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방인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1
알베르 까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알베르 카뮈 저 이방인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선제된다면 도움이 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부조리'와 '반항'인데요. 이 책의 저자 해설에서는 부조리를 세계의 몰합리와 인간의 '합리의 욕망'이 빚어내는 모순이라고 언급합니다. 카뮈에 따르면 이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고,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그대로 생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반항'이라고 합니다.
...라고는 하지만,
뭐, 두 번째 읽은 거긴 하지만(아니, 세 번째던가) 종일에 걸쳐 읽었다. 역시 번역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피곤했던 상태 치고는 선전했다고 봐야지. 그렇지만 나는 도무지 이 역자 해설의 몰이해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만약에 카뮈의 다른 작품, 이를 테면 이방인의 해설서라는 '시지프 신화'나 수록된 '배교자'를 포함한 카뮈의 다른 단편을 접하게 할 요량이었다면 꽤 괜찮은 마케팅이었다고 생각이 든다만…… (참고로 난 시지프 신화를 읽을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난해한가 하면, 내가 바로 그 뫼르소처럼 졸고 있는 의식상태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해설에서는 '부조리'와 '모순' 키워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지프 신화'의 한 구절이 인용된다.
"어떤 사나이가 유리창 저편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물론 이쪽에서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무의미한 몸짓을 볼 수 있다. 왜 그가 그런 몸짓을 하고 있는지, 이쪽의 사람은 생각해본다." 이때 그 유리창 안에 있는 사람의 동작은 부조리하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끊어진 회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 선은 연결되고 인간의 활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뫼르소와 뫼르소를 바라보는 독자의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 유리창에 비친 인물은 다름 아닌 독자 자신으로, 독자 개인이 얼마나 무감각하게 사는가를 투시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몰합리의 세계에서 부표처럼 사는 그런 위태로운 인간이, 아니 그러한 인간임을 비로소 깨달은 내가 부조리니 반항이니 하는 테제를 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전에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건 꽤나 아픈 일이다. 다만 나는 '되는대로' 살고 있으므로, 어떤 '체계'나 '질서'를 제공하는 프레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판단의 준거가 되는 그 인식의 틀이 오래 전부터 내게는 없었다. 지금은 어렴풋이 생긴 거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졸고 있는 인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더욱 역자의 해설은 몰이해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쩌라는 거지'라는 식으로 (...)
아무튼 세계의 '몰합리'와 나의 '합리'가 달라서 생겨나는 그 '불통'의 참극은 잘 알겠다. 3년 전 즈음 자살했던 대학생의 유서에도 '세계의 합리와 나의 합리가 달랐다'는 게 괴로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뭐 뫼르소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기어코 깨달았다고 하지만 이쪽은 모르겠다. 생을 긍정하고 반항하라는 건가? 니체처럼? (실제로 이 책 또한 니체의 목젖이 만져지는 것이다.) 좌우간 '부조리'와 '반항'의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얼마나 잉여인간인지는 잘 알겠다.
전에 읽었을 때는 결말부에 신부의 멱살을 잡고 열심히 자기 신념을 피력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감흥이 없다. 그때는 내가 안티크리스트였기도 했지만, 동시에 체제에 불만이 많은 반항아였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그랬는지도 (...)
그리고 다시금 니체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힘의 의지나 초인 같은 그의 사상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니체의 냄새가 별로 달갑지 않다. 해설에서 카뮈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방인'은 영락 없는 실존주의 소설이다. 따라서 이 책이 주는 또다른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실존주의'에 대해 더 공부할 만한 필요성을 준다는 것이겠다. 더 배우고 나면 이 책을 두고 회자되는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라는 표현이 와닿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