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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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남자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가 대뜸 자기 어머니가 근처에 왔다며 연락을 했다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다지 편할 리 없는 자리였고 멀리서 오랜만에 온 분이라면 내가 비켜드리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이미 남자친구가 이야기를 해둬서 어머니가 점심 사줄테니 같이 나오라고 하셨단다. 애인의 부모님을 만난다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긴장을 안고 나갔지만 그렇게까지 많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들어온 일면으로 추측해보건대 상당히 진보적이고 관대하신 분이라고 생각할만한 구석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례적인, 이야기 많이 들었다, 반갑다, 같이 밥 먹으니 좋다, 어서 먹어라, 라고 한 이후로는 내내 자신의 아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둘만이 알 만한 집안의 대소사나 친척의 결혼식이나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소재 어디에서도 나를 끼워주겠다거나 배려하겠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었다. 깨작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젓가락질을 했고 차라리 내가 들고 있는 초밥의 밥알 수를 세는게 더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는 이따금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밀어주거나 이거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녀를 배웅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가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편혜영의 <홀>을 읽으며 문득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홀>은 아내와 여행을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는 죽고 사지가 마비된, 혼자가 된 오기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남는 것이라곤 시간 뿐인 삶에서 끊임없이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의 냄새나 자신이 좋아했던 그녀의 성격이라던가 대화를 생각하며 그 사이사이 자신의 삶을 끼워넣어 기억해낸다. 그가 아내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오기는 자신이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부모님이 안 계시고 아직은 뚜렷한 직책이 없는 직업에 모아둔 돈도 변변찮다.


장모가 한 말이 내내 맴돌았다. 반듯하다는 말, 자격지심이 있을까 걱정했다는 말. 그 말들이 장인이 식사 내내 했던 노골적인 핀잔보다 더 마음을 후벼 팠다. 장모는 간파한 것 같았다. 오기는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질 만한 인간이라는 걸, 그다지 반듯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걸 말이다. 장인은 그걸 핀잔했고 장모는 세련된 방식으로 상기시켰다.


처음 오기는 대놓고 핀잔을 주고 못마땅한 기색을 과시하는 장인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적어도 솔직한 장인보다는 친절하고 조용한 그러나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마치 점수라도 매기듯 커트러리를 들어올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장모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대개 그것은 거짓에 가깝다. 이미 우리는 희미한 위화감과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다만 그것을 깊게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미처 잊어버렸거나 혹은 잊어버리려 노력했기 때문에 ‘몰랐다’고 착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기가 장인과 장모에게 가졌던 인상이나 나의 점심 식사처럼 말이다. 


그랬다. 내가 받은 인상도 오기의 것과 유사했다. 말끔한 옷차림과 상냥한 말투, 다정한 표정으로 가장한, 너무나 예의있고 상냥한 적의였다. 어찌나 배려있고 친절한지 무시보단 차라리 멸시라고 해야할 느낌이었다. 그건 여러모로의 충격이었다. 스스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나는 늘 연장자로부터 신뢰받는 타입이었다. 그 때 나는 어렸고 남자친구 역시 그랬기에 우리는 결혼 등의 구체적인 미래를 꿈꾼 적이 없었다. 즉 그녀에게 내가 점수를 얻을만한 분명한 이유도 없었지만 적지 않은 확률로 점수를 잃은 행동조차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 황당했던 건 남자친구는 그 기이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를 못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봐봐,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표정이 너무나 진심이라 할 말도 없었다. 그 날 나는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 선과 그가 알지 못하는 선을 모두 봐버린 기분이었다. 하나를 안다고 결코 열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는 열 가지 이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와 계속 만나고 어쩌면 결혼을 하는 삶을 내가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대답은 늘 '아니'었고 거기엔 몇몇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 날, 그의 어머니와의 식사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기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그 날의 일을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기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 뒤로도 그럭저럭 잘 살았으니까. 아내의 커리어는 매번 실패하거나 좌절하고 엎어지지만 오기는 제법 나쁘지 않은 줄을 잡아 기회를 얻고 정교수가 되었다. 누군가는 오기를 기회주의자라고 하고 의외로 약은 구석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오기는 아내와 직업과 집을 얻음으로써 삶을 누렸다. 어쩌면 그렇게 다소 심심하지만 그래도 무난한 삶을 이어갔겠지만 사고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좌절 그리고 부채의식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얼마간의 희망. 그는 폴이 되고 장모는 점차 애니처럼 변해간다(<미저리>의 두 주인공). 


장모는 만일의 경우 오기가 창으로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 생각은 몹시 불쾌했지만 왜 이제껏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지 후회하게 했다.


집에는 오기와 장모만 남았다. 앞으로 오랫 동안 그럴 것이었다. 장모는 많은 걸 알고 있어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오기에게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가 안다고 믿었던 걸 모두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오기가, 도대체 아내가 알고 있던 게 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밀어넣을 수 있고 우리가 타인을 밀어넣을 수 있는 구멍 말이다. 인간은 그런 식의 빈구석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야말로 내면의 진실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오기는 수업 시간이나 강연 때 자주 써먹었다. 


구멍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커질 수도 깊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구멍의 크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 거기에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구멍. 우리가 들어갈 수 있고 타인을 밀어넣을 수도 있는 구멍 말이다. 오기는 지리학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남에게 그럴듯하게 역설한 진실 한조각도 잊고 살았다. 홀 속에 몸을 누이는 순간 오기는 아내의 울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녀가 울었던 이유를 짐작하기보단 그녀의 울음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것을 상기한다. 오기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타인은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얼마나 당연하고 다행스럽고 잔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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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5-2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다 알 수 없지만,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알려고 애쓰는 건 좀 다르겠죠 다는 모르더라도 알려고 애쓰는 게 더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은 거군요 남한테 그런 걸 바랄 수도 없겠습니다 남의 마음은 남의 것이어서...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면 남이 애쓰지 않아도 그런가 보다 해야겠지만, 이것도 쉽지 않군요 왜 모르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어떤 때는 말하지 않아서 모를 때도 있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말해야 아는 거냐 생각하겠습니다

남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해도 자기 마음은 자기 것이니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자신은 남을 알려고, 알아주려고 조금은 애쓰는 게 좋겠죠


희선

Shining 2017-05-28 23:59   좋아요 0 | URL
하나를 보고 열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한 가지는 열 가지 이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는 건 제 입버릇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런 점들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 사이에 바로 그 한 가지, 이 소설의 예시로서는 구멍을 봐버리면 이전만큼 서로를 친숙하거나 은밀하게 느껴지기가 힘들죠.

사실 상대를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믿거나, 완벽히 알아야 한다고,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귀납법의 결과이기도 하고 체념이기도 하고 비관주의일 수도, 어떤 쪽이든 경험에 의하면 이제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과 애정과 존중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서로를 완벽히 아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관계에 더 큰 도움이 되겠죠.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