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휴 삼일간 집에 있기로 했다. 이틀 동안 밀린 영수증을 정리했고 패브릭 빨래며 대청소를 했다. 오늘은 필요한게 있어서 잠시 서점과 마트로 쇼핑을 갈 계획이다. 어쨌든간 어딘가로 '놀러' 또는 '휴가를 보내러' 멀리 나가지는 않았다.

 

5월에 제주도를 갔었다. 4박 5일의 일정 후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으며 생각했다. 아, 나는 여행을 정말 안 좋아하는 사람이 맞구나. 그리고 여행을 좋아하기 힘든 체질을 가졌구나(때문에 더더욱 안 좋아하게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우선 사람 많은 것과 시끄럽고 혼잡한 곳을 극도로 싫어하고 식사를 위해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에도 심드렁하다. 방향치에 길치다. 사진촬영에 흥미가 없다. 거기에 탈 것을 못 탄다(지하철과 기차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환경 변화에 대해 스트레스를 느끼고 즉홍적인 상황을 선호하지 않는다. 심지에 음식에 대한 모험심이 무척 적다(실은 비위가 약하다). ......이쯤 되면 사실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번만 해도 고작 국내인 제주도였는데도 가벼운 물갈이를 했고 이륙하는 짧은 시간동안 정신이 혼몽했고 우도로 가는 배를 타고 영혼이 빠져나갔다. 다섯 살인 조카는 탈 것을 무척 잘 타고 집의 형태인 펜션, 리조트, 호텔 등을 좋아해서 시종일관 무척 신나했는데 그 모습에 괜한 자괴감이 들기까지 했다.

 

옮겨다니는 것보단 한 곳에 북박이고 온전한 내 공간, 내 것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이다. 집순이로 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꽉 차서 바쁘고 마음은 충족되어서 얼굴이 반질반질해지니까. 거기에 외부세계에 대한 갈증이 신기할 정도로 적어서 특별히 아쉬운 마음은 없다. 애초 가치관이 이렇고 체질 또한 이러하니 장시간 비행하는 곳은 엄두를 못 내봤지만 내셔널갤러리나 모마 등에 걸린 그림들을 생각했을 때만 아주 잠깐 아깝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2. 그랬는데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너무 많은 기회나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비주얼 머천다이저Visual Merchandiser, 스스로는 상품가치연출 전문가라 부르는 직업을 갖고 있다. 어느날 문득 회의와 두려움과 도전의식을 갖고 남편과 상의 후 세계여행에 뛰어든다. 까지 쓰면 어느 여행기의 흔한 도입같지만 저자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녀는 세계의 각종 시장이나 상점 등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펴냈다. 어째서 국내의 전통시장은 점점 축소되는가. 왜 똑같이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도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즉,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들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가. 그런 물음의 답으로 쓰여진 책이다.

 

세계 각국의 전통시장과 상점의 독특한 배열방식, 정체성과 자부심 등을 그려낸 책은 외국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시장과 상점 투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은 참고 자료가 될 것 같다. 그게 아니라도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한 번씩 돌이켜볼만한 면이 있는 책이다. 개인적 감상보다는 전통적인 역사나 도시나 나라의 정체성과 관련한 이야기가 좀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고, 책의 기능적 면에 비해 사진이 적긴 하지만 어쨌거나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읽은 후에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내가 허용한 제한적인 경험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불편했지만 이러한 생각은 나를 더욱 유연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극장이나 음악회에 가는 것은 다른 장소에서 새롭고 낯선 경험을 하기 위함이다. 낯선 황경에 노출되어야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또 그 새로운 생각은 위기의 순간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도출시킨다. 그래서 나는 약속이 있을 때마다 늘 상대방에게 장소를 잡으라고 한다. 그래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갈 수 있으니까.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매일 보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행동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일 뿐 생각의 결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십 대라면 단골을 만들기보다는 늘 새로운 곳에 가보길 권한다. 같은 카페에 가더라도 어제 먹었던 것과 다른 것을 먹어 보라.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맛이 없더라도 그 경험으로 인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불행은 새로움을 낳는다. 창조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 일상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매일 다른 곳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머리 하고, 옷 사 입는 것이다.

 

바깥에 나가서 에너지를 얻기보단 집안에서, 내부에서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는 타입이라고 여겨왔고 '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자만 때문에 혹은 도무지 여행을 즐기지 못할만한 체질을 방패 삼아 내 자신을 너무 작게 정의하고 있는 건 아닌지, 누릴 수 있는 혹은 일정 부분은 누려야 하는 권리를 스스로 뺏고 있는건 아닌지, 즉 스스로가 기회를 차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 읽기는 여행의 즐거움과 감동을 두 배로 만들어 준다. 쿠아 아바나에서 읽은 <노인과 바다>, 뉴욕에서 읽은 <위대한 개츠비>,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는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책속에 들어와 있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장소와 날씨와 컨텐츠의 시너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 직접 그 장소로 가서 읽는 즐거움을 시도해볼 생각이 없었던 스스로에게 놀란다. 10월이 있는 세상은 아름답다는 빨간머리 앤의 캐나다 캐번디시의 햇살을 품어보려고 고려해보지 않는 것, 뉴욕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곳의 지도나 건물을 머릿속에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다해도 그 곳의 냄새는 맡을 수 없다는, 중동이 얼마나 더운 곳인지는 구글의 세계날씨를 입력하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그 곳의 낙타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그 후텁한 공기를 시도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영국의 비가 사람을 얼마나 후려치는지 그 속을 걸으며 우산살이 홀라당 벗겨지는 황당한 기분은 어떤건지. 아이슬란드에서 듣는 시규어 로스의 음악은 다를거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나는 시도나 고려조차 해보지 않은채 스스로 기회를 꺾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3. 같은 저자의 책을 한 권 더 읽었다. 사실 이 책이 순서상으로는 먼저였다. 위의 책에서 아쉬웠던 점들이 이 책에서 보완이 되는데 아마도 이 책의 요점이 저자의 정확한 전공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마케팅이나 경제심리학책에서 본 사례들이 이 책에는 촘촘이 박혀있다. 매대의 높이와 물건의 진열의 연관성이라던가 마트나 백화점의 동선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짜여진 이유와 오른쪽과 왼쪽에 배열하는 물건이 다른 이유와 색깔로 브랜드화를 하는 전략 등. 그 중에서도 이 책은 조금 더 현실적이고 특별한 게 이러한 법칙(?)들이 소비자나 학자의 눈이 아닌 영업자 내지는 소유주 입장에서 쓰였다는 사실이다. 위의 책에서도 살아남은 가게들의 생존전략을 분석했던 것처럼 이 책에도 기존의 성공한 가게 혹은 업체들이 어떤 식의 전략을 사용했는지를 알려주어 그것을 자신의 가게나 매장에 접목하도록 권장한다.

 

창업을 준비하거나 업체나 상점의 이미지 변화를 꾀하는 중이라거나 매출이 낮아 고민하는 자영업자라면 지나치지 않고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만약 내가 창업을 한다면 어떤 곳에 자리잡고 어떤 상품을 어떤 식으로 팔 것인지 괜히 생각해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때에도 매장의 위치나 창업시 여유자금, 전체적인 분위기와 인테리어 등은 고려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조명이나 출입문의 위치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때문에 아주 만약에라도 혹 가게를 열 때가 된다면 이 책이 정말 유용하겠구나 괜히 그런 생각도 해봤다.

 

아이러니한 건 막연하게 언젠가 창업을 하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가게를 빛나게 해서 손님을 속이고(!) 매출을 올려야지 생각해놓고는 그러나 나는 지금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쭈욱 소비자일테니 그래, 이런 전략을 쓰는 가게에 속지 말자고 동시에 이상한 다짐을 하고 있었다. 속일 생각과 속지 않을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는게 좀 웃기기도 하다.

 

 

4. 팡팡 털어 각을 세워 차곡차곡 패브릭을 접으며 내가 이런 순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는다. 좀 이따 나가게 될 외출에도 아주 약간은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도. 그러니 내 자신이 쉽게 변할거라고 믿지 않는다. 변화를 시도할만한, 변화의 가치를 느낄만한 당위가 있긴 하지만 '좀 전에 깨달은' 당위는 여태껏 살아온 습관과 체질, 현실과 타협하기엔 너무나 작고 약하니까. 좋아보이는 것들이 실은 다 그러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살아남은 시장과 상점에는 합당한 근거아 있었듯, 내가 여행을 즐길 수 없었던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모든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두루뭉술한 말을 실패나 무가치과 심지어 퇴보의 그럴듯한 핑계나 변명으로 삼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게된다. 정말로 충분히 시도해봤는지, 패배를 인정할 정도로 시도해본적은 있기나 한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연휴 마지막 날이다. 특별한 곳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많은 곳을 거쳐온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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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0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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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1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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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없는 완전한 삶
엘런 L. 워커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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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과에 정기검진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랑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는 내게 다짜고짜 "결혼하셨어요?"라고 묻기에 "아뇨."라고 답했다. 그 다음엔 "하실거죠?" 묻는데 치아와 결혼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해 멀뚱히 있자 "지금은 괜찮지만 출산을 앞두거나 수술을 하게 될 경우..."라고 하신다.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말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혹시 임신을 염두에 있다거나 출산을 예정하는 경우" 라고 말했다면 같은 말이라도 기분이 달랐을 것 같다. 결혼 적령기 안에 들어간 여자. 미혼. 사회의 통념상 '당연하다'는 가정을 하는 것까진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해도, 거기서 제가 비혼주의자라서요,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지만. 이건 좀 좋은 화법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그 사랑니는 한 해가 지난 지금도 멀쩡히 잘 쓰고 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두지 않아서 말이다.

 

1-2. 이 책을 읽다가 그 날 치과의사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아주 가끔 억울한 기분이 든다. 기혼인 사람, 결혼을 예정하거나 계획이 있는 사람, 자녀를 갖거나 낳은 사람에겐 "근데 결혼은 왜 하셨어요?"라거나 "어쩜 애기를 다 낳았어요?"라고 묻지 않는데. 반대의 경우엔 "왜 결혼을 안 하려구요?" 라던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봐야..."하는 말을 아무런 자각 없이 하는 무배려와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곤 하는지. 만약 전자인 질문을 해버리면... 말을 말자.

 

2. 한 친구는 지난 달에 아이를 낳았다. 최근 통화에서 친구는 아이가 벌써 고개를 돌리려고 한다거나 아빠를 닮은 것 같다거나 신랑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낸다. 그녀 인생의 엄청난 변화가 생겼으니 당연한 대화라고 생각해 그저 응응,그랬구나, 하며 말을 맞췄으나 전화를 끊은 후 문득 "근데 넌 어떻게 지내?"라는 식의 질문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음을 깨닫자 왠지 입이 썼다. 이해한다. 부럽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냥, 그저 이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친구는 결혼을 할 때 잃는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때 잃게 되더라는 또 다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3. A는 내게 어쩌면 너는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는 문제를 결심한 사람들에 대한 적지 않은 편견과 다르게- 책임감이 없는게 아니라 반대로 책임감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남들도 다 사는데, 애 키우는게 별거야, 그렇게 힘들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해내겠어, 난 좋은 사람이고 남편도 그러니까, 라는 불성실한 확신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거라고. 하긴, 엄마도 내게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 너보다 한참 부족한 사람들도 다 해내는 걸 왜 못할거라고 생각하냐고.

 

3-1.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거라 이야기해봐도 엄마는 -그저 딸을 배려해 말을 안 하는 것도 같다- 여전히 일말의 의구심과 측은함을 조금씩 안고 계신다. 그래서 요새 가끔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형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니는 결혼을 했고 형부는 처가 식구들과 가깝고 제법 잘 지낸다. 아이도 둘 있다. 남동생도 아마 결혼을 할 테니까. 나쁜 의도라는건 알지만 어쨌건 부모님에게 나 말고도 손주와 사위와 며느리라는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만들 자식이 있다는 건 아주 가끔 다행이다(물론 이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아주 이기적인 태도다).

 

4.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안에 있다. 저자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확고한 결심을 했지만 그 결심이 흔들리고 다시 잡히는 과정에서 혼란과 우울감을 느꼈다. 그 후 자식이 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책이 너무 적고 정보가 얕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과 주변을 시작으로 해 사례를 모으고 책을 썼다. 저자가 말하는 아이가 없는 삶childfree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아이를 원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던 이들도 있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주장을 확립한 사람들도 있다. 그 경우의 수를 분류하고 아이가 없는 삶이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들은 육아 대신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왜 현재의 삶을 살게 되었고, 사회는 그들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있고 그 편견은 또 옳거나 그른지에 대해 썼다. 

 

4-1.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파트에선 동의할만한 고민의 흔적이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 유전적으로 희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점이 되면, 그 점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사회와 주변이 압박하는 이상화된 가정과 육아에 대한 환상에 대한 토로. 특히 부모가 된다는 점을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고 성숙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자격처럼 권장하는 탓에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신이 대단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거나, 성장하긴 커녕 퇴화하거나,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스트레스에 대해서 동의한다.

 

4-2. 그리고 <아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아이 없는 사람들이 마주해야 할 문제>파트는 앞으로 고민해볼만한 것들, 살면서 접할만한 고민에 대해 쓰여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파트너를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비주류로 살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이가 없기에 받는 차별이나 아이가 없기에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라는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부당함, 혼자가 된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예컨대 이런 부분들에 공감이 갔다.

 

우리 사회에서는 세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녀를 가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자녀 없이 사는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일부 부모들은 자녀를 낳은 일을 후회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중략) 제퍼스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아픈 반려동물을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내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비롯해 가족 중심의 대다수 공동체에서는 비웃음을 살 뿐이다. 최근에 아이가 없는 없는 내담자 하나가 전화를 걸어와 아픈 고양이를 돌봐줘야 한다면서 상담 약속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 반려견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약속을 취소할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비서들 중 아이 엄마인 사람이 어이없다는듯 말했다. “세상에, 고양이가 아파서 약속을 취소하겠다니, 이게 말이 되나요?”

 

다른 사람을 보살피길 좋아하고 여성스럽다는 것이 자녀를 가진 사람만의 특성일 수는 없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들 중 대다수가 자신을 친구들과 가족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런 자질을 가졌다 해서 꼭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싶어하진 않는다. 여성들을 아이와 관련짓는 것은 사회적 기대의 한 예라고 봐야 한다.

 

린다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관심의 초점이 ‘자신의 목표’에서 ‘무엇이 아기에게 최선인가’로 옮겨갔다. 그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일뿐더러 린다와 린다의 아들에게 필요한 변화임을 알면서도, 나는 기운이 쭉 빠졌다.

 

5.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부분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나는 조카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일반적인 이모의 의미보다 훨씬- 이 되어있었다. 작은 조카는 엄마보다 내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의 생체 시계는 아이의 아빠보다 내가 더 정확히 안다. 큰 아이는 엄마랑 아빠가 놀아주는 것보다 나랑 노는게 더 재밌다고 몰래 귀엣말을 한다. 나 역시 내 어디에 이런 말랑한 마음이, 이런 애틋한 마음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를 애정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 때마다, 아이에 가까운 삶을 사는만큼 나에겐 육아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다. 내가 얼마나 나쁜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이를 위해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도 해야 할 삶을 선택하기엔 내가 얼마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나와 같은 사람을 엄마로 둔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내가 엄마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런 각오나 기대나 다짐이 내 안에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나왔듯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식이다.

 

5-1. 게다가 아이들이 워낙 가까이 있고 육아를 함께 나누느라 아이가 없는 삶에 대해서도 본의 아니게 체험해보기도 한다. 비용과 시간, 노력과 여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제적인 기회비용을 생각해보게 되고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 변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형태와 그들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내가 갖게 될 장점과 단점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카는 자식과 다르지"라던가 "조카가 아무리 가깝고 예뻐봐야 자식만큼" 또는 "자식 낳으면 또 다르다."는 조언을 가장한 참견은 그만 받고 싶다. "안 낳아봐서 그래."까진 그렇다치지만 "출산도 육아도 안 해본 사람이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거둬주길 바라고 있다.

 

6. 사례 위주로 진행되는 책이기에 깊은 통찰력 같은 건 없다. 글이 하나로 모이기보단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데다 대부분이 여자의 관점이라는 것도 약간은 아쉽다. 아마 저자가 여자고 그가 주로 접하는 주변인이나 내담자, 무엇보다 출산의 직접적인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렇다면 남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나 고민을 갖고있는지 알 수 없는 건 역시 아쉬운 문제고 꼬아 생각하자면'아이없는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주로 여자에게 쏠려있다는 것도 씁쓸한 일이다.

 

6-1.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여러 사람의 삶과 그들의 역사와 가치관에 대해 듣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저자가 머리말에 썼듯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출판되는 현실에서 아이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 책의 의미인 것 같다. 

 

6-2. 결혼을 하고 아이에 대한 계획이 있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들은 다른 책들을 읽느라 바빠 굳이 아이 없는 삶에 대해서까지 읽어볼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다(비꼬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이미 고민을 하고 선택을 했을테니까. 만약 나였어도 그럴 것 같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망설임이나 경우의 수를 상대적으로 적게 가정한다는데 비해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망설이고 가정해본다. 대개의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덧) 인구증가의 면이나 환경오염의 문제 등에서 아이 있는 삶이 사회를 더 위태하게 나쁘게 만드는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놀라웠다. 여태껏 이런 관점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소비나 생산의 구조에서 봤을 땐 오히려 다자녀가정에 혜택을 주는게 합리적이지 않나 -정작 나 자신은 비혼을 지지하면서도- 생각해왔던 터라 내 자신이 사회에 세뇌가 된 건지, 미국과 한국은 인구에 대한 태도가 다른가(한국은 출산률 저하로 국내 인구 감소와 노령화를 걱정하는 터라),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당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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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3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7-01-05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ㅎ ㅎ ~ 저도 그 경험자 입니다.
사랑니 와 치과. 임신과 출산 이 뼈 마디에 미치는 영향을 몸으로 겪었습니다. ^^ 공감하고 갑니다.
 

 

 

설잠에 드는 순간 그 문단이 떠올랐다. 어렴풋한 느낌과 그 글귀를 읽는 순간의 전율과 아찔함, 그 날의 날씨와 입었던 옷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문단은 약간 흐릿했다. '그 문단'은 이것이었다.

 

그런 아내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마치 그녀가 믿고 기도하는 대상인 전능한 하나님이 그녀의 몸에 암세포를 집어넣고 키우라기도 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는, 자기 몸 속에 암세포를 집어놓고 키운 것이 분명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독한 항암제를 맞아 머리가 빠지고 거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 가는데도 아내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정효는 그런 하나님도 그런 아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추종자의 안전조차 보호해 주니 않는 전능자의 능력이란 게 대체 뭐냐고. 전능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 힘을 어디에 쓰려고 아껴두는 거냐고, 자기에 대한 믿음 하나로 사는 사람의 생명조차 보호해 주지 못하는 신을 왜 믿어야 하느냐고 윽박질렀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는 힘이 어떻게 쓰이며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내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답했다. 한정효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내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한 사람의 판단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정효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듣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독실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이런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서 무슨 뜻을 찾으란 말인가,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만 질러 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의 무반응과 침묵은 도에 지나치게 항변하는 그를 무안하게 했다. 그때는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의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징벌을 피하고 있었다.      - 이승우, 지상의 노래

 

오늘 낮, 뜨거운 볕 아래에서는 다짜고짜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났다. 아마도 『문』의 한 부분일거다.

 

불륜의 발각이 정통으로 그들의 미간으로 꽂혔을 때, 그들은 이미 도의적인 경련의 고통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창백한 이마를 솔직하게 앞으로 내밀고 불꽃과 비슷한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 무형의 쇠사슬에 묶인 채 서로 손을 잡고 어디까지라도 함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부모를 버렸다. 친척을 버렸다. 친구를 버렸다. 크게 보면 일반 사회를 버렸다. 어쩌면 그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쪽이 옳았다. 물론 학교로부터도 버림받았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퇴학한 것으로 하여 형식상 인간다운 흔적을 남겼다.            - 나쓰메 소세키, 문

          

그리고 지금, 갑자기 근거있는 불안과 이유없는 우울 속에서 필립 로스의 글을 떠올린다.

 

그는 형이 건강을 잃기를 바라는 원한 가득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지는 못했다. 질투를 한다지만 그 정도까지 가지는 못했다. 형이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자신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의 건강, 그의 젊음을 되찾아줄 수 없었고, 그의 재능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격앙된 상태에서는 하위의 건강 때문에 자신이 건강을 망쳤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교양 있는 사람답게 불평등과 불행의 수수께끼를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지만. 옛날에 정신분석가가 급성 맹장염 증상을 질투의 증상이라고 그럴싸하게 진단했을 때, 그는 여전히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때 찾아오는 느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질투하는 사람에게서 평온, 나아가서 심지어 현실적인 태도까지 빼앗아가는 감정 상태를 발견했다 - 하위가 생물로서 부여 받은 것이 자기 것이기도 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위을 미워했으니까.

갑자기 그는 원시적으로, 본능적으로 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이 그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글을 쓴다는 건 새삼 대단한 족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는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에 대한 감탄도. 자야하는데 잠이 오지 않아 들쑥날쑥 빈 책장 앞에 서성이며 여태까지 읽어온 책 중,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책 20권은 뽑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정도를 셀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라는 이상한 방식의 안도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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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여자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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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분을 느끼는 날이 있다. 남들은 아이를 낳고 결혼을 약속하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바로 전 날까지도 바쁘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열심히 걸어온 시간이었는데 대뜸 친구의 반가운 소식 앞에서 괜히 마음이 흐려졌다. 최선을 다해 아쉬워하고 반가워하며 축하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 깊은 마음, 좀 더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타인의 삶과 나의 것을 비교하지 말자고 늘 읊조려왔건만.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산을 등반하는 것을 보면서 아, 벌써 저기까지 가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며 샘을 내다니. 심지어 그건 내 길도 아니었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산도 아니었건만. 스스로를 꾸짖었고 친구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솔직히 말해 잠정적 비혼주의자를 결심한 나에게 결혼이나 출산은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찌됐던 그들이 사회적인 의미에서 주류에 합류한다는 것,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유하게 될테고 그 삶이 다수에게 인정받은, 설명이 필요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는 것, 그 태평함이 부러울 뿐이다. 아니, 요즈음엔 그보다도 더, 분기점을 지나고 일종의 이정표를 꽂는 것, 거칠게 표현하자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가시적인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이 부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대학, 취업, 결혼, 출산 등으로 삶이라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에 꽂을 수 있는 몇 개의 뚜렷한 깃발을 얻는 것. 자신이 성실하게, 나쁘지 않게, 혹은 평범하게 살아왔음에 안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상징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이 상처 입었을 때 새삼 깨닫게 된다.

 

주말에는 가능한 한 나 자신을 위해 보낸다. 할 수 있는만큼 게으름을 보내고 주중에 못본 영화를 보고 아침 일찍부터 빨래를 해서 널고 방청소를 하고 침대 위에 뒹굴거리며 책을 읽는다. 마스다 미리의 단순한 펜선, 일견 가벼운 이야기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가끔은 답변도 한다.

 

젊은 사람에게 ‘젊음’의 우월감을 안겨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젊었을 때 그렇게 대해주면 기뻤으니까. 누군가 젊음을 부러워해주는 건 기쁘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사실은 특별히 부럽지도 않지만 젊은 사람에 대한 서비스. 나는, 젊은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좋다.

 

자신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상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해왔던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세상살이의 능숙함과 뻔뻔함을 때로는 분리시키고 가끔은 낡고 무거워진 질문을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기도 한다. 아아, 어른이 되는 건 보기에 따라 더 강해지거나 때로는 더 무심해지는 일의 ‘결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선 ‘그게 나쁜 걸까? 나는 지금 나쁜 행동을 하는건가?’ 라고 묻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을 마스다 미리는 주지시킨다.

 

맞아,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주는 건 내 자신이 특별히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좋은 사람인 척 하고 싶지 않다. 좋은 사람이라는 오해도 받고 싶지 않다. 다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혹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노력마저 없애고 싶지 않거나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는 번거로울 만큼의 성실함을 잃지 않고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좋다. 일기도 계속 쓰지 못하고 복어도 먹지 못했지만 나라서 좋다. 나도 나쁘지 않다(문장을 잇기 위해 몇 개의 조사와 어미를 살짝 바꿨다). 몇 년 전 그 해의 마지막 날, 그런 일기를 썼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희망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나겠지. 겨우 나이거나 고작 나이거나 가쁘게 나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꿈꾸지 않는 것, 그게 나라는 비관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여전히 바보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때로는 철없는 생각을 곱씹고 아직도 누군가의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기엔 스스로가 부족할 때가 가끔 있지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 속 대사처럼 아마 그게 나란 사람일테지. 나이를 먹으면서 갖는 가장 큰, 버릴 수 없는 장점은 내 자신에 대해서 단 한 가지라도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사람은 많지만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단순하게 하는 사람은 몇 없다. 그러면서도 무례하거나 냉혹하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도 않다. 책을 덮으면서 좋은 친구,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그 드문 경우가 마스다 미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동지의식, 동료애, 어쩌면 그런 것들에 배가 부르다.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무 사심이나 불안감 없는 순도 백퍼센트의 진심이었다. 다만, 그 날은 아주 예쁜 옷과 귀걸이를 골라야겠다고, 드물게 높은 구두를 신어볼까 생각한다. 이렇게라도 나는 나도 아주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중으로 겉으로나마 조금은 증명하고 싶어한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속물이다. 뭐,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마스다 미리가 말했듯, 나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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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1 0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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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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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날이 있다. 아슬아슬한 테트리스 조각들처럼 그럭저럭 쌓아가던 인생이 사실은 그 밑바닥에 모래는 커녕 진흙탕 위에 세워진 것이란 것을 깨닫는 날이. 사실 내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자체는 괜찮았다. 그러나 내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밖으로 보이는 나와 현실의 나. 외부와 내부. 나는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없고, 전화로 병결을 통보한 적도 없으며, 숙취로 조퇴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내부의 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안팎의 부조화가 너무 컸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거나 혹은 3시가 넘도록 너무도 멀쩡한 불면의 밤을 헤매는게 지겨워졌을 때, 차라리 밖을 나가고 싶었으나 그 시간에 바깥을 걷는다는 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고 그 겨울은 객관적으로도 몹시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걷는 대신 한 두 잔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깊은 잠을 위해, 가끔은 잠들고 싶지 않아서. 기껏해야 맥주 한 두 캔, 많은 날은 소주 한 병이나 와인 한 병이었다. 키가 큰 스탠드 하나만 켜두고 책상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책을 쌓아놓고 홀짝였다. 거의 매일을 그렇게 보냈다.

 

나같은 사람을 일컫어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라고 한다. 겉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 없고, 유능하며 단정하다. 그 밑은 진흙탕처럼 혼탁하고 온갖 비밀로 들끓지만, 그런 모습은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중략) 이들은 대부분 대인관계가 좋고 친구도 많다. 고도 적응혈 알코올 중독자들은 아주 흔하다. 이들은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식품점 계산대에 얌전히 줄을 서 있다. 의사, 변호사, 교사, 정치인, 화가, 심리치료사, 증권거래인, 건축가 등 전문 직업인도 많다. 이들을 지탱하는 힘, 다시 말해서 이들이 밤마다 술에 빠지고 다음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그게 문제라는 걸 외면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들이 ‘진짜’ 주정뱅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때의 내가 알코올 중독자였을까. 놀랍게도 이 책에 따르면 나는 ‘그랬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이러했다. 나는 맹세코 취하도록 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안을 엉망으로 어지른 적도,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었으며, 스스로의 안전에 위협이 될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늘 나의 주량을 살펴서 조심해서 마셨고 그 다음날 늦잠을 자거나 숙취에 시달리지 않아 생활의 패턴을 망가트린 적이 없다. 심지어는 술을 더 마시기 위해, 하루를 잘 버티기 위해 그전에는 안 하던 운동을 시작했고 삼 시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아 특별히 살이 더 찌거나 심각하게 빠지지도 않았으며 눈에 띄게 피부가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요즘 얼굴이 좋아보인다는 소리도 가끔 들었다. 평소보다 더 이를 더 꼼꼼히 신경 써서 닦았고 손이나 머리카락에서 혹시 모를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한층 더 청결에 집중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났고 늘 그렇듯이 영화도 봤고 일도 -심지어- 아주 잘 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른 아침 혹은 아주 늦은 밤 몰래 버리는 술병과 내 머릿속을 제외한다면, 나는 너무나 멀쩡했다. 한 두 어번, 잊어버릴만 하면 한 번씩,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는 행위가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님을 인지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단지 나 자신의 건강을 조금 해치고, 잔해의 처리가 어렵다는 것 외엔 문제가 될 거리가 전혀 없는 '취미생활'을 포기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술을 조금 많이 마시긴 해.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어? 나는 좀 마셔도 돼.’ 나는 자주 이렇게 중얼거렸고 이 말을 갈수록 진실하게 느껴졌다. (중략) 이것은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논리 전개 방식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에게는 술 자체가 중요한 보상 역할을 한다. 하루를 온전히 버틴 데 대한 크나큰 보상, 그것도 그렇게 훌륭하게 버텨낸 데 대한.

 

가난이나 불행, 불운과 같은 일이 가져오는 진짜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겪는 인간의 변혁이다. 도무지 그 전과 같은 농도로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참혹함, 거세된 감정을 껴안고 흘릴 눈물도 남아있지 않은 냉혹함. 본래 연민이나 동정에 익숙한 편이 아니지만 고통의 시간이 권태롭고 허무해져 세상 만사에 예전보다도 적어도 2,3도는 낮은 온도를 갖게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같지 않아졌을까. 댐이 무너져 수장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수장된 마을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파충류의 눈깔로 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미련없이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주 작은, 있는지도 모르는 어떤 생채기를 계기로 느닷없이 울음은 터졌다. 작은 짐승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입술을 깨문 채 나오는 울음 끝은 길고 깊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힘들었다는 것을, 힘들었다고 누군가에게라도 아니면 스스로에게라도 말했어야 했음을 알았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제멋대로 상처를 봉합해버렸다는 것을, 기실 스스로가 다쳤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한참 후에야. 그리고 그 시절의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어쩌면 -스스로도 몰랐지만- 내 자신 그 자체가 아니라 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18개월 가까이 모진 일들을 겪는 동안에도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것도. 내가 무너져선 안 된다는 다짐 하나 때문에 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이미 잃었다는 것까지도. 그 때 흘린 눈물은 이미 지나간 상실의 무덤에 바치는 뒤늦은 허무였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한 해가 긴 어느 날의 오후의 일이었다.

 

그때의 허기, 그 ‘결핍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한테는 이게 필요해.’ 어쩌면 그렇게 소리 내서 말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게 말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느낌은 그만큼 강렬했다.

 

내가 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대부분 술을 입에 대기 훨씬 전부터 그런 허기를 경험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안도감과 위로와 평안을 전해줄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다.

 

상황이 나아지면 다 끝낼거야.

 

맞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상담사를 찾아갈 수도 없고 한밤중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고 가족에게 털어놓기엔 가족 자체가 문제라면, 누군가에게 골칫덩이가 되거나 이해받지 못해 얼음벽에 쌓여있는 것보단, 술이 훨씬 나으니까. 이해받을 수 없는 스스로도 통제 불가능한 결핍과 허기와 두려움의 세계에서 술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친구는 없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말처럼 술은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게 아니라(어쩌면 처음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점점 더 문제 그 자체가 된다. 나는 일상생활을, 내 자신을, 주변을 망가트리지 않았지만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을 지속했다면 분명 누군가에겐 내 상태를 들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술을 많이 마시는 모습, 혼자서만 술을 마시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파하는 모습, 남들과 함께 있는 중에도 술병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무는 모습, 아침의 전화 너머로 알 수 있는 약간 샌 발음 같은 것들을. 어떤 순간에 누군가는, 어쩌면 그런 것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이제는 인정한다.

 

바닥을 치는 일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바깥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술을 ‘그런 식으로’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그 때보다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그 때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그만큼 더 탁하고 늙고 낡아져가고 있다.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는다. 글쎄,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었던 자기 학대의 역치가 그 때였을수도 있고 이제는 상황 자체에 체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모르겠다. 그 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걸까. 모르겠다. 그저 술은 선하고 따뜻하고 온건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래서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다시 그 선을 넘게 될 수도 없다. 세상에 다시 없는 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없기에. 선을 넘을 때는 이게 그 선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읽고나니 울음끝이 터질듯 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비록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 그게 어떤건지 알 것 같아." 입밖으로 터져나온, 한숨같기도 하고 탄식같기도 한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 제 멋대로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는 것을. 적어도 그것을 알 것은 같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이 책장 한 켠에 놓여있는 것을 볼 때마다 실감한다. 어쩌면 이 책이 내게는 일종의 AA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나이 먹는 건 씁쓸하지만 그래도 다시 어려지고 싶진 않다고 의견을 모았다. 몇 가지를 빼곤 나이 먹는 쪽이 더 좋다고. 아니 몇 가지일 것도 없지. 노쇠한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낡아지는 체력이나 건강문제에 대한 두려움을 빼곤 특별히 지금보다 어린 시절이 부럽지는 않다고 우리는 동의했다. 딴에는 어른인 척 했던 그 시절이 돌이켜보면 어리석거나 영글거나 서툴고 때문에 때로는 이기적이고 철이 없었음을 이야기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한층 더 상승된 (나 자신의) 초연함, 무던함, 어쩌면 무심함이 나이를 먹음으로써 갖게 된 것이라면 때문에 나이 드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긴, 무심함은 언제나 나의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셀 수 없는 단점 중 하나였고 거의 유일한 장점인 궁극의 무정함. 과거엔 서운함이나 질타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는데 요샌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론 (점차) 비주류에 속할 선택을 하는 탓에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고립되고 도태되는 느낌을 받아 초조해질 때가 있다. 정말 이렇게 괜찮을까. 이대로도 잘못 살고 있지 않는걸까. 그럴 때마다 낮아지는 자존감, 치솟는 불안감을 채우려고 나도 모르게 뭔가를 사려고 할 때가 있다. 결코 건강한 신호가 아님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결과적으로 나를 더 -여러 의미에서- 가난하게 할 뿐이고 그 가난은 나를 숨막히게 할 거라는 것을, 어떤 소설에서 말하듯이 “돈이 있을 땐 낙타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었던 것이 돈이 없을 땐 낙타가 신발장에 들어찬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그냥, 적게 쓰는 쪽을 택한다.

 

물론 때때론 다이어트하다 폭식하는 사람마냥 난폭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외로워진다. 잘 안 신을 것을 알면서도 예쁜 구두를 사고 싶고, 분명히 잘 안 어울릴 색깔의 섀도우를 사려고 한다. 허나 정작 그러고나면 크고 작게 후회하거나 자책하거나 자조할 것을 알기에. 그냥 커피나 마시자며 다독인다.

 

“중요한 건 소박함 자체가 아니야. 나는 나를 미니멀리스트라 여기지 않아. 중요한 건 선택을 신중히 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언제나 빚지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어. 빚을 지지 않으면 우리 성향과 생활방식에 잘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거든.”

 

결국 ‘삶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자기 내면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활방식을 재정립한다는 의미이다.

 

짐이 늘어나는 걸 너무너무 싫어하는 사람이고 물건이 많아짐으로써 필연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워지는 점도 못 견딘다. 가끔 좀 깔끔병을 떨고 청결에 집착하는 면이 있어서 수납되지 않고 바깥으로 나온 물건이나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책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겠지. 그래, 친구와 이런 말도 했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더 강해지거나 부드러워지거나 더 철이 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황파악은 비교적 냉정하게 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의 장단점을 이제는 인정한다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것, 또는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상황 자체를 피하기 위해 심호흡한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삶을 지향하는게 적어도 나 혼자는 아니라는 것, 내가 잘못하거나 잘 못 하고 있지 않음을 새삼스레 확인받는다. 그게 가끔은, 안도가 된다.

 

 

 

아무것도 읽지 않고도 삶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진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책을 읽자는 다짐 아닌 다짐도 힘을 잃은지 오래다. 그러나 문득 생각하길, 그렇다면 독서란 그야말로 자발적인 순도 백퍼센트 자의에 의한 행위라는 것과 그렇기에 마음 먹지 않고 몸이 습관을 뱉어낸다면 영영 할 수 없는 일일수도 있다는 오싹한 결론. 아아, 이건 좀 새롭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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