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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 그들은 대중을 어떻게 유혹했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6월
평점 :
제목에 한 번 끌렸고, ‘내가 하는 자기계발은 괜찮고 남이 하는 건 나쁘다는 태도는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서론의 문장에 또 한 번 끌렸다. 요즘 한창 자기계발에 관한 고민에 빠져있다. 청년세대는 왜 그토록 자기계발을 환멸하면서도 꾸준히 자기계발서를 찾는지, 언제까지 자기계발을 마치 ‘길티 플레저’처럼 여기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럴 때면 꼭 도달하게 되는 원론적인 물음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이 그 물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바로 읽게 됐다.
이 책은 흔히 자기계발, PR의 선구자들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열 명의 인물들의 생애, 활동이력, 평가 등을 나열하는 데 방점이 찍힌, 평전보다는 인물사에 가까운 책이다. 강준만의 책은 처음 읽어 보는데, 다독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당히 많은 책들이 인용된다. 각 챕터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인물평 겸 자신의 ‘소신(?)’을 조금씩 피력하는데, 이게 꽤나 아프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론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p.104-105)
설득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를 압도하는 대중 민주주의, 그 본질이 바로 광고임을 바턴은 간파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혹 우리는 민주주의를 대체할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민주주의의 경제적 버전이라 할 광고에 대한 혐오와 비판을 통해 표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여기는 정치인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한 광고 능력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광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세일즈맨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p.206)
보다시피 강준만은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대중민주주의’와 궤를 같이 해왔다고 연결짓고 있다. ‘그들’은 대중이 돈이 되고, 힘이 된다는 걸 간파해 왔다는 식으로. 그가 맨 먼저 조지 갤럽을 소개했다는 점은 여론조사가 오늘날 대중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력을 볼 때 시사적이다. (강준만은 이 처음 챕터에서만 자신의 견해를 집중하고 그 뒤로는 비교적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조지 갤럽은 20세기 초, 미국 내 여론조사를 확대시킨 주역으로, 여론조사가 엘리트 정치에 대한 견제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소위 엘리트 위주로 돌아갔던 미국의 정치는 갤럽의 등장으로 판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강준만은 여론조사의 등장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폐해 역시 심각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 이는 바람에 약하고 바람을 사랑하는 여론 형성 구조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람기는 유권자의 특권이라지만, 그게 지나치면 대접받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여론을 무서워하는 동시에 여론을 깔보기 때문이다. 언제든 바람 한 번 불면 쉽게 뒤집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심각하게 성찰하기보다는 바람을 만들 수 있는 드라마, 이벤트를 연출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한탕주의를 창궐케 하고 성찰의 씨를 마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면 '대중은 위대'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에 음모와 방해' 때문에 또는 유권자가 어리석거나 탐욕스럽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이중 잣대가 만연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대중 폄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p.40)
어쩌면 페북에서 내가 그토록 학을 떼던 소위 ‘지식인의 엘리트주의’를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마주하게 된 셈인데, 그의 논증을 보고 있으니 그런 스탠스가 조금은 이해가 갈 법도 했다. 사실 얼핏 보면 왠지 강준만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걸 직접 말 하는 게 철저하게 금기시되어 있을 뿐이라 그런 거지) 다만 나는 그의 지식인, ‘학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정치, 사회 안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박근혜와 트럼프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듯 지성이 부재한 사회는 공멸의 길에 이를 수 있으므로 위험하다. 어쩌면 그의 소신(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는다)에 전부 동의할 수는 없어도 반가울 수 있는 이유다.
동시에 그는 이 책을 통해 계보학적 조망을 시도한다. 그가 소개한 10명의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은 전부 미국인이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영국인이지만 사실상 미국에서 활동했으므로) 미국은 광고, PR, 맥도날드, 거대금융, 자기계발을 수출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수출했다. 바로 이것이 강준만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중민주주의는, 그리고 우리가 환멸하는 자기계발이나 광고산업은 실상 한 배에서 나온 것들이며, 이것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꽤나 흥미롭게 읽었고, 이전에는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그냥 무턱대고 ‘나쁘다’고 했었다면, 이제는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나쁘다’고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제일 큰 소득이다. 8장부터 10장, 데일 카네기와 노먼 빈센트 필, 나폴레온 힐 같은 인물들이 등장했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 소개된 인물 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인물은 바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다. 그의 삼촌이 그 유명한 지그문드 프로이트라고 하는데, 삼촌이 무의식의 욕구를 치료 대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걸 선전선동의 기초로 보았으니, 좀 대단하다. 그가 저지른 기행(?)은 상당하다. 여성들도 담배를 피우도록 조장하고(놀랍게도 여성의 흡연을 당시 페미니즘 운동과 연계시켰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었던 ‘초록색’의 인식을 대중적으로 개선했으며, 샐러드와 샌드위치 위주의 미국인의 아침식사를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위주로 바꾸는 등 엄청났다. 특히 괴벨스가 그의 팬이었다고 하는 데서 조금 무서워졌다. 중학생 때 지역서점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주저 '프로파간다'를 처음 봤는데, 그 책의 강렬했던 표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름 욕구를 누르느라 힘들었던 것 까지도) 사실 저자 이름은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금 그가 희대의 선전, 선동가였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제일 의문인 것은 왜 미국인들이 ‘좋은(good) 삶’을 추구하는 대신 ‘부’나 ‘성공’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또한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미국발 자본주의는 그 넓은 지역에 적응하기 위한 기제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종교는 각각 ‘성공학’과 ‘번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빠르게 대체되었던 것이다. 미국적 가치가 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는 지금 이 폐해는 더 말 할 나위 없겠다. 이런 부분을 좀 더 공부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자기계발론자들은 내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산이다. 강준만은 자기계발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그나마의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말 하지만, 경험상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내면의 강박보다는 ‘확고한’ 가치에의 믿음이다. 철학상담치료는 기존의 심리치료의 고객층과는 차별되는 이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보다 인본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 자기계발논리들과 대비되는 테라피를 주창하고자 한다. 오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