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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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선전(propaganda)의 고전이다. 이 책은 강준만의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보고 읽게 됐다. 강준만은 PR의 선구자들 중 한 명으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지목했는데, 그는 최초로 PR 고문(Public Relationship Counsel)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현대적인 '선전' 개념을 정립시킨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라는데, 삼촌이 무의식 개념을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써먹었을 때 그 자신은 그걸 대중들을 선동하는 데 이용했으니 가히 비범한 인물인 것은 틀림 없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이상호 기자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그가 김광석 타살설을 주장하는 게 모로 보나 음모론처럼 느껴져서 몹시 불편했으나,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여론이 크게 역전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故 김광석의 딸 서연양의 죽음이 밝혀진 뒤부터였을 텐데, 그때의 여론은 무죄추정의 원칙은 아랑곳 않고 서해순씨를 범죄자로 몰아갔지만 수사 결과는 끝내 무혐의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른 실속없는 아젠다들처럼 흐지부지하게 식어갔다.


 "이상호가 결정적 증거 제시도 없이 이 다큐를 극장에 내건 것은 박해받은 기자의 고군분투와 서해순의 악마화라는 코드가 지니는 대중성과 그 결과가 주는 달콤한 결과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영화는 지난 정권 동안 쌓인 국가 기구에 대한 불신을 의혹의 재료로 활용한다."(슬로우뉴스. 이상현. 2017.10.13)며 이상호 기자를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때때로 이런 식의 '정의감'을 주창하는 의제들에 대해 '선동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여하한 선전 자체에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물론 많다. 하지만 나는 우선 강준만의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하고 싶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론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강준만 -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p.104-105>)



 '프로파간다'는 숙독의 중요성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그냥 20세기 초 미국사를 훑어보기 위한 사료 정도로 대충 훑어내려가도 되었으나, 읽다 보니 그보다는 좀 더 깊이있게 독해하고 싶어진 것이다. 선전이 대중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버네이스의 주장에 구태여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다만 그는 과두 엘리트주의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소수의 성실한 엘리트들이 선전을 통해 더 나은 국가를 만들 것'이라는 그의 진단은 근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적용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각종 미디어, 특히 sns가 등장하고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현대사회는 엘리트-대중의 이분법적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 현상들이 훨씬 많다. 버네이스는 선전이 여론을 조작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두고 '보이지 않는 정부'라는 표현을 썼다. 각종 미디어, 광고, 마케팅 그 어디에서든 크고 작은 선전이 판치는 오늘날, 이제 선전은 '보이지 않는 손' 정도로 격상시켜도 무리 없는 개념이지 않을까.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 전교회장 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핵심 참모 역을 하면서도 대중주의에 대한 식견이 조금도 없어서 끝내 고배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상대측은 선거송을 만들어 부르며 유세를 다녔고, 나는 '진심은 통한다'면서 지속적으로 유익한 정책과 공약을 강조하면 된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짓이 따로 없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아졌을 지도 모르겠다. 버네이스는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서든 요원한 문제와 관련해서든 사회가 발전하려면 진보적인 교육을 통해 대중을 각성시켜야 한다."(p.233)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때의 교육은 당연히 지적으로 고도화된 정신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 조성을 통해, 중요한 행사와 사안의 의미 부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계몽된 형태의 선전을 의미한다."(p.196) 


 요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조사가 있던데, 그들에게는 버네이스의 저서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기업과 대중은 각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둘의 특징은 어떻게든 기분 좋은 합의점에 이르러야 한다. 갈등과 의심은 양쪽 모두에게 해로울 뿐이다."(p.139)라는 진단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진정한 소통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다수의 여론을 선도하는 대중적인 조작이 있을 뿐이겠다. 그러니까 선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효율성'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더 쉽고 빠르며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만으로 선전은 그 정당성을 얻는 듯 보인다. 하지만 버네이스는 그 폐단에 대해서는 "이러한 남용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p.223)"고 일축한다. 그가 평생에 걸쳐 PR윤리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고는 하지만, 정작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강준만이 우리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한 딜레마를 지적했듯 어설픈 선전은 역효과를 낳을 뿐이라는 현실이 슬프다. 조금 느리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는 이들이 새삼 대단해진다.



 "버네이스는 성실한 자세만으로도 칭찬을 살 만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PR 전문가들의 엄격한 윤리규범 마련에 헌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는 윤리적인 성격을 띤다기보다 인식론의 성격을 띤다. 선전 전문가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세상에서 값비싼 진실이 밖으로 나와 진실로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떤 생각이 더 이상 괴상한 이론이나 좌익이나 우익의 터무니 없는 망상이 아니라 용인되어야 하는, 나아가 결국 용인되는 그 무엇으로 바뀌는 시점은 과연 언제일까?"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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