타깝게도 그 pc함의 추구에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누구나 다 아는 소릴 왜?' '그래, 잘났다. 재수 없는 새끼!'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 그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가 선민사상에 경도되어 있다고 볼 것도 없는 게 그는 <월든>에서 보여지듯 홀로 외로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이 점을 한 번만 더 숙고한다면 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물론 그래도 아니 꼬운 사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힘들어진 세상이다. 아니,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면 대체 그것이 무엇에 대한 정의인지, 추구한다는 그 자신은 불의로부터 무결한지 쉼 없이 검증받게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명백히 말할 수 있는 인본적 잣대가 존재할 때,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불의가 존재할 때, 제도와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을 침탈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 그는 끊임 없이 재평가받아야 되는 인물이 아닐까.



참 좋은 말로 마무리 했다. 우리는 결국 한 인간의 '순수함'과 '진심'을 보고 나아가야 하니까. 그 형식은 어쩌면 둘째 문제다. 소로우는 그런 인물이다. 어쩌면 사람사는세상이니 나라다운나라니 좋은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는 인간 심리의 근저에는 크든 작든 순수한 소로우가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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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수록된 다른 네 편, 돼지 잡아들이기, 가을의 빛깔들, 한 소나무의 죽음, 계절 속의 삶, 야생 사과까지 다 읽었다. 영문학도스러운 시적표현과 <월든>의 주요 문장으로(이건 고도의 마케팅 수법으로 사료되기도 한다) 작가의 말을 포장한 역자의 말까지. 연보는 대충 읽었다.


소로우는 진짜 시골 아재가 맞는 게 약간 그런 느낌 있지 않나. "마, 니 야생사과 안묵어봤제? 이거 어디가서 묵고싶어도 몬먹는다. 퍼뜩 묵어봐라 쥑인다~!" 마치 아버지가 낚시 다녀 오시고 집에서 회 치면서 내가 잡은 게 제일 맛있고 영양가도 좋다면서 처자식들에게 생색내는 그런 뉘앙스로. 게다가 소로우는 말 그대로 초야에서 홀로 2년을 내리 지낸 진짜 '자연인'아닌가. 우월감 내지 비교하듯 서술하는 투, 이런 걸 선민의식이 아니라 아재감성, 자연인 감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편이 더 자연스럽지.


'가을의 빛깔들'이 정말 읽기 힘들었는데, 이스트 코스트 메사추세스의 자연경관을 네셔널 지오그래픽 HD 다큐멘터리로 보여주어도 졸음을 느낄 판에 삽화 하나 없이 그 번역체의 묘사들을 읽자니 안 그래도 주의집중을 잘 못하는 내 머리는 계속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오늘 무궁화밭에 가서 비닐 멀칭하면서 하루 종일 일 했는데 정말 농촌은 아닌 거 같고 산촌에서 혼자 유유자적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다큐멘터리도 보고, '나는 자연인이다'도 봐야지. 내가 그 나무들, 곤충들, 새들, 짐승들을 다 어떻게 알 것이며 ... 정말.


계절 속의 삶은 요즘 나오면 참 욕 많이 먹을 만한 단문인데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감안하자. 그는 자연인이다.


야생사과는... 사과의 내력과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을 두 번에 걸쳐 읽었는데 당최 가물가물하다. 예전에는 잘 기억했었던 거 같은데, 너무 슬프다... 역사라면 자신 있었는데 ... 요튼 하임, 트야씨, 이둔 여신 ... 다시 읽어야지. 몇 번에 걸쳐. 강박을 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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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p.24)"1



"정의 편에 투표하는 것도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당신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가볍게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맡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가 다수의 힘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p.30)"2



"왜 그들 자신은 자기들과 주 정부의 연합 관계를 해체하지 않으며, 자기들 몫의 세금을 주 정부에 바치기를 거부하지 않는가? 그들과 주 정부의 관계는 주 정부와 합중국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그들이 주 정부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주 정부도 합중국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p.34 - 35)"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떤 나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p.38)"



"시작이 아무리 작은 듯이 보여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끼껏해야 거기에 대해 토론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면서. 개혁은 수십 개의 신문을 붙들어 일거리를 주고 있으나 단 한 명의 사람도 붙들지 못하고 있다. (p.41)"



"당신의 온 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단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p.42)"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 (p.44)"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교양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가 가난했을 때 품었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p.44 - 45)"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p.46)"3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p.50-51)"



"나는 참다운 인간들이 군중의 강요를 받아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식의 삶이 도대체 어떤 삶이겠는가? (p.51)"



"나는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선령한 이웃이나 친구로 어느 정도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았다. 그들의 우정은 평온한 시절만의 우정이고, 그들은 올바른 일을 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 (p.56)"



"이 세상에서조차도 내가 정부 밑에서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유롭게 사색하고 자유롭게 공상을 하고 자유롭게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면, 현명치 못한 지배자나 개혁자가 우리를 치명적으로 괴롭힐 수는 없을 것이다. (p.63)"



"진리의 보다 순수한 원천을 모르는 사람들, 즉 그 냇물을 따라 상류로 더듬어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성서와 헌법 옆에 서서 존경과 겸허의 자세로 그곳의 물을 마신다. 그러나 진리의 시냇물이 이 호수 또는 저 연못에 조금씩 흘러들어 가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허리띠를 다시 한 번 졸라매고 그 수원(水源)을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p.66)"



"국가가 개인을 보다 커다란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에 알맞는 대접을 개인해게 해줄 때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는 나올 수 없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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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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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 이틀 아니 실은 단숨에 다 읽었다. 국내 청소년 성장소설이 주는 아릿한 느낌. 간결한 문장이지만, 그 속에는 마음 속을 깊숙히 저미며 추억을 새기게 하는 묵직함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예전보다 '사회적 시간'을 많이 체감한 어른이 되었음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짧디 짧은 독서량에도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래서 결코 소녀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구나. 아파하면서도 자신의 낭만을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구나...하고 생각한다. 실은 이제 다 지난 일이다. 단지 내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역시 추억만을 곱씹기엔 난 이 소중한 시간들을 너무 많이 허비하고 말았다. 


짧디 짧은 독서량에 어디 책 깨나 읽었겠냐만은 과거(아마도 10년이 더 지난 어릴 적) 읽었던 청소년 성장소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김혜진의 '프루스트 클럽'이라는 작품이다. 다 읽지는 않았지만 (실은 제목도 줄거리도 가물가물하다가 얼마 전에 검색을 통해 알았다. 그 잠깐 읽었던 작품이 뇌리에 남을 정도라면....) 당시로서는 대단히 어린 나이에(그것도 중,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 무렵의 나이에) 접했던 주제의식, 예컨대 성장통이라던가 사춘기 같은 부분에서 어딘가 괴리감이 들었던 부분도 없지 않다. 이제는 그 시기를 훌쩍 지나버린 어른이 되었지만, 오늘 '아몬드'를 읽으면서 과거에 읽었던 그 책 생각이 많이 났다. (분류하자면) 똑같은 청소년 성장 소설이기도 하고, 단숨에 읽었으나, 그 여운은 결코 단숨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말이다. 분열하고 방황하는 소년들, 기시감에 가까울 정도로 붕 떠있는 풋풋한 느낌. 어머니의 품 안, 정확히는 과거 짝사랑하던 소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 평화로운 한때의 무위(無爲). 대충 그러한 향수인데, 나는 각박한 현실에 그런 구원을 좇은 인간 전형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참 많은 어린 아이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구원의 길을 향해 손을 뻗쳤었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연애에 탐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술에 탐닉하기도 하고. '청소년의 향수' 역시 그렇다. 내가 괜히 입시 때 청소년학과나 상담학과를 썼겠냐만은 (...) 이번 독서를 계기로 '프루스트 클럽'을 한 번 다시 읽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딘 중고가로는 단돈 500원에 판매하고 있는 잡스러운 느낌의 책이지만, 뭐 어때. 내가 보고싶다는데.


요즈음은 애써 표현력을 재고하고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쓰는 게 가식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현학적 수사로 수놓인 비평 따위의 글들을 읽을 때 구태여 억지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그녀석은 비평마저도 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글쎄, 나는 그런 사랑이라면 싫다. 각종 재단과 분석. 교양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고나리질, 꼰대질... 작품을 깎아 먹는 하등 영혼 없는 짓거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역시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나 아비투스가 따로 있는 것이겠지. 아무튼 참으로 이런 생각에 경도될 때면 마침내 나만의 독서 취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이번 달은 네 권의 책만 주문하려 한다. 실은 이번에 사 놓은 것도 다 읽지 않고 있으니까 사둔 책을 열심히 읽기나 해야겠지. '안녕 나의 피아니스트'같은 거라던가...



청소년기의 치기 어린 방황도, 형언되기에는 꽤나 명료하지 않은 사랑과 아픔과 숱한 인간관계에서의 고뇌도, 실은 그것은 다시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시간이다. 나는 얼마나 이 아름다운 시간을 허투루 살았나. 텅 빈 방 안에는 술 냄새만 가득했지. 열렬히 사랑이나 했겠냐만은 그에 비해 열렬히 사랑한다는 말을 낭비하기나 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다 결국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떠올려 봤다. 사랑이 변했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학대를 가한다는 뉴스도.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용서한 이들의 이야기도.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란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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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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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 드디어 다 읽었다. 4월의 첫 완독서.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는 그 완독서라는 개념에 대해 지대한 회의를 품을 수 밖에 없지만, 그 텍스트 조차 텍스트를 읽는 개인조차 유동적인 것이라면 그런 말도 상관 없겠지. 결국엔 내가 창조자로서 서술하는 거니까)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가. 아니 책을 읽는다는 개념은 무엇인가. 나를 포함한 통상적인 사람이라면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페이지를 읽으면 전에 읽었던 내용이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독서란 곧 망각의 과정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그런데도 그 책을 끝까지 넘겨서 다 읽고 덮어버리는 것으로 그 책을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텍스트와 진리의 고정성, 이른바 통독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리 쉽게 맹신할 수 있을까.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며 수 가지 예를 제시한다. 독서란 곧 비독서이며, 이는 곧 읽은 책이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갖는 관념이나 그것이 유동적이라는 점에서는 상동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예시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몽테뉴의 예인데, 몽테뉴는 '수상록'의 그 지적인 텍스트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지독한 건망증 환자였다고 한다. 저자는 몽테뉴의 독서를 넘어서는 탈독서의 경지라고 찬탄해 마지않는데 본문의 내용을 옮기자면 이렇다.



"독서는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줌과 동시에 탈(脫)개성화 작용을 발생시킨다. 텍스트의 어떤 내용도 고정시킬 수가 없으므로, 독서는 자기 자신과 합치될 수 없는 주제를 부단히 야기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휘말려 들게 되는 책에 대한 이 부단한 망각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는 독서라는 말보다는 몽테뉴의 경우에 비추어 '탈(脫)독서'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 책들이 단지 지식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기억 상실, 즉 정체성의 상실과도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에 관한 모든 고찰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다. 이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텍스트 접촉의 긍정적이고 축적적인 측면만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어쩌면 아 점이 더 크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시피 저자는 책읽기의 '인풋', 즉 정보의 수용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고 2차, 3차 구성물로 만들어내는 개인의 창조성을 중시하고 있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책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견해는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는 마지막 장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비평은 예술, 다름 아닌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개인' 그 자체로 환원되는 가장 고도의 예술이다. 책은 단지 담론의 구실일 뿐이고 결국에는 자기 얘기를 끌어 올리게 되는 까닭에 예술이라는 건데, 이것은 비평이 곧 나르시즘, 다시 말해 자폐적인 예술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얼마 전에 이랑의 '욘욘슨'에 대한 비평을 읽었을 때, 그것이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뻑을 하고 있는 거라는 기분이 들었던 건 과연 착각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


얼마 전에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상섭 역)의 한 주석을 보면 창조(creative)는 기독교적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이 아니라 '장인'이라는 개념으로 창조가 아니라 제작을 행할 뿐이라는데, 원론적으로 본다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수많은 주해들에 의존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이렇게 보면 자아라는 고정된 실체도 환상이고, 내가 아는 건 진짜 아는 게 아니고, 내 생각도 내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 수긍이 가기 시작한다. 탈독서의 경지라는 것은 이렇듯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명확한) 인식의 불가해성, 곧 인식의 다변성에 합치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참 흥미로운 부분이다.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끝내 알 수 없는 그 이해의 늪이란 참 무한히 아득하다.


이 책은 비독서의 개념을 다루며 독서의 부재를 언급한다. 마지막 장에 오스카 와일드의 현대의 비평이론을 설명하면서 현대(19세기)의 독자들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쓰느라 성찰할 시간이 없다고 지적하는데, 여기서 독자를 유저(user), 책을 정보매체, 글을 sns활동이라고 치환하면 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적이다. 아니, 주류 매체가 아날로그 텍스트에서 디지털 텍스트로 옮겨진 지금은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책'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신성시된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고,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금기로 여겨왔다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겁에 질린 아이'의 자아라고 한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우리는 교양을 얘기하면서 상대방을 얼마나 깎아내리는가.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뼈저리게 깨달은 건 메모를 하는 습관이다. 책이라는 것은 (본문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그 자체로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니까. 텍스트는 언제든지 유기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한 문장 내지 한 문단의 텍스트를 읽었을 때 느껴지는 심상을 그때그때 기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휘발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니까. 나는 통독을 한다는 명목으로 고정된 진리, 고정된 텍스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프로이트를 전공했고, 이 부분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을 개진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도 책을 잘 안 읽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모르는 책도 많고(라고 하기에는 기만이 확실한 게 진짜 아는 책이 많다. 햐긴 문학 교수니까...) 요컨대 그런 주장이다. '꼭 다 통독해야만 능사는 아니다'라고.


그렇지만 통독은 또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정확히 말하면 옛날 책이 '고전'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그 담론 상황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한 교양으로만 넘겨버린 진리를, 단순히 읽었다고만 착각하는 그 부분을 더 파고들어감으로써 내가 얻는 가르침, 또 새로 배우고 익히는 그러한 맛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독서년을, 곧 통독을 성실히 행할 생각이다.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서도 나오는 그것이지만, 중요한 건 인풋을 수용하지 못한 뇌는 순환논리를 거듭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독학하는 사람들이 접하는 딜레마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도식에 갇혀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맥락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 책은 지적 스노브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스노비즘을 비판하는 책이기도 하다. 반드시 읽은 책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면, 어느 상황에서건 자신의 지식을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한다면, 비매너도 그런 비매너가 없을 테니까. 교양과 허영심은 결국 한 끗 차이일 수도 있다. '책 읽는 사람'들은 최소한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러한 인간적인 매너는 더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


기실 나한테 꼭 필요한 책이었던 거 같다. 다만 이 책은 아날로그 텍스트, 그 중에서도 문학에 관한 담론이다. 일전에 읽었던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와는 대비되면서 공통된 정서를 공유한다. 단치가 책의 인풋을 강조하는 반면, 피에르 바야르는 책의 아웃풋 기능을 강조한다. 내가 샤를 단치의 책 읽기가 주로 문학독서에 경도되어 있다고 지적하지 않았나. 그런데 맞는 거 같다. 문학은 첫 페이지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쭉 읽어내려 가는데 적합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피에르 바야르는 본문에서 소세키의 예시를 들며 무작위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문장부터 읽는다는 청년도 있다고 한다.) 




네이트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30대가 되면 20대 때의 낭만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외투를 걸치게 된다고 하면서 작품을 아무리 많이 접해도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 같다. 더 심오하고 원숙한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자랐는데 계속 같은 우물물을 퍼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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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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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는 ‘연대하라‘의 다른 이름이다. 이 메시지의 기저에서 보여지는 생의 낙관론은 무척 아름답기까지 하다. 마치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 앨범을 레지스탕스 노장의 버전으로 듣는 느낌이랄까. 분명한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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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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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의 안티테제. 이 한 권의 책은 이후 '투명사회', '권력이란 무엇인가', '에로스의 종말' 등에서 개진되는 한병철의 여타 주요 개념과 사상의 전초가 된다.


소설가 장정일은 이 책을 두고 패스티시(특정한 작품으로부터 내용이나 양식을 빌려온 작품)라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처럼 사회 문제의 철학적 진단을 이토록 직관적인 도식에서 간명히 쓴 책은 (내가 알기로) 여태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겠지...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근대의 면역학적 구도(부정성의 사회)와 후기 근대의 신경증적 구도(긍정성의 사회)를 비교하며 현대 사회가 '긍정성 과잉', 이른바 '같은 것의 범람'으로 자아의 위기를 고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성과사회'는 다른 누구(타자)도 아닌 자기자신이 스스로의 경영자가 되어 혹사하는 시대이고, 우울증, 주의력행동결핍장애, 소진증후군은 바로 이 자아의 혹사로 비롯하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적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서 발견되는 현대인의 내적 폐해에 관한 서술을 보고 싶다면, 3장 '깊은 심심함' (p.30 ~ p.36)과 5장 '보는 법의 교육' (p.47 ~ p. 54)이 제격이다. 첫 문장부터 팩트폭력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정리해본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 구조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예컨대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은 큰 규모의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지금은 페이스북을 멈춰야 할 때'리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페이스북은 '타인의 의견'을 표방한 '같은 지형적 담론'의 소비가 만연한 플랫폼이라는 내용이었는데, '피로사회'에 따르면 페이스북이 말 그대로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동일자의 나르시스트 경향을 강화한다는 거 아닌가. (...)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논리를 따라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사회문제전반을 파악하는 것은 자칫 맹아적인 이해로 귀결될 소지가 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우울사회'를 보론으로 엮은 듯 하다. 내가 보기엔 주장의 중언부언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한병철이 이후의 저작들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견지하는 것이겠지만... 확실히 이 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영학적 메커니즘'을 기술하는 데는 적절하지만, 여전히 국가 단위로 자행되고 있는 감시와 검열은 설명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렇듯 헤겔을 위시한 변증법은 반증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어느 측면에서 어디까지 유효한지 판단하고,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결론부에 '이상적인 피로'에 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전에 읽었던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데이터 풍요의 시대에 이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독자에게 사유와 에로스를 촉구하는, 상당히 '뚝심있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근본적 피로'라는, 거의 전근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개념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피로라기 보다는 '쉼'이다. 주 5일, 필요하다면 주말에까지 나가서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일하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오순절 막간의 시간'과 '커피 브레이크'는 양립할 수 있을까. 장정일의 지적대로 단순한 '힐링'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역자 후기에 '분단국으로서의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이념적 지형'에 대해 언급하는데, 근대의 면역학적 도식(이데올로기적, 민족적 타자와의 대립)에서 벗어나 '긍정성의 확대'로 이어지는 사회는 기존의 '진보 vs 보수' 구도를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반은 동의하지만 반은 글쎄다. 이념을 잃어버린 사회는 표류하고 있고, 오히려 '우경화'되어가고 있다. 진보는 '불편한 것', '성가신 것'이 되어간다. 거기에 자리잡는 것은 이기적이고 협소한, 파쇼적 군상이다. 또한 아직도 태극기를 들고 왕당정치를 옹호하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이다. 그렇게 쉽게 타개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래도 생각보다 읽는 데 얼마 안 걸렸다. 이전에 '에로스의 종말'을 읽어서 그런가 꽤 나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한 달 넘게 질질 끌었을 텐데. 이제 나도 독서인이 되어가나 보다. (주변사람들도 대개 그렇더라. 젊은이들을 다독가로 내모는 세상... 독서의 시대정신....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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