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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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팠다. 붉은 반점이 사정없이 몸을 덮었다. 처음엔 손등이었고 그 다음에는 팔, 어깨, 상체에서 하체로 빠르다면 빠르게 느리다면 느리게 퍼져갔다. 처음 며칠은 발병 원인을 찾기 어려웠고 병명도 쉬이 진단받지 못했다. 일주일 후에야 수포가 생기듯 작은 물방울이 드러났고 그제야 의사는 적상건선, 이른바 물방울 건선이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원인은 그 전에 앓았던 심한 인후염이었다. 심한 목감기를 앓았을 때 발생한 열이 미처 몸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피부로 분출되는 식의 병이라 했다. 퍼져가는 속도는 빠르고 범위가 넓어 겁에 질렸으나 의사는 프로페셔널한, 그래서 조금은 인위적이고 귀찮은 듯한 어조로 가렵지 않고 옮지도 않는 것이며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흉터없이 깨끗히 나을테니 걱정말라고 말했다. 그렇게 꼬박 한 달 간 발병과 진단, 치료에 전념했다. 피부과 약은 몹시 독해서 거의 매일 밤 꿈없이 잠 세계를 헤맸고 아침이 되면 몸은 무겁고 정신은 몽롱했다.


배 위의 반점이 분홍색일 때는 그냥 두드러기쯤으로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색과 모양이 좀 끔찍해졌다. 처음에는 분홍빛이다 과일처럼 발갛게 무르익은 뒤 검붉어졌다. 그러다 나중에 연한 갈색으로 변하며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크기가 다양한 반점들은 테두리 쪽 색이 유독 진해 타다 만 종이나 화려한 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허물이 내려앉고 벗어지길 반복했다. 그 위에 다시 '인설'이라 불리는 살비듬이 내려앉아 흉하게 파들거렸다. 몇몇 부위에 벌레 물린 자국이 생긴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잃기 전에는 그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것들이 있다. 그것을 구태여 소홀히 하려는게 아니라, 정말로, 진심의 무구함으로 내게 그것이 있는 줄도 차마 몰랐던, 그런 것들이 있다. 제법 하얀 편이고 점 하나 없고 아무 화장품이나 써도 어디서 자도 '피부가 뒤집어진다'는 체감을 해본적이 없는데다 체모까지 옅어 건강하고 깨끗한 피부에 속한다는 것을 아주 모르진 않았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이 매일 보는 거울 속 지겨운 얼굴처럼 익숙하고 뻔한 것이라 그것이 소중하다는, 소중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붉은 반점이 돋아나는 피부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낫는거라고,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려 해도 초조함과 불안감이 해일처럼 밀려와 한번씩 사람을 오롯이 적시고 떠나갔다. 인터넷을 헤매며 정보를 찾으려 애썼다. 의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사는 나만큼 내 병에 대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절실하지 않다는 불만과 불안 때문이었다. 온갖 좋다는 영양제를 알아보고 생활 습관을 고치려 애쓰고 비타민을 종류별로 비교했다. 당연히 술은 안 마셨고 커피를 대폭 줄이고 케일과 시금치를 사다 야채주스를 만들어 먹었다. 붉은 반점보다 두려운 건, 더딘 회복 속도였고 그보다 절망스러운 건 깨끗했던 피부가 어떘는지 자꾸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픔의 본질은 외로움인지라, 자꾸만 처지를 잊고 술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거절하는 것이 짜증스러웠고 밤을 누리고 싶어도 쫓아오듯 잡아채는 수면이 서글펐고 커피마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울적했다. 정확히 6주가 지나자 반점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이제 제 볼 일이 끝났다는 듯한 가볍고 미련없는 실종이었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우스운 것이라 막상 그렇게 되니 이제는 반점이 있던 위치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3개월이 걸렸다고 했고 누군가는 꼬박 반년이 걸렸다더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조금은 느슨해졌을 때였다. 갑자기 오돌토돌 두드러기가 올라오며 온몸이 가려워졌다. 피부과에선 여러 원인을 짚어주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원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젠 증세가 바뀌어서 또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득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재발에 재발을 할 거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멍했다.


이틀 뒤였다. 밤중에 가려움을 참지 못해 잠결에 다리를 긁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다리가 온통 시꺼멓게 물들어있었다. 폭행 피해자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온 다리와 팔뚝에 피멍이 들었다. 아직 파랑색인 것도 있었고 보랏빛으로 바뀌는 것도 점상출혈처럼 생긴 자국도 있어다. 심지어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은 곳도 있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젠 화를 내기에도 지쳤었다. 그러고 나서 열흘쯤 지난 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아주 오랜만에 참 원없이 울었다. 


- 나는 행복해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랄까 거짓말을 분간 못하는 기계를 시험하듯 건넨 말이었다. 시리는 건전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침착하게 답했다.

- 덕분에 저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 .......

그저 매뉴얼대로 답하는 걸 알면서도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약간 반감이 일었다.

- 아니에요, 슬퍼요.

나는 앞의 말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보았다. 어린아이 입에 고기 넣어주듯, 시리가 인간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말한 거였다.

-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책이 그만큼 '감동적'이었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쓰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뻔한 수사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이 책에 대한, 이 순간에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그저, 그저 아프고 기뻤고, 슬펐고 그러다 눈물이 났다.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도 아니면 내가 양파를 써야만 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이유였고 아무것도 이유일 수 없었다. 


에반의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찬성이 에반의 입매, 수염, 콧방울, 눈썹 하나하나를 공들여 바라봤다. 그러자 그 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걸까?

- .......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 .......

- 있잖아, 에반. 만약에 못 참겠으면....... 나중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면 형한테 꼭 말해. 알았지?  - 노찬성과 에반


그제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리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가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꺠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 건너편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일한 나이대의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사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내가 중하게 느끼는 것이 상대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안도가 되는 일이다. 김애란을 처음 읽은 것이 2005년이었으니 그럭저럭 12년이 지난 셈이다. 12년. 한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 자라서 기고 걷고 뛰고 유치원을 지나 학교를 들어가 원통의 부피나 방정식을 배우는 시간이자 열두 마리의 동물이 달리기를 한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를 회귀回歸하는 주기다. 그녀는 작가로, 나는 독자로 우리는 부득이하게 함께 자랐다. 첫 소설집에서는 섬뜩할만큼 고시원의 눅눅한 삶에 대해 묘사했던 그녀가 5년 전 소설집에서는 사회생활과 여행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날 거리를 배회하는 연인 대신(「건너편」) 집은 있으나 그것이 내 것이 아닌, 낡고 지리한 삶(「입동」)에 대해 쓴다. 부모의 죽음(「가리는 손」)을 담고 배우자의 죽음(「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을 가정해보고, 아이를 키우는 삶의 변화와 그 뿌듯한 경외감과 속된 희생정신(「입동」,「가리는 손)」)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자꾸만 상실을 되짚는다(「노찬성과 에반」). 아주 천천히, 나이 들고 있고 삶의 양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제는 학점과 학과와 고시원에서의 삶보다는 갚아야 할 빚과 건강과 부모님의 죽음과 아이를 키우는 삶에 대해 엿보고 그것을 더 큰 삶의 층위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처음엔 가난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삶과 시부모와 내 부모와 배우자의 사라짐에 대해서 생각한다(김애란 작가에게 아이가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연히 어디선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읽은 것 같다). 나는 감히 그녀의 실망과 권태와 환멸과 체념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불안과 불만과 음울과 슬픔을 위로한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함께 서서히 나이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 입동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눅누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 가리는 손 


문학은, 글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예컨대 음악은, 노래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폭발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반면 글은 그렇지 않으니까. 140자의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해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내 기준에선 140자는 감정이나 사유를 담아내긴 너무나 빈곤한 그릇이었으니. 춤이나 연극이나 발레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데다 글자 사용률이 아무리 늘어도 책을 읽는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니까.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품을 들이고 시간을 소비하는 식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향유할 수 있으니까 등등.


때때로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자기 자신의 빈껍데기까지 적나라하게 안다는 이유로 마음껏 자기혐오를 하다 나마저 나를 너무 싫어한다면 그건 조금 가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연민한다. 그리고는 자기연민의 껍질을 입은 비겁함에 또 다시 스스로가 싫어지는 식이었다. 줄에 매달린 자석의 추처럼, 둘 사이를 왔다갔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비겁하고 저열하고 비참하고 졸렬해서 마지막엔 늘 도망치게 된다. 가끔씩, 도피와 도망의 끝에서 어떤 것을 만난다. 예를 들면 글과 같은 것들.  


우리가 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있다. 우리가 글을 문학이라 부르고 문학이 예술로 포섭되는 이유가 있다. 글이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거나, 나 자신을 구원한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라 하더라도 맥이 탁 풀려 차라리 울어버리게 만드는, 그래서 또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순간들이 책 속에 존재한다. 위안인지 위로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그도 아니면 동지의식일지는 모르나 어찌됐건 글을 읽어서 다행이라고, 이런 글을 만날 수 있으니 앞으로도 책을 읽겠다고 스스로에게 탄식하는 순간들이 분명 있다. 그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이, 이 책을 읽을 때 일어났다.


두드러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줄어가고 간지러움도 한결 나아졌다. 나 자신과 의사의 진료 기록 외에는 누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병은 느릿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제의 진료시간에 의사는 여름은 자외선이 많은 계절이라 회복이 빠른거라는, 위로인지 격려인지 아니면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해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여름을 좋아해본 적 없는데 바깥이 여름이라 다행이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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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7-07-2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괜찮아요, shining님?😁

Shining 2017-07-24 22:17   좋아요 0 | URL
이제 괜찮아요. 아직도 여분의 약이 남긴 했지만 증세는 모두 사라진 것 같아요. 정확히 두 달쯤 걸렸네요. 여름, 너무 덥고 힘드네요. 저도 이런데 아이리시스님은 몸이 더 무겁고 그만큼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돼요 :( 건강한거죠?

2017-07-2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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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긴 해도 현재에 이르러 애거서 크리스티는 과소평가된 부분이 있다. 이해는 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은 코난 도일의 것처럼 괴팍하고 뛰어나지만 그보단 정중하며 앨러리 퀸처럼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만큼 공포스럽거나 음울하지 않으며 반 다인처럼 자신의 교양과 지식을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다. 모리스 르블랑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며 존 딕슨 카가 그러했듯 기과한 사건을 다루지도 않는다. 추리소설 계에 드문 여류소설가임에도 각별히 -이른바- 여성적인 시각으로 글을 쓰는 타입도 아니다. 에르큘 포와로 탐정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비非 영미권 출신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신뢰보다는 불신과 의아함을 품게 하며 마플 여사는 안락의자에 앉아 사건을 해결하는 카우치형 탐정인 할머니다. 거기에 사건의 주무대가 저택이라던가 선상, 별장 등이며 대개는 계층보다는 계급별로 나뉜 인물에 대해 다루기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고루하고 케케묵은 소설로 읽히기 쉽다. 때문에 혹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제인 오스틴 소설'이라거나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라는 식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모두 이해할만한 반박이고 어느 부분에선 맞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경애하고 지지해왔다고 말한다면 '왜'냐고 물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내게는 몇 개의 리스트가 있다. 우선 첫만남에 기선 제압(?)을 하기엔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만한게 없다. 화려하면서도 연극적이고 동시에 반전이 대단하다. 스포일러를 밟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고 당신은 아마 반드시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사건』이 있다. old but gold라고 하지 않던가. 클래식은 클래식이다. 이 세 권은 언제나 실패하지 않았다. 반전이 중요한, 스릴러적 요소를 중요시한다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누명』, 『장례식을 마치고』등이 준비되어 있다. 블록버스터식 스케일을 읽고 싶다면 『빅 포』가 포와로 탐정을 사랑하게 된 이에게는 『커튼』을 슬쩍 놓고 간다. 코지 미스터리처럼 소소하고 일상적인, 잔인하지 않은 이야기가 끌린다면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코끼리는 기억한다』에 만족할지 모른다. 


단, 주의할 점이 있다. 당신에게 만약 클래식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크리스티의 영향권 아래 있기 떄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시각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면 안 된다. 이미 수많은 책과 영화가 이 소설들의 모티프나 트릭 등을 따왔기 때문에 당신에겐 '생각보단 심심하거나 뻔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그건 그만큼 크리스티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지 그녀의 것이 각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거의 모든 장르 영화는 히치콕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이제는 히치콕이 조금은 평범해보이는 마법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한 번 더 묻는다. 그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점은 다양함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살아 생전 대략 100권의 책을 쓴 작가다. 게다가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글을 썼으니 그녀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만큼 책이 가진 성격 역시 바뀔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녀의 다양성 역시 장점이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진짜 정수는 바로 이런 소설들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비뚤어진 집』,『끝없는 밤』그리고『봄에 나는 없었다』와 같은 글 말이다. 


앞선 두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 이름으로 발표된 본격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고 『봄에 나는 없었다』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책으로 한 사람의 심리를 집요하게 써내려간 마치 에세이같은 서스펜스물이다. 앞선 두 글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인간이라는 우물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호들갑스러운 살인사건이나 마루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피나 잔인한 살인수법, 기묘한 트릭이나 수상한 용의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이상하고 불안한, 불온하고 기묘한 사람과 그것에 조금씩 숨통이 조여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유를 모르고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지막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어디선가 차갑고 무기질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즉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한순간 멍해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글을 읽고 나면 범죄나 잔인한 수법이나 사람의 잔인성에 놀라기보단 그저 사람이라는게 이토록 무섭고 무겁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답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조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잉여의 시간동안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즉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하게 된다. 다정하고 온순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아름답게 나이들어가는 자기 자신. 그녀는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몇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은 잘 해결될거라 믿는 낙천주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없는 그 시간, 읽을 책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하는 일도 없는 여행의 시간에 조앤은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실은 기만이나 위선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을, 자신이 얼마나 가혹하고 못된 사람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엄마는 아빠가 사무실에서 노예처럼 일만 하게 내버려뒀어요. 뻔히 알았으면서도요. 아빠는 오랫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하셨다고요.”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니?”

“진작 거기서 아빠를 빼냈어야죠. 아빠가 그 일을 싫어하는 걸 모르셨어요? 엄마는 아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이제 그만해라, 토니. 당연히 나는 네 아빠를 잘 알아. 너보다 훨씬 많이 안다.”

“글쎄요, 아닌 것 같은데요. 가끔 난 엄마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로드니는 성급하게 대꾸했다. “지금 그는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야. 조앤, 사랑에 대해 그렇게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있을까! 그녀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건 사랑 아니에요.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러자 로드니는 아주 뜻밖에도 조앤에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조앤.“ 그러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조용히 나갔다.


“이제 특별히 한마디만 더 하겠다.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 돼! 인생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 돼!”


수없이 반추되는 기억들을 곱씹으며 그녀는 자신의 이기적임과 저열함과 속물근성을 깨닫고 몸소리치며 참회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녀의 이타심과 관대함과 공명정대함은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끔 보통의, 원래의 그녀로 돌아온다. 이제 독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그녀를 쉽게 비난한다. 그녀 자신이 느낀 자신의 부족함, 저열함, 비겁함과 졸렬함, 이기심 등에 같이 혀를 찬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녀를 한심하게도 바라보면서 사람이란 이토록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간은 그리 많은 변화나 변혁을 하지 않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변화에 대한 글이 각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앤 주변의 인물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해도 된다. 그렇게 제 3자가 되어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만약 타인의 것이라면, 오롯이 순수하게 타인의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고 또 다른 당신의 것이고 내 것이라면. 진짜 이야기가 되는 시간은 너의 이야기가 내 것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애거서 크리스티는 마지막 단락을 넣음으로써 이 이야기가, 이 저열함과 비겁함과 이기심이 오롯이 조앤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조앤과 로드니와 에이버릴, 바버라을 비롯해 종국에는 우리 모두를 끌어들인다. 어둠 속에서 앉아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킬킬대고 고고한 척 하던 우리에게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돌아서며 조명이 떨어진다. 


나는 조앤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함부로 타인의 안위와 행과 불행을 단정짓고 값싼 연민과 자기 변호, 자기 연민과 합리화 등으로 나이테를 만들고 사는 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봄에 없었던 것만은 조앤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모든 계절에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렇게 조앤을 향한 거부감을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섬뜩함을 선사한다. 그것도 아주 점잖은 방식으로 말이다. 바로 이게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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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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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남자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가 대뜸 자기 어머니가 근처에 왔다며 연락을 했다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다지 편할 리 없는 자리였고 멀리서 오랜만에 온 분이라면 내가 비켜드리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이미 남자친구가 이야기를 해둬서 어머니가 점심 사줄테니 같이 나오라고 하셨단다. 애인의 부모님을 만난다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긴장을 안고 나갔지만 그렇게까지 많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들어온 일면으로 추측해보건대 상당히 진보적이고 관대하신 분이라고 생각할만한 구석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례적인, 이야기 많이 들었다, 반갑다, 같이 밥 먹으니 좋다, 어서 먹어라, 라고 한 이후로는 내내 자신의 아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둘만이 알 만한 집안의 대소사나 친척의 결혼식이나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소재 어디에서도 나를 끼워주겠다거나 배려하겠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었다. 깨작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젓가락질을 했고 차라리 내가 들고 있는 초밥의 밥알 수를 세는게 더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는 이따금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밀어주거나 이거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녀를 배웅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가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편혜영의 <홀>을 읽으며 문득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홀>은 아내와 여행을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는 죽고 사지가 마비된, 혼자가 된 오기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남는 것이라곤 시간 뿐인 삶에서 끊임없이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의 냄새나 자신이 좋아했던 그녀의 성격이라던가 대화를 생각하며 그 사이사이 자신의 삶을 끼워넣어 기억해낸다. 그가 아내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오기는 자신이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부모님이 안 계시고 아직은 뚜렷한 직책이 없는 직업에 모아둔 돈도 변변찮다.


장모가 한 말이 내내 맴돌았다. 반듯하다는 말, 자격지심이 있을까 걱정했다는 말. 그 말들이 장인이 식사 내내 했던 노골적인 핀잔보다 더 마음을 후벼 팠다. 장모는 간파한 것 같았다. 오기는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질 만한 인간이라는 걸, 그다지 반듯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걸 말이다. 장인은 그걸 핀잔했고 장모는 세련된 방식으로 상기시켰다.


처음 오기는 대놓고 핀잔을 주고 못마땅한 기색을 과시하는 장인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적어도 솔직한 장인보다는 친절하고 조용한 그러나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마치 점수라도 매기듯 커트러리를 들어올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장모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대개 그것은 거짓에 가깝다. 이미 우리는 희미한 위화감과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다만 그것을 깊게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미처 잊어버렸거나 혹은 잊어버리려 노력했기 때문에 ‘몰랐다’고 착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기가 장인과 장모에게 가졌던 인상이나 나의 점심 식사처럼 말이다. 


그랬다. 내가 받은 인상도 오기의 것과 유사했다. 말끔한 옷차림과 상냥한 말투, 다정한 표정으로 가장한, 너무나 예의있고 상냥한 적의였다. 어찌나 배려있고 친절한지 무시보단 차라리 멸시라고 해야할 느낌이었다. 그건 여러모로의 충격이었다. 스스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나는 늘 연장자로부터 신뢰받는 타입이었다. 그 때 나는 어렸고 남자친구 역시 그랬기에 우리는 결혼 등의 구체적인 미래를 꿈꾼 적이 없었다. 즉 그녀에게 내가 점수를 얻을만한 분명한 이유도 없었지만 적지 않은 확률로 점수를 잃은 행동조차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 황당했던 건 남자친구는 그 기이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를 못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봐봐,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표정이 너무나 진심이라 할 말도 없었다. 그 날 나는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 선과 그가 알지 못하는 선을 모두 봐버린 기분이었다. 하나를 안다고 결코 열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는 열 가지 이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와 계속 만나고 어쩌면 결혼을 하는 삶을 내가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대답은 늘 '아니'었고 거기엔 몇몇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 날, 그의 어머니와의 식사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기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그 날의 일을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기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 뒤로도 그럭저럭 잘 살았으니까. 아내의 커리어는 매번 실패하거나 좌절하고 엎어지지만 오기는 제법 나쁘지 않은 줄을 잡아 기회를 얻고 정교수가 되었다. 누군가는 오기를 기회주의자라고 하고 의외로 약은 구석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오기는 아내와 직업과 집을 얻음으로써 삶을 누렸다. 어쩌면 그렇게 다소 심심하지만 그래도 무난한 삶을 이어갔겠지만 사고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좌절 그리고 부채의식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얼마간의 희망. 그는 폴이 되고 장모는 점차 애니처럼 변해간다(<미저리>의 두 주인공). 


장모는 만일의 경우 오기가 창으로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 생각은 몹시 불쾌했지만 왜 이제껏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지 후회하게 했다.


집에는 오기와 장모만 남았다. 앞으로 오랫 동안 그럴 것이었다. 장모는 많은 걸 알고 있어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오기에게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가 안다고 믿었던 걸 모두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오기가, 도대체 아내가 알고 있던 게 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밀어넣을 수 있고 우리가 타인을 밀어넣을 수 있는 구멍 말이다. 인간은 그런 식의 빈구석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야말로 내면의 진실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오기는 수업 시간이나 강연 때 자주 써먹었다. 


구멍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커질 수도 깊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구멍의 크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 거기에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구멍. 우리가 들어갈 수 있고 타인을 밀어넣을 수도 있는 구멍 말이다. 오기는 지리학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남에게 그럴듯하게 역설한 진실 한조각도 잊고 살았다. 홀 속에 몸을 누이는 순간 오기는 아내의 울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녀가 울었던 이유를 짐작하기보단 그녀의 울음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것을 상기한다. 오기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타인은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얼마나 당연하고 다행스럽고 잔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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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5-2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다 알 수 없지만,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알려고 애쓰는 건 좀 다르겠죠 다는 모르더라도 알려고 애쓰는 게 더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은 거군요 남한테 그런 걸 바랄 수도 없겠습니다 남의 마음은 남의 것이어서...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면 남이 애쓰지 않아도 그런가 보다 해야겠지만, 이것도 쉽지 않군요 왜 모르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어떤 때는 말하지 않아서 모를 때도 있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말해야 아는 거냐 생각하겠습니다

남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해도 자기 마음은 자기 것이니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자신은 남을 알려고, 알아주려고 조금은 애쓰는 게 좋겠죠


희선

Shining 2017-05-28 23:59   좋아요 0 | URL
하나를 보고 열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한 가지는 열 가지 이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는 건 제 입버릇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런 점들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 사이에 바로 그 한 가지, 이 소설의 예시로서는 구멍을 봐버리면 이전만큼 서로를 친숙하거나 은밀하게 느껴지기가 힘들죠.

사실 상대를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믿거나, 완벽히 알아야 한다고,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귀납법의 결과이기도 하고 체념이기도 하고 비관주의일 수도, 어떤 쪽이든 경험에 의하면 이제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과 애정과 존중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서로를 완벽히 아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관계에 더 큰 도움이 되겠죠.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요 :)
 



나이를 실감하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다. 내 경우엔 조카가 자라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본 게 몇 년 전이구나 할 때 가장 절실하게 실감한다. 전자는 뿌듯함과 아련함과 다행스러움이 섞여있다면 후자에는 전적으로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스민다. 누군가가 어떤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부진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쉼없이 움직였지. 내가 이렇게 제 자리에 주저않아 있을동안.' 하고 생각했다. 선거 역시 따지자면 후자와 비슷하다. 벌써 총선을 몇 번, 대선을 몇 번, 심지어 보궐 선거에 투표도 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 제법 많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년 전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아침에 입었던 옷과 신었던 신발과 눈이 채 녹지 않은 곳을 밟으며 걸어갔던 그 냉기와 혹독함까지도. 후보자에는 늘 되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늘 나쁜 선택지만 고른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가 함께 견뎌야 할 투표의 결과가 혹독해 나는 늘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승리나 획득의 경험이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실감한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껏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도 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기는게 아니라 견디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우린 늘 나쁜 선택지만 뽑았으니까. 하지만 어렵사리 거둬낸 첫 걸음은 그 값만큼이나 무척이나 맛있었다. 과장하자면 황홀했던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어제 아침은 그 날 아침과는 달랐다. 아마 5년 뒤에도 어쩌면 그 뒤에도 역시 어제를 기억하겠지. 어제 입은 옷과 신었던 신발과 취임사를 보던 사람들의 표정과 비온 후 오랜만에 깨끗했던 공기까지도. "2017년 5월 10일, 대한민국이 다시 시작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울컥했을 때, 새삼 모두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산재해있는 문제는 너무나 많고 크고 무겁다. 반드시 돌아서는 사람이 있을테고 기다리지 못해 지쳐 떨어져가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발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다시는 방관자로서 혹은 회의론자를 가장한 비겁자로 지내지만은 않겠다. 적어도 나만은 그래야 한다고 어젯밤 생각했다. 맹신이 아니며 지지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나쁜 선택지만 뽑아왔던, 말이 안 되는 말만 들어왔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는게 그것이 대견할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새로운 시작, 하고도 첫 날이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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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아침엔 늘 부족하다. 저녁형 인간이라 평생을 그러해왔지만 요샌 새삼스러울 정도로 그 간극이 심하다. 밤에 깨어있다고 특별히 무얼 더 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늘 생각하는 건 졸려, 보다도 그냥 차라리 잘 걸, 에 가깝다. 멀뚱히 눈만 뜨고 괜히 책장을 뒤적거리거나 더는 정리할 것도 없는 서랍을 열고 닫는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걸까. 오늘은 진짜 진짜 안 마시겠다고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아침의 다짐은 밤이 쓰러트리고 밤의 결심은 아침에게 매일 패배한다. 


잠과 커피, 손거스러미와 두통, 무기력증과 허무함, 비어버린 열정의 잔, 미지근한 냉소의 그릇, 진심이 아닌 상냥함과 친절하지 않은 진실. 지독하게 얽혀 끝과 끝을 모르는 실타래를 풀어내기보단 그냥 통째로 몽땅 다 어딘가에 버리고 싶어진다. 며칠 전 본 영화 <라이프>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 게다가 그 웅장하고 비장하고 불온한 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오는 곡이 Norman Greenbaum의 <Sprit in the sky>라니. 비겁함에 느끼던 수치조차 사라진 밤, 잠이 오지 않는다.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When I lay me down to die 
Goi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Goi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I'm gonna go when I die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Prepare yourself you know it's a must 
Gotta have a friend in Jesus 
So you know that when you die 
He's gonna recommend you 
To the spirit in the sky 
Gonna recommend you 
To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you're gonna go when you die 
When you die and they lay you to rest 
You're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Never been a sinner I never sinned 
I got a friend in Jesus 
So you know that when I die 
He's gonna set me up with 
The spirit in the sky 
Oh set me up with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I'm gonna go when I die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I'm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 Norman Greenbaum, Spirit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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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0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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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4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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