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 개정판 매스터마인즈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이희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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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고 싶어서 읽었던 책보다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읽었던 책들이 많다. 또는 사 놓았는데 그냥 두기 아까워서 읽었던 것들. 글자는 눈에 들어올 리 없었고, 때문에 사고와 행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음 역시 자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를 쓰고 걸렀던 장르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계발서'였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이 평범한 심리학 도서인 줄 알았다. 외우기 힘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라는 이름과 함께 '몰입flow'은 어디서든 인용되는 개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책은 평범한 심리학 도서가 아니었다. 바로 과학적 자기계발서였다. (...)


과학적 자기계발서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바로 '과학적 낙관론'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낙관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은 어차피 기술적으로 진보하고 있으므로 희망을 갖고 살아라. 네가 하는 일에 충실하면 된다.' 일견 맞는 말이다.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수혜를 누리고 있는 입장이니까.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보를 곧바로 사회의 진보로 못박을 수가 있는가? 이는 과학이 인간의 가치판단에 개입할 수 있다는 비약으로 이어지는 문제다. 요컨대 과학의 진보를 종교적 믿음처럼 수용하기 이전에 우리는 과학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색안경을 끼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다. 이전에는 자기계발서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서 성공, 긍정, 열정 같은 류의 주장을 원색적으로 경멸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소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알려주는 충고를 보고 저자가 주장하는 개념은 바로 '몰입'이다. 몰입은 주로 과업 수행중에 나타난다. 잠을 자거나 세수를 하며 몰입하는 사람은 없다. 일중독자의 삶이 가치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행복'을 쉽게 얘기하곤 한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라는 수사는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행복은 수반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저자는 '몰입하는 삶'을 살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한다. 이렇듯 행복을 수반개념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내 견해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지점도 있다. 궁극적인 목적에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충고는 데일 카네기 이래로 미국발 자기계발서가 주요하게 지적하고 있는 특징 중 하나다. 저자는 좋은 인간관계가 성공한 인생에 있어 필수불가결하다는 식으로 조각가 니나 홀턴의 말을 인용한다. 


"방 안에 틀어박혀 가지고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이따금 찾아오는 동료 예술가로부터 "당신 생각은 어때?" 이런 질문도 받아가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종의 피드백이 있어야 한단 소리다. 죽어라고 한 자리에 붙어있는다고 해서 일이 잘 되는 게 아니다. 나중에 가서 자기를 드러내야 할 때는 연고라는 것도 있어야 한다. 화랑 사람들도 알아야 하고 내 분야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아야 한다. 거기에 속하고 싶건 속하고 싶지 않건 간에 어떤 동질적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p.128)
심지어는 '바보'가 혼자 있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idiot라며 극딜을 넣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정말 왜 혼자 있지 않아야 하지?


또한 의문이다. 왜 나는 그토록 자기계발을 혐오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조차 하나의 핍진한 엘리트주의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자기계발에만 몰두하게 되면 개혁이나 혁명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 경계하는 느낌으로. 그런데, 개혁과 혁명을 논의하기 이전에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었나. 오히려 자유로운 자아상은 몇몇 소수만 누리는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상담심리학의 모토가 그것 아닌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 결핍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지식사회의 위계가 자기계발논리를 수용한 지식인과 그렇지 않은 지식인의 구도로 양분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전자가 미들브로우, 지적 중산층이라면 후자는 엘리트로서. 아무래도 전자는 의식의 반전을 겪은 경우가 많을 테니 자기계발논리에 보다 친화적일 테다. 후자는 어쨌든 그게 '잘못 되었으니까' 까내리는 데 주력할 것이고. 강준만이 지적했듯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하는 건 괜찮고 남이 하는 건 잘못되었다는 식의 태도는 필견 잘못된 것일 터이니.

이 책은 소위 말하는 '꿀팁'에 가깝다. 그러나 꿀팁만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다.

자아상에 대한 성찰에서 얻어갈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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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드 THAAD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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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역 독서모임을 통해 읽게 됐다. 아마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평생 읽지 않고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 소중한 인연들, 책 한 권. 고마운 마음이다.





 김진명은 한국 문학이 망해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베스트셀러 일변도를 걷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지난 2016년에도 김진명의 ‘글자전쟁’과 ‘싸드 Thaad’는 서울시민들이 가장 많이 대출한 책으로(각각 1위, 4위) 기록된 바 있다. (뉴시스. 지난해 서울시민이 가장 많이 빌려간 책은?. 2017.01.01) 고로 대중성을 척도로 본다면 김진명은 대단히 공신력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각종 시사 이슈들에 대한 코멘트를 던지는 데서 그가 대중에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시사문학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줄거리는 전체적으로 김성모나 박인권 같은 극화작가들의 그것과 흡사한 느낌이다. 소위  ‘아재 냄새’가 난다. 자신의 오너캐(해당 인물의 아바타나 페르소나 등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 오너 캐릭터Owner character의 줄임말)가 등장하고, 충북 제천(그의 작품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개연성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경도되어 있는 서술 또한 특징이다. 굉장히 술술 읽히면서도 작가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달리 말하면 줄거리와 인물관계는 결국 자신의 주장에 복무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할 뿐,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리고 김진명은 작품에서 사드 배치=전쟁이라는 등식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상 서론에 집약되어 있다. 달러가 꾸준한 약세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 미국은 그들의 본토가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그 시점은 바로 한반도에 사드(언제부터인가 Thaad의 표기는 '싸드'보다는 '사드'가 일반화된 관계로 '사드'로 표기한다)가 배치된 이후부터일 것이라고. 작품의 주인공 ‘최어민’(작가의 오너캐로 사료된다)과 그의 조력자 ‘김윤후’는 각각 사드배치반대론과 찬성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인공 최어민은 사드배치를 막지 않으면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것이라는 엄청난 진실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개인들을 대변한다. 그야말로 미국은 신(Deus)이고, 개인들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반면 김윤후는 “중국은 나라가 아니다”라며, 중국의 반反인권적 현실에 분노하는, 그리고 미국의 패권주의가 이를 타개할 수단이라고 판단하는 지식인으로 상징된다. 그들의 견해야 어쨌든, 줄거리를 따라가노라면 한반도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보여진다. 통탄할 일이긴 하지만 2017년 현재, 동북아 정세는 어떠한가. 그리고 사드의 현안은 어디로 가고 있나.






 김진명이 지적한 대로 전쟁은 달러의 약세가 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달러의 약세’라는 것은 지극히 필연적인 현상이다. 달러는 국제 거래의 기준이 되는 통화, 즉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는 돈보다 밖으로 나가는 돈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다시 말해 태생적으로 무역 적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는 미국이 고도로 발달된 금융업과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그 많은 무역 적자를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안정적인 체제라는 방증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빚으로 순환하는 딜레마를 떠안은 국가이기도 하다. 돈이 부족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어 유지되는 체제는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빚을 탕감할 만한 유일한 방책으로 전쟁이 지목되는 것이 바로 작금의 문제의식이다. 미국 국방예산은 심각한 수지 불균형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결코 감축되지 않고, 오히려 매년 확대되고 있다. 미국이 전쟁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라는 점은 비단 책의 서론에 언급된 폴 크루그먼 뿐만이 아니라 노엄 촘스키, 슬라보예 지젝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석학들이라면 하나같이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다. 소위 불량국가,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그들의 엄청난 군비증강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미국이 망하면 그 막대한 혼란은 어떻게 떠맡을 것인가.




 중국은 얼핏 미국의 아성을 넘볼만 한 신흥 패권국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이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1)안정된 체제를 가져야 하고, 2)자본시장을 더 개방해야 한다. 중국이 아무리 성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부 개방된 도시들에 한해서일 뿐이며, 시진핑 일당 독재체제의 공포정치와 불안정은 미국 금융 체제의 불안정에 비해 결코 나을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극복되기 요원한 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한 수 멀었다. 김윤후가 일갈했듯 지금의 중국은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다.




 작품 중간마다 ‘태프트 리포트’라는 막간이 나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태프트라는 익명의 유력자가 2010년대 한국의 권력실세들을 분석, 정세를 전망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태프트 리포트는 딱 두 챕터, 즉 채동욱과 안철수까지만 그나마 납득할 만하다. 태프트는 아주 결정적인 변수를 간과함으로써 그 모든 논의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바로 박근혜의 비선실세다. (...) 이 엄청난 변수 때문에 새누리당을 위시한 보수 여당 세력은 하루아침에 폭삭 망해버렸고, 10년 만에 민주당 세력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그리고 정권을 획득한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게 불편한 지도자일 것이라는 태프트의 예상과는 반대로 자신들의 우방으로서 전략적인 기조를 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사드 배치는 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라고 언급한 바 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허완. 2017. 09.19) 문 대통령은 8일 ‘입장문’ 형태로 밝힌 글에서 “우리의 안보 상황이 과거 어느때보다 엄중해졌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드 임시배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또한 문 대통령은 "거듭된 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어 6차 핵실험까지 감행”한 북한의 도발을 언급하며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방어능력을 최대한 높여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는 전임 박근혜가 사드배치에 대해 이도저도 아닌 입장으로 불안정한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과 중국 중에서 확실하게 미국을 위시한 외교라고 볼 수 있겠다.






 냉전 이후 한반도는 세계3차대전이 일어나기 유력한 전장戰場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그것은 오랜 기간 기우에 지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북한의 도발이나 핵실험 등은 지금도 다수 민간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렇더라도 전쟁에 대한 불안을 피해갈 수 없도록 하는 주지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다. 역사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고, 때문에 반공-군부독재 정권이 오랜 기간 권력의 정점에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인은 북한 자체보다는 국제 정세의 불안정이다. 이렇게 보면 ‘휴전국’이란, 비단 38선 너머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정황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 상황을 은유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느 쪽 기로에 서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이다. 국군은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른 북한 외 다른 강대국들과는 대적이 안 되는 국군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일 뿐, 사실상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위협적인 존재인 것이 더욱 적절한 현실이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세계 제일의 패권국으로 군림했고, 우리나라가 현재까지도 이들 군사력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 대통령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에 미국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라 같지도 않은” 중국과 천덕꾸러기 북한 사이에서 최선이 아니라 그나마 차악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과 사드의 현 주소다. 국제, 외교적으로 힘이 약한 나라라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싸드”가 대중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 의의와 한계는 몹시 분명해진다. 지금이야 사드가 시사상식용어가 된지 오래지만 이 책이 초판된 2014년 당시만 해도 사드는 지극히 알려져 있지 않은 주제였다. 만약 이 소설이 대중 일반에 사드의 존재와 그 의의를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면 김진명은 충분히 이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7년 현재, 김진명이 지적한 바가 과연 타당한가는 또다른 문제이다. 선술한 대로, 그는 전문성을 갖추었다기 보다는 다만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작가 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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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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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선전(propaganda)의 고전이다. 이 책은 강준만의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보고 읽게 됐다. 강준만은 PR의 선구자들 중 한 명으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지목했는데, 그는 최초로 PR 고문(Public Relationship Counsel)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현대적인 '선전' 개념을 정립시킨 이들 중 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라는데, 삼촌이 무의식 개념을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써먹었을 때 그 자신은 그걸 대중들을 선동하는 데 이용했으니 가히 비범한 인물인 것은 틀림 없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이상호 기자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그가 김광석 타살설을 주장하는 게 모로 보나 음모론처럼 느껴져서 몹시 불편했으나,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여론이 크게 역전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故 김광석의 딸 서연양의 죽음이 밝혀진 뒤부터였을 텐데, 그때의 여론은 무죄추정의 원칙은 아랑곳 않고 서해순씨를 범죄자로 몰아갔지만 수사 결과는 끝내 무혐의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른 실속없는 아젠다들처럼 흐지부지하게 식어갔다.


 "이상호가 결정적 증거 제시도 없이 이 다큐를 극장에 내건 것은 박해받은 기자의 고군분투와 서해순의 악마화라는 코드가 지니는 대중성과 그 결과가 주는 달콤한 결과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영화는 지난 정권 동안 쌓인 국가 기구에 대한 불신을 의혹의 재료로 활용한다."(슬로우뉴스. 이상현. 2017.10.13)며 이상호 기자를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때때로 이런 식의 '정의감'을 주창하는 의제들에 대해 '선동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여하한 선전 자체에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물론 많다. 하지만 나는 우선 강준만의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하고 싶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론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강준만 -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p.104-105>)



 '프로파간다'는 숙독의 중요성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그냥 20세기 초 미국사를 훑어보기 위한 사료 정도로 대충 훑어내려가도 되었으나, 읽다 보니 그보다는 좀 더 깊이있게 독해하고 싶어진 것이다. 선전이 대중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버네이스의 주장에 구태여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다만 그는 과두 엘리트주의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소수의 성실한 엘리트들이 선전을 통해 더 나은 국가를 만들 것'이라는 그의 진단은 근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적용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각종 미디어, 특히 sns가 등장하고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현대사회는 엘리트-대중의 이분법적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 현상들이 훨씬 많다. 버네이스는 선전이 여론을 조작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두고 '보이지 않는 정부'라는 표현을 썼다. 각종 미디어, 광고, 마케팅 그 어디에서든 크고 작은 선전이 판치는 오늘날, 이제 선전은 '보이지 않는 손' 정도로 격상시켜도 무리 없는 개념이지 않을까.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 전교회장 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핵심 참모 역을 하면서도 대중주의에 대한 식견이 조금도 없어서 끝내 고배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상대측은 선거송을 만들어 부르며 유세를 다녔고, 나는 '진심은 통한다'면서 지속적으로 유익한 정책과 공약을 강조하면 된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짓이 따로 없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아졌을 지도 모르겠다. 버네이스는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서든 요원한 문제와 관련해서든 사회가 발전하려면 진보적인 교육을 통해 대중을 각성시켜야 한다."(p.233)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때의 교육은 당연히 지적으로 고도화된 정신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 조성을 통해, 중요한 행사와 사안의 의미 부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계몽된 형태의 선전을 의미한다."(p.196) 


 요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조사가 있던데, 그들에게는 버네이스의 저서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기업과 대중은 각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둘의 특징은 어떻게든 기분 좋은 합의점에 이르러야 한다. 갈등과 의심은 양쪽 모두에게 해로울 뿐이다."(p.139)라는 진단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진정한 소통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다수의 여론을 선도하는 대중적인 조작이 있을 뿐이겠다. 그러니까 선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효율성'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더 쉽고 빠르며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만으로 선전은 그 정당성을 얻는 듯 보인다. 하지만 버네이스는 그 폐단에 대해서는 "이러한 남용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p.223)"고 일축한다. 그가 평생에 걸쳐 PR윤리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고는 하지만, 정작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강준만이 우리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한 딜레마를 지적했듯 어설픈 선전은 역효과를 낳을 뿐이라는 현실이 슬프다. 조금 느리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는 이들이 새삼 대단해진다.



 "버네이스는 성실한 자세만으로도 칭찬을 살 만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PR 전문가들의 엄격한 윤리규범 마련에 헌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는 윤리적인 성격을 띤다기보다 인식론의 성격을 띤다. 선전 전문가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세상에서 값비싼 진실이 밖으로 나와 진실로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떤 생각이 더 이상 괴상한 이론이나 좌익이나 우익의 터무니 없는 망상이 아니라 용인되어야 하는, 나아가 결국 용인되는 그 무엇으로 바뀌는 시점은 과연 언제일까?"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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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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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봤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싸이코", 놀란의 "다크나이트"처럼, 지금 보면 그다지 큰 감흥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 역시 출간 당시에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리라는 것을.


'고전'과 '한 철 유행'의 차이는 그 메시지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고전인 이유는 지금도 무책임하고 선정적인 언론보도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리라.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 전반에서 언론의 비윤리적 보도행태가 한 인간의 명예를 파괴하는 명백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카타리나 블룸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파괴되는 과정을 보면, 그녀가 기자를 살해한 것을 과연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양반 작품은 예전에도 읽은 적 있다. (머리 싸매고 끙끙 앓으면서 읽었었다. 그때는 그의 독일식 만연체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독일 소설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유머러스한 편이라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는 그래도 좀 유머러스했던 것 같은데, 이 책은 사뭇 진중하다. 그러면서 또 고풍스럽지는 않은데, 페이지 수도 얼마 안돼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모던한 소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민음사에서 리커버 버전 나왔다는데, 이 책이 고전 중에서는 그나마 모던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오늘날의 독자가 만약 이 작품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뵐이 훌륭한 작가라는 것과 아직도 황색언론의 추악한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 뵐 문학의 특징은 '동시대성'이다. 그는 전후 피폐해진 독일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구축하는 것을 문학의 목표로 봤고, 항상 시대정신에 입각하는 글쓰기를 해 왔다. 그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로 지칭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82년생 김지영'처럼 일종의 사회고발문학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뵐은 70년대 초반, 독일의 '빌트'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억울한 피해를 입어왔다고 하는데, 이후 그가 문학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피력하기 위해 내놓은 게 바로 이 작품이다. 


문학은 이런 맛인가보다. 문학을 읽으면 오히려 할말이 없어진다. 아... 그랬구나 식. 그리고 문학 파는 친구들이 대체로 시니컬해 보였는데, 왜 그러는지 점점 알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문학을 좋아했다는데, 말 다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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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 그들은 대중을 어떻게 유혹했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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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한 번 끌렸고, ‘내가 하는 자기계발은 괜찮고 남이 하는 건 나쁘다는 태도는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서론의 문장에 또 한 번 끌렸다. 요즘 한창 자기계발에 관한 고민에 빠져있다. 청년세대는 왜 그토록 자기계발을 환멸하면서도 꾸준히 자기계발서를 찾는지, 언제까지 자기계발을 마치 ‘길티 플레저’처럼 여기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럴 때면 꼭 도달하게 되는 원론적인 물음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이 그 물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바로 읽게 됐다.


 이 책은 흔히 자기계발, PR의 선구자들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열 명의 인물들의 생애, 활동이력, 평가 등을 나열하는 데 방점이 찍힌, 평전보다는 인물사에 가까운 책이다. 강준만의 책은 처음 읽어 보는데, 다독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당히 많은 책들이 인용된다. 각 챕터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인물평 겸 자신의 ‘소신(?)’을 조금씩 피력하는데, 이게 꽤나 아프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론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p.104-105)

 

 

설득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를 압도하는 대중 민주주의, 그 본질이 바로 광고임을 바턴은 간파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혹 우리는 민주주의를 대체할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민주주의의 경제적 버전이라 할 광고에 대한 혐오와 비판을 통해 표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여기는 정치인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한 광고 능력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광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세일즈맨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p.206)



 보다시피 강준만은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대중민주주의’와 궤를 같이 해왔다고 연결짓고 있다. ‘그들’은 대중이 돈이 되고, 힘이 된다는 걸 간파해 왔다는 식으로. 그가 맨 먼저 조지 갤럽을 소개했다는 점은 여론조사가 오늘날 대중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력을 볼 때 시사적이다. (강준만은 이 처음 챕터에서만 자신의 견해를 집중하고 그 뒤로는 비교적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조지 갤럽은 20세기 초, 미국 내 여론조사를 확대시킨 주역으로, 여론조사가 엘리트 정치에 대한 견제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소위 엘리트 위주로 돌아갔던 미국의 정치는 갤럽의 등장으로 판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강준만은 여론조사의 등장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폐해 역시 심각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 이는 바람에 약하고 바람을 사랑하는 여론 형성 구조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바람기는 유권자의 특권이라지만, 그게 지나치면 대접받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여론을 무서워하는 동시에 여론을 깔보기 때문이다. 언제든 바람 한 번 불면 쉽게 뒤집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심각하게 성찰하기보다는 바람을 만들 수 있는 드라마, 이벤트를 연출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한탕주의를 창궐케 하고 성찰의 씨를 마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면 '대중은 위대'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에 음모와 방해' 때문에 또는 유권자가 어리석거나 탐욕스럽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이중 잣대가 만연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대중 폄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p.40)



 어쩌면 페북에서 내가 그토록 학을 떼던 소위 ‘지식인의 엘리트주의’를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마주하게 된 셈인데, 그의 논증을 보고 있으니 그런 스탠스가 조금은 이해가 갈 법도 했다. 사실 얼핏 보면 왠지 강준만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걸 직접 말 하는 게 철저하게 금기시되어 있을 뿐이라 그런 거지) 다만 나는 그의 지식인, ‘학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정치, 사회 안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박근혜와 트럼프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듯 지성이 부재한 사회는 공멸의 길에 이를 수 있으므로 위험하다. 어쩌면 그의 소신(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는다)에 전부 동의할 수는 없어도 반가울 수 있는 이유다.


 동시에 그는 이 책을 통해 계보학적 조망을 시도한다. 그가 소개한 10명의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은 전부 미국인이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영국인이지만 사실상 미국에서 활동했으므로) 미국은 광고, PR, 맥도날드, 거대금융, 자기계발을 수출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수출했다. 바로 이것이 강준만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중민주주의는, 그리고 우리가 환멸하는 자기계발이나 광고산업은 실상 한 배에서 나온 것들이며, 이것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꽤나 흥미롭게 읽었고, 이전에는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을 그냥 무턱대고 ‘나쁘다’고 했었다면, 이제는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나쁘다’고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제일 큰 소득이다. 8장부터 10장, 데일 카네기와 노먼 빈센트 필, 나폴레온 힐 같은 인물들이 등장했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 소개된 인물 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인물은 바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다. 그의 삼촌이 그 유명한 지그문드 프로이트라고 하는데, 삼촌이 무의식의 욕구를 치료 대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걸 선전선동의 기초로 보았으니, 좀 대단하다. 그가 저지른 기행(?)은 상당하다. 여성들도 담배를 피우도록 조장하고(놀랍게도 여성의 흡연을 당시 페미니즘 운동과 연계시켰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었던 ‘초록색’의 인식을 대중적으로 개선했으며, 샐러드와 샌드위치 위주의 미국인의 아침식사를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위주로 바꾸는 등 엄청났다. 특히 괴벨스가 그의 팬이었다고 하는 데서 조금 무서워졌다. 중학생 때 지역서점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주저 '프로파간다'를 처음 봤는데, 그 책의 강렬했던 표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름 욕구를 누르느라 힘들었던 것 까지도) 사실 저자 이름은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금 그가 희대의 선전, 선동가였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제일 의문인 것은 왜 미국인들이 ‘좋은(good) 삶’을 추구하는 대신 ‘부’나 ‘성공’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또한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유보시켜 준다. (...)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미국발 자본주의는 그 넓은 지역에 적응하기 위한 기제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종교는 각각 ‘성공학’과 ‘번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빠르게 대체되었던 것이다. 미국적 가치가 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는 지금 이 폐해는 더 말 할 나위 없겠다. 이런 부분을 좀 더 공부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자기계발론자들은 내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산이다. 강준만은 자기계발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그나마의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말 하지만, 경험상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내면의 강박보다는 ‘확고한’ 가치에의 믿음이다. 철학상담치료는 기존의 심리치료의 고객층과는 차별되는 이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보다 인본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 자기계발논리들과 대비되는 테라피를 주창하고자 한다. 오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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