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 -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보면, 집중하는 것이 그저 가만히 깊게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 호흡의 밸런스가 잡혀 있지 않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전업 작가로서 소설을 계속 써나가기 어렵다. 호흡을 멈추었다 이었다 하면서도 계속할 것.


아무튼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나 스스로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다음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올 소설이 어떤 것이 될지 기다리는 그것이 낙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끌어안은 한 사람의 작가로서, 모순투성이의 불분명한 인생의 길을 더듬어가면서 그래도 아직 그러한 마음을 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시 하나의 성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다소 과장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만약 매일 달리는 것이 그 같은 성취를 조금이라도 보조해주었다고 한다면, 나는 달리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만약 자기가 쓴 초고를 봤는데 토할 것 같다면 그건 소설가의 일거리, 즉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건 뱃살이 생기거나 방이 더러워지는 일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우리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뱃살이 나왔다고 난 원래 배불뚝이로 태어난 것이라며 절규하거나, 방이 더러워졌다고 왜 나는 사는 방마다 더러워지느냐고 좌절하는 사람만큼이나 이상한 게 처음 쓴 문장이 엉망이라고 재능을 한탄하는 사람들이다. 단번에 명작을 쓰고 싶다면, 시간이 갈수록 방이 깨끗해지는 우주에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머릿속에 쓰든 흙바닥에 쓰든 노트에 쓰든, 자신이 소설을 쓴 것인지 그냥 생각만 한 것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한심한 내용일지라도 글자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소설을 쓴 것이고, 제아무리 멋진 이야기라도 헤아릴 글자가 없다면 소설을 쓴 게 아니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작가가 된 순간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이 사실은 글쓰기의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를 유추하게 한다. 소설이 일기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괴롭거나 억울하거나 부끄럽거나 참단한 것들이 일기에 적힌다. 사랑하고 있는 동안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롭거나 사랑을 잃고 슬퍼지면 일기를 쓴다. 이것은 일기 쓰기가 곧 나름대로의 견디기의 처세, 치유의 방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시 소설 역시 그것을 쓴 작가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 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이길 힘을 얻는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그 힘을 얻는다.


독자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 자전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국민 평균 독서량이나 독서 시장의 파이를 보면 부인하기 어렵다(누구보다 내 자신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 그러나 문장의 활용 빈도나 가독성 면에선 조금 다른 것 같다. 이메일, 블로그, 리뷰, 소셜네트워크, 동호회나 커뮤니티 등등을 한 가지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며 심지어 주된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 역시 수없이 많다(실질문맹률, 그러니까 문장독해의 능력이나 문장력 자체에 대해서는 제외한 빈도와 의존도 면을 따져보자면 말이다). 와중에 개인블로그를 운영하거나 웹소설, 2차 창작 등을 쓰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현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지를 알 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이 읽고 쓰며 문자를 활용해 소통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인쇄매체나 책을 대하는 비율이 줄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글과 문자와 독해를 많이 활용하며 더불어 창작, 문장력에 대한 의지나 열망 역시 못지 않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2. 발췌해온 작가들의 이름을 듣거나 소설 작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쓰는 나 자신도 약간 주눅이 들긴 한다. 무려 무라카미 하루키, 김연수, 이승우의 글을 발췌해왔으니 말이다. ...와중에 스티븐 킹의 작법서를 현재 소장 중이지 않아 빠진 것이 아쉬우면서도 그나마도 다행이다). 작가들이 공통으로 말하길 독자는 작가만큼 중요한 소통의 상대이며 이승우 작가가 쓴 것처럼 글을 쓰는 우리는 실질적으로 모두 작가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관점이지만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3. 한 번도 글쓰기를 업으로 삼거나 밥벌이를 해보려는 뜻을 품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언제나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아주 강렬하게 소망해왔다. 어떤 이의 글을 보며 이게 내가 쓴 글이길 바란 적 있고 훔치고 싶은 문장이라고 뜨거운 마음을 품기도 했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페이퍼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지금보다 많이 어릴 적, 좀 더 거칠고 뜨겁던 때에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메피스토텔레스는 내게 제안을 해오지 않았고 루시퍼마저도 나를 찾지 않았다. 게다가 글쓰기란 생각처럼 오롯한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 전에는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생각했냐면 놀랍게도 '그렇다', 일종의 생활력이 거세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였다).


4. 제임스 미치너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글쓰기란 고된 노동'이라고 썼고 야마다 에이미는 초고에서 한 문장도 고치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온다 리쿠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고 했으며 김연수는 초고란 응당 토할 것 같이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늘 같은 시간에 일정하게 앉아있는 레이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고 심지어 -어쩐지- 일필휘지로 갈겨 쓸 것 같은 헤밍웨이마저 무더위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날씨에 몇 시간이고 꼼짝않고 서서 소설을 완성했고 전해진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는 이것을 관통하는 말이 한 마디로 나온다. "영감을 찾는 자는 아마추어다.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5. 그러나 근본적으로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선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능. 재능에 대해 생각나는 건 늘 이 두 가지다. 하나는 김연아의 이야기. 피겨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 무슨 기술인가 단계인가를 연습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 달이 걸려도 할까 말까한 그것을 김연아는 일 주일이 채 못 된 시간 안에 해냈다고 한다. 아직 어렸던 그녀는 "그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건줄 몰랐다"비슷한 말을 했다는데 그건 오만이 아니었다. 재능이었다. 남들이 한 달 걸려 할 것을 일 주일 만에 하는 것. 더 빨리 혹은 더 눈부시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는 것. 그게 재능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발견한 글귀다. 재능은 연습이라는 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에게서 어떤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눈이 빠질 정도로 몰두하기 마련이다. 들어주는 (또는 읽어주는,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밖에만 나가면 용감하게 공연을 펼친다. 창조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환희라고 해도 좋다. 


6. 그렇다고 남들보다 앞서는 것과 창조의 기쁨만이 재능을 완성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그것을 유지하고 지속하고 더 나은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인내하고 제련하며 몰두할 수 있는 것. 인내심과 끈기와 참을성과 지속력, 지치지 않은 흥미와 애정 모두가 어쩌면 재능, 그 이상의 조건이 될 것이다. 글쓰기도 비슷하다. 문장 강화를 읽고 작법서를 읽고 내러티브 짜는 법, 시나리오 쓰는 법을 읽는다 해도 닿을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고 명작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을 모두 깨버리고도 최고의 위치에 도달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좋은 지적이 있다(사실 이 의식의 흐름에 의한 글은 실은 그 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글쓰기는 서열이나 순위가 없는 제로섬 사회가 아니라는 것. 베스트셀러를 많이 보유한 작가와 스테디셀러가 있으며 특정 상의 수상자가 있지만 그것이 꼭 글쓰기의 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예컨대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독자가 있고 피츠제럴드를 선호하는 독자가 있고 혹은 둘 다를 좋아하거나 둘이 아닌 다른 작가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때문에 한 명의 꾸준한 독자가 수 십 명의 작가보다 실은 더 중요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은 신선하며 동의가 간다). 글쓰기의 세계는 그런 곳이기에 서로를 경쟁하기보단 격려할 수 밖에 없다는 말까지도. 


8. 이제는 알고 있다. 악마에게 내 영혼 따위는 의미도,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다는 위악이나 과장, 쓸모없는 말은 하지도 않는다. 엄청난 글을 쓰고 싶었던 적도,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 믿지 않는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염원이나 소망,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저 범인凡人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글쓰기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주목받는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좀 더 나은 문장, 하나라도 내 자신이 인정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잠깐이라도 닿을 수 있는 문장을 쓸 수 있길 바라고 쓰고 고치는 것 밖엔 없다. 고맙게도 자리매김되지 않고 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배척하지 않는 필드에서 쓰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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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0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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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6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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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1.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

2. 소설이냐 에세이냐.


첫 번째 질문은 무난한, 그러니까 여느 소설가나 작가에게도 하게 되는 물음이라 보편적이지만 두 번째 질문은 이례적인 편이다. 소설만큼 에세이 역시 유명한 작가는 그리 많진 않은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해 내 경우엔 늘 몇 개의 소설과 대부분의 에세이라고 답했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후에야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에세이인 것 같다. 이유는 더 명확하다. 이 책에서 쓴 작가 본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작가로서의 서랍(소재를 넣어둔 일종의 마인드팰리스)은 호불호가 있지만 에세이로서의 서랍은 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책을 읽으면서 아, 말을 잘 하는 작가구나, 그래서 에세이는 더 설득력 있게 읽혔구나, 를 깨닫는다.


글을 읽고 말솜씨를 짐작한다니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의 '말솜씨'는 실제로의 말재간과는 무관하다. 타입이나 유형이라고 해도 좋다. 직관적으로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게끔 쓰는 작가들이 있는데 대개는 그들이 쓴 에세이는 소설만큼 때로는 -칭찬인지 불운인지- 소설 이상으로 재미있다.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거나, 강연을 할 때와 비슷한 일상적인 어휘를 쓰면서도 논리적으로 기승전결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도(즉, 서면을 통하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게다가 균형감각이 무척 좋아서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흐트러짐 없이 표현하는데에도 그게 아집이나 완고함이라기보단 명확함, 명징함 등으로 느껴지게도 한다. 자신의 주장은 이러하며 생각은 이러하지만 세상에는 나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신의 방법을 찾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궁금하다면 공개할 나의 방법은 이런 것입니다. 대개는 이런 어조다. 생각해보면 늘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십 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인 소설가로 활약하고, 혹은 살아 남아서 각자 일정한 수의 독자를 획득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뭔가 남다르게 강한 핵core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drive,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이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자질이자 자격이라고 딱 잘라 말해버려고 무방할 것입니다.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나는 누군가에게서 비판을 받을 때마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흔한 반발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설령 네거티브라고 해도 분명한 반응을 이끌어내는게 더 좋을 것이다, 라고.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안된다 싶더라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원래가 발췌를 귀찮아하는데다 이 책에서 발췌를 하려거든 책 하나를 필사하는게 나을만큼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많았지만 몇 개만 슬쩍 옮겨본다. 아마 이 전에 작가의 에세이를 읽은 사람에게는 약간 동어반복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나만 해도 몇몇 챕터는 그렇게 느껴졌지만 거기에 약간 보완 된 부분들이 꽤 재미있고 의미있다.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유의미한 정보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작가가 되고싶은, 소설가를 꿈꾸는, 그게 아니라도 글로 창작을 하거나 더 나은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에게 특히 유용한 정보가 많이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처음이 아니라 유지를 하는게 어렵다는 사실, 자신은 규칙적인 생활로 늘 정해진만큼 글을 쓴다는 것, 자신의 내부에서 글감을 찾아야 오래 견디고 덜 지루해진다는 생각과 자신의 '번역투' 문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와 어째서 문학상 심사위원은 하지 않는지, 나아가 상이란 무슨 의미인지 등등. 어찌됐거나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독자라는 말과 더불어 나를 계속 찾고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고 그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 꾸준히 글을 써 그들을 만나는 것이 자신이 해야할 가장 큰 업이라는 말에는 묘한 감동이 느껴진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행위가 누군가의 창의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나 질투,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독자 한 명이 작가 한 명만큼이나 큰 창구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무라마키 하루키라는 소설가, 도 아니고 소설가라는 직업, 도 아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라니 제목이 재밌다는 생각을 했는데 끝까지 읽고나면 그야말로 맞춤인 제목같다. 이 책은 소설가라는 직업의 고단함에 대해 투정을 털어놓는게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소설이 업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발표하는 -사실상- 작법서에 가깝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을 쓰는 분들, 창작자가 되려는 분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분들이 읽는다면 분명 한 가지 이상은 유의미할 정보, 혹은 다시 생각해볼만한 이색적인 발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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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희망 2017-02-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끼의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이 단편입니다.
고백하자면 장편은 읽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장편들도 읽고닢어졌구요 또 이젠 그를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Shining 2017-02-17 17:37   좋아요 0 | URL
전 몇 개의 소설과 대개의 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에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글쓰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더불어 이 책은 작가 본인의 매력 뿐 아니라 글쓰는 행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줘서 제겐 유용하고 의미있는 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

희선 2017-02-17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쓰기 힘들어서 괴로웠던 적이 없었다고도 하죠 쓰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루키는 쓰고 싶을 때 쓴다고 했군요 쓰려고 준비를 먼저 하고 꾸준히 쓰겠습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산문도 쓰고 번역도 하는군요 소설만 쓰지 않고 다른 걸 해서 기분을 바꾸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다른 데서 했군요 어딘가에 떠나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소설가는 다음 책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도 하죠 그게 얼마 없다 해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쓸지... 아니 그것보다 자신이 쓰고 싶어서 쓰는 게 더 좋겠네요 작가한테 자기 책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힘이 되겠습니다 거기에 부담을 가지지 않는 게 좋겠군요


희선

Shining 2017-02-17 17:41   좋아요 1 | URL
그렇다고 하네요. 솔직히 좀 놀라워요. 즐겁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 쓸 수 없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엔 애정보단 애증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이 분은 그렇게 말하시는군요(흐음). 그때 쓴 글이 이 글에도 똑같이 포함되었는지 아니면 생각이 변하지 않았는지 희선님이 기억하신 부분과 완전히 같군요. 여전히 재밌고 즐거우며 쓰고 싶고 다른 일과 함께 쓰되 병행하진 않는다. 아예 소재 창고 같은게 다르다고 말하더라구요.

글쓰기를 통해 부수적으로 타인에게 위안이나 연민, 정보나 지식을 줄 순 있지만 근본적으로 글쓰기란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괴롭고도 즐겁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창작 행위를 왜 하겠냔 말이죠(웃음). 자괴감을 갖는 날에는 이 사람은 무려 창작을 하는데 나는 소비밖에 못하지, 하고 주눅들기도 하지만 하루키는 바로 그 독자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라고 하니 왠지 다행스럽기도 하네요 :)

2017-02-18 1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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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9 0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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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도 질 거라고 생각했다. 싸우면서도 승리를 가늠하거나 확신하진 않았다. 속으로는 늘 그랬다. 나는 어쩌면 비관주의나 현실주의자를 가장한 비겁자였다. 질 때 지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이미 질리도록 얻어맞고 지기만 했던 경험이 이 슬픈 승리에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득하다. 다행스러운 한편 암담하고 기쁘기는 한데 조금 슬프기도 하다. 


지금 떠오르는 영상은 이 두 개다. 영화로서 <레 미제라블>을 높게 평가하지 않지만 이 장면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주룩주룩 울었다. 좀처럼 울지 않아서 눈물샘이 메말랐다는 소리를 듣는 내가 떠오를 때마다, 들을 때마다 울컥하는 장면이자 노래다. 그리고 아래는 <킹스맨>의 강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절대 절대 클릭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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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5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6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 : How do you speak such good English?

J : Me? I'm American.

C : You're American? Are you sure?

J : Yeah.

C : No, I'm joking. I knew you were American. And you don't speak any other language, right?

J : Yeah, yeah. I get it, I get it. I'm the crude, dumb, vulgar American...who doesn't speak other languages, who has no culture. But I tried.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영어로 길을 물어올 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누구는 영어를 못해서 '부끄럽다고' 했고 누구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은 이유는 내가 영어권 사람이 아니니 당연하다는 사람도 있고 그러나 어쨌건 기초교육과정에 포함된 영어를 최소 6년 이상 배웠음에도 잘 못한다는게 부끄럽다고 답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요즘 들어 누군가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영어로 묻냐고 반문했다. 적어도 한국어로 길을 물어보려는 노력을 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구글 번역기라도 돌리거나 정 그렇다면 '혹시' 영어 하실 줄 아냐고 먼저 묻는게 예의가 아니냐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외국을 나간다면 미리 몇개 정도는 외워가거나 제3의 언어가 어렵다면 영어라도 외워가지 않냐고. 미국인 혹은 영어권 사람들의 교만함에 대해 꼬집는 이도 있었다. 모든 이의 생각을 들으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지막 의문에 대해선 최근까지 생각해본바 없는지라 조금 놀랐다.


시카고컵스의 우승을 두고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쟤네는 자기가 보는 연말시상식이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상 중 하나가 되고 자기네 나라 우승 소식이 전세계에 퍼지고 본인 나라에서 셀레브리티면 전세계의 유명인이고 미국 대선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구나. 좋다 나쁘다 혹은 어떤 부러움이나 질투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괴감 비슷하달까 씁쓸한 뉘앙스였다. 


세계 전반에 점점 혐오와 경멸과 배척의 감정은 도드라지고 강해지는데다 브렉시트 때도 그랬지만 특히 이번 미국 대선을 계기로 백인우월주의와 선민의식,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자들이 숨겨온 위선의 일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을 본 기분이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혐오와 배척이 기저에 깔려있음을 배제하기 어려웠고 결과 자체보다 충격적인 건 여론조사와의 간극과 성별과 인종, 학력 별 출구조사였다). 당분간 제1세계 백인남성의 시각을 문화 컨텐츠 자체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 아, 캡틴 아메리카를 위시한 마블(로 대변되는, '여러분, 걱정마세요! 미국이 있잖아요!' 라던가 세계는 우리가 지킨다는 식의 히어로물)과 스타트렉과 찰스 자비에 교수는 이상에 불과했다(하긴, 난 늘 매그니토가 더 좋았지). 내가 불행할 때 남이 행복하면 생각보다 배아픈 일이지만 내가 불행할 때 남까지 함께 불행해지면 그것도 참 뭣같은 일인데. 세상 따윈 싸그리 다 그냥 망해버렸으면 하는 요즘이다. 사는 게 참 춥다.



덧) 맨 위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다. 난 늘 누군가가 '미국인'이라고 할 때마다 왠지 저 대화가 떠오른다(+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아 덧붙인다. 미국인에 대해서 내가 갖는 이미지나 실제가 위와 같다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라 '미국인'에 대한 유럽인, 혹은 프랑스인의 셀린느의 은근한 태도와 '네, 네, 맞아요, 미국인들은 그렇죠' 라는 냉소 섞인 말이 미국인인 제시, 또는 이단 호크나 리처드 링클레이터에게서 나왔다는게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쓰고 싶었다). 참고로 영화는 1995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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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 오랜만에 10시가 넘은 시간 걸어서 집에 들어왔다. 자뭇 차가워지는 가을냄새가 섞인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러고보니 이 시간에 걷는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샌 가능한 한 일찍 집에 들어가려 하고 밤늦게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하며 밤산책은 커녕 밤에 이동하지 않는다. 세상이 무섭고 치안이 두렵고 혹여 내게 발생할 수 있는 불행에 대해 오롯이 결점을 제거하고 싶은 입장에서였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어떤 남자들은 이게 오버하는 거라고 한다. 당신이 여자여서 이 미묘한 두려움과 불쾌함을 느껴본 적 없을텐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문득 밤의 냄새, 밤의 정취, 일테면 밤의 정서 같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으며 서글퍼졌다.


2. 나는 낙관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낙관적인 세계란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에다 뭔가를 믿는다는 걸 결벽적으로 두려워한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곧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인터뷰, 일화, 필모그래피 정도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인터넷의 힘을 빌어 이 작은 휴대폰으로도 오늘 누가 어디서 촬영을 했고 누구를 만났으며 누구와 사귀고 얼마나 서로를 깎아내리며 이혼을 하고 음주운전을 했고 과거에 애인을 폭행했다는 것을 소상히 알 수 있던 때부터 늘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연예인의 예를 들어보자면)공적 커리어와 사생활을 어떻게 분리되어야 하는가. 그러다 몇 년이 지나서 겨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하나.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며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거나 한 배우를 평하는데에 있어서 사적영역을 끌어와선 안 된다. 즉 사생활이 개차반인게 밝혀진 배우라 해도 작품 안에서 역할에 충실했다면 소급해서 비난할 수 없다. 둘. 그러나 이것은 나의 판단 영역이지 배우 혹은 그 개인이 불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저분하게 바람펴서 이혼해놓고 한 사람만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역할에 안 어울린다고 혹평받았을 때, 배우가 나서서 사생활과 연기를 분리해달라고 애원할 순 없는 듯 싶다. 셋. 누구를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든 건 이 세번째다. 사람인 이상, 누군가에게 더 호감이 가고 호감이 호의를 형성하는건 지극히 당연한 과정인데. 애정이나 믿음이 맹신으로 변질되며 결국엔 맹목이 되는 일들이 내겐 본능적인 애정의 형태보다 더 두려웠다. 누구에게도 실망하지 않고 실망했을 때 나도 몰랐던 기대를 발견하지 않도록. 누구도 안다고 믿거나 좋은 사람이라거나 옳은 의견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최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건이 터진 직후에도 그랬다. 사건의 과정과 수사를 접하고선 또 다시 어쩔 수 없는 환멸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몰랐을거라 무작정 감싸는 맹종파와 그도 이용당했으리라는 연민파와 그럴줄 알았다는 예언자들과 그렇다면 여태껏 해온 환경운동이 모두 의심스럽다는 논리적인 주장 등등을 바라보며 아, 그저, 정말, 짜증이 났고 화가 났고 그러다 결국 조금 슬펐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서 누구도 함부로 믿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되뇌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누구도 믿지 않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아득하다.


3. 줄을 잇는 문단 및 예술계 성추행 또는 성폭행 폭로는 어땠는가. 피해자에게 토시 하나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고 아주 손쉽게, 구차한 변명과 구질구질한 자기연민에 가득찬 사과를 하는 저명한 인사라는 분들이 활동할 동안, 그런 식으로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사건들은 얼마나 있을 것이며 여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견디고 버티고 숨기며 내가 잘못한 거라고, 바뀌는 건 없다고, 내가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며 욕할지도 모른다고 자책하며 후회한 시간은 또 얼마나 길었을까. 또 한 번, 앞으로도 다시는 누구를 긍정하지 말자고 굳게 다짐할 수 밖에 없었다.


4. 작금의 사태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감상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진 않았는데 아, 정말 그러긴 싫었는데 화가 나고 화가 나고 화가 나다 어젯밤 잠을 자려다 말고 문득 조금 눈물이 났다. 이제 와 나마저 거짓말을 하진 말아야지. 그래, 이 나라를 사랑한 적도 소속감을 가진 적도 아낀 적도 없었다. 맞아, 그랬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곳이 '내' 나라, 일테면 조국 같은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결국 이 곳에 박붙여 살면서 나마저 나빠지진 말아야지, 이 곳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아끼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생각했었다. 헌데 아니었구나. 내 나라가 아니어서, 그래서 사랑할 수가 없었나 보다. 나에겐 나라가 없었다. 가졌던 적도 없었는데 뺏긴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뺏겨서 가진 적이 없었던 거구나. 참담했다.


5.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아침에 <닥터 스트레인지>를 봤다. 마블 페이즈4를 위해 꽤 애를 쓰는구나 싶으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티벳을 네팔로 바꾸고 동양에 대한 스트레오타입 시각과 비영어권 배우의 간편한 활용, 틸다 스윈튼을 캐스팅 한 화이트 워싱 논란, 그러면서도 중국 눈치는 볼 수 밖에 없는 영화 바깥이 생각이 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유사한 스토리의 영웅설화를 이미 몇 개를 떠올릴 수 있었고 2008년 <아이언맨> 플롯의 자가복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식은 실망스러웠다. 제 1세계 백인남성의 시각은 지긋지긋하다. 


6. 모든 걸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벌릴 입도 없는 것들이 이제껏 떠들어대고 있었던 셈이다. 


7.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긍정함으로써 믿지 않는다. 낙관의 세계는 없다. 


8. 무엇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데 어째서 계속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은 없었다. 어쩌면 바로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환멸과 혐오와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해 기어이 입이 없는 자들을 목도하며 살아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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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8 0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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