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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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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활동 중인 일본 작가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은 팬층을 거느린 작가. 실제로 국내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는 대개 풀네임이 아닌 ‘하루키’라고 불린다. 그는 유명한 작가이고(출판계의) 흥행보증수표이며 하나의 아이콘이다. 그러니 하루키를 읽는다, 는 것은 단순히 한 작가를 선호한다는 것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젊고 이질적이고 쿨하고 세련된 문화나 문학을 향유 한다는 혹은 그 정도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가 매일 달리기를 하고 스파게티와 맥주, 와인을 좋아하며 재즈광이자 철인 삼종 경기에 출전한 경험과 재즈바를 운영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종종 하루키로 인해 달리기나 재즈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들은 하루키를 경애하고 사랑하고 몰래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듯 쑥스럽게 그러나 자식 자랑을 하듯 자랑스럽게 그의 이름을 말한다. 하루키와 재즈, 하루키 에세이, 하루키 여행집, 하루키 문학 연구, 그에 대한 책들도 참으로 방대하다. 아아, 모두가 하루키를 사랑한다.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다, 아마도. 하지만 한 번도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 왜였을까. 다른 이들처럼 그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고 그가 쓴 거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읽기도 전, 미처 존재를 알기 전, 판단하기도 전 그가 ‘이미’ 유명했다는 것에 대한 묘한 배신감과 억울함 혹은 내가 그저 스테디셀러를 읽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까. 나의 이전 시대의 상징이었던 그는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느끼는 허탈함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그를 늘 보류 상태에 놓아두고는 했다. 그런데도 나는 『상실의 시대』를 아마 열 번쯤 읽었다.

 

『상실의 시대』에는 언제나 지나가버린 것의 냄새, 청춘의 쓸쓸함이 묻어있다. 책이 쓰여진 일본의 시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국내 첫 출간해, 그리고 현재까지의 유행. 배경과 시대는 달라도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이 책에 끊임없이 열광한다. 아마도 언제 쓰여졌든 언제 읽혀졌든과는 무관하게 이 책에는 젊음의 어딘가를 자극하는 뭔가가 담겨 있나보다. 어쩌면 청춘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이 책을 기억할 어떤 세포가 심어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사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한 번도 잘 써진 소설,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친하지는 않았지만 또렷이 기억이 나는 동창생처럼, 버스에 놓고 내린 우산처럼, 기억이 날듯 말듯 입에서 맴도는 노래가사처럼 이상하게도 마음이나 머릿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마치 와인 병 밑바닥에 가라앉은 포도주의 침전물처럼 말이다.

 

그의 다른 글들도 비슷했다. 그에게선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을 읽을 수 있었고, 단 한 문장과 문단만으로도 반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특한 설정과 다분한 실험 정신으로도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내게 했다. 젊고 생생하고 의도하지 않은 (소위 말하는) 쿨함을 지닌 문체 또한 인상적이며 무엇보다 글을 잘 쓰기보다도 기억에 남게 쓰는 작가였다. 그런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1 여 년 전쯤의 이야기이다.

 

1Q84

 

간헐적인 스테디셀러와 일부의 베스트셀러. 그 가운데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킨 『1Q84』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일본에서의 판매 부수, 국내에 출간되자마자 팔리는 경향, 2권의 예약판매 부수, 수많은 리뷰와 특집 기사. 어떤 ‘책’이 이토록 다양한 화제와 서브컬처를 양산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책의 위치는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의 다양한 문화로 대체되었고 책은 간신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는데. 실제 어느 잡지 에디터가 말하길 어느 날 지하철 한 칸에 이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이 네, 다섯이 되더라고 썼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약간의 경악 반, 감탄 반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과연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첫째로 나는 이 책의 놀라운 흡입력에 감탄했다. 짧지 않은 페이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차근한 묘사, 평범하지 않은 환경과 인물들을 안고도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했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남동생과 친구 한 명도 이 책을 이틀 만에 깔끔하게 독파했다고 했고, 내 경우엔 밤에 읽기 시작해서 2권을 모두 읽어내고 몇 시간 후 아침을 맞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음에는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즐거웠다. 군살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깔끔하고 매끈한 아오마메, (해를 입히지 않을 것 같은) 덩치는 크지만 온순한 동물과 같은 덴고, 상냥하고 선한 웃음을 가진 아유미, 강하고 단단하게 그야말로 나이스하게 나이가 든 노부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딘가 뒤틀려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후카다 에리코 등. 모든 인물들은 각각 분명한 개성과 매력이 있었지만, 묘하게도 조금씩 닮아있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단단하고 상처받았고 뭔가 중요한 부품이 하나씩 결여된 사람들 같았다. 특히 (주인공 두 명 외에) 개인적으로 가장 반했던 캐릭터는 노부인의 경호원을 맡고 있는 다마루였다. 공기와 말의 밀도를 변화시키지 않는 말, 다양한 이야기와 해학,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냉철함, 탄탄한 몸과 군더더기 없는 동작, 그의 말투, 건네져오는 목소리, 느껴지는 성향 모든 것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하루키라는 사람이 나도 몰랐던 취향을 꼭 맞춰서 만들어내기라도 한 듯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그는 정말로 내가 선망하는 거의 모든 습성을 갖고 있었다.

 

세 번째로는 이 책이 하루키 소설의 핵심이자 완결, 혹은 옴니버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흥미로웠다. 『1Q84』는 분명 새로운 책이었지만 그가 여태껏 써온 소설과 약간의 교집합 또는 합집합을 모두 갖고 있었다. 판타지적인 설정, 독특한 인물들,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접목시키는 방식, 다마루가 말한 ‘쥐’, 여태껏 그가 써온 어떤 이야기보다 현실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냉철한 세계, 문장의 호흡과 농도 등 모든 것들이 ‘하루키 식’이었다. 그가 말하려던 모든 것이 간헐적으로 합해진 짝패 혹은 가장 핵심 된 맥락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루키가 그런 나이였던가, 자신이 가진 모든 카드를 함께 조합해서 내놓아야하는? 왈칵 서글픈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이 책은 하루키 문학 그 자체였다. 마치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게 되듯이 그는 이 한 권을 위해 여태껏 모든 글을 써왔던 걸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허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1Q84』의 놀라운 점은 이 세 가지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하루키를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했지 ‘문장력이 좋은’ 작가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용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말고 문장만 철저히 수정해나간다.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와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둔다. 구조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수도 설비의 위치도 변경하지 않는다. 그 외의의 교환 가능한 것 - 마룻바닥과 천장, 벽이나 칸막이- 을 뜯어내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나간다. 나는 모든 것을 위임받은 솜씨 좋은 목수다, 라고 덴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해진 설계도 같은 건 없다.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직감과 경험을 구사해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중략) 늘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늘리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되고, 그 다음에는 깎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깎아내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된다. 그 같은 작업을 번갈아가며 집요하게 거듭하는 사이에 진폭이 점점 작아져서 글의 분량은 자연스럽게 적정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더 이상 늘릴 수 없고 더 이상 깎아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아가 지우지고 쓸데없는 수식이 떨어져나가고, 빤히 보이는 논리는 깊숙한 뒷방으로 물러난다. 그런 작업은 덴고의 천성적인 특기였다. 타고나기를 기술자로 타고난 것이다. 먹잇감을 찾아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카로운 집중력을 가졌고, 물을 운반하는 당나귀처럼 참을성이 강하며, 게임의 룰에는 한없이 충실했다. (1권)

 

하루키가 문체를 바꾼것일까? 감수와 교열 과정에서 움직인걸까? 아니면 번역에서? 미묘하고도 조심스럽게 뭔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단절 된 문장, 냉철하지만 상냥한 말투, 독특하고 굴절된 표현들이 그의 특징 아니었던가. 하루키 문장에서의 ‘논리’와 '해설'은 -그가 자신의 소설에서 표현했듯- 나비에게 뼈대를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가 변했든 아니든, 바뀌었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뀌었든 결국 상관 없어지고 말았다. 『1Q84』의 문장은 마치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심지어 매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얄미운 사람 같았다.

 

아주 작은 단어로도 문장은 크게 변한다. 마찬가지로 생기 있는 문장 하나로도 문단의 숨도 바뀐다. 차근차근한 시선과 일정한 호흡, 마치 하루에 쓴 것과 같이 변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 쉽고도 적확한 표현. 아아, 쉽고도 적확한 표현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였을까. 2권까지 하룻밤에 모두 읽어낸 후 지금까지 총 열 번 정도 이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눈으로 각인하려는 듯, 마음의 정화나 배설을 위한 듯, 조금씩 핥아가는 심정으로 문장을 먹고 음미하고 따라하고 경배했다. 모든 장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 책의 문장으로 좌절하고 경외하고 사랑에 빠졌다.

 

1Q84 3

 

아오마메는 자신의 입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2권은 끝이 난다, 하나의 끝이자 다른 하나의 시작을 알리며. 한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내러티브가 시작하려 한다, 결말은 가시적이지만 함의는 깊고 길다. 소설이라는 오브제의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결말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양이 아닐까. 그렇다면 <1Q84>의 결말은 최선이다, 라고 책을 덮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는 3권을 기다리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과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는 완결되었다는 완전함이 양쪽에서 같은 밀도로 나를 밀어왔다.

 

그렇게 복잡하고 벅차는 마음으로 읽은 3편은 (1, 2편에서 인물들의 성격과 배경, 사건의 발단과 전개가 이미 이루어졌기에) 비교적 담백했다. 새로운 인물의 시각이 추가되었고, 분명 수레는 굴러가고 있지만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은근하고 더딘 진행이다. 허나 그것은 문장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거나 기복이 물결치는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지런한 등산이 진행 된 후 어느 임계선을 통과한 끝에 걷는 부드럽고 유연한 걸음에 가깝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추적과 엇갈리는 덴고와 아오마메 덕에 나는 TV 추리극장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꼭 쥐며 읽었다.

 

실제로 지난 두 권에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치 둘을 연결하지 못해 안달이 난 오지랖 넓은 중매쟁이 같았다. 아오마메를 기억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덴고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아오마메에게서 아유미까지 뺏어가는 작가를 잠시 원망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아오마메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어서 덴고가 그녀를 찾아 그녀와 그녀 안의 ‘작은 것’ 부드럽고 따뜻하게 안아주길 원했다. 나는, 그리고 (확신컨대)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왜 그렇게도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원할까. 아마도 이 책은 근본적으로 사랑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1권)

 

아오마메는 말했다.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와 같아.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해.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1권)

 

작가는 『상실의 시대』서문에서도 ‘이 책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쓴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아마 『1Q84』도 같지 않을까. 가벼운 만남 혹은 신파, 타산과 이기, 고결한 척 굴거나 애써 아프게 구는 모습, 호의나 호감을 애정으로 착각하는 현재에 덴고와 아오마메의 교감이란 얼마나 깊고 길고 촉촉한가.

 

확인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고, 둘 다 굳이 입 밖에 내어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아오마메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덴고도 거의 동시에 똑같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달을 찾는다. (중략)

 

이윽고 구름이 끊기고, 달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다.

 

달은 하나뿐이다. 항상 익숙하게 보던 그 노랗고 고고한 달이다. 억새 들판 위에 말없이 떠오르고, 온화한 호수면에 희고 둥근 접시가 되어 떠돌고, 조용히 잠든 집의 지붕을 조용히 비추는 그 달이다. 만조의 물결을 한결같이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밀어 보내고, 짐승들의 털을 부드럽게 빛나게 하고, 밤의 여행자를 감싸 안아 보호해주는 그 달이다. 때로는 예리한 그믐달이 되어 영혼의 살갗을 깎아내고, 초승달이 되어 어두운 고절의 물방울을 지표면에 소리도 없이 떨구는, 늘 보던 그 달이다. (3권)

 

그들의 사랑은 억지로 열거나 밀어오는게 아니라 조용히 닿아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순정, 감내할 수 있는 고통과 인내, 누군가를 구원으로도 절망으로도 여겨줄 마음, 그리고 서로가 같을 것이라는 의심 없는 확신. 두 사람이 미끄럼틀 위에서 만나 겨우 상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흘렀다. 의미나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눈물이었다. 아마 진심에 공명했던 투명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약간 붉어진 눈시울로 ‘덴고’와 ‘아오마메’의 이름으로 있던 챕터가 ‘덴고와 아오마메’가 되었을 때의 안도감과 벅참이라니.'덴고와 아오마메'로 바뀐 일곱글자를 언 땅 위에 피어난 꽃을 바라본 것처럼 기쁘고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눈으로 좇고 있었다.

 

나는 둘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네 사람은 각자의 심산을 품고 이 계획에 임했을 뿐, 딱히 똑같은 방향을 지향했던 건 아니었어. 말을 바꾸자면, 모두가 같은 리듬에 같은 각도로 노를 저었던 건 아니라는 얘기야."(3권) 라는 고마쓰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 방향, 리듬과 각도를 노를 젓고 있으니까.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지키도록. 어떤 의미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애정의 상징이자 이상이고 꿈이기도 할테니. 4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예전에 작가란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일부의 선택받은 천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엉뚱한 일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야말로 섬광 같은 계시를 받고 갑자기 책상에 앉아 글을 휘갈기고, 그들의 광기 어린 붓끝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며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는 그 움직임을 뒤로 하고 짠! 하고 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엉뚱하고 예민하고 재능을 타고 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고. 퇴고로 머리를 썩이거나 열패감에 시달리거나 밤새 눈을 퀭한 채 밤을 새는 일들은 없을 거라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하루키는 ‘그런 작가’ 라고 넘겨짚었다. 왜 그런지 그는 언제나 무연하고 대담하고 쿨하고 솔직한 천재라고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작가란 축복 받았다기보단 사실 저주에 걸린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재능을 뽐내는 쪽이 아니라 열등감에 시달리는 쪽에 가깝다는 것도. 쓰고 싶은 것들을 저절로 술술 풀어내는 게 아니라 때로는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써왔다는 것 또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만성적인 어깨결림 따위를 안고 살고, 가끔은 한 단어 때문에 머리를 감싸며 좌절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끊임없이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체력을 단련한다는 것을 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일정한 페이지를 써내고, 헤밍웨이의 말처럼 오늘 더 쓰고 싶을 때 내일을 위해 멈추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하루키는『먼 북소리』에서 소설을 쓸 때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한다고 했다. 걸작이 되지 않다손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소설을 끝맺음 할 때까지는 죽고 싶지 않다고. 만약 그 안에 죽는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만큼 분하다고도 말했다. 아아, 이제 나는 그를 천재 작가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고요한 새벽을 필력의 위엄으로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에 일정한 운동량을 달성하고 (앞서 인용한) 덴고의 경우처럼 끈질기고 빈틈없는 퇴고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 단단하고 아름다운 등을 한 채 『1Q84』의 4권을 써가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괜시리 가슴이 뻐근하고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진다.

 

이제는 나도 하루키가 좋다고 솔직하게 수긍한다. 게다가 사실 옛날보다 지금, 그리고 점점 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이 좋아진다. 그는 여전히 젊고, 담백하고, 뜨거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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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2010-10-02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Q84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책의 분위기나 하루키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봐야겠습니다.
8기 서평단 안내 글을 따라 무심코 들어왔는데 하루키도 좋았지만 [Talk to]님의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hining 2010-10-03 14:49   좋아요 0 | URL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매력적인 책이라는 것과 흡입력면에서는 대부분 동의를 하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리뷰도 많지 않고, 미욱한 글솜씨로 서평단 하게 되어 걱정도 됩니다. 과분한 칭찬을 들었으니 더 분발해야겠어요+_+ 감사합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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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지하실에서 곧 고요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3페이지로 넘어갔을 때 리젤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리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겁에 질린 눈이 자신에게 매달려있다는 것을 느꼈다. 리젤은 단어들을 잡아당겼다가 숨으로 뱉어냈다. 목소리 하나가 그녀 안에서 음들을 연주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것이 네 아코디언이야.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사람들을 두 토막으로 베어버렸다.

 

다시 소녀가 말을 했을 때, 소녀의 입에서는 질문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뜨거운 눈물들이 눈에서 자리를 찾으려고 싸웠지만 소녀는 그것들이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호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나았다. 말이 모든 일을 하게 하자. “정말 오신 거에요?” 소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 뺨에서 씨앗을 가져온 게 맞나요?” - 마커스 주삭, 『책도둑』 

 

헤르타 뮐러의 글이 숨 쉴 때는 마커스 주삭의 소설이 퍼뜩 떠오른다. 마커스 주삭은 명료한 문장과 담담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즘, 단어의 의인화로서 자신만의 문체를 구축한 호주 출신의 젊은 작가다. 『책도둑』은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젤이라는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의 이야기인데 신인답지 않은 스토리텔링과 시선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위의 문단처럼- 문장이 백미다.

 

단어와 사물들의 의인화, 비참한 현실과 그에 대조되는 청아한 문장, 참혹하고 불온한 시대상,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한 사람의 결단에 휘말리는 집단의 공포, 무엇보다 단어에 온기를 불어넣고 숨을 쉬게 하며 맘껏 움직이게 하는 문체라는 특징의 유사성 때문일까. 헤르타 뮐러와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은 어느 면에서 닿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에는 읽으면서 즐거운 글이 있고 반대로 읽기조차 괴로운 글이 있다. 마찬가지로 즐겁기 위해 읽는 책도 있고 괴로울 줄 알면서도 읽게 되는 책도 있다. 내게 헤르타 뮐러의 책은 단연 후자이다. 나는 늘 그녀의 글을 읽으며 괴롭고 참혹해하며 이따금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헤르타 뮐러의 글은 마치 어떤 고통 어린 순간들을 조심스럽고 서글프게 펴서 보여주는 것 같다. 아코디언처럼 자글자글 접힌 그 안에는 절망과 향수의 언어, 박제가 되어 버린 시간들이 아로새겨져있다. 그녀의 글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종종 나는 그것을 '당해본 자의 것'이라고 부른다. 역사의 한 자락이 되어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져본 자, 인간이 악마로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자, 응축된 절망과 두려움을 심장 근처에 두고 살아본 자, 전쟁과 망명, 기아와 핍박,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것. 그들의 언어. 알베르 까뮈의 말을 인용하자면 "경험은 실험해보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하는 것이다. 경험이라기보다는 인내가 옳겠다. 우리는 견딘다."에 해당하는 삶이랄까.

 

그래서인지 그녀의 글을 읽을 때는 시원한 곳, 찬 음료와 햇살조차 꺼림칙할 때가 있다.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끈질긴 생의 집념을 목도한 사람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아야 했을까 싶은 상황 앞에서 그녀는 차라리 생에 대한 복수에 가까운 의지로써 살아남았다. 그녀의 언어는 비통하게도 아름답다. 어째서 언어를 이토록 슬프도록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이 매끈한 공예품과 같은 아름다움이 현실을 더욱 통탄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름다움의 본질은 슬픔인가. 늘 그녀의 글 앞에선 비슷한 의문과 혼란, 벅찬 감정들이 알알이 흩어져 마치 은하수와 같은 길을 이루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뮐러의 글은 상당히 어렵다. 주어와 목적어는 각각 주장을 하고 문장의 흐름은 뚝뚝 끊어지는데다, 사물·자연·사실의 의인화, 한 편의 서사시와 같은 길고 구비진 흐름. 설상가상으로 내용은 음험하고 무참하다. 그래서 나는 늘 그녀의 글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두 번, 세 번씩 반복해서 읽는다. 아니, 읽는다기보다 입안에 넣고 혀와 입천장 사이에서 뱅뱅 굴린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이렇게 활자의 움직임과 냄새에 집중하고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하다보면 어느새 나 역시 그녀가 증축한 미지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세계는 마치 크로스워드나 스도쿠와 같아서 집중력과 호기심이 부족하거나 끈기가 없으면 결국 글에서 손을 거두게 된다. 쉽게 읽고 빠르게 잊는 세상에, 그녀의 글은 어렵게 읽히고 깊고 길게 기억된다. 헤르타 뮐러는 모든 글자들이 쉽게 글이 되는 현재, 활자가 과도하게 난무하는 세대에게 주어지는 경건한 서사이자 경고이며 끈기 있는 자만이 열 수 있는 마법의 문이다. 분명 많은 이들이 그 문 앞에서 열쇠를 쥐었다 폈다만 반복한 후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금만 인내를 갖자. 그녀는 생(生)과 싸워서 이겨낸, 삶의 끝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 문 안쪽에는 놀라운 언어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세계를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해보지 못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때때론 어쩌면 그녀의 글이 이토록 난해한 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도 잠시 생각해본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을 쓸 수 있었고 『1984』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직접적이고 명료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헤르타 뮐러의 글은 엉키고 섞이고 도치되는 것이 아닐까.

 

그 중에서도 특히『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굼뜨고 미묘한 움직임만을 포착한 글이다. 책에는 거시적인 행동이나 직접적인 대화나 지칭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몸을 웅크린 채 조심스럽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는 듯한 동물의 시선 같달까. 그녀가 포착하는 세계에는 독재 정권 치하에서의 공포와 광기 어린 -마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처럼- 목숨만이 존재한다. 그들의 공포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크다. 사방에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그들은 반대로 점점 더 눈이 멀고 귀가 어둡고 입을 닫게 되는 세상. 언행은 물론 생각과 약간의 가능성과 꿈조차 함부로 누릴 수 없던 세상. 아디나와 클라라,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절망적일만큼 무겁다. 그들에겐 이미 희망의 빛은 커녕 빛을 지필 촛대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만 생존을 꿈꿀 뿐.

 

8월의 그런 어느날, 일리예는 가스레인지 옆에 서서 바퀴벌레를 으깨어 죽였다. 어쩌면 그가 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 있던 열기의 무자비함이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중략) 그는 구역질을 했고 식은땀을 흘렸다. 도나우 강이 있어서 세상은 행복해,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혀를 삼키며 딸꾹질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방 벽에 콘센트가 잔뜩 있다. 콘센트에는 입이 있다. 램프대에는 재물조사 목력번호인 노란 숫자들이 쓰여 있다.

 

노인의 노래가 그친다. 세상에, 그가 잎이 없는 황량한 아카시아 앞에서 말한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먹을 빵도 없어. 경찰관 한 명과 개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오고, 또 한 경찰관이 온다. 그러자 그는 양팔을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하느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루마니아인이라는 것을. 그의 눈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빛에 번쩍이고, 눈 속에서 광채가 번뜩인다. 개가 짖으며 그의 목으로 뛰어오른다. 두 명, 세 명, 다섯 명의 경찰이 그를 끌고 간다. (중략) 노인의 머리가 제일 아래쪽에 걸려 있다.

 

일견 냉담해 보일 만큼 쉬이 감상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 치밀함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그때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은연중에 전달한다. 치열하고 아름다운 글은 묵묵한 속도로 그저 이들을 ‘비춘’ 다음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깥의 시선을 오래토록 던진다. 대체 지금 내가 발을 디디는 곳이 어디인지, 이 불온한 공기는 어떻게 해체될 것인지, 지독하게 상징적인 이 제목의 의미는 언제쯤 알게 될 수 있을지, 독자가 조금씩 조바심을 낼 때쯤 겨우 여우 이야기를 꺼낸다.

 

아디나에게는 여우 모피가 있다. 반짝이는 갈색 발톱을 가진, 턱 아래에서 묶을 수 있는 발을 가진 여우 모피. 그런데 여우는 그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잘리고 있다. 방 안에 다른 물건은 모두 미세한 배치조차 바뀌지 않았는데.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그리고 언젠간 그녀를 해칠 것이라는 무언의 압력. 그녀는 문득 열 살이 되기 전 일을 떠올리며 클라라에게 이야기한다. 여우를 사러갔을 때의 일, 매끄러운 털을 가진 여우, 그리고 사냥꾼의 얼굴.

 

너 긴장했구나, 아디나가 말한다.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걸. 그러자 클라라는 깜짝 놀란다. 그녀의 시선은 거리낌 없고 단호하다. 클라라는 떠나간 한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은 위장된 얼굴이다. 양 뺨과 입술이 제각각 따로 놀고, 생기 없고 동시에 탐욕적이다. 앞과 옆의 한 얼굴이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그림처럼 텅 빈다. (중략)

아디나는 그 사냥꿈이 되고 싶어해, 클라라는 생각한다.

   

넌 나보다 더 많이 불안해해, 아디나가 말한다. 여우를 보지 마, 더 이상 여우를 쳐다보지 마.

 

밤사이에 여우의 발이 모두 붙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되려 조금씩 없어지는 여우의 모피를 바라보며 그녀는 어떤 밤들을 지새웠을까. 여우가 마치 자신을 잡아먹는 늑대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하나씩 사라지는 여우의 분신을 바라볼 때 그녀는 억겁의 시간을 지나온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에 떨지 않았을까.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녀는 머리가 잘리기 전 클라라의 쪽지를 받고 아파트를 도망 나온다. 그렇게 찰나의 차로 그녀가 피신을 하게 된 얼마 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독재정권이 마침내 종식된다. 아디나(아마 그녀를 비롯한 모두)는 마치 백일몽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TV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이 뒤졌을 게 분명한, 그러나 아무도 없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다. 모든 게 끝났다. 하녀의 딸은 교장이 되었고, 교장은 체육 교사가, 체육 교사는 노동조합장이, 물리 교사는 개혁과 민주주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의 불온한 빛은 미처 거둬지지가 않았다.

 

고양이는 수염이 있어, 아이가 말한다. 그 애의 손끝 아래로 여우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밀린다. 아이가 여우의 머리를 탁자 위에 놓는다. 

 

아디나는 두 번째로 머릿속에서, 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지만, 그것과는 다른 소음을 느낀다.

 

클라라는 이방인이고 일리예는 떠나며 아디나는 여우가 더 이상 붙지도 잘리지도 않을 것을 안다. 노래는 침묵하고 빵가게의 줄은 길고, 타오를 것 같았던 희망과 삶의 빛도 결국엔 비루해졌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여우는 사냥꾼인 채로 남게 된다. 아아, 나는 이 책 끝에 자그만 희망을 소망했던가. 씁쓸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이 책의 제목이『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와 '-었다'의 과거의 언어는 바뀔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단 한 번, 몇 명의 독단과 아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잿빛 초상화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겼다. 비록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아마도 희망의 빛은 쉬이 켜지지 않을 것만 같아 괜시리 목이 매캐해진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은 승리자일까.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비슷한 의문을 품는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과 사를 나눈다 해도, 설사 역사가 이긴 자들의 것들이라 한들, 어떤 때는 죽어버린 자들이 ‘차라리’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살아남았다는 부채감 중 어떤 게 더 클까. 헤르타 뮐러는 어떤 생각을 하며 글을 쓸까. 어쩌면 그녀의 글쓰기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로서, 혹은 생에 대한 완벽한 복수를 위해, 그것도 아니라면 써야만 했기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산물이 아닐까. 오로지 살아남은 자들만이 악몽에 시달린다. 살아남은 자들만이 무소의 뿔처럼 걸어갈 수 있다. 살아남은 자들만이 슬픔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책을 덮으며 브레히트의 시를 떠올린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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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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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강을 읽은 것은 -대부분의 이들이 그러하듯- 고등학교 적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해설에는 ‘안녕’이란 ‘goodbye'가 아닌 ’hello'에 가깝다는 것과 책이 아닌 그녀를 소비하려는 -일종의 신드롬이 되어버린- 현상에 그녀가 느끼는 거북함과 당혹스러움에 대해 적혀있었다. 굉장히 매력적인 여자인가 보다 싶은 심드렁한 마음과 hello라는 단어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읽었다는 기억’만 남고 꽤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사강의 책이 세 권 나란히 꽂혀있는 것을 도서관에서 발견했고 오랜만에 그녀와의 조우를 시도했다. 그리고 쓴 짧은 -다른 책의- 리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사강의 책은 재미있다. 문장은 짤막하고 단어는 적확하고 표현은 추상적이되 모호하지 않다. 쉽게 읽히지만 내용이 가볍진 않다. 어딘가 무뚝뚝하지만 야무지고 뼛속까지 세련된 그야말로 '프랑스 아가씨'의 느낌이 난다. 무엇보다 매력 있다. 엄청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문장도 단어도 숨을 쉬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강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역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향과 외모와 목소리와 인생을 살았는지가 궁금해졌다. '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쓴 거야' 라기보단 '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쓰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만드는 문체랄까.

 

그리고 이 리뷰의 일부에 여전히 사강의 글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미소』는 국내 번역된 사강의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내러티브면에서는 가장 약한 글이기도 하다. 도미니크라는 파리의 한 여대생이 사랑에 빠지고, 사랑의 절망과 단애에 대해서 배우고, 결국 유연하게 그것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연애 이야기, 혹은 불륜이 될 수도 있는 글이랄까. 그러나 사강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특기, 그리고 그녀만의 특징을 솜씨 좋게 녹여냄으로써 독특하게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무연하고도 솔직한 감정, 회의적이지만 비관적이지 않은 사고, 다소 악마적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의 배치, 풍부하면서도 적확한 표현은 이 책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인 도미니크는 사랑에 푹 빠져 있지만,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볼 수 있을 만큼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하지도 않고, 자기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으며, 위선과 가식을 덮어쓰는 것을 -싫어하기보다도!- 귀찮아하는 여자다. 이렇게 도미니크는 여러모로 신기한 여자지만, 특히나 자신의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감탄할만하다. 이런 구절들을 보자.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것은 열일곱 살까지 내가 많이 하던 일종의 스포츠였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해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나는 뤽이 나를 사랑하는 경우에만, 뤽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에만 나 자신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생각은 바보 같았다.

 

나는 이 이야기에 다른 측면이, 내가 모르는 비참한, 아니, 비참하지조차 못한, 일상적이고, 슬픈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내 소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자신 안의 어두움과 허기짐에 맞닿게 되고, 자신을 바꿔서 사랑을 쟁취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상대의 감정과 생각의 사이, 생각과 행동의 간극 사이에서 얼마나 당황해했는가. 도미니크의 사랑 또한 연약하고 뻔뻔하고 죄책감의 달콤한 과실을 물고 행해진다, 대부분의 사랑이 실제로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녀는 사랑의 열병이라는 고독과 침묵 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느 날 바로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나는 아주 주의하며 내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음악은 끝나 있었고, 나는 음악의 끝부분을 놓친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놀랐다. 미소 짓는 내가 보였던 것이다. 미소 짓는 나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것. 나는 나 자신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혼자, 혼자라고. 그러나 결국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이 자신의 슬픔, 혹은 좌절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단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은가. 도미니크는 부정과 체념 인정과 수용의 단계를 넘어서 자신의 사랑에 라벨을 붙여 역사 속에 묻어둔다. 지나온 사랑에 대해서 더 이상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런 모든 단계를 심어준 사강을 사랑한다. 나 역시 이별을 겪은 후에 도미니크처럼 수없이 중얼거렸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나간 일에 얼굴을 찌푸를 이유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 이별에 대한 사강식 위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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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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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즈키 씨가 너를 부르듯 나도 박 군이라 부르고 싶은데 그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한다. 마치 몰래 좋아하던 사람의 이름을 들켜버린 기분처럼, 새삼스레 너를 부르려니 쑥스럽고 간지럽다. 대학에 입학한 지 고작 한 달쯤 지났던가, 나는 학교가 시시해졌다. 대학이라는 곳의 피상성과 너무나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에 놀랐고, 대학이라는 시스템 구조와 그곳을 지배한 헤게모니가 불편했다. 사실은 대학이 아니라 내 자신이 시시했을 뿐인데, 젊은이답게 비관적이었고 이따금 허무했고 자주 도피를 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으로 갔다. 읽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장서가 기뻤고, 활자 냄새에 대한 기대감에 설렜고, 혼자만의 비밀장소를 얻은 것처럼 안도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네가 있었다. 나 역시 박군처럼 책을 좋아하고 -비록 니체를 얼마큼 이해했는지 스스로 의문은 들지만- 니체를 읽었고,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독파했다. 나는 너를 스무 살에 만날 수 있어 고마웠고, 구제 받았다는 환상에 들떴고, 너를 동경했다. 너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이었다.

 

나는 너의 친구들 모두가 좋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방식의 삶과 기발함과 당당함이 부러웠다. 그리고 이 책의 실질적 주인공인 스즈키 씨 가족에게도 푸근함을 느꼈지만 유독 너를 사랑했다. 너의 정직성과 유연함과 지성과 인내를 닮고 싶었다. 스무 살 적에는 매일매일 너와 같아지고 싶었다. 너는 고작 열여덟 소년이다. 그런데 너는 왜 벌써 알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너의 친구들도). 세상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 필요한 마음, 쌓아지는 지성을. 절대 멋진 척 폼 잡지 않은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에 와 닿는 것은 왜인가. 자식, 진짜 멋지단 말이야. 나는 몇 번씩 너의 단단한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나 철이 너무 빨리 든 아이들은 으레 눈이 깊고 조숙해서 오히려 안쓰럽지 않은가. 네가 지나온 세월과 과정과 역사가 짐작되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마치 몇 해쯤 더 산 누나가 된 것처럼 네가 찡했다.

 

게다가 박 군, 사실 나는 늘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은밀한 상상을 품었었다. 나는 누구보다 여자를 존중하는 사람이니 폄하한다는 오해를 하지는 않길 바란다(박군이라면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남자로서의 삶을 동경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가가고자 하는 삶에 남자의 것이 편했을 것이라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겸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온다 리쿠는 그녀의 소설에서 그런 말을 했고 분하기보다 안타까웠다. 여자인 나는 이 세계에 그저 용인되거나 종속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따금 유리된 세상에 살고 있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물론 자격지심이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남자의 몸을 동경했다. 뼈가 불거진 체형과 여자의 것과는 전혀 다른 근육의 성질과 순간적인 폭발성을 갖춘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마르지만 단단한 소년의 것 말이다.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근육을 갖고 싶었다. 굵은 뼈와 강한 힘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여자의 부드럽고 유연한 몸의 따뜻함도 사랑하지만 남자의 무뚝뚝한 평평한 몸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너를 더욱 동경했을 지도 모른다. 타인을 압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완력이 아니라 타인을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너의 인력을. 명민하고 재빠른 너의 운동신경과 아름답고 절도 있는 너의 움직임 그 자체를 선망했다.

 

너와 네 친구들을 마주하며 나는 스즈키 씨가 된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처럼 나약하고 때때론 비겁하거나 무심하며 평범했다. 허나 나도 작지만 튼튼한 날개를 달고 싶었다. 너를 자주 만나며 선생님 뒤를 쫓아다니는 열등생처럼 배우고 깨닫고 기다렸다. 삶이 무거운 날에는 네가 춘 매의 춤을 떠올린다. 곧은 너의 눈빛과 질타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모질게 대한다. 네 말처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고 파르르 떨던 날들을 반성한다. 상상을 배가시키고 고독 앞에서 침묵하며 불안을 기꺼이 안는다.

 

"어떤 사람이라도 싸울 때는 고독해. 그래서 고독마저도 상상을 해봐. 그리고 불안이나 고뇌가 없는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 인간일 뿐이야. 정말 강해지고 싶으면 고독이나 불안, 고뇌를 물리치는 방법을 상상하고, 배워보는 거야. 자기 힘으로."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라고 말한 괴테의 말처럼 나는 너의 말 또한 믿는다.

 

요즈음 나는 예전처럼 너를 자주 찾지 않는다. 고작 다섯 해가 흘렀을 뿐인데, 네 앞에 서면 내가 이렇게나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여전히 눈부시지만, 지금의 나는 너의 찬란함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너의 곧은 눈은 때로는 극찬의 격려가 때로는 무언의 질타가 되어 돌아온다. 박 군, 네가 나의 비겁함을 너무 심하게 비난하지 않길 바란다. 너는 영원한 소년이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사회적인 의미의) 어른이 된다는 일은 날개가 돋아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처절하고 고독한 일인지도 모르니. 그러니 틈만 나면 너를 찾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저 침묵하고 인내하고 노력할 뿐이다. 너를 떠올리며.

 

이 얼마나 부드러운 움직임인가.그렇게 박순신은 잠시 동안 나의 상상력이 넘어선 곳에서 움직이면서 자유자재로 날갯짓을 했다. 저녁노을에 비친 날개의 움직임은 너무도 아름답고 힘차서, 박순신이 날아가 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따금 나도 네가 날아 가버리지 않을 지 걱정된다. 네가 스무 살 내게 남기고 간 것과 네게 뺏긴 것을 생각한다. 너와 말썽쟁이지만 매력덩어리인 너의 친구들로 웃는다. 너는 여전히 아름답고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겠지. 박 군, 나는 너의 강직함과 포용력과 유연함을 사랑한다. 영원한 소년인 나의 박 군, 너는 여전히 나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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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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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단편 「겨울꿈」에서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F.스콧 피츠제럴드였다. 과연, 설사 같은 사람과 다시 연애를 한다 해도 절대 똑같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단순한 명제를 인정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지난 사랑을 탐하며 아파했던가.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린 후 방황하고 아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정의 깊이에 비례되는 상실감과 허무함, 그리고 두려움일까. 대부분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현실에 근거한 사실을 믿기 싫은 우리는 때때론 사랑을 시작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사랑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괴롭고 외로운 싸움이오, 다만 한 줌의 아름다움과 추억만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데. 대체 그 누가 사랑을 가장 쉽고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했던가. 아름답고 순수한 모리스를 바라보며 새삼 탄식에 젖게 된다.

 

『모리스』는 포스터의 작품 중 거의 제일 저평가 된 작품인데, 이 책을 둘러싼 가시적인 이슈들 - 동성애 소설이라는 꼬리표와 자전적 소재라는 자극점 등 - 만으로 바라보기엔 너무도 아까운 글이다. 『모리스』에는 포스터의 문체와 역량이 그대로 담겨 있다. 서사구조는 간단하고 내용은 명료하면서도 문장은 우아하고 냉철하다. 특히 어떤 선입견에 쌓여 읽기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정직하고 아름답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올해 읽은 최고의 연애소설 중 하나로 꼽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대체 모리스가 사랑을 갈구한 사람이 남성이라는 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 이야기는 한 남자가 사랑의 과정을 지나면서 어른이 되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며 동시에 애절한 연애소설일 뿐인데.

 

주인공 모리스는 다소 즉흥적인 면이 있지만 다정한 성품과 단정한 생김새, 어디를 보나 촉망받는 청년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클라이브는 예민하고 유약한 편으로 모리스와는 정반대에 가깝다. 학창시절에 만난 둘은 호의와 호감과 신뢰를 넘어선 무언가가 존재했다. 클라이브의 사랑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것과 닮아있다. 여성을 폄하하고 남성을 우상시하는 것, 아름다운 것을 흠모하는 것, 남성의 몸과 근육과 뼈를 지지하는 것, 그럼에도 플라토닉한 사랑의 지향까지도. 클라이브를 보면, 누군가 내게 동성애는 자기애의 연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모리스의 진솔함과 남자다움을 탐했지만 그에게 사랑을 던지지는 않았다. 모리스의 손길은 클라이브를 안정시켰으나 욕망에는 답해주지 못한다. 결국엔 모리스의 탐욕과 다정함을 경멸하게 된다. 그렇게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홀로 둔 채 스스로 안정된 구조와 보통의 삶이 주는 안위로 돌아온다.

 

자신이 더 많은 마음을 받은, 미련 없는 지나간 사랑은 (극단적인 언어지만 일종의)가해자에겐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긴 미련을 지니고 더 깊은 상처를 받은 피해자에게는 아픔으로 남는다. 클라이브는 아는 것도 많고 섬세했지만 유약한 남자였다. 심지어 지나간 애정을 우정 따위로 포장해서 모리스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구원하려드는, 차갑고 연약한 손을 뻗기도 한다. 그런 그의 앞에서 모리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무릎에 기대던 그 머리카락이 빠져나갔을 때, 자신의 손을 거절하는 그의 얼굴 앞에서, 모리스는 어떤 절망에 빠졌을까. 어쩌면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상우가 내뱉었던 대사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처연하게 말했을까.

 

그렇게 모리스는 클라이브에게서 사랑을 달콤함을 오만함을 다정함을 배웠고 그 깊이만큼 절망한다. 그런 모리스를 앞에 두고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둔탁한 아픔이 가슴께를 강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득한 눈빛과 안온한 공기와 순간적인 행복감. 그런데 그때의 찬란함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닐 때, 아름다웠던 그때의 너와 나는 이제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질 때 우리는 압도적으로 서글퍼진다. 그리고 애정의 깊이는 종종 무관심이 아닌 증오나 혼동의 깊이로 돌이켜지기도 한다.

 

지나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배움이 없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지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음란한 욕망, 두서없이 나누던 기나긴 대화들도 돌이키지 않으니.

 

작가의 냉담하고도 부드러운 말투 앞에서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이 책이 어째서 연애소설인지, 그리고 본질까지도. 어쩌면 이 책은 우리를 관통했던 어떤 순간을 기록하는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면서 접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키스의 부드러움, 사랑하는 이의 손의 감촉, 그때의 수줍음과 설렘, 희망의 시기를 지나 관계의 정착, 그리고 균열. 몰이해와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상처를 수습하고 다음 사랑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 그렇게 반복되는 사랑의 과정 말이다.

 

그러나 모리스의 사랑은 단지 사랑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 시대상, 동성애에 대한 주의의 시선들, 가족과 집안과 사회적 직위 등 작가는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모리스를 시대 안으로 녹여낸다. 사랑이 지나간 것을 알아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리스를 때론 동정하면서도 줄곧 냉담하게 바라본다. 그에게 비로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을 때 그는 먼 곳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기 안의 두려움과 연약함과 둔함을 안고서 알렉을 선택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렇다. 그것이 모리스가 그를 찾아간 이유였다. 그것은 더는 읽지 않을 책을 덮어 두는 일이었으며, 그런 책은 곁에 두고 먼지만 쌓이게 하느니 그냥 덮어 버리는 편이 낫다. 그들의 과거의 책은 책장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기, 어둠과 죽어 가는 꽃들에 감싸인 여기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렉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새것과 옛것이 섞이는 고통을 겪을 수 없었다. 모든 타협은 속임수고 그러므로 위험하다. 이제 모든 걸 털어놓았으니 그는 자신을 키워 준 세계를 떠나야 했다.

 

모리스는 이제 자신의 사랑이 지나갔다는 것을 인정한다. 피츠제럴드의 말처럼 세상에 같은 사랑을 없다는 사실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과 결별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나 여태껏 그 책을 더 읽을 수도 덮을 수도 없었던 그가 이토록 의연해질 수 있다니. 마치 그것이 어떤 성장처럼 느껴졌다. 아, 여전히 소년에 불과했던 그가 사랑이 지나간 후 -혹은 새 사랑을 앞두고- 남자가 되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포스터는 모리스와 알렉이 떠난 후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기대치가 부담스러워 작용한 의도적인 희미함인지, 자기 자신도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희망을 담은 침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둘이 십자가를 진 채 걷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죄악이 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 처참한 일이 아닐까.

 

그 뒤에 남은 흔적이라곤 조그맣게 쌓인 달맞이꽃의 꽃잎뿐이었다. 꽃잎들은 꺼져 가는 모닥불처럼 땅 위에서 애처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죽을 때까지도 모리스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블루 룸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고사리 풀숲은 물결쳤다. 영원한 케임브리지 어딘가에서 친구는 온몸에 햇살을 입고 그에게 손짓하며 5월 학기의 소리와 향기를 떨치기 시작했다.

 

모리스의 뒷모습을 클라이브는 이렇게 회상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사랑의 과정의 알싸함을 떠올린다. 우리를 관통했던 그 순간들에 대한 기억과 피츠제럴드의 말을 상기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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