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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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는 ‘연대하라‘의 다른 이름이다. 이 메시지의 기저에서 보여지는 생의 낙관론은 무척 아름답기까지 하다. 마치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 앨범을 레지스탕스 노장의 버전으로 듣는 느낌이랄까. 분명한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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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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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의 안티테제. 이 한 권의 책은 이후 '투명사회', '권력이란 무엇인가', '에로스의 종말' 등에서 개진되는 한병철의 여타 주요 개념과 사상의 전초가 된다.


소설가 장정일은 이 책을 두고 패스티시(특정한 작품으로부터 내용이나 양식을 빌려온 작품)라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처럼 사회 문제의 철학적 진단을 이토록 직관적인 도식에서 간명히 쓴 책은 (내가 알기로) 여태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겠지...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근대의 면역학적 구도(부정성의 사회)와 후기 근대의 신경증적 구도(긍정성의 사회)를 비교하며 현대 사회가 '긍정성 과잉', 이른바 '같은 것의 범람'으로 자아의 위기를 고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성과사회'는 다른 누구(타자)도 아닌 자기자신이 스스로의 경영자가 되어 혹사하는 시대이고, 우울증, 주의력행동결핍장애, 소진증후군은 바로 이 자아의 혹사로 비롯하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적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서 발견되는 현대인의 내적 폐해에 관한 서술을 보고 싶다면, 3장 '깊은 심심함' (p.30 ~ p.36)과 5장 '보는 법의 교육' (p.47 ~ p. 54)이 제격이다. 첫 문장부터 팩트폭력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정리해본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 구조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예컨대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은 큰 규모의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지금은 페이스북을 멈춰야 할 때'리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페이스북은 '타인의 의견'을 표방한 '같은 지형적 담론'의 소비가 만연한 플랫폼이라는 내용이었는데, '피로사회'에 따르면 페이스북이 말 그대로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동일자의 나르시스트 경향을 강화한다는 거 아닌가. (...)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논리를 따라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사회문제전반을 파악하는 것은 자칫 맹아적인 이해로 귀결될 소지가 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우울사회'를 보론으로 엮은 듯 하다. 내가 보기엔 주장의 중언부언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한병철이 이후의 저작들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견지하는 것이겠지만... 확실히 이 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영학적 메커니즘'을 기술하는 데는 적절하지만, 여전히 국가 단위로 자행되고 있는 감시와 검열은 설명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렇듯 헤겔을 위시한 변증법은 반증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어느 측면에서 어디까지 유효한지 판단하고,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결론부에 '이상적인 피로'에 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전에 읽었던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데이터 풍요의 시대에 이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독자에게 사유와 에로스를 촉구하는, 상당히 '뚝심있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근본적 피로'라는, 거의 전근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개념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피로라기 보다는 '쉼'이다. 주 5일, 필요하다면 주말에까지 나가서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일하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오순절 막간의 시간'과 '커피 브레이크'는 양립할 수 있을까. 장정일의 지적대로 단순한 '힐링'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역자 후기에 '분단국으로서의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이념적 지형'에 대해 언급하는데, 근대의 면역학적 도식(이데올로기적, 민족적 타자와의 대립)에서 벗어나 '긍정성의 확대'로 이어지는 사회는 기존의 '진보 vs 보수' 구도를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반은 동의하지만 반은 글쎄다. 이념을 잃어버린 사회는 표류하고 있고, 오히려 '우경화'되어가고 있다. 진보는 '불편한 것', '성가신 것'이 되어간다. 거기에 자리잡는 것은 이기적이고 협소한, 파쇼적 군상이다. 또한 아직도 태극기를 들고 왕당정치를 옹호하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이다. 그렇게 쉽게 타개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래도 생각보다 읽는 데 얼마 안 걸렸다. 이전에 '에로스의 종말'을 읽어서 그런가 꽤 나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한 달 넘게 질질 끌었을 텐데. 이제 나도 독서인이 되어가나 보다. (주변사람들도 대개 그렇더라. 젊은이들을 다독가로 내모는 세상... 독서의 시대정신....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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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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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더 말이 필요 없다. 책 말미의 추천사들은 독자 개인의 실존에 찬물을 끼얹는 엘리트적인 레토릭 군더더기일 뿐이다.


기실 <표백>을 읽기 전에 이 책이 담고 있는 사회의식 내지 시대정신,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불안과 좌절 등지에 접근한 글을 많이 보았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H그룹 인사부 선배에게 '청년들에게 도전정신 강요하지 말라'고 대들었던 후배 대학생 일화" 역시 유명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표백>을 두고 사회 얘기를 꺼내기 이전에 이 작품이 문학으로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을 보다 보면 현실과 문학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지 의심하기 충분하다. 내 말은, 각종 통계 들먹이면서 사회문제 얘기 꺼내는 건 이 책이 진가를 발휘하기에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거다. 마찬가지로 사회문제를 논하기 위해 이 책이 여하한 부수적인 역할을 해야하는 것 역시 안타까운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이것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주제의식과 맞아떨어진다. 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천부적인 재능을 안고 태어난 젊은이들 조차 세상에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현실.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무결의 이데올로기로 구성원들을 옭아매는 세상. 따라서 자살을 귀결점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삶 전반, 세계 전반이 어떤 근본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역설이다. 이런 세상에 살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는 주체적인 의지 표명인 것이다. 과거 계몽 사상이나 공산주의 등 통상적으로 '이념'이라는 것은 삶의 의지 표명을 의미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삶의 의지를 추동하는 이념이 존재하는가? 자살을 진지하게 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변화에의 희망은 있는가. 표백의 망령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건 구태여 논증하지 않아도 충분할 듯 하다. 다만 작은 촛불을 조심스레 감싸안듯, 우리는 가치를 가꾸어 내기 위해 힘겹게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논외로 대학시절이 묘사되는 초반부 장에서 좀 많이 아팠다. '세연'이 죽기 직전까지. 여전히 내게 피해망상 증세가 있고, 그때 추억이 결코 유쾌해질 수 없음을, 그때를 되새기려면 아직 10년은 이르다는 사실을 상기해주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학 시절과 내가 경험했던 대학 시절은 명백히 다르다. 꾸며진 청춘과 병들었던 과거를 비교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내년에 복학하는데, 참 걱정이다. 학교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무섭다.


암튼 엄청나게 우울해지는 책이라는 건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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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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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부터 선정적이다. 나도 사실상 낚였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의 원제는 mortality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반드시 죽는다는 '필사(必死)'의 명제, 즉 (생명의) '유한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마치 죽음과 투쟁하는 무신론자의 논변(책에서 히친스는 죽음에 관해 '투쟁'한다거나 '싸운다'는 수사를 거부한다.)처럼 장식했다는 사실은 책을 덮고 난 이후에 보면 꽤나 역겨운 대목이다. 후기에서 히친스의 아내가 '남편은 죽는 순간까지도 유쾌하고 열정이 있었다'는 걸 꾸준히 언급하지만, 유고집에 드러난 그의 병중생활은 기약 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여타 시한부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mortality'라는 원제야말로 이 책을 장식하기 충분했다고 보지만... 그랬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슬픈 현실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특히 과학계와 무신론진영에서 저명한 이름이다. 나 역시 간단한 약력 정도만 알고 있었고. 예전에 도킨스는 몇 번 읽었던 거 같지만 이 사람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인데 유고에세이로 시작했다는 아이러니는 넘어 가자 ...) 


번역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옛날만큼 무신론이나 반종교진영에 그리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책쇼핑을 하다가 제목에 끌려서 샀을 거다. (골고루 읽는 편이 좋겠지...하는 마음에서) 모로 보나 사실상 제목에 낚였다고 봐야할 텐데, 그래도 얻어낸 부분이 없지는 않은 책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건 언제든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지금 이 삶이 전부 다 끝난다면, 다 끝이라면... 아직 젊고 건강한 나 조차도 아득해지곤 한다. 다만 이 나약함을 이용하는 장사치들을 욕하기는 하겠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사색으로 끝나곤 하지만, 막상 죽음을 선고받게 될 때면 그때도 태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히친스는 계속 아파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힌다.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거 같지만...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히친스는 자신의 병중생활을 통해 이 금언을 철저히 논파한다. 고통은 인간을 더 나약하게 할 뿐이라는 거고, 그건 이성과 열정을 흩뜨리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원래 이 표현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역시 죽음 앞에서 사람은 변한다.) 이와 동시에 니체의 나약함을 까기도 한다. 뭐, 이렇게 보면 히친스는 꽤나 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삶을 통해 한 사상가의 위선을 까발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예전에 이말년 만화를 보고 되게 감명 받았던 구절이 있었다. (되게 별 거 아닌 말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거 보면 역시 그다지 중요한 말은 아닌 거 같다.) 셀럽의 아포리즘은 그 신봉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아마 히친스를 보고 감동받았던 독자들이 이 책을 보면 나보다는 더 격한 반응을 보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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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1
알베르 까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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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저 이방인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선제된다면 도움이 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부조리'와 '반항'인데요. 이 책의 저자 해설에서는 부조리를 세계의 몰합리와 인간의 '합리의 욕망'이 빚어내는 모순이라고 언급합니다. 카뮈에 따르면 이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고,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그대로 생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반항'이라고 합니다.


...라고는 하지만,


뭐, 두 번째 읽은 거긴 하지만(아니, 세 번째던가) 종일에 걸쳐 읽었다. 역시 번역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피곤했던 상태 치고는 선전했다고 봐야지. 그렇지만 나는 도무지 이 역자 해설의 몰이해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만약에 카뮈의 다른 작품, 이를 테면 이방인의 해설서라는 '시지프 신화'나 수록된 '배교자'를 포함한 카뮈의 다른 단편을 접하게 할 요량이었다면 꽤 괜찮은 마케팅이었다고 생각이 든다만…… (참고로 난 시지프 신화를 읽을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난해한가 하면, 내가 바로 그 뫼르소처럼 졸고 있는 의식상태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해설에서는 '부조리'와 '모순' 키워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지프 신화'의 한 구절이 인용된다. 



"어떤 사나이가 유리창 저편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물론 이쪽에서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무의미한 몸짓을 볼 수 있다. 왜 그가 그런 몸짓을 하고 있는지, 이쪽의 사람은 생각해본다." 이때 그 유리창 안에 있는 사람의 동작은 부조리하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끊어진 회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 선은 연결되고 인간의 활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뫼르소와 뫼르소를 바라보는 독자의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 유리창에 비친 인물은 다름 아닌 독자 자신으로, 독자 개인이 얼마나 무감각하게 사는가를 투시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몰합리의 세계에서 부표처럼 사는 그런 위태로운 인간이, 아니 그러한 인간임을 비로소 깨달은 내가 부조리니 반항이니 하는 테제를 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전에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건 꽤나 아픈 일이다. 다만 나는 '되는대로' 살고 있으므로, 어떤 '체계'나 '질서'를 제공하는 프레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판단의 준거가 되는 그 인식의 틀이 오래 전부터 내게는 없었다. 지금은 어렴풋이 생긴 거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졸고 있는 인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더욱 역자의 해설은 몰이해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쩌라는 거지'라는 식으로 (...)


아무튼 세계의 '몰합리'와 나의 '합리'가 달라서 생겨나는 그 '불통'의 참극은 잘 알겠다. 3년 전 즈음 자살했던 대학생의 유서에도 '세계의 합리와 나의 합리가 달랐다'는 게 괴로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뭐 뫼르소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기어코 깨달았다고 하지만 이쪽은 모르겠다. 생을 긍정하고 반항하라는 건가? 니체처럼? (실제로 이 책 또한 니체의 목젖이 만져지는 것이다.) 좌우간 '부조리'와 '반항'의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얼마나 잉여인간인지는 잘 알겠다.


전에 읽었을 때는 결말부에 신부의 멱살을 잡고 열심히 자기 신념을 피력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감흥이 없다. 그때는 내가 안티크리스트였기도 했지만, 동시에 체제에 불만이 많은 반항아였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그랬는지도 (...)



그리고 다시금 니체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힘의 의지나 초인 같은 그의 사상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니체의 냄새가 별로 달갑지 않다. 해설에서 카뮈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방인'은 영락 없는 실존주의 소설이다. 따라서 이 책이 주는 또다른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실존주의'에 대해 더 공부할 만한 필요성을 준다는 것이겠다. 더 배우고 나면 이 책을 두고 회자되는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라는 표현이 와닿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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