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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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드디어 다 읽었다. 4월의 첫 완독서.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는 그 완독서라는 개념에 대해 지대한 회의를 품을 수 밖에 없지만, 그 텍스트 조차 텍스트를 읽는 개인조차 유동적인 것이라면 그런 말도 상관 없겠지. 결국엔 내가 창조자로서 서술하는 거니까)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가. 아니 책을 읽는다는 개념은 무엇인가. 나를 포함한 통상적인 사람이라면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페이지를 읽으면 전에 읽었던 내용이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독서란 곧 망각의 과정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그런데도 그 책을 끝까지 넘겨서 다 읽고 덮어버리는 것으로 그 책을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텍스트와 진리의 고정성, 이른바 통독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리 쉽게 맹신할 수 있을까.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며 수 가지 예를 제시한다. 독서란 곧 비독서이며, 이는 곧 읽은 책이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갖는 관념이나 그것이 유동적이라는 점에서는 상동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예시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몽테뉴의 예인데, 몽테뉴는 '수상록'의 그 지적인 텍스트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지독한 건망증 환자였다고 한다. 저자는 몽테뉴의 독서를 넘어서는 탈독서의 경지라고 찬탄해 마지않는데 본문의 내용을 옮기자면 이렇다.



"독서는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줌과 동시에 탈(脫)개성화 작용을 발생시킨다. 텍스트의 어떤 내용도 고정시킬 수가 없으므로, 독서는 자기 자신과 합치될 수 없는 주제를 부단히 야기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휘말려 들게 되는 책에 대한 이 부단한 망각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는 독서라는 말보다는 몽테뉴의 경우에 비추어 '탈(脫)독서'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 책들이 단지 지식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기억 상실, 즉 정체성의 상실과도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에 관한 모든 고찰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다. 이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텍스트 접촉의 긍정적이고 축적적인 측면만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어쩌면 아 점이 더 크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시피 저자는 책읽기의 '인풋', 즉 정보의 수용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고 2차, 3차 구성물로 만들어내는 개인의 창조성을 중시하고 있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책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견해는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는 마지막 장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비평은 예술, 다름 아닌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개인' 그 자체로 환원되는 가장 고도의 예술이다. 책은 단지 담론의 구실일 뿐이고 결국에는 자기 얘기를 끌어 올리게 되는 까닭에 예술이라는 건데, 이것은 비평이 곧 나르시즘, 다시 말해 자폐적인 예술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얼마 전에 이랑의 '욘욘슨'에 대한 비평을 읽었을 때, 그것이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뻑을 하고 있는 거라는 기분이 들었던 건 과연 착각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


얼마 전에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상섭 역)의 한 주석을 보면 창조(creative)는 기독교적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이 아니라 '장인'이라는 개념으로 창조가 아니라 제작을 행할 뿐이라는데, 원론적으로 본다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수많은 주해들에 의존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이렇게 보면 자아라는 고정된 실체도 환상이고, 내가 아는 건 진짜 아는 게 아니고, 내 생각도 내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 수긍이 가기 시작한다. 탈독서의 경지라는 것은 이렇듯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명확한) 인식의 불가해성, 곧 인식의 다변성에 합치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참 흥미로운 부분이다.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끝내 알 수 없는 그 이해의 늪이란 참 무한히 아득하다.


이 책은 비독서의 개념을 다루며 독서의 부재를 언급한다. 마지막 장에 오스카 와일드의 현대의 비평이론을 설명하면서 현대(19세기)의 독자들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쓰느라 성찰할 시간이 없다고 지적하는데, 여기서 독자를 유저(user), 책을 정보매체, 글을 sns활동이라고 치환하면 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적이다. 아니, 주류 매체가 아날로그 텍스트에서 디지털 텍스트로 옮겨진 지금은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책'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신성시된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고,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금기로 여겨왔다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겁에 질린 아이'의 자아라고 한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우리는 교양을 얘기하면서 상대방을 얼마나 깎아내리는가.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뼈저리게 깨달은 건 메모를 하는 습관이다. 책이라는 것은 (본문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그 자체로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니까. 텍스트는 언제든지 유기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한 문장 내지 한 문단의 텍스트를 읽었을 때 느껴지는 심상을 그때그때 기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휘발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니까. 나는 통독을 한다는 명목으로 고정된 진리, 고정된 텍스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프로이트를 전공했고, 이 부분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을 개진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도 책을 잘 안 읽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모르는 책도 많고(라고 하기에는 기만이 확실한 게 진짜 아는 책이 많다. 햐긴 문학 교수니까...) 요컨대 그런 주장이다. '꼭 다 통독해야만 능사는 아니다'라고.


그렇지만 통독은 또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정확히 말하면 옛날 책이 '고전'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그 담론 상황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한 교양으로만 넘겨버린 진리를, 단순히 읽었다고만 착각하는 그 부분을 더 파고들어감으로써 내가 얻는 가르침, 또 새로 배우고 익히는 그러한 맛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독서년을, 곧 통독을 성실히 행할 생각이다.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서도 나오는 그것이지만, 중요한 건 인풋을 수용하지 못한 뇌는 순환논리를 거듭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독학하는 사람들이 접하는 딜레마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도식에 갇혀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맥락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 책은 지적 스노브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스노비즘을 비판하는 책이기도 하다. 반드시 읽은 책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면, 어느 상황에서건 자신의 지식을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한다면, 비매너도 그런 비매너가 없을 테니까. 교양과 허영심은 결국 한 끗 차이일 수도 있다. '책 읽는 사람'들은 최소한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러한 인간적인 매너는 더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


기실 나한테 꼭 필요한 책이었던 거 같다. 다만 이 책은 아날로그 텍스트, 그 중에서도 문학에 관한 담론이다. 일전에 읽었던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와는 대비되면서 공통된 정서를 공유한다. 단치가 책의 인풋을 강조하는 반면, 피에르 바야르는 책의 아웃풋 기능을 강조한다. 내가 샤를 단치의 책 읽기가 주로 문학독서에 경도되어 있다고 지적하지 않았나. 그런데 맞는 거 같다. 문학은 첫 페이지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쭉 읽어내려 가는데 적합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피에르 바야르는 본문에서 소세키의 예시를 들며 무작위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문장부터 읽는다는 청년도 있다고 한다.) 




네이트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30대가 되면 20대 때의 낭만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외투를 걸치게 된다고 하면서 작품을 아무리 많이 접해도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 같다. 더 심오하고 원숙한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자랐는데 계속 같은 우물물을 퍼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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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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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는 ‘연대하라‘의 다른 이름이다. 이 메시지의 기저에서 보여지는 생의 낙관론은 무척 아름답기까지 하다. 마치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 앨범을 레지스탕스 노장의 버전으로 듣는 느낌이랄까. 분명한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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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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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의 안티테제. 이 한 권의 책은 이후 '투명사회', '권력이란 무엇인가', '에로스의 종말' 등에서 개진되는 한병철의 여타 주요 개념과 사상의 전초가 된다.


소설가 장정일은 이 책을 두고 패스티시(특정한 작품으로부터 내용이나 양식을 빌려온 작품)라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처럼 사회 문제의 철학적 진단을 이토록 직관적인 도식에서 간명히 쓴 책은 (내가 알기로) 여태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겠지...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근대의 면역학적 구도(부정성의 사회)와 후기 근대의 신경증적 구도(긍정성의 사회)를 비교하며 현대 사회가 '긍정성 과잉', 이른바 '같은 것의 범람'으로 자아의 위기를 고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성과사회'는 다른 누구(타자)도 아닌 자기자신이 스스로의 경영자가 되어 혹사하는 시대이고, 우울증, 주의력행동결핍장애, 소진증후군은 바로 이 자아의 혹사로 비롯하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적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서 발견되는 현대인의 내적 폐해에 관한 서술을 보고 싶다면, 3장 '깊은 심심함' (p.30 ~ p.36)과 5장 '보는 법의 교육' (p.47 ~ p. 54)이 제격이다. 첫 문장부터 팩트폭력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정리해본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 구조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예컨대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은 큰 규모의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지금은 페이스북을 멈춰야 할 때'리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페이스북은 '타인의 의견'을 표방한 '같은 지형적 담론'의 소비가 만연한 플랫폼이라는 내용이었는데, '피로사회'에 따르면 페이스북이 말 그대로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동일자의 나르시스트 경향을 강화한다는 거 아닌가. (...)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논리를 따라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사회문제전반을 파악하는 것은 자칫 맹아적인 이해로 귀결될 소지가 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우울사회'를 보론으로 엮은 듯 하다. 내가 보기엔 주장의 중언부언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한병철이 이후의 저작들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견지하는 것이겠지만... 확실히 이 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영학적 메커니즘'을 기술하는 데는 적절하지만, 여전히 국가 단위로 자행되고 있는 감시와 검열은 설명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렇듯 헤겔을 위시한 변증법은 반증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어느 측면에서 어디까지 유효한지 판단하고,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결론부에 '이상적인 피로'에 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전에 읽었던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데이터 풍요의 시대에 이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독자에게 사유와 에로스를 촉구하는, 상당히 '뚝심있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근본적 피로'라는, 거의 전근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개념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피로라기 보다는 '쉼'이다. 주 5일, 필요하다면 주말에까지 나가서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일하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오순절 막간의 시간'과 '커피 브레이크'는 양립할 수 있을까. 장정일의 지적대로 단순한 '힐링'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역자 후기에 '분단국으로서의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이념적 지형'에 대해 언급하는데, 근대의 면역학적 도식(이데올로기적, 민족적 타자와의 대립)에서 벗어나 '긍정성의 확대'로 이어지는 사회는 기존의 '진보 vs 보수' 구도를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반은 동의하지만 반은 글쎄다. 이념을 잃어버린 사회는 표류하고 있고, 오히려 '우경화'되어가고 있다. 진보는 '불편한 것', '성가신 것'이 되어간다. 거기에 자리잡는 것은 이기적이고 협소한, 파쇼적 군상이다. 또한 아직도 태극기를 들고 왕당정치를 옹호하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이다. 그렇게 쉽게 타개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래도 생각보다 읽는 데 얼마 안 걸렸다. 이전에 '에로스의 종말'을 읽어서 그런가 꽤 나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한 달 넘게 질질 끌었을 텐데. 이제 나도 독서인이 되어가나 보다. (주변사람들도 대개 그렇더라. 젊은이들을 다독가로 내모는 세상... 독서의 시대정신....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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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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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더 말이 필요 없다. 책 말미의 추천사들은 독자 개인의 실존에 찬물을 끼얹는 엘리트적인 레토릭 군더더기일 뿐이다.


기실 <표백>을 읽기 전에 이 책이 담고 있는 사회의식 내지 시대정신,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불안과 좌절 등지에 접근한 글을 많이 보았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H그룹 인사부 선배에게 '청년들에게 도전정신 강요하지 말라'고 대들었던 후배 대학생 일화" 역시 유명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표백>을 두고 사회 얘기를 꺼내기 이전에 이 작품이 문학으로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을 보다 보면 현실과 문학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지 의심하기 충분하다. 내 말은, 각종 통계 들먹이면서 사회문제 얘기 꺼내는 건 이 책이 진가를 발휘하기에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거다. 마찬가지로 사회문제를 논하기 위해 이 책이 여하한 부수적인 역할을 해야하는 것 역시 안타까운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이것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주제의식과 맞아떨어진다. 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천부적인 재능을 안고 태어난 젊은이들 조차 세상에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현실.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무결의 이데올로기로 구성원들을 옭아매는 세상. 따라서 자살을 귀결점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삶 전반, 세계 전반이 어떤 근본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역설이다. 이런 세상에 살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는 주체적인 의지 표명인 것이다. 과거 계몽 사상이나 공산주의 등 통상적으로 '이념'이라는 것은 삶의 의지 표명을 의미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삶의 의지를 추동하는 이념이 존재하는가? 자살을 진지하게 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변화에의 희망은 있는가. 표백의 망령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건 구태여 논증하지 않아도 충분할 듯 하다. 다만 작은 촛불을 조심스레 감싸안듯, 우리는 가치를 가꾸어 내기 위해 힘겹게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논외로 대학시절이 묘사되는 초반부 장에서 좀 많이 아팠다. '세연'이 죽기 직전까지. 여전히 내게 피해망상 증세가 있고, 그때 추억이 결코 유쾌해질 수 없음을, 그때를 되새기려면 아직 10년은 이르다는 사실을 상기해주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학 시절과 내가 경험했던 대학 시절은 명백히 다르다. 꾸며진 청춘과 병들었던 과거를 비교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내년에 복학하는데, 참 걱정이다. 학교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무섭다.


암튼 엄청나게 우울해지는 책이라는 건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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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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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선정적이다. 나도 사실상 낚였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의 원제는 mortality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반드시 죽는다는 '필사(必死)'의 명제, 즉 (생명의) '유한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마치 죽음과 투쟁하는 무신론자의 논변(책에서 히친스는 죽음에 관해 '투쟁'한다거나 '싸운다'는 수사를 거부한다.)처럼 장식했다는 사실은 책을 덮고 난 이후에 보면 꽤나 역겨운 대목이다. 후기에서 히친스의 아내가 '남편은 죽는 순간까지도 유쾌하고 열정이 있었다'는 걸 꾸준히 언급하지만, 유고집에 드러난 그의 병중생활은 기약 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여타 시한부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mortality'라는 원제야말로 이 책을 장식하기 충분했다고 보지만... 그랬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슬픈 현실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특히 과학계와 무신론진영에서 저명한 이름이다. 나 역시 간단한 약력 정도만 알고 있었고. 예전에 도킨스는 몇 번 읽었던 거 같지만 이 사람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인데 유고에세이로 시작했다는 아이러니는 넘어 가자 ...) 


번역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옛날만큼 무신론이나 반종교진영에 그리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책쇼핑을 하다가 제목에 끌려서 샀을 거다. (골고루 읽는 편이 좋겠지...하는 마음에서) 모로 보나 사실상 제목에 낚였다고 봐야할 텐데, 그래도 얻어낸 부분이 없지는 않은 책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건 언제든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지금 이 삶이 전부 다 끝난다면, 다 끝이라면... 아직 젊고 건강한 나 조차도 아득해지곤 한다. 다만 이 나약함을 이용하는 장사치들을 욕하기는 하겠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사색으로 끝나곤 하지만, 막상 죽음을 선고받게 될 때면 그때도 태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히친스는 계속 아파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힌다.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거 같지만...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히친스는 자신의 병중생활을 통해 이 금언을 철저히 논파한다. 고통은 인간을 더 나약하게 할 뿐이라는 거고, 그건 이성과 열정을 흩뜨리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원래 이 표현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역시 죽음 앞에서 사람은 변한다.) 이와 동시에 니체의 나약함을 까기도 한다. 뭐, 이렇게 보면 히친스는 꽤나 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삶을 통해 한 사상가의 위선을 까발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예전에 이말년 만화를 보고 되게 감명 받았던 구절이 있었다. (되게 별 거 아닌 말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거 보면 역시 그다지 중요한 말은 아닌 거 같다.) 셀럽의 아포리즘은 그 신봉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아마 히친스를 보고 감동받았던 독자들이 이 책을 보면 나보다는 더 격한 반응을 보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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