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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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명실상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긴 해도 현재에 이르러 애거서 크리스티는 과소평가된 부분이 있다. 이해는 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은 코난 도일의 것처럼 괴팍하고 뛰어나지만 그보단 정중하며 앨러리 퀸처럼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만큼 공포스럽거나 음울하지 않으며 반 다인처럼 자신의 교양과 지식을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다. 모리스 르블랑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며 존 딕슨 카가 그러했듯 기과한 사건을 다루지도 않는다. 추리소설 계에 드문 여류소설가임에도 각별히 -이른바- 여성적인 시각으로 글을 쓰는 타입도 아니다. 에르큘 포와로 탐정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비非 영미권 출신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신뢰보다는 불신과 의아함을 품게 하며 마플 여사는 안락의자에 앉아 사건을 해결하는 카우치형 탐정인 할머니다. 거기에 사건의 주무대가 저택이라던가 선상, 별장 등이며 대개는 계층보다는 계급별로 나뉜 인물에 대해 다루기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고루하고 케케묵은 소설로 읽히기 쉽다. 때문에 혹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제인 오스틴 소설'이라거나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라는 식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모두 이해할만한 반박이고 어느 부분에선 맞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경애하고 지지해왔다고 말한다면 '왜'냐고 물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내게는 몇 개의 리스트가 있다. 우선 첫만남에 기선 제압(?)을 하기엔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만한게 없다. 화려하면서도 연극적이고 동시에 반전이 대단하다. 스포일러를 밟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고 당신은 아마 반드시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사건』이 있다. old but gold라고 하지 않던가. 클래식은 클래식이다. 이 세 권은 언제나 실패하지 않았다. 반전이 중요한, 스릴러적 요소를 중요시한다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누명』, 『장례식을 마치고』등이 준비되어 있다. 블록버스터식 스케일을 읽고 싶다면 『빅 포』가 포와로 탐정을 사랑하게 된 이에게는 『커튼』을 슬쩍 놓고 간다. 코지 미스터리처럼 소소하고 일상적인, 잔인하지 않은 이야기가 끌린다면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코끼리는 기억한다』에 만족할지 모른다. 


단, 주의할 점이 있다. 당신에게 만약 클래식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크리스티의 영향권 아래 있기 떄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시각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면 안 된다. 이미 수많은 책과 영화가 이 소설들의 모티프나 트릭 등을 따왔기 때문에 당신에겐 '생각보단 심심하거나 뻔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그건 그만큼 크리스티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지 그녀의 것이 각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거의 모든 장르 영화는 히치콕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이제는 히치콕이 조금은 평범해보이는 마법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한 번 더 묻는다. 그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점은 다양함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살아 생전 대략 100권의 책을 쓴 작가다. 게다가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글을 썼으니 그녀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만큼 책이 가진 성격 역시 바뀔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녀의 다양성 역시 장점이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진짜 정수는 바로 이런 소설들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비뚤어진 집』,『끝없는 밤』그리고『봄에 나는 없었다』와 같은 글 말이다. 


앞선 두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 이름으로 발표된 본격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고 『봄에 나는 없었다』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책으로 한 사람의 심리를 집요하게 써내려간 마치 에세이같은 서스펜스물이다. 앞선 두 글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인간이라는 우물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호들갑스러운 살인사건이나 마루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피나 잔인한 살인수법, 기묘한 트릭이나 수상한 용의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이상하고 불안한, 불온하고 기묘한 사람과 그것에 조금씩 숨통이 조여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유를 모르고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지막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어디선가 차갑고 무기질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즉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한순간 멍해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글을 읽고 나면 범죄나 잔인한 수법이나 사람의 잔인성에 놀라기보단 그저 사람이라는게 이토록 무섭고 무겁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답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조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잉여의 시간동안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즉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하게 된다. 다정하고 온순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아름답게 나이들어가는 자기 자신. 그녀는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몇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은 잘 해결될거라 믿는 낙천주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없는 그 시간, 읽을 책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하는 일도 없는 여행의 시간에 조앤은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실은 기만이나 위선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을, 자신이 얼마나 가혹하고 못된 사람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엄마는 아빠가 사무실에서 노예처럼 일만 하게 내버려뒀어요. 뻔히 알았으면서도요. 아빠는 오랫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하셨다고요.”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니?”

“진작 거기서 아빠를 빼냈어야죠. 아빠가 그 일을 싫어하는 걸 모르셨어요? 엄마는 아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이제 그만해라, 토니. 당연히 나는 네 아빠를 잘 알아. 너보다 훨씬 많이 안다.”

“글쎄요, 아닌 것 같은데요. 가끔 난 엄마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로드니는 성급하게 대꾸했다. “지금 그는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야. 조앤, 사랑에 대해 그렇게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있을까! 그녀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건 사랑 아니에요.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러자 로드니는 아주 뜻밖에도 조앤에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조앤.“ 그러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조용히 나갔다.


“이제 특별히 한마디만 더 하겠다.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 돼! 인생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 돼!”


수없이 반추되는 기억들을 곱씹으며 그녀는 자신의 이기적임과 저열함과 속물근성을 깨닫고 몸소리치며 참회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녀의 이타심과 관대함과 공명정대함은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끔 보통의, 원래의 그녀로 돌아온다. 이제 독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그녀를 쉽게 비난한다. 그녀 자신이 느낀 자신의 부족함, 저열함, 비겁함과 졸렬함, 이기심 등에 같이 혀를 찬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녀를 한심하게도 바라보면서 사람이란 이토록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간은 그리 많은 변화나 변혁을 하지 않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변화에 대한 글이 각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앤 주변의 인물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해도 된다. 그렇게 제 3자가 되어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만약 타인의 것이라면, 오롯이 순수하게 타인의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고 또 다른 당신의 것이고 내 것이라면. 진짜 이야기가 되는 시간은 너의 이야기가 내 것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애거서 크리스티는 마지막 단락을 넣음으로써 이 이야기가, 이 저열함과 비겁함과 이기심이 오롯이 조앤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조앤과 로드니와 에이버릴, 바버라을 비롯해 종국에는 우리 모두를 끌어들인다. 어둠 속에서 앉아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킬킬대고 고고한 척 하던 우리에게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돌아서며 조명이 떨어진다. 


나는 조앤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함부로 타인의 안위와 행과 불행을 단정짓고 값싼 연민과 자기 변호, 자기 연민과 합리화 등으로 나이테를 만들고 사는 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봄에 없었던 것만은 조앤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모든 계절에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렇게 조앤을 향한 거부감을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섬뜩함을 선사한다. 그것도 아주 점잖은 방식으로 말이다. 바로 이게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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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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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남자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가 대뜸 자기 어머니가 근처에 왔다며 연락을 했다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다지 편할 리 없는 자리였고 멀리서 오랜만에 온 분이라면 내가 비켜드리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이미 남자친구가 이야기를 해둬서 어머니가 점심 사줄테니 같이 나오라고 하셨단다. 애인의 부모님을 만난다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긴장을 안고 나갔지만 그렇게까지 많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들어온 일면으로 추측해보건대 상당히 진보적이고 관대하신 분이라고 생각할만한 구석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례적인, 이야기 많이 들었다, 반갑다, 같이 밥 먹으니 좋다, 어서 먹어라, 라고 한 이후로는 내내 자신의 아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둘만이 알 만한 집안의 대소사나 친척의 결혼식이나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소재 어디에서도 나를 끼워주겠다거나 배려하겠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었다. 깨작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젓가락질을 했고 차라리 내가 들고 있는 초밥의 밥알 수를 세는게 더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는 이따금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밀어주거나 이거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녀를 배웅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가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편혜영의 <홀>을 읽으며 문득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홀>은 아내와 여행을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는 죽고 사지가 마비된, 혼자가 된 오기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남는 것이라곤 시간 뿐인 삶에서 끊임없이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의 냄새나 자신이 좋아했던 그녀의 성격이라던가 대화를 생각하며 그 사이사이 자신의 삶을 끼워넣어 기억해낸다. 그가 아내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오기는 자신이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부모님이 안 계시고 아직은 뚜렷한 직책이 없는 직업에 모아둔 돈도 변변찮다.


장모가 한 말이 내내 맴돌았다. 반듯하다는 말, 자격지심이 있을까 걱정했다는 말. 그 말들이 장인이 식사 내내 했던 노골적인 핀잔보다 더 마음을 후벼 팠다. 장모는 간파한 것 같았다. 오기는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질 만한 인간이라는 걸, 그다지 반듯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걸 말이다. 장인은 그걸 핀잔했고 장모는 세련된 방식으로 상기시켰다.


처음 오기는 대놓고 핀잔을 주고 못마땅한 기색을 과시하는 장인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적어도 솔직한 장인보다는 친절하고 조용한 그러나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마치 점수라도 매기듯 커트러리를 들어올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장모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대개 그것은 거짓에 가깝다. 이미 우리는 희미한 위화감과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다만 그것을 깊게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미처 잊어버렸거나 혹은 잊어버리려 노력했기 때문에 ‘몰랐다’고 착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기가 장인과 장모에게 가졌던 인상이나 나의 점심 식사처럼 말이다. 


그랬다. 내가 받은 인상도 오기의 것과 유사했다. 말끔한 옷차림과 상냥한 말투, 다정한 표정으로 가장한, 너무나 예의있고 상냥한 적의였다. 어찌나 배려있고 친절한지 무시보단 차라리 멸시라고 해야할 느낌이었다. 그건 여러모로의 충격이었다. 스스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나는 늘 연장자로부터 신뢰받는 타입이었다. 그 때 나는 어렸고 남자친구 역시 그랬기에 우리는 결혼 등의 구체적인 미래를 꿈꾼 적이 없었다. 즉 그녀에게 내가 점수를 얻을만한 분명한 이유도 없었지만 적지 않은 확률로 점수를 잃은 행동조차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 황당했던 건 남자친구는 그 기이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를 못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봐봐,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표정이 너무나 진심이라 할 말도 없었다. 그 날 나는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 선과 그가 알지 못하는 선을 모두 봐버린 기분이었다. 하나를 안다고 결코 열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는 열 가지 이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와 계속 만나고 어쩌면 결혼을 하는 삶을 내가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대답은 늘 '아니'었고 거기엔 몇몇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 날, 그의 어머니와의 식사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기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그 날의 일을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기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 뒤로도 그럭저럭 잘 살았으니까. 아내의 커리어는 매번 실패하거나 좌절하고 엎어지지만 오기는 제법 나쁘지 않은 줄을 잡아 기회를 얻고 정교수가 되었다. 누군가는 오기를 기회주의자라고 하고 의외로 약은 구석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오기는 아내와 직업과 집을 얻음으로써 삶을 누렸다. 어쩌면 그렇게 다소 심심하지만 그래도 무난한 삶을 이어갔겠지만 사고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좌절 그리고 부채의식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얼마간의 희망. 그는 폴이 되고 장모는 점차 애니처럼 변해간다(<미저리>의 두 주인공). 


장모는 만일의 경우 오기가 창으로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 생각은 몹시 불쾌했지만 왜 이제껏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지 후회하게 했다.


집에는 오기와 장모만 남았다. 앞으로 오랫 동안 그럴 것이었다. 장모는 많은 걸 알고 있어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오기에게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가 안다고 믿었던 걸 모두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오기가, 도대체 아내가 알고 있던 게 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밀어넣을 수 있고 우리가 타인을 밀어넣을 수 있는 구멍 말이다. 인간은 그런 식의 빈구석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야말로 내면의 진실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오기는 수업 시간이나 강연 때 자주 써먹었다. 


구멍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커질 수도 깊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구멍의 크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 거기에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구멍. 우리가 들어갈 수 있고 타인을 밀어넣을 수도 있는 구멍 말이다. 오기는 지리학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남에게 그럴듯하게 역설한 진실 한조각도 잊고 살았다. 홀 속에 몸을 누이는 순간 오기는 아내의 울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녀가 울었던 이유를 짐작하기보단 그녀의 울음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것을 상기한다. 오기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타인은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얼마나 당연하고 다행스럽고 잔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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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5-2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다 알 수 없지만,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알려고 애쓰는 건 좀 다르겠죠 다는 모르더라도 알려고 애쓰는 게 더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은 거군요 남한테 그런 걸 바랄 수도 없겠습니다 남의 마음은 남의 것이어서...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면 남이 애쓰지 않아도 그런가 보다 해야겠지만, 이것도 쉽지 않군요 왜 모르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어떤 때는 말하지 않아서 모를 때도 있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말해야 아는 거냐 생각하겠습니다

남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해도 자기 마음은 자기 것이니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자신은 남을 알려고, 알아주려고 조금은 애쓰는 게 좋겠죠


희선

Shining 2017-05-28 23:59   좋아요 0 | URL
하나를 보고 열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한 가지는 열 가지 이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는 건 제 입버릇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런 점들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 사이에 바로 그 한 가지, 이 소설의 예시로서는 구멍을 봐버리면 이전만큼 서로를 친숙하거나 은밀하게 느껴지기가 힘들죠.

사실 상대를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믿거나, 완벽히 알아야 한다고,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귀납법의 결과이기도 하고 체념이기도 하고 비관주의일 수도, 어떤 쪽이든 경험에 의하면 이제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과 애정과 존중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서로를 완벽히 아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관계에 더 큰 도움이 되겠죠.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요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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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1.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

2. 소설이냐 에세이냐.


첫 번째 질문은 무난한, 그러니까 여느 소설가나 작가에게도 하게 되는 물음이라 보편적이지만 두 번째 질문은 이례적인 편이다. 소설만큼 에세이 역시 유명한 작가는 그리 많진 않은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해 내 경우엔 늘 몇 개의 소설과 대부분의 에세이라고 답했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후에야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에세이인 것 같다. 이유는 더 명확하다. 이 책에서 쓴 작가 본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작가로서의 서랍(소재를 넣어둔 일종의 마인드팰리스)은 호불호가 있지만 에세이로서의 서랍은 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책을 읽으면서 아, 말을 잘 하는 작가구나, 그래서 에세이는 더 설득력 있게 읽혔구나, 를 깨닫는다.


글을 읽고 말솜씨를 짐작한다니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의 '말솜씨'는 실제로의 말재간과는 무관하다. 타입이나 유형이라고 해도 좋다. 직관적으로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게끔 쓰는 작가들이 있는데 대개는 그들이 쓴 에세이는 소설만큼 때로는 -칭찬인지 불운인지- 소설 이상으로 재미있다.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거나, 강연을 할 때와 비슷한 일상적인 어휘를 쓰면서도 논리적으로 기승전결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도(즉, 서면을 통하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게다가 균형감각이 무척 좋아서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흐트러짐 없이 표현하는데에도 그게 아집이나 완고함이라기보단 명확함, 명징함 등으로 느껴지게도 한다. 자신의 주장은 이러하며 생각은 이러하지만 세상에는 나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신의 방법을 찾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궁금하다면 공개할 나의 방법은 이런 것입니다. 대개는 이런 어조다. 생각해보면 늘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십 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인 소설가로 활약하고, 혹은 살아 남아서 각자 일정한 수의 독자를 획득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뭔가 남다르게 강한 핵core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drive,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이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자질이자 자격이라고 딱 잘라 말해버려고 무방할 것입니다.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나는 누군가에게서 비판을 받을 때마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흔한 반발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설령 네거티브라고 해도 분명한 반응을 이끌어내는게 더 좋을 것이다, 라고.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안된다 싶더라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원래가 발췌를 귀찮아하는데다 이 책에서 발췌를 하려거든 책 하나를 필사하는게 나을만큼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많았지만 몇 개만 슬쩍 옮겨본다. 아마 이 전에 작가의 에세이를 읽은 사람에게는 약간 동어반복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나만 해도 몇몇 챕터는 그렇게 느껴졌지만 거기에 약간 보완 된 부분들이 꽤 재미있고 의미있다.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유의미한 정보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작가가 되고싶은, 소설가를 꿈꾸는, 그게 아니라도 글로 창작을 하거나 더 나은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에게 특히 유용한 정보가 많이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처음이 아니라 유지를 하는게 어렵다는 사실, 자신은 규칙적인 생활로 늘 정해진만큼 글을 쓴다는 것, 자신의 내부에서 글감을 찾아야 오래 견디고 덜 지루해진다는 생각과 자신의 '번역투' 문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와 어째서 문학상 심사위원은 하지 않는지, 나아가 상이란 무슨 의미인지 등등. 어찌됐거나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독자라는 말과 더불어 나를 계속 찾고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고 그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 꾸준히 글을 써 그들을 만나는 것이 자신이 해야할 가장 큰 업이라는 말에는 묘한 감동이 느껴진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행위가 누군가의 창의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나 질투,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독자 한 명이 작가 한 명만큼이나 큰 창구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무라마키 하루키라는 소설가, 도 아니고 소설가라는 직업, 도 아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라니 제목이 재밌다는 생각을 했는데 끝까지 읽고나면 그야말로 맞춤인 제목같다. 이 책은 소설가라는 직업의 고단함에 대해 투정을 털어놓는게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소설이 업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발표하는 -사실상- 작법서에 가깝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을 쓰는 분들, 창작자가 되려는 분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분들이 읽는다면 분명 한 가지 이상은 유의미할 정보, 혹은 다시 생각해볼만한 이색적인 발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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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희망 2017-02-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끼의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이 단편입니다.
고백하자면 장편은 읽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장편들도 읽고닢어졌구요 또 이젠 그를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Shining 2017-02-17 17:37   좋아요 0 | URL
전 몇 개의 소설과 대개의 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에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글쓰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더불어 이 책은 작가 본인의 매력 뿐 아니라 글쓰는 행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줘서 제겐 유용하고 의미있는 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

희선 2017-02-17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쓰기 힘들어서 괴로웠던 적이 없었다고도 하죠 쓰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루키는 쓰고 싶을 때 쓴다고 했군요 쓰려고 준비를 먼저 하고 꾸준히 쓰겠습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산문도 쓰고 번역도 하는군요 소설만 쓰지 않고 다른 걸 해서 기분을 바꾸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다른 데서 했군요 어딘가에 떠나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소설가는 다음 책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도 하죠 그게 얼마 없다 해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쓸지... 아니 그것보다 자신이 쓰고 싶어서 쓰는 게 더 좋겠네요 작가한테 자기 책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힘이 되겠습니다 거기에 부담을 가지지 않는 게 좋겠군요


희선

Shining 2017-02-17 17:41   좋아요 1 | URL
그렇다고 하네요. 솔직히 좀 놀라워요. 즐겁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 쓸 수 없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엔 애정보단 애증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이 분은 그렇게 말하시는군요(흐음). 그때 쓴 글이 이 글에도 똑같이 포함되었는지 아니면 생각이 변하지 않았는지 희선님이 기억하신 부분과 완전히 같군요. 여전히 재밌고 즐거우며 쓰고 싶고 다른 일과 함께 쓰되 병행하진 않는다. 아예 소재 창고 같은게 다르다고 말하더라구요.

글쓰기를 통해 부수적으로 타인에게 위안이나 연민, 정보나 지식을 줄 순 있지만 근본적으로 글쓰기란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괴롭고도 즐겁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창작 행위를 왜 하겠냔 말이죠(웃음). 자괴감을 갖는 날에는 이 사람은 무려 창작을 하는데 나는 소비밖에 못하지, 하고 주눅들기도 하지만 하루키는 바로 그 독자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라고 하니 왠지 다행스럽기도 하네요 :)

2017-02-18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9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 없는 완전한 삶
엘런 L. 워커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1. 치과에 정기검진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랑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는 내게 다짜고짜 "결혼하셨어요?"라고 묻기에 "아뇨."라고 답했다. 그 다음엔 "하실거죠?" 묻는데 치아와 결혼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해 멀뚱히 있자 "지금은 괜찮지만 출산을 앞두거나 수술을 하게 될 경우..."라고 하신다.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말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혹시 임신을 염두에 있다거나 출산을 예정하는 경우" 라고 말했다면 같은 말이라도 기분이 달랐을 것 같다. 결혼 적령기 안에 들어간 여자. 미혼. 사회의 통념상 '당연하다'는 가정을 하는 것까진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해도, 거기서 제가 비혼주의자라서요,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지만. 이건 좀 좋은 화법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그 사랑니는 한 해가 지난 지금도 멀쩡히 잘 쓰고 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두지 않아서 말이다.

 

1-2. 이 책을 읽다가 그 날 치과의사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아주 가끔 억울한 기분이 든다. 기혼인 사람, 결혼을 예정하거나 계획이 있는 사람, 자녀를 갖거나 낳은 사람에겐 "근데 결혼은 왜 하셨어요?"라거나 "어쩜 애기를 다 낳았어요?"라고 묻지 않는데. 반대의 경우엔 "왜 결혼을 안 하려구요?" 라던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봐야..."하는 말을 아무런 자각 없이 하는 무배려와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곤 하는지. 만약 전자인 질문을 해버리면... 말을 말자.

 

2. 한 친구는 지난 달에 아이를 낳았다. 최근 통화에서 친구는 아이가 벌써 고개를 돌리려고 한다거나 아빠를 닮은 것 같다거나 신랑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낸다. 그녀 인생의 엄청난 변화가 생겼으니 당연한 대화라고 생각해 그저 응응,그랬구나, 하며 말을 맞췄으나 전화를 끊은 후 문득 "근데 넌 어떻게 지내?"라는 식의 질문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음을 깨닫자 왠지 입이 썼다. 이해한다. 부럽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냥, 그저 이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친구는 결혼을 할 때 잃는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때 잃게 되더라는 또 다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3. A는 내게 어쩌면 너는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는 문제를 결심한 사람들에 대한 적지 않은 편견과 다르게- 책임감이 없는게 아니라 반대로 책임감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남들도 다 사는데, 애 키우는게 별거야, 그렇게 힘들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해내겠어, 난 좋은 사람이고 남편도 그러니까, 라는 불성실한 확신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거라고. 하긴, 엄마도 내게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 너보다 한참 부족한 사람들도 다 해내는 걸 왜 못할거라고 생각하냐고.

 

3-1.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거라 이야기해봐도 엄마는 -그저 딸을 배려해 말을 안 하는 것도 같다- 여전히 일말의 의구심과 측은함을 조금씩 안고 계신다. 그래서 요새 가끔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형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니는 결혼을 했고 형부는 처가 식구들과 가깝고 제법 잘 지낸다. 아이도 둘 있다. 남동생도 아마 결혼을 할 테니까. 나쁜 의도라는건 알지만 어쨌건 부모님에게 나 말고도 손주와 사위와 며느리라는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만들 자식이 있다는 건 아주 가끔 다행이다(물론 이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아주 이기적인 태도다).

 

4.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안에 있다. 저자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확고한 결심을 했지만 그 결심이 흔들리고 다시 잡히는 과정에서 혼란과 우울감을 느꼈다. 그 후 자식이 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책이 너무 적고 정보가 얕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과 주변을 시작으로 해 사례를 모으고 책을 썼다. 저자가 말하는 아이가 없는 삶childfree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아이를 원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던 이들도 있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주장을 확립한 사람들도 있다. 그 경우의 수를 분류하고 아이가 없는 삶이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들은 육아 대신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왜 현재의 삶을 살게 되었고, 사회는 그들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있고 그 편견은 또 옳거나 그른지에 대해 썼다. 

 

4-1.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파트에선 동의할만한 고민의 흔적이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 유전적으로 희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점이 되면, 그 점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사회와 주변이 압박하는 이상화된 가정과 육아에 대한 환상에 대한 토로. 특히 부모가 된다는 점을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고 성숙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자격처럼 권장하는 탓에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신이 대단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거나, 성장하긴 커녕 퇴화하거나, 진정한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스트레스에 대해서 동의한다.

 

4-2. 그리고 <아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아이 없는 사람들이 마주해야 할 문제>파트는 앞으로 고민해볼만한 것들, 살면서 접할만한 고민에 대해 쓰여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파트너를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비주류로 살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이가 없기에 받는 차별이나 아이가 없기에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라는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부당함, 혼자가 된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예컨대 이런 부분들에 공감이 갔다.

 

우리 사회에서는 세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녀를 가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자녀 없이 사는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일부 부모들은 자녀를 낳은 일을 후회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중략) 제퍼스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아픈 반려동물을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내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비롯해 가족 중심의 대다수 공동체에서는 비웃음을 살 뿐이다. 최근에 아이가 없는 없는 내담자 하나가 전화를 걸어와 아픈 고양이를 돌봐줘야 한다면서 상담 약속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 반려견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약속을 취소할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비서들 중 아이 엄마인 사람이 어이없다는듯 말했다. “세상에, 고양이가 아파서 약속을 취소하겠다니, 이게 말이 되나요?”

 

다른 사람을 보살피길 좋아하고 여성스럽다는 것이 자녀를 가진 사람만의 특성일 수는 없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들 중 대다수가 자신을 친구들과 가족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런 자질을 가졌다 해서 꼭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싶어하진 않는다. 여성들을 아이와 관련짓는 것은 사회적 기대의 한 예라고 봐야 한다.

 

린다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관심의 초점이 ‘자신의 목표’에서 ‘무엇이 아기에게 최선인가’로 옮겨갔다. 그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일뿐더러 린다와 린다의 아들에게 필요한 변화임을 알면서도, 나는 기운이 쭉 빠졌다.

 

5.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부분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나는 조카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일반적인 이모의 의미보다 훨씬- 이 되어있었다. 작은 조카는 엄마보다 내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의 생체 시계는 아이의 아빠보다 내가 더 정확히 안다. 큰 아이는 엄마랑 아빠가 놀아주는 것보다 나랑 노는게 더 재밌다고 몰래 귀엣말을 한다. 나 역시 내 어디에 이런 말랑한 마음이, 이런 애틋한 마음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를 애정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 때마다, 아이에 가까운 삶을 사는만큼 나에겐 육아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다. 내가 얼마나 나쁜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이를 위해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도 해야 할 삶을 선택하기엔 내가 얼마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나와 같은 사람을 엄마로 둔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내가 엄마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런 각오나 기대나 다짐이 내 안에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나왔듯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 노릇을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식이다.

 

5-1. 게다가 아이들이 워낙 가까이 있고 육아를 함께 나누느라 아이가 없는 삶에 대해서도 본의 아니게 체험해보기도 한다. 비용과 시간, 노력과 여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제적인 기회비용을 생각해보게 되고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 변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형태와 그들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내가 갖게 될 장점과 단점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카는 자식과 다르지"라던가 "조카가 아무리 가깝고 예뻐봐야 자식만큼" 또는 "자식 낳으면 또 다르다."는 조언을 가장한 참견은 그만 받고 싶다. "안 낳아봐서 그래."까진 그렇다치지만 "출산도 육아도 안 해본 사람이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거둬주길 바라고 있다.

 

6. 사례 위주로 진행되는 책이기에 깊은 통찰력 같은 건 없다. 글이 하나로 모이기보단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데다 대부분이 여자의 관점이라는 것도 약간은 아쉽다. 아마 저자가 여자고 그가 주로 접하는 주변인이나 내담자, 무엇보다 출산의 직접적인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렇다면 남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나 고민을 갖고있는지 알 수 없는 건 역시 아쉬운 문제고 꼬아 생각하자면'아이없는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주로 여자에게 쏠려있다는 것도 씁쓸한 일이다.

 

6-1.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여러 사람의 삶과 그들의 역사와 가치관에 대해 듣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저자가 머리말에 썼듯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출판되는 현실에서 아이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 책의 의미인 것 같다. 

 

6-2. 결혼을 하고 아이에 대한 계획이 있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들은 다른 책들을 읽느라 바빠 굳이 아이 없는 삶에 대해서까지 읽어볼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다(비꼬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이미 고민을 하고 선택을 했을테니까. 만약 나였어도 그럴 것 같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망설임이나 경우의 수를 상대적으로 적게 가정한다는데 비해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망설이고 가정해본다. 대개의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덧) 인구증가의 면이나 환경오염의 문제 등에서 아이 있는 삶이 사회를 더 위태하게 나쁘게 만드는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놀라웠다. 여태껏 이런 관점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소비나 생산의 구조에서 봤을 땐 오히려 다자녀가정에 혜택을 주는게 합리적이지 않나 -정작 나 자신은 비혼을 지지하면서도- 생각해왔던 터라 내 자신이 사회에 세뇌가 된 건지, 미국과 한국은 인구에 대한 태도가 다른가(한국은 출산률 저하로 국내 인구 감소와 노령화를 걱정하는 터라),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당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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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3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7-01-05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ㅎ ㅎ ~ 저도 그 경험자 입니다.
사랑니 와 치과. 임신과 출산 이 뼈 마디에 미치는 영향을 몸으로 겪었습니다. ^^ 공감하고 갑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날이 있다. 남들은 아이를 낳고 결혼을 약속하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바로 전 날까지도 바쁘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열심히 걸어온 시간이었는데 대뜸 친구의 반가운 소식 앞에서 괜히 마음이 흐려졌다. 최선을 다해 아쉬워하고 반가워하며 축하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 깊은 마음, 좀 더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타인의 삶과 나의 것을 비교하지 말자고 늘 읊조려왔건만.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산을 등반하는 것을 보면서 아, 벌써 저기까지 가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며 샘을 내다니. 심지어 그건 내 길도 아니었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산도 아니었건만. 스스로를 꾸짖었고 친구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솔직히 말해 잠정적 비혼주의자를 결심한 나에게 결혼이나 출산은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찌됐던 그들이 사회적인 의미에서 주류에 합류한다는 것,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유하게 될테고 그 삶이 다수에게 인정받은, 설명이 필요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는 것, 그 태평함이 부러울 뿐이다. 아니, 요즈음엔 그보다도 더, 분기점을 지나고 일종의 이정표를 꽂는 것, 거칠게 표현하자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가시적인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이 부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대학, 취업, 결혼, 출산 등으로 삶이라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에 꽂을 수 있는 몇 개의 뚜렷한 깃발을 얻는 것. 자신이 성실하게, 나쁘지 않게, 혹은 평범하게 살아왔음에 안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상징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이 상처 입었을 때 새삼 깨닫게 된다.

 

주말에는 가능한 한 나 자신을 위해 보낸다. 할 수 있는만큼 게으름을 보내고 주중에 못본 영화를 보고 아침 일찍부터 빨래를 해서 널고 방청소를 하고 침대 위에 뒹굴거리며 책을 읽는다. 마스다 미리의 단순한 펜선, 일견 가벼운 이야기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가끔은 답변도 한다.

 

젊은 사람에게 ‘젊음’의 우월감을 안겨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젊었을 때 그렇게 대해주면 기뻤으니까. 누군가 젊음을 부러워해주는 건 기쁘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사실은 특별히 부럽지도 않지만 젊은 사람에 대한 서비스. 나는, 젊은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좋다.

 

자신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상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해왔던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세상살이의 능숙함과 뻔뻔함을 때로는 분리시키고 가끔은 낡고 무거워진 질문을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기도 한다. 아아, 어른이 되는 건 보기에 따라 더 강해지거나 때로는 더 무심해지는 일의 ‘결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선 ‘그게 나쁜 걸까? 나는 지금 나쁜 행동을 하는건가?’ 라고 묻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을 마스다 미리는 주지시킨다.

 

맞아,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주는 건 내 자신이 특별히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좋은 사람인 척 하고 싶지 않다. 좋은 사람이라는 오해도 받고 싶지 않다. 다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혹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노력마저 없애고 싶지 않거나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는 번거로울 만큼의 성실함을 잃지 않고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좋다. 일기도 계속 쓰지 못하고 복어도 먹지 못했지만 나라서 좋다. 나도 나쁘지 않다(문장을 잇기 위해 몇 개의 조사와 어미를 살짝 바꿨다). 몇 년 전 그 해의 마지막 날, 그런 일기를 썼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희망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나겠지. 겨우 나이거나 고작 나이거나 가쁘게 나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꿈꾸지 않는 것, 그게 나라는 비관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여전히 바보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때로는 철없는 생각을 곱씹고 아직도 누군가의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기엔 스스로가 부족할 때가 가끔 있지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 속 대사처럼 아마 그게 나란 사람일테지. 나이를 먹으면서 갖는 가장 큰, 버릴 수 없는 장점은 내 자신에 대해서 단 한 가지라도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사람은 많지만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단순하게 하는 사람은 몇 없다. 그러면서도 무례하거나 냉혹하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도 않다. 책을 덮으면서 좋은 친구,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그 드문 경우가 마스다 미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동지의식, 동료애, 어쩌면 그런 것들에 배가 부르다.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무 사심이나 불안감 없는 순도 백퍼센트의 진심이었다. 다만, 그 날은 아주 예쁜 옷과 귀걸이를 골라야겠다고, 드물게 높은 구두를 신어볼까 생각한다. 이렇게라도 나는 나도 아주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중으로 겉으로나마 조금은 증명하고 싶어한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속물이다. 뭐,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마스다 미리가 말했듯, 나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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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1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9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