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의 불교사
본디 붓다(불타佛陀)는 ‘깨달은 사람’이란 뜻으로 자이나교에서도 사용하는 용어다. 2500년 전 세상에는 많은 현자가 출현한다. 인도에서는 붓다와 마하비라 바르다마나가,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묵가, 한비자 등이, 페르시아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삶의 길과 지혜를 가르쳤다. 이 시대에 탄생한 불교는 종주국 인도에서보다 동북아 중국, 한국,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유수의 종교로 자리매김한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구분도 불교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동북아 중국, 한국, 일본의 전래과정을 비롯하여 한국 불교의 특징(호국불교, 독자적인 선 체계 등)과 부침의 역사적 장면 100개를 다룬다. 한 세대 전에 나온 책을 한국 근현대 불교 관련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새롭게 다듬은 개정판이다. 지은이는 교사생활을 하다가 출가, 불교계의 친일파에 관한 연구 등에 참여하였으며, 연합불교신문의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00개의 이야기는 동북아로 건너온 불교, 중국을 거쳐 한반도 삼국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과정 속의 부침을 고려 무신정권 때의 선종은 무인 정권의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했고, 조선 중종 때 불교 중흥을 꾀했던 보우, 임진왜란의 호국불교, 인조 때 남한산성 축조와 농성에 동원됐던 승군, 호국불교의 모습, 동학 때까지 66개의 이야기가, 그리고 일제강점기 동안의 불교의 모습을 67~92까지 26개의 이야기, 이 대목은 낯선 이야기다. 한쪽에서는 나라를 구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현실 권력에 부합하는 친일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역사를 그렸다.
1945년 해방 후 불교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독신승의 조계종과 대처승의 태고종으로 종단이 나뉘고, 불교계의 정화 운동도 소개한다. 특히, 개정판에 실린 해방 후 북한의 불교계와 현재 상황, 그리고 비구니 교단의 형성 한국 비구니 교단의 역사 순으로 실렸다.
중국에서는 황로사상, 불로장생술의 하나로 수입한 불교
모든 중생에게 “자유와 평화”와 “다르마” 사람이 지켜야 할 불변의 진리를 논하는 종교가 사막을 건너 중국에는 황로(황제와 노자)와 부도(浮屠=부처) 숭상으로, 불교의 기본성격은 복을 바라는 현세 이익에 있었다. 서역 승려들은 주술의 역할을 지닌 신선적 수행자로서 존경을 받았고, 불교는 어디까지나 현세적이며 공리적인 도교적 신앙의 형태로 수용됐다.
한반도의 불교, 호국불교, 토착 신앙과의 조화를 통해 한국적인 불교로
중국을 거쳐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 우리나라에 들어와 백제, 신라 순으로 전파된다. 그중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중국 절강성(東晉)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고승 마라난타가 왕을 만나고 불법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특이한 것은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왜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호국불교로, 또는 토속신앙과 융합하여 재앙을 방어하고 복덕을 비는 기복 종교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한편,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원시 종교인 샤머니즘 신앙과 중국에서 전래한 도교적인 음양 지리설, 풍수설 같은 사상과도 조화를 이루는 한국적인 불교로 승화 발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억불숭유 정책을 폈음에도 불교는 많은 명승과 승병장을 배출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승병을 일으키거나 불법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등 호국불교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특히 서산대사(1920~1604)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구에도 불구하고 승병장이 되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였다.
일본불교의 조선 침략과 친일행적, 대한 조계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숭유억불 태도는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나 여전히 도성 출입이 금지되는 등 크게 바뀌지 않았다. 조선 침략의 선발대 일본불교, 마치 선교사의 파송과 같은 것이다. 1877~1909년에 이르는 척후 활동은 강화도조약(1876년)을 계기로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의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임진왜란 때 종군승으로 참여했던 오쿠무라 조신의 7대손)이 1877년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했다. 이 무렵 개화승 이동인이 일본 유학을 통해 친일 주구로 활동하게 된다. 지은이는 개화사상의 선두주자라는 이면에 숨겨진 친일행적을 지적한다.
1985.4.24. 조선 불교에 일대 사건, 일본 일연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청원으로 천시와 서러움의 표상이었던 '승려 도성(都城) 출입금지' 해금령이 발포됐다. 이는 조선 불교 일본예속의 상징적 출발선언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많은 승려의 항일투쟁(무장투쟁)도 있었지만, 친일행적 또한 끊임없었다. 호국불교라는 생각은 항일과 친일 이 모두의 근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왜색불교와 친일 불교가 청산되지 못했다. 이승만의 친일파 영입으로 불교계에서도 친일파가 득세,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됐지만, 결국에는 승려들의 자율적인 정화가 아니라 관권에 의지, 그 영향을 받게 된 것, 지금도 그러하지만, 승려들의 자질 저하, 이는 지금도 계속 논란 중이다. 부처의 가르침에 관한 이해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이를 직업으로 삼고 이익을 취하려 한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유럽에서 성당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듯이, 우리 산천에 있는 절 또한 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고, 때때로 밥도 나눠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고려 시대의 불교와 중세 유럽의 가톨릭 세계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는 승려와 추기경 등의 사제로…. 우리에게 불교는 종교라는 의미보다는 문화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절 안에 있는 신선당 역시 정겹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