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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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선전(propaganda)의 고전이다. 이 책은 강준만의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보고 읽게 됐다. 강준만은 PR의 선구자들 중 한 명으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지목했는데, 그는 최초로 PR 고문(Public Relationship Counsel)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현대적인 '선전' 개념을 정립시킨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라는데, 삼촌이 무의식 개념을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써먹었을 때 그 자신은 그걸 대중들을 선동하는 데 이용했으니 가히 비범한 인물인 것은 틀림 없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이상호 기자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그가 김광석 타살설을 주장하는 게 모로 보나 음모론처럼 느껴져서 몹시 불편했으나,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여론이 크게 역전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故 김광석의 딸 서연양의 죽음이 밝혀진 뒤부터였을 텐데, 그때의 여론은 무죄추정의 원칙은 아랑곳 않고 서해순씨를 범죄자로 몰아갔지만 수사 결과는 끝내 무혐의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른 실속없는 아젠다들처럼 흐지부지하게 식어갔다.


 "이상호가 결정적 증거 제시도 없이 이 다큐를 극장에 내건 것은 박해받은 기자의 고군분투와 서해순의 악마화라는 코드가 지니는 대중성과 그 결과가 주는 달콤한 결과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영화는 지난 정권 동안 쌓인 국가 기구에 대한 불신을 의혹의 재료로 활용한다."(슬로우뉴스. 이상현. 2017.10.13)며 이상호 기자를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때때로 이런 식의 '정의감'을 주창하는 의제들에 대해 '선동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여하한 선전 자체에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물론 많다. 하지만 나는 우선 강준만의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하고 싶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론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강준만 -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p.104-105>)



 '프로파간다'는 숙독의 중요성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그냥 20세기 초 미국사를 훑어보기 위한 사료 정도로 대충 훑어내려가도 되었으나, 읽다 보니 그보다는 좀 더 깊이있게 독해하고 싶어진 것이다. 선전이 대중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버네이스의 주장에 구태여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다만 그는 과두 엘리트주의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소수의 성실한 엘리트들이 선전을 통해 더 나은 국가를 만들 것'이라는 그의 진단은 근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적용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각종 미디어, 특히 sns가 등장하고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현대사회는 엘리트-대중의 이분법적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 현상들이 훨씬 많다. 버네이스는 선전이 여론을 조작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두고 '보이지 않는 정부'라는 표현을 썼다. 각종 미디어, 광고, 마케팅 그 어디에서든 크고 작은 선전이 판치는 오늘날, 이제 선전은 '보이지 않는 손' 정도로 격상시켜도 무리 없는 개념이지 않을까.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 전교회장 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핵심 참모 역을 하면서도 대중주의에 대한 식견이 조금도 없어서 끝내 고배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상대측은 선거송을 만들어 부르며 유세를 다녔고, 나는 '진심은 통한다'면서 지속적으로 유익한 정책과 공약을 강조하면 된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짓이 따로 없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아졌을 지도 모르겠다. 버네이스는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서든 요원한 문제와 관련해서든 사회가 발전하려면 진보적인 교육을 통해 대중을 각성시켜야 한다."(p.233)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때의 교육은 당연히 지적으로 고도화된 정신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 조성을 통해, 중요한 행사와 사안의 의미 부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계몽된 형태의 선전을 의미한다."(p.196) 


 요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조사가 있던데, 그들에게는 버네이스의 저서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기업과 대중은 각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둘의 특징은 어떻게든 기분 좋은 합의점에 이르러야 한다. 갈등과 의심은 양쪽 모두에게 해로울 뿐이다."(p.139)라는 진단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진정한 소통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다수의 여론을 선도하는 대중적인 조작이 있을 뿐이겠다. 그러니까 선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효율성'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더 쉽고 빠르며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만으로 선전은 그 정당성을 얻는 듯 보인다. 하지만 버네이스는 그 폐단에 대해서는 "이러한 남용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p.223)"고 일축한다. 그가 평생에 걸쳐 PR윤리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고는 하지만, 정작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강준만이 우리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한 딜레마를 지적했듯 어설픈 선전은 역효과를 낳을 뿐이라는 현실이 슬프다. 조금 느리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는 이들이 새삼 대단해진다.



 "버네이스는 성실한 자세만으로도 칭찬을 살 만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PR 전문가들의 엄격한 윤리규범 마련에 헌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는 윤리적인 성격을 띤다기보다 인식론의 성격을 띤다. 선전 전문가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세상에서 값비싼 진실이 밖으로 나와 진실로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떤 생각이 더 이상 괴상한 이론이나 좌익이나 우익의 터무니 없는 망상이 아니라 용인되어야 하는, 나아가 결국 용인되는 그 무엇으로 바뀌는 시점은 과연 언제일까?"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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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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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봤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싸이코", 놀란의 "다크나이트"처럼, 지금 보면 그다지 큰 감흥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 역시 출간 당시에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리라는 것을.


'고전'과 '한 철 유행'의 차이는 그 메시지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고전인 이유는 지금도 무책임하고 선정적인 언론보도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리라.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 전반에서 언론의 비윤리적 보도행태가 한 인간의 명예를 파괴하는 명백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카타리나 블룸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파괴되는 과정을 보면, 그녀가 기자를 살해한 것을 과연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양반 작품은 예전에도 읽은 적 있다. (머리 싸매고 끙끙 앓으면서 읽었었다. 그때는 그의 독일식 만연체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독일 소설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유머러스한 편이라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는 그래도 좀 유머러스했던 것 같은데, 이 책은 사뭇 진중하다. 그러면서 또 고풍스럽지는 않은데, 페이지 수도 얼마 안돼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모던한 소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민음사에서 리커버 버전 나왔다는데, 이 책이 고전 중에서는 그나마 모던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오늘날의 독자가 만약 이 작품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뵐이 훌륭한 작가라는 것과 아직도 황색언론의 추악한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 뵐 문학의 특징은 '동시대성'이다. 그는 전후 피폐해진 독일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구축하는 것을 문학의 목표로 봤고, 항상 시대정신에 입각하는 글쓰기를 해 왔다. 그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로 지칭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82년생 김지영'처럼 일종의 사회고발문학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뵐은 70년대 초반, 독일의 '빌트'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억울한 피해를 입어왔다고 하는데, 이후 그가 문학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피력하기 위해 내놓은 게 바로 이 작품이다. 


문학은 이런 맛인가보다. 문학을 읽으면 오히려 할말이 없어진다. 아... 그랬구나 식. 그리고 문학 파는 친구들이 대체로 시니컬해 보였는데, 왜 그러는지 점점 알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문학을 좋아했다는데, 말 다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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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 그들은 대중을 어떻게 유혹했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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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한 번 끌렸고, ‘내가 하는 자기계발은 괜찮고 남이 하는 건 나쁘다는 태도는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서론의 문장에 또 한 번 끌렸다. 요즘 한창 자기계발에 관한 고민에 빠져있다. 청년세대는 왜 그토록 자기계발을 환멸하면서도 꾸준히 자기계발서를 찾는지, 언제까지 자기계발을 마치 ‘길티 플레저’처럼 여기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럴 때면 꼭 도달하게 되는 원론적인 물음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이 그 물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바로 읽게 됐다.


 이 책은 흔히 자기계발, PR의 선구자들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열 명의 인물들의 생애, 활동이력, 평가 등을 나열하는 데 방점이 찍힌, 평전보다는 인물사에 가까운 책이다. 강준만의 책은 처음 읽어 보는데, 다독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당히 많은 책들이 인용된다. 각 챕터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인물평 겸 자신의 ‘소신(?)’을 조금씩 피력하는데, 이게 꽤나 아프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론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p.104-105)

 

 

설득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를 압도하는 대중 민주주의, 그 본질이 바로 광고임을 바턴은 간파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혹 우리는 민주주의를 대체할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민주주의의 경제적 버전이라 할 광고에 대한 혐오와 비판을 통해 표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여기는 정치인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한 광고 능력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광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세일즈맨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p.206)



 보다시피 강준만은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대중민주주의’와 궤를 같이 해왔다고 연결짓고 있다. ‘그들’은 대중이 돈이 되고, 힘이 된다는 걸 간파해 왔다는 식으로. 그가 맨 먼저 조지 갤럽을 소개했다는 점은 여론조사가 오늘날 대중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력을 볼 때 시사적이다. (강준만은 이 처음 챕터에서만 자신의 견해를 집중하고 그 뒤로는 비교적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조지 갤럽은 20세기 초, 미국 내 여론조사를 확대시킨 주역으로, 여론조사가 엘리트 정치에 대한 견제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소위 엘리트 위주로 돌아갔던 미국의 정치는 갤럽의 등장으로 판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강준만은 여론조사의 등장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폐해 역시 심각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 이는 바람에 약하고 바람을 사랑하는 여론 형성 구조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람기는 유권자의 특권이라지만, 그게 지나치면 대접받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여론을 무서워하는 동시에 여론을 깔보기 때문이다. 언제든 바람 한 번 불면 쉽게 뒤집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심각하게 성찰하기보다는 바람을 만들 수 있는 드라마, 이벤트를 연출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한탕주의를 창궐케 하고 성찰의 씨를 마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면 '대중은 위대'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에 음모와 방해' 때문에 또는 유권자가 어리석거나 탐욕스럽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이중 잣대가 만연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대중 폄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p.40)



 어쩌면 페북에서 내가 그토록 학을 떼던 소위 ‘지식인의 엘리트주의’를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마주하게 된 셈인데, 그의 논증을 보고 있으니 그런 스탠스가 조금은 이해가 갈 법도 했다. 사실 얼핏 보면 왠지 강준만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걸 직접 말 하는 게 철저하게 금기시되어 있을 뿐이라 그런 거지) 다만 나는 그의 지식인, ‘학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정치, 사회 안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박근혜와 트럼프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듯 지성이 부재한 사회는 공멸의 길에 이를 수 있으므로 위험하다. 어쩌면 그의 소신(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는다)에 전부 동의할 수는 없어도 반가울 수 있는 이유다.


 동시에 그는 이 책을 통해 계보학적 조망을 시도한다. 그가 소개한 10명의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은 전부 미국인이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영국인이지만 사실상 미국에서 활동했으므로) 미국은 광고, PR, 맥도날드, 거대금융, 자기계발을 수출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수출했다. 바로 이것이 강준만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중민주주의는, 그리고 우리가 환멸하는 자기계발이나 광고산업은 실상 한 배에서 나온 것들이며, 이것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꽤나 흥미롭게 읽었고, 이전에는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그냥 무턱대고 ‘나쁘다’고 했었다면, 이제는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나쁘다’고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제일 큰 소득이다. 8장부터 10장, 데일 카네기와 노먼 빈센트 필, 나폴레온 힐 같은 인물들이 등장했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 소개된 인물 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인물은 바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다. 그의 삼촌이 그 유명한 지그문드 프로이트라고 하는데, 삼촌이 무의식의 욕구를 치료 대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걸 선전선동의 기초로 보았으니, 좀 대단하다. 그가 저지른 기행(?)은 상당하다. 여성들도 담배를 피우도록 조장하고(놀랍게도 여성의 흡연을 당시 페미니즘 운동과 연계시켰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었던 ‘초록색’의 인식을 대중적으로 개선했으며, 샐러드와 샌드위치 위주의 미국인의 아침식사를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위주로 바꾸는 등 엄청났다. 특히 괴벨스가 그의 팬이었다고 하는 데서 조금 무서워졌다. 중학생 때 지역서점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주저 '프로파간다'를 처음 봤는데, 그 책의 강렬했던 표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름 욕구를 누르느라 힘들었던 것 까지도) 사실 저자 이름은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금 그가 희대의 선전, 선동가였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제일 의문인 것은 왜 미국인들이 ‘좋은(good) 삶’을 추구하는 대신 ‘부’나 ‘성공’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또한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미국발 자본주의는 그 넓은 지역에 적응하기 위한 기제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종교는 각각 ‘성공학’과 ‘번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빠르게 대체되었던 것이다. 미국적 가치가 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는 지금 이 폐해는 더 말 할 나위 없겠다. 이런 부분을 좀 더 공부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자기계발론자들은 내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산이다. 강준만은 자기계발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그나마의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말 하지만, 경험상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내면의 강박보다는 ‘확고한’ 가치에의 믿음이다. 철학상담치료는 기존의 심리치료의 고객층과는 차별되는 이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보다 인본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 자기계발논리들과 대비되는 테라피를 주창하고자 한다. 오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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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김민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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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페북에서 문유석 판사의 추천평을 보고 읽게 됐다. 그는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를 쓴 천종호 판사과 더불어 내가 존경하는 국내의 법조인이다. 원래는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런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은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워서 틈틈히 도서관 대출을 노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인기가 상당히 많던 탓인지, 요 몇 달 간 좀처럼 대출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저께,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대출하고 나서 바로 읽어내렸다.


우리 세대는 자기계발담론에 대한 대대적인 환멸에 빠져 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건 내가 노력을 게을리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차서인데, 언론, 매체에서는 허구헌 날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식으로 닦달을 해대니, 신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개소리고, 천 번을 흔들리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에 시달려 죽는다. 하지만 살아 남기는 해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어른'이 추천해준 책이니, 속는 셈 쳤다.


꽤나 좋은 책이다. 영어공부 꿀팁 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기술(art), 저자의 긍정적인 면모들을 얻어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저자 김민석PD는 어렸을 때부터 다독가였다는데, 울산에서 방위(지금의 사회복무요원)로 근무할 때는 지역 도서관에서 1년에 200권에 육박하는 책을 읽었다고 한다. 올해로 이제 딱 40권 읽어낸 나로서는 낯뜨거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성공한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싶어도 이제 그런 빈곤 코스프레는 집어 던지기로 했다. 내가 잘해내면 그만이다.


또한 이 책이 여느 자기계발서와 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첫째, 자신의 재능을 공공에 기여한다는 저자의 진심을 읽을 수가 있어서겠고, 둘째, 내가 그 진심을 읽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탓이겠다. 그러니까 이런 부류의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보다는 컨텍스트가 중요하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라', '즐거운 꿈을 가져라',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하라'같은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자칫 본래의 의미가 결여되고 그 가치가 소진될 수도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노력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다. 나로서는 텍스트 이상의 컨텍스트를 가꾸는 일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두고볼 일이다.


언젠가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건 만년째인데, 무척 좋은 동기부여를 얻은 것 같다. 역시 공부에 왕도는 없다. 끈기가 있을 뿐. (그리고 나도 책에 나오는 문구를 하나 외운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개념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인용된다. 대체 안 인용되는 데가 어디일까 이 양반은... (그렇게 또 하나의 책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주워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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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바바리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63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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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망했어요' 페이지에서 책의 목차만 캡쳐해서 대차게 까는 걸 보고 읽게 된 소설이다.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에 익숙한 오늘날의 인터넷 젊은이들에게 바바리맨이란, 지극히 '빻은'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준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 어떤 작품이 구태여 소재만을 두고 까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봤다. 더군다나 이 책은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소재와는 별개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봤고, 그래서 일단 읽게 됐다.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건 덤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정치적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바리맨이라는 소재를 비교적 성실하게, 나름대로 적절한 조망을 가지고 활용하고 있었다. 책 자체도 그렇게 가볍게만은 볼 수 없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헬로 바바리맨'의 배경은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 뚝방촌 언덕이다. 언덕 위쪽에는 철거 위기에 놓인 주거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아래 쪽에는 아직 직접적으로 철거 위기에 놓여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를 가진 사람들이 산다. 아랫 동네 구멍가게에 사는 주인공 동현은 이른 나이에 현실의 논리를 학습한, 다소 조숙하면서도 시니컬한 13살 소년이다. 아버지는 두부공장 일을 하다가 사업을 말아먹고,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무협지를 읽는 데만 빠져 있으며,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일수쟁이다. 얹혀 살고 있는 삼촌은 경찰 공무원이 되겠다고 몇 년 째 허송하고 있는 만년 공시생이다. 이런 무료한 일상이 깨어지는 계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 이후다.


 가구 구성원으로서의 무능함과 권태에 찌들어있던 아버지는 부부싸움을 한 그날부터 바바리 코트를 입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바바리맨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 바깥에만 나갔다 들어오면 생기(라 쓰고 '변태 에너지'라 읽는다)를 얻는 아버지(그렇다고 완전 노출하지는 않고 언더웨어까지는 입는다.), 동현은 그런 아버지가 몹시 '쪽팔렸기' 때문에 그를 미행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음란과 일탈행위의 상징 '바바리맨'은 언제부터인가 '동네의 영웅'으로 통하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바바리맨은 여고생을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고, 발을 다쳐 거동이 어려운 학생들의 등교를 도와주고, 윗 동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몰래 쌀을 가져다 주는 등 선행을 일삼았던 것이다. 급기야는 동네에서 바바리맨의 팬클럽이 만들어지기까지 이르고, 한편으로 이를 심상치 않게 본 파출소 측에서는 바바리맨을 체포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과연 '어떻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전달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문학의 기능이라는 '다양한 삶의 조망' 이라는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회의를 거듭하는 가운데, 그래도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글로 남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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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가짜'와 '진짜' 간 구분의 '무용성'이다. 프롤로그에서 동현의 학교 담임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웅은 누구냐고 묻는다. 배트맨, 슈퍼맨, 아이언맨 등의 평범한 대답들이 오가는 가운데 동현은 가장 '이상적인' 영웅으로 '우리 동네 바바리맨'을 언급한다. 그리고 바바리맨에 대한 일화와 그의 영웅적 면모, 그가 영웅으로서 갖는 위치성에 대한 논의가 사실상 이후의 줄거리다.


 작중에서는 철거민과 용역업체 간의 갈등이 계속해서 언급된다. 원주민의 주거권을 빼앗고 무책임하게 일관하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성장중심주의의 폐해는 현실의, 그리고 현재진행형의 아젠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돌아 보지 않으면 내일 당장 '살 곳'을 잃는 쪽은 우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헬로 바바리맨'의 용두동 철거민들은 불의한 시장권력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조금이나마 더 연명하는 처지에 불과한 입장인 것이다. 영웅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선행을 일삼는 '바바리맨'은 민중의 영웅으로 급부상하지만, 그가 현실의 모든 사태를 끝장낼 수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용역업체로부터 철거민들의 주거권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점은 바바리맨의 '기호'와 '상징'이다.


 '우리 동네 바바리맨'을 상징하는 것은 '가이 포크스 가면'과 '바바리 코트' 크게 두 가지다. 가이 포크스는 17세기 초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인물로, 후일 그의 얼굴을 따서 만들어진 가면은 자유와 혁명을 상징하게 되었다. 바바리 코트는 공연음란과 변태성에 대한 기호로 잘 알려져 있다. 정부 기득권이 보기에 양자는 불의함, 일탈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가히 '치워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일탈'에의 상징이 바바리맨이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은 그토록 위험하기 짝이없는 '바바리맨'이 가히 영웅으로 호명하기에 이른, 지극히 '위험한 사회'라는 역설이다. 그가 현 시점에서 이미 영웅이라는 것은 그의 '정치적 위험성'과 그 어떤 영웅으로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귀결을 제공한다.

 

 소설의 막바지에서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개인들'이 나타나 용역업체를 저지하기에 이른다. 바바리맨의 활약상이 한 네티즌에 의해 알려져 철거민들을 위한 '연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영웅이 구태여 '총대를 매는 개인'의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촛불혁명을 통해 광장에서 전제군주를 끌어내린 시민들처럼 우리는 충분히 불의한 권력에 맞서 연대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용기 있는 '시도'이다.



 우리는 저항의 수단을 논의함에 있어서 그 수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13년 말, 철도 민영화 시위 노동자 파업 이후의 하 수상한 시국을 비판하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붙었었다. 혹자는 대학 측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판촉물' 운운하기 급했지만, 세월호가 가라앉고, 시민이 물대포를 맞아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논리가 지극히 기득권 영합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뼈아프게 체득한 시민들에게 있어 표준, 준법, 평범을 의미하는 '진짜'의 개념은 지극히 사회에서 규정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불의에 눈 감는 온건한' 시민들을 양산하기 위한. 일례로 매스미디어는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보여주며 개인에게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데 급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표준을 따를 만큼 녹록지 않고, 그렇게 따라서도 안된다. 동현의 이웃들, '백부'라고 불리는 철물점 주인,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만년 파출소장, 나훈아 '모창가수' 나후나, 옥탑방에 사는 시인 아줌마 등 현실은 '진짜'를 따르지 않는 '가짜'들이 더 많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진짜'의 개념은 결코 본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구조적이라는 것이다. 대신 비(非)진짜가 인간에게 더 유익하게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이 포크스의 반정부적 사상은 당시 도덕적으로 아주 위험했고, 바바리맨은 오늘날 탈선자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 다크나이트처럼, 바바리맨은 철거촌을 지켜냈고, 시민의 연대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바바리맨이라는 일탈자의 운명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애벌레가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변태'했다. 코너에 내몰린 사업 실패자라는 하나의 '알'을 깨고, '우리동네의 영웅'이라는 신에게로 날아갔다. 안타깝게도 현행법 상 바바리맨은 경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설에서는 바바리맨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는 걸까. 아빠는 아득한 눈빛으로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큰숨을 내쉬고서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며칠 전 그가 바바리맨 팬카페에 올린 글을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바바리맨입니다.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네요. 한낱 치한에 지나지 않는 저를 위해 팬카페를 만들고, 게다가 경찰서에서 풀려나는데 도움까지 주시니, 정말이지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건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여러분이 저를 히어로라고 불러주지만, 분명 제 바바리맨 행각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은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그 학생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그동안의 제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반성합니다. 여러분들이 제게 보내준 따뜻한 관심과 응원은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빕니다.


(p.254)



 아버지는 바바리맨에서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왔다. 동현은 너무나 일찍이 세상의 혹독한 논리를 학습한 시니컬한 소년이지만, 끝내는 '우리동네 바바리맨'을 영웅으로 인정했다. 불의한 일을 겪고 의식의 반전을 겪은 다른 많은 시민들처럼 동현 역시도 세상을 보는 또다른 관점을 얻게 되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렇게 '변태'하고 더 성장할 모두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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