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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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백 번 정도 한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개인사를 듣는 것이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는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다.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애정에 눈이 가려지기 마련이고 헌데 인간이란 본디 얼마정도는 서로를 실망시키니. 혼자만의 믿음이 깨지거나 바닥없이 아스라한 배신감에 시달리다보면 가능한 한 사적인 부분을 눈에 두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물론, 언제나 잘 되진 않지만 꾸준히 시도한다. 배우는 캐릭터로, 작가는 오로지 완성한 글로 판단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이 책은 그런 원칙의 면에서 적합하다. 번역가가 이야기해주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는 어느 정도의 개인사가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써내려간 의도나 의중에 대해서일뿐 그들의 성격이나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번역가가 자신이 만난 작가들에 대해서 써낸 에세이로 분류되긴 하나 예상 이상으로 평론적이며 다소 학술적인 접근법을 갖춘 책이다. 일부 발췌한 문단을 빌려오면 이러하다.

 

그는 1959년 첫 장편 구빈원 축제로 미국 예술원 로즌솔상을 수상했고, 이십대 후반인 1960년에 달려라, 토끼를 출간하여 그 세대의 대표 작가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인 1963년에는 켄타우로스로 전미도서상을 받고, 1964년에는 최연소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업다이크는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업다이크가 젊은 시절에 반짝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평생 우려먹는 작가였다는 뜻은 아니다(업다이크 자신은 불가리아 여자 시인에서 베크의 입을 빌려 그런 자화상을 슬쩍 그려내기도 하지만). 상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십대에 들어선 1981년에는 토끼는 부자다로 퓰리처상, 육십대에 들어선 1991년에는 토끼 잠들다로 다시 퓰리처상을 받았다(소설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작가는 업다이크를 포함하여 미국에서 세 명 뿐이다). 토끼는 부자다를 발표한 직후인 1982년에 타임은 업다이크를 두 번째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는데, 이때 표제가 오십 세에 위대해지다였다.

 

(중략) 업다이크는 상복도 많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68년에 발표한 커플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일 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 젊은 시절 잠깐 시민권 운동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 국가기구와도 대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젊은 시절에는 국무부에서 파견한 미소 문화교류 문화사절로 동구를 순회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부시 대통령 부자에게 각각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에 영화적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나보코프가 영화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앞이 보이지 않는 알비누스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영화로 본다면 스크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마지막 장면도 이 소설을 쓰던 시점에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영화와 소리의 결합(1929년에 최초로 도입되었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금은 상투적 수법이 된 지 오래지만, 오나전한 암흑 속에서 소리만 들려줄 때 오히려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알바누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눈앞에 드러나는 현장을 나보코프가 무대 지시 사항이라는 말을 앞세워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러 해석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영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은 플롯의 전개 속도, 또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딱 영화로 만들기 좋게 짜인 플롯과 대사이고, 그런 면에서는 오늘날의 대중소설과 흡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영화적이라는 평이다.

 

앞서 밴빌이 조이스에게 받은 영향을 이야기했지만, 밴빌은 가디언과 이야기하면서 모든 아일랜드 작가는 조이스 추종자와 베케트 추종자로 나뉘는데, 자신은 베케트 진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특히 아일랜드 내에서 밴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가 능력으로 보나 성취로 보나 베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존 업다이크의 수상경력과 이력, 상업적 성취에 대한 정보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향한 대략적인 중평, 밴빌 자신의 발언과 밴빌을 향한 발언을 인용하는 와중에 자신이 가진 태도나 의견은 숨기는 편이다(물론 이런 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자체가 저자가 그러한 논조에 동조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나). 가능한 한 독자에게 사실만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인상적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을 꺼내든 독자들의 호와 불호는 나뉠 수도 있겠다. 재밌는 건 출판사 역시 이 점을 의식한 것 같다는 짐작이다. 번역서 외에는 책을 내지 않은 저자가 이 책과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두 권을 동시에 발표했다. 물론 같은 출판사다. 공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가벼운 에세이나 일상의 에피소드, 저자의 번역 원칙 등이 궁금하다면 다른 한 권을 찾아가면 된다는 안내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거나 재미가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저자의 이야기도 겻들어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번역과 관련된 그의 생각 일부를 읽을 수 있는데다 작가들의 이야기 중에도 문득 자신의 의견이 새어나올 때도 있다. 이런 식이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 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척하는 삶에서 끝애와 하타가 기대하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사십대로 들어선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로 한 바퀴 원을 그리듯이 다시 히스로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내부보다는 외부를 관찰한다. 공항에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지만, 왠지 노스탤지어도 묻어나는 듯하다.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중략) 사실 나 자신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이야기들이 너무 자신의 내부에 몰입해 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이런 느낌은 알랭 드 보통과 나의 나이 차이, 즉 서로 속해 있는 인생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이p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불안에 와서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외부로 시선을 돌려,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이나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는 외부에 대한 관찰이 글의 출발점이 되는 지점에 이른 듯하다.

 

매카시가 긴 은둔 기간을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보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하니 궁핍도 대단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거의 팔 년 동안 헛간 같은 곳에서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했다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대학에 와서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자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그뒤로 일주일 동안은 또 콩만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곤궁한 생활에서도 죽으란 법은 없더라는 것이 매카시의 말이다. 정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꼭 어딘가에서 살 방도가 나타나곤 했다(한번은 코카콜라가 지원금을 주었다고 하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유명사가 사라진 로드의 흑백의 세계에 빨간 코카콜라 캔이 도드라지게 등장하는 것이 그런 인연의 소산이 아니겠느냐고 한마디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일화 중심이고 의견을 표명할 때 마저 꽤 조심스러운 태도다(알랭 드 보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저자의 생각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 같다). 일각에선 남의 이야기를 빌어온 것처럼 신중하다못해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는 저자로서, 특히 자신이 만난 작가들을 향한 존중과 애정이 깃든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나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별개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겐 일종의 길티플레져 역할을 할 수 있다.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고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작품과 작가 개인을 연결하고 있으니. 

 

저자가 워낙 유명한 번역가인데다 걸출한 작가들의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책에 인용된 작가의 목록만 봐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독자도 많을 거다. 책을 좋아한다면 아마 이 중 적어도 한 명쯤은 좋아할 게 분명하고 작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본 책이 한 권 이상은 될 가능성도 높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저 '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이 흥미롭지 않기 어렵다. 이 책을 읽고나면 필연적으로 이 안에 들어있는 작가들, 그들의 책을 더 만나고 싶어진다. 그러니 짓궂게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자기홍보 수단이 어딨으랴(작가와 독자 사이의 연결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선 번역의 본질과도 비슷한 책이니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가 -번역책으로 만났을 때도 느꼈듯이- 글을 잘 쓰는 문장가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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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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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 때는 질리지도 않고 많이, 열심히 읽었다. 재밌는 것은 재밌는 대로, 재미가 없다 해도 없는 만큼, 좋은 것은 좋되 별로인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자세였던 것 같다. 지금보다 어렸고 또 여리고 유연했던 시기여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제는 더는 그런 식으로책을 읽지 않는다.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그 날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일테면 사람의 일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의 생애서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간 셈이다.

 

내게 다수의 일본 소설들은 그런 시기가 되어 과거가 되어버렸다. 한 때는 그런 정서들을 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서로의 날것을 보이지 않고 보지 않아도 되고, 생활력이 결여된, 그림처럼 아름다운 관계들. 헤어진 연인 사이에도 더없이 무던하고 가족끼리 상처를 주지 않고 친구라도 와나타베와 미도리처럼(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들) 지낼 수 있고,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연하고 미니멀한 삶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삶에 할퀴어지고 나니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쿨한 관계란 생각해보면 거기까지인 사이일 수도 있다는 것, 헤어진 연인은 결코 쿨할 수 없고 가족이란 본디 애와 증사이에서 줄다리를 타기 마련이며 와나타베와 미도리는 결국 친구가 아니었고 에쿠니 가오리의 주인공들은 불륜마저 쿨하다고 여기며 상대가 나를 돌아봐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남에게 상처를 줘놓고 자기연민으로 칭얼거리며 그 와중에도 일은 안 하고 고양이나 껴안고 사는 삶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삶은 대체로 그런 식인 것 같다. 좋으니까 싫어지고 좋은 점이 견딜 수 없어지며 더없이 미워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앞두니 감회가 새로워 서두가 길었다. 가느다랗고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옆으로 땋아서 묶고 에스닉한 셔츠와 펠트로 만들어진 가방을 들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낡은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녀. 요시모토 바나나를 떠올리면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책을 열었는데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쓴 웃음이 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반가웠다.

 

나는 지금도 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다만 장난으로 하는 놀이가 아니다. 높은 벼랑 위에서 물을 향해 뛰어내리는 아이처럼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푹 빠진 놀이다.

 

주인공 이름은 사야카. 남편인 사토루가 세상을 떠난 후 딸인 미치루와 함께 지낸다. 1층에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사신다. 어느 날 이전에 이 곳에 살던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는데 이야기인즉슨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지금의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마당에 소중한 뭔가를 묻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 말이라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데 혹 괜찮다면 방문을 해서 그 곳의 땅을 파도 되겠냐는 부탁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독특한 일이 생기네 하고 말겠지만 편지의 발신인이 오래전, 사야카가 스무살에 사귀었던 남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야카는 산사인 그의 집에서 함께 산 적도 있고 가족들도 모두 알았다. 당연히 돌아가셨다는 그의 어머니도. 한 때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진지한 사이였으나 모종의 사건이 발생해 그(이치로)와 그의 가족들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믿기지 않을 우연의 일치로 그와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야카는 일본인이긴 하나 발리에서 쭉 살았다. 문화인류학자인 부모님을 여의었기에 가족이나 형제도 없고 정해진 거처도 없다. 그리고 그녀에겐 이른바- 사이코메트리와 같은 초능력 비슷한 재능이 있다. 그녀의 결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지인으로 알고 지내던, 정말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었던 사토루가 시한부를 선고받자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정확히는 아이를 낳아달라고.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토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고, 그의 아이를 낳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둘은 일종의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심지어 사토루의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다 듣고도 그녀를 기꺼이 집안으로 들인다.

 

다소 비일반적인 설정과 상황이 펼쳐짐에도 이상하다는 생각보단 이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언제나 그랬다. 분명히 일상적인 이야기 임에도 오컬트 요소를 넣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말갛고 상냥한 남자주인공과 다정하고 너그럽고 강한, 진짜 어른이 등장한다. 대개는 할머니나 어머니, 이모 등으로. 여기선 사토루의 엄마이자 사야카의 시어머니가 그러하다.

 

네 손,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아팠겠구나.”

시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책임이나 상처나 장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전략) 우붓에 가면 멋진 그림도 사 오고. 새와 숲이 있는 걸로. 현관에 걸어 두련다. 우리 집에서는 잘 없던 일이지, 그림을 걸어 둔다는 거, 즐겁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왜 없어진다고 그래.”

나는 도무지 눈물을 거둘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시어머니가 전부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려 깊고 현명하다. 아들을 보냈지만 미치루와 함께 내 가족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사야카는 부모님처럼 사랑한다. 이 이상한 결혼을 받아들여준 것도 사토루와 사야카가 모르는, 혹은 눈치 채지 못한 점 덕이었다. 아들의 따뜻한 표정, 친구였던 사람의 아이를 낳겠다는 사야카의 결정. 이들 부부는 타이밍이 어긋난, 늦된 사랑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가 있고 이들의 사랑이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거리를 뒀기 때문에 서로를 나무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치로의 편지를 받은 사야카는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를 마주하고 후회를 접고 미련을 청산하고. 임신을 하고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를 안으면서도 변화하고 성장했던 그녀는 이제 완전한 탈피를 한다. 젊었던, 어렸던 시절을 묻어두되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단순하지만 묵직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서로의 옆에 선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미치루의 엄마로 사는 일,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만족하지만. 이들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의 스웨터와 가방 같은 것들이 되어 늘 따라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했던 시절.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첫사랑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문득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플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가 품은 사물이 되고 싶을만큼 강렬하게 뭔가를 염원했던 적이 있긴 했나. 아니지. 분명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읽었던, 지금보다 어리고 여리고 유연했던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그땐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이 내게 유효하게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반갑다는 마음이 든다. 늙고 낡고 시니컬한 나에겐 더 이상 아름답거나 주효할 수 없는 사야카의 사랑과 삶,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과거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겐 충분히 반짝거리는, 멋진 이야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어떤 시절과 시기를 지나는 이에게 이 책이 더욱 아름답길 바란다. 그리고 '이 작가 아직도 글을 쓰는구나' 하고 발견할 수 있고 '변하지 않았네'하는 아쉬움과 반가움이 공존할 수 있도록 요시모토 바나나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요시모토 바나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된 시기를 되짚어 보면 어떤 이는 옛날의 내가 읽던 그녀의 책을 보며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신기하다.


어떤 책들은 기억 속에서 계절과 함께 박제된다. 지르르르 귀가 얼얼해질 만큼 울어대는 매미와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티의 유리잔, 손안에 꽉 들어찬 청사과의 맛. 이 책을 떠올리면 아마 이런 것들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 자신도. 이 모든 것이 추억의 맛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달고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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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4 0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법 다독가에 가깝던 시절이 있었다. 다독가란 이런 사람이다 하는 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며 내 자신이 그 기준안에 부합하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독가에 가깝다고 에측할 만한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시절'일 뿐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허무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책을 읽지 않아서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책과 영화 정도는 평생을 걸쳐 좋아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진 탓이었다. 4월에 쓴 포스트에서 말했듯이 한 생을 걸쳐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는 삶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늘 그렇지만, 나는 늘 너무 내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면이 있었다. 기록을 뒤져보니 2015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2016년과 작년은 진정 암흑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단지 권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력과 기억력에서도 형편이 없던 시기였다. 다행히도 영화만큼은 꾸준히 보았으나 그건 위로라고 할 게 못되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는)영화는 책보다는 수동적인 매체이며 영화를 적게 보는 건 책을 적게 보는 것보다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적기 때문이었다. 즉, 나는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많다는 뜻이었다.


집중력과 인내심, 끈기가 사라졌다(아니, 사라졌다니? 내 안에 그것들이 있기는 했다는 게 우선 놀랍고 그 '있기는 했다는' 것들이 탈탈 털어 사라진 기분이 들어 암담하다). 친구의 생일을 잊어버리거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만졌으며 자고 일어나도 피곤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쓰는 행위가 번거롭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고 쓰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거지같았다.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표현력이 더 떨어졌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 관조적이고 회의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무기력감이 심했다. (모두 다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서도)전형적인 디지털 중독이었다. 이 말을 입에 담는게, 인정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이건 그냥 순도 백퍼센트의 부끄러움이었다). 그나마, 정말 그나마 스마트폰을 들기 전에 읽어둔 책마저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더 상황은 나빴을 거다. 

 

우리의 지능지수는 18세에서 25세 사이에 가장 높다뇌는 25세에 최대 크기가 되고이후에는 쪼그라들기 시작하여 무게가 줄고 빈 공간이 액체로 채워진다.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 경은 말했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감동적이고고무적인 업적은 25세 사이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창조성은 30대에 절정에 달한 뒤 급격히 쇠퇴한다사람들이 창조적인 성취를 해내는 것은 대부분 30대 때이다드가는 말했다. ‘25세에는 누구나 재능이 있다. 50세에도 재능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위안이 필요하다면 지식적인 면을 생각하자어휘력은 20세일 때보다 45세일 때 3배 풍성하다. 60세의 뇌는 20세 때보다 정보를 4배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 데이비드 쉴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우선 기억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기억은 나이가 든다고 굳어지는 것이 아니다나이가 들어서도 경험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상기한다면 그 기억들은 강화된다이때 일기와 시간이 아주 유용하다노화되는 두뇌는 기억의 보조도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나이 든 사람들은 단어를 잘 외우지 못한다그리고 어제 혹은 일주일 전의 일을 즉석에서 기억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낀다그에 반해 재인식을 하는 힘은 젊은 사람들만큼이나 뛰어나다어떤 단어를 기억에서 자유자재로 불러올 수는 없을지라도 단어를 본 뒤 그와 관련된 일은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대니얼 삭터는 체험한 것들을 메모해두거나 사진으로 찍어두라고 권한다원천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수단들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다른 한편 회색세포의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두뇌가 얼마나 빨리 노화하는지는 두뇌를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훈련은 뉴런의 기능을 개선해 나이가 들어서까지 높은 사유능력을 갖게 한다이는 최근의 방대한 연구들을 통해 입증한 사실이다가령 규칙적으로 강의를 듣는 노인은 별로 머리를 쓰지 않는 동년배의 노인보다 기억력이 월등히 좋다낱말퍼즐만 맞춰도 효과가 있다게다가 정신 활동은 알츠하이머병도 예방해준다자극은 두뇌의 노화를 늦춰어준다두뇌를 쓰지 않으면 40세부터 그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한다반면 일생 동안 두뇌를 사용한 사람은 나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간이 질주한다는 느낌이 덜할 것이다그들에게는 중년의 세월이 더 느리게 간다  - 슈테판 클라인,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가뜩이나 완벽한 인도어indoor인간인데 이러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이미 내 뇌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가장 창조적인 시기마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갈지도. 두려움이 가까스로 게으름과 권태를 밀어내기 시작했기에 힘을 돋우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다시 시작한다. 어릴 적 추리소설로 글을 읽는 재미를 배운 것처럼, 일단은 가볍고 '재밌는' 글부터 읽고 있고 독서 자극하는데는 다독가들의 기록만한 게 없는지라 책에 대한 책도 읽고 있다. 닉 혼비의 글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싶고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천천히, 다시, 책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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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0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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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그것이 바로 틈새였다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던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그러나 그들은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그들은 멈출 수도 없고멈추려 하지도 않았다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번째 죽음 같았다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아래로저 아래로 내려갔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일 년의 나머지 절반이 머무는 6월이다. 그것도 벌써 유월의 사흘이 지나갔다. 지난 달은 행사도 많고 연휴도 있는 날이라 그런지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쏜살같이 지나간 기분이다. 필립 로스의 타계 소식을 들은 지 열 흘도 훌쩍 지났지만 미처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책은 대여섯 권 읽었고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 책이 나오길 기대하고 기다리곤 했는데. 더 이상은 '새 책'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헛헛하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필립 로스. 보내는 구절은 그의 소설 중 단연코 제일 좋아하는, 그리고 모든 소설을 통틀어 아마도 손꼽아 좋아하는 책인 『에브리맨』에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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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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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나는 왜 네가 아니고 너인가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자라면서 들은, 읽은, 때로는 출처가 불분명한 인디언들의 일화나 명언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인디언(정확히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지혜와 현명함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두 늙은 여자의 책 소개를 읽고서도 여타 다른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짐작했다.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 말이다. 보라, 책 띠지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하지만 막상 책장을 펴서 접하게 되는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든 개의, 일흔 다섯 해의 여름과 겨울을 보낸 노인들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들은 부족 전체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대개는 젊은 여자들이 그들을 보살피는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다른 노인들을 보살폈고, 그들에게 공동부양은 당연한 의무이나 책임이었느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자신의 몫은 해내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기아와 추위와 이동은 사람들로부터 온정을 앗아가는 대신 실리적인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족 전체의 손해일 뿐 결코 인력이나 노동력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사와 칙디야크는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그나마 그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빼앗지 않는 것, 그들을 직접 죽이지 않는 것(과연 이쪽이 더 잔인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이 부족과 족장이 베풀 수 있는 남은 정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당연히도 사와 칙디야크에겐 큰 슬픔과 두려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 거동도 쉽지 않은 이들을 놓고 떠나는 것은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가족이 없는 사와 다르게 칙디야크에겐 딸과 손자까지 있었으나 그들 역시 집단을 등지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곁에 서지 못한다.

 

이제 부족은 떠났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 사와 칙디야크에겐 무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복수심이나 반골기질, 아니면 차라리 치기에 가까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존을 향한 투지가 사와 칙디야크에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의지가 솟아났다. 게다가 그들은 둘이었다. 비록 상대도 나만큼이나 지치고 낡고 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 보다야 나을 터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죽자고.”

 

그들은 남은 짐을 꾸려 여정을 떠난다. 자신의 부족과 마주치지 않도록, 또 다른 포식자 즉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아. 그 곳은 어릴 때 그들(정확히는 그들의 부족)이 살던 곳이었다. 자신들처럼 늙은 이가 그 곳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그 곳이 그들 기억에서와 일치하다면, 고향은 안식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 일념으로 얼어붙은 강 위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무릎과 다리를 이용해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칙디야크는 몸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이 사의 미소 짓는 얼굴을 비추었다. 사는 자부심에 찬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수없이 했던 일이지만, 내가 또다시 해낼 줄은 몰랐어.”

 

칙디야크는 오랫동안 친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죽음은 반드시 닥쳐올 터였다. 그녀는 자신들 두 사람이 과연 이 엄혹한 계절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목소리 속에 깃든 열정이 그녀의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해주었다.(중략) 그러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힘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끼며 사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두 여인은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러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사는 오랫동안 사냥을 한 적이 없었고 오랜 시간 더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여겨왔기에 먹잇감을 발견하고 집중을 해 정확한 위치를 겨냥해 손도끼를 던져 해낸 첫 번째 성공은 의미가 깊었다. 비록 작은 다람쥐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이 어쩌면더 큰 사냥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존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노마지도老馬知途라고 하던가. 마침내 터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고 땔감을 주워 불을 피우면서 그녀들은 오래 전 가졌던, 이제는 잊혔다고 생각했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한다. 낮에는 사냥을 하거나 덫을 설치하는데 전념하고 밤에는 옷가지나 담요를 만들었다. 행동에 패턴이 생기고 몇 가지 요령과 기술이 붙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이동을 하고 사냥을 하고 심지어 식량을 비축하기까지 한다. 가끔씩 치받는 두려움과 설움을 묻어두고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최대한 깊게 잠을 자던 그들은 점차 서로를 좀 더 깊이 알아가며 지난 날을 떠올린다. 

 

그들의 부족은 이런 한가한 대화에 귀중한 시간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여인은 긴 저녁나절 동안 예외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상대의 힘겨운 과거에 대해 알게 되자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커져갔다.


사실 사와 칙디야크 모두 같이 지내기에 썩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둘은 불평이 많았고 쓸모없는 잡담을 하길 좋아하고 자신들의 나약함을 과시하거나 동정받으려는 태도를 취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지팡이는 커녕 사냥을 하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영민하다. 게다가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처럼 늙고 보잘 것 없고 성가신 상대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꽤 오랜 시절을 함께 했음에도 말이다. 사와 칙디야크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종종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삶과 그들이 어릴 적 보고 듣고 느꼈던 것, 한 때는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등. 대화를 나눌수록 사와 칙디야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연민하게 되고 지난 시절 자신들이 얼마나 짜증나는 사람들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두 늙은 여자』의 재밌는 점은 이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인디언의 지혜'라는 교훈으로 묶이는 결코 훈훈한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와 칙디야크는 버려졌고 부족들은 그들을 버렸고 심지어 버림받은 이들의 태도 역시 끈기 있고 현명한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인디언'이란 이름 하에 무작정 현자가 들려주는 훈화로 묶이지는 않되 그녀들이 절망하고 희망을 갖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반면교사를 통한 성장 이야기라고 할까. 사와 칙디야크는 힘이 없고 나약하고 의지 또한 없었지만 오히려 버려졌기에 자신들의 삶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 스스로가 강하고 현명하고 부지런하며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는 기세를 몰아 큰사슴을 쫓아갔다. 그녀는 젊은 때처럼 힘차게 달릴 수 없었다. 달리기라기보다는 절뚝거리는 경보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커다란 짐승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중략) 그녀는 자신이 그 큰사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즈음 그들은 살아남은 자신의 부족민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살아남은 노인들을 보며 경탄을 하며 용서를 구한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전히 배신감과 복수심을 잊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고 또한 딸과 손자가 보고 싶었기에 그들을 용서한다. 대신 자신들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립적인 객체로서 그들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가 떠올랐다. 버림받은 이가 대륙을 횡단하며 이동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살을 에는 추위와 배신감이라는 감정과 결국엔 수천 킬로를 가로질러 생존했다는 이력도 그렇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마지막에는 사와 칙디야크가 실제로 이동한 경로가 지도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독하디 독한 겨울동안 일흔 다섯, 여든의 노인이 이러한 길을 이동하며 생존했다는 사실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레버넌트>의 실제 인물인 휴 글래스도 4,000km를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등을 다친 후에, 기어서 말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인간이란 때론 또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가 깨닫는다(예를 들어 휴 글래스가 결국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점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이 글의 초반에 썼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두 늙은 여자』는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이 맞다. 책 띠지에도 써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옳다, 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성장소설이자 지혜로운 삶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예감은 틀린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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