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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내 말을 안 들을까? - 20년 경력 상담심리사가 실전에서 써먹는 듣는 기술, 말하는 기술
도하타 가이토 지음, 김소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2월
평점 :
사람들은 왜 내 말을 안 들을까?, 미래 전망의 불투명, 불안이 엄습한 "대화 단절"사회에서 각자도생을
여유가 없어서, 흥미가 없어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라서, 늘 푸념이어서 듣는 사람도 우울해지니까, 그럴듯한 답변들이다. 정작, 넘치고 또 넘쳐나는 이야기들, 지하철을 타봐라, 사무실, 학교 어딜 가든 떠드는 소리는 여전한데, 정작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네”.
이 책의 지은이 도하타 가이토는 한때 대학교수로 일할 때의 처지를 토로하는데, 사람들이 많은 곳이나 회의 등에 영 익숙지 않아, 회의 중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교수가 하는 말, 회의 중에는 휴대전화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감을. 아니 지은이 표현대로라면 고립감을(?), 아무튼 대학의 역할과 기능의 변화 속에서 투명, 가시화 등이 영 맞지 않았는지, 대학에 사표를 내고, 상담실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듣기 기능 부전 상태에 빠진 사회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 최선
이 책은 “듣기(聞) 기능 부전 상태에 빠진 사회”를 주제로 지은이가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의 사회 계명(季評)에 석 달에 한 번씩 실은 글(평론)을 앞에 달고, 이를 상담사의 시선으로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쓴 글과 실용적인 매뉴얼 노하우를 묶어서 엮은 것이다. 지은이는 “듣기(聞)와 듣기(聽)”의 관계를 지금껏 오해했다고 말한다. 듣기(聞)는 쉬운 레벨이고 또 다른 듣기인 청(聽), 즉 경청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청보다는 문, 그냥 들어주기가 더 어렵다고, 끼리끼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반론은 귓등으로 오로지 앞으로 내 생각이 옳다 진격을 외치는 무리, 정치판에서 목소리를 높은데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이런 상태, 서로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바쁜 가정 안 세상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통” 부재라는 말이다. 왜 소통 부재가 생긴 걸까에 천착한 지은이는 이 책의 배경을 ‘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 그래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좋을까?’라는 물음이라고 했다. 글쎄다. 듣기 기능 부전과 한정된 자원의 분배가 무슨 상관이람.
지은이의 ‘사회철학’이란 표현은 "대화"다. 신자유주의로 각자도생을 하는 현대인, 집단주의든 개인주의든 모두 나름의 한계가 있고,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귀를 닫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게 한다. 여기에는 저 출생 초고령사회의 문제들 인구 절벽을 비롯하여 수도권 집중화, 지방의 공동화와 인구감소, 노인 문제, 아이(출생, 양육) 문제, 도시는 도시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각각의 문제가 있지만, 한정된 자원을 서로 끌어가려는 경쟁으로 서로 소통하지 않고 균열은 더 깊어지고, 이때 필요한 것이 “대화”라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로의 복귀는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 요즘 한국의 실정도 그러하지 않은가, 정치 현장을 보라. 국회의원 공천을 하는데 일방통행, 힘의 논리, 바로 소통, 대화의 부재다.
묻지 마 식 살인, 청소년 비행. 이 이면에는 “그때 내가 필요할 때, 내 말을 들어줄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듣지 않고 내뱉은 말은 상대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지은이는 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던 일본 스가 총리와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코로나 대유행 시절에 어떻게 국민에게 다가섰는지를 비교하는데, 떠나는 일본 총리가 말하기를 “왜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에 대한 답을 메르켈의 국민을 대하는 태도로 설명했다. 국민의 자유를 제하는 긴급 사태가 초래된 것에 대해 국민께 용서를 구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른바 소통한 것이다. 일본 총리는 국민이 알 필요 없음. 정부가 다 알아서 함. 국민을 사지로 모는 국가가 있겠냐고, 일본 국민의 드센 항의는 “내 말 좀 들어줘, 우리는 절박함을 알아야 달라"라는 말이었다.
지은이는 듣기 기능의 부전 상태 담론을 일본 사회체제를 다루는 거시적 접근에서 가정에 개인에 이르는 미시적 접근까지, 마치, 카페에 앉아 차 한잔하면서 편하게 옆 사람에게 말하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것도 심리학자, 의료인류학자 들의 이야기를 곁들어가면서, 술술.
공동체의 유대관계가 살아나야!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며, 격려해 주고 등을 토닥여 주는 사람들 속에서 얼어붙은 마음은 풀린다. 정신건강의학이나 공인된 상담심리사, 심리상담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누구라도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옆에서 그저 이야기만 들어줘도 된다. 격려만 해줘도 된다. 지은이는 전문가 필요한 대목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 왜 대인관계에서 화를 내고, 무례하게 구는지 그 원인을 진단명이라는 규정을 통해서 성격이 못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마음의 병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해준다면, 주변의 태도는 바뀐다고,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 이외의 것은 민간영역(주변 사람들, 혹은 일반 사람)에서 민속 영역(전통적으로 요가, 명상, 혹은 무당의 굿이라도)에 맡겨도 좋다고 이른바 전통적인 “돌봄” 문화의 회복을 말한다. 모든 것을 전문가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전문가는 평범한 사람이 서로 돌보는 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경청할 만한 대목이다. 그저 내 말을 좀 들어달라는 것이 핵심이다. 일상의 이야기를 하거나 들어주거나 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라포(신뢰)가 형성되면 그것으로 도움이 된다. 동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동네 사람이 함께 키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익숙해진 아파트 생활은 고립무원이다. 문을 닫으면 누가 사는지, 그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렇다.
대문에 커다랗게 “맹견 주의”라고 써 붙여 놓은 집 안의 강아지는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요란하게 짓는다. 이 개는 주인 외에 다른 사람이 두려워서 그런다. 오지 말라는 의사표시일 뿐, 사람도 마찬가지다.
듣기 기능 회복은 "내 이야기 들어줄래요"로 시작
이게 아마도 정답인 듯싶다. 내 말을 왜 안 들어줄까가 아니라, 먼저 내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TV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비틀거나, 왜곡하거나, 상상하거나, 예측하고 단정 짓기 전에, 대체로 우리 이야기는 “답정너다”. 다만, 그런 결정에 대한 지지를 받고 싶을 뿐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