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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몸이, 아팠다. 붉은 반점이 사정없이 몸을 덮었다. 처음엔 손등이었고 그 다음에는 팔, 어깨, 상체에서 하체로 빠르다면 빠르게 느리다면 느리게 퍼져갔다. 처음 며칠은 발병 원인을 찾기 어려웠고 병명도 쉬이 진단받지 못했다. 일주일 후에야 수포가 생기듯 작은 물방울이 드러났고 그제야 의사는 적상건선, 이른바 물방울 건선이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원인은 그 전에 앓았던 심한 인후염이었다. 심한 목감기를 앓았을 때 발생한 열이 미처 몸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피부로 분출되는 식의 병이라 했다. 퍼져가는 속도는 빠르고 범위가 넓어 겁에 질렸으나 의사는 프로페셔널한, 그래서 조금은 인위적이고 귀찮은 듯한 어조로 가렵지 않고 옮지도 않는 것이며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흉터없이 깨끗히 나을테니 걱정말라고 말했다. 그렇게 꼬박 한 달 간 발병과 진단, 치료에 전념했다. 피부과 약은 몹시 독해서 거의 매일 밤 꿈없이 잠 세계를 헤맸고 아침이 되면 몸은 무겁고 정신은 몽롱했다.
배 위의 반점이 분홍색일 때는 그냥 두드러기쯤으로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색과 모양이 좀 끔찍해졌다. 처음에는 분홍빛이다 과일처럼 발갛게 무르익은 뒤 검붉어졌다. 그러다 나중에 연한 갈색으로 변하며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크기가 다양한 반점들은 테두리 쪽 색이 유독 진해 타다 만 종이나 화려한 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허물이 내려앉고 벗어지길 반복했다. 그 위에 다시 '인설'이라 불리는 살비듬이 내려앉아 흉하게 파들거렸다. 몇몇 부위에 벌레 물린 자국이 생긴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잃기 전에는 그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것들이 있다. 그것을 구태여 소홀히 하려는게 아니라, 정말로, 진심의 무구함으로 내게 그것이 있는 줄도 차마 몰랐던, 그런 것들이 있다. 제법 하얀 편이고 점 하나 없고 아무 화장품이나 써도 어디서 자도 '피부가 뒤집어진다'는 체감을 해본적이 없는데다 체모까지 옅어 건강하고 깨끗한 피부에 속한다는 것을 아주 모르진 않았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이 매일 보는 거울 속 지겨운 얼굴처럼 익숙하고 뻔한 것이라 그것이 소중하다는, 소중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붉은 반점이 돋아나는 피부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낫는거라고,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려 해도 초조함과 불안감이 해일처럼 밀려와 한번씩 사람을 오롯이 적시고 떠나갔다. 인터넷을 헤매며 정보를 찾으려 애썼다. 의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사는 나만큼 내 병에 대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절실하지 않다는 불만과 불안 때문이었다. 온갖 좋다는 영양제를 알아보고 생활 습관을 고치려 애쓰고 비타민을 종류별로 비교했다. 당연히 술은 안 마셨고 커피를 대폭 줄이고 케일과 시금치를 사다 야채주스를 만들어 먹었다. 붉은 반점보다 두려운 건, 더딘 회복 속도였고 그보다 절망스러운 건 깨끗했던 피부가 어떘는지 자꾸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픔의 본질은 외로움인지라, 자꾸만 처지를 잊고 술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거절하는 것이 짜증스러웠고 밤을 누리고 싶어도 쫓아오듯 잡아채는 수면이 서글펐고 커피마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울적했다. 정확히 6주가 지나자 반점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이제 제 볼 일이 끝났다는 듯한 가볍고 미련없는 실종이었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우스운 것이라 막상 그렇게 되니 이제는 반점이 있던 위치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3개월이 걸렸다고 했고 누군가는 꼬박 반년이 걸렸다더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조금은 느슨해졌을 때였다. 갑자기 오돌토돌 두드러기가 올라오며 온몸이 가려워졌다. 피부과에선 여러 원인을 짚어주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원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젠 증세가 바뀌어서 또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득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재발에 재발을 할 거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멍했다.
이틀 뒤였다. 밤중에 가려움을 참지 못해 잠결에 다리를 긁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다리가 온통 시꺼멓게 물들어있었다. 폭행 피해자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온 다리와 팔뚝에 피멍이 들었다. 아직 파랑색인 것도 있었고 보랏빛으로 바뀌는 것도 점상출혈처럼 생긴 자국도 있어다. 심지어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은 곳도 있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젠 화를 내기에도 지쳤었다. 그러고 나서 열흘쯤 지난 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아주 오랜만에 참 원없이 울었다.
- 나는 행복해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랄까 거짓말을 분간 못하는 기계를 시험하듯 건넨 말이었다. 시리는 건전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침착하게 답했다.
- 덕분에 저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 .......
그저 매뉴얼대로 답하는 걸 알면서도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약간 반감이 일었다.
- 아니에요, 슬퍼요.
나는 앞의 말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보았다. 어린아이 입에 고기 넣어주듯, 시리가 인간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말한 거였다.
-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책이 그만큼 '감동적'이었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쓰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뻔한 수사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이 책에 대한, 이 순간에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그저, 그저 아프고 기뻤고, 슬펐고 그러다 눈물이 났다.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도 아니면 내가 양파를 써야만 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이유였고 아무것도 이유일 수 없었다.
에반의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찬성이 에반의 입매, 수염, 콧방울, 눈썹 하나하나를 공들여 바라봤다. 그러자 그 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걸까?
- .......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 .......
- 있잖아, 에반. 만약에 못 참겠으면....... 나중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면 형한테 꼭 말해. 알았지? - 노찬성과 에반
그제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리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가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꺠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 건너편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일한 나이대의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사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내가 중하게 느끼는 것이 상대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안도가 되는 일이다. 김애란을 처음 읽은 것이 2005년이었으니 그럭저럭 12년이 지난 셈이다. 12년. 한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 자라서 기고 걷고 뛰고 유치원을 지나 학교를 들어가 원통의 부피나 방정식을 배우는 시간이자 열두 마리의 동물이 달리기를 한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를 회귀回歸하는 주기다. 그녀는 작가로, 나는 독자로 우리는 부득이하게 함께 자랐다. 첫 소설집에서는 섬뜩할만큼 고시원의 눅눅한 삶에 대해 묘사했던 그녀가 5년 전 소설집에서는 사회생활과 여행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날 거리를 배회하는 연인 대신(「건너편」) 집은 있으나 그것이 내 것이 아닌, 낡고 지리한 삶(「입동」)에 대해 쓴다. 부모의 죽음(「가리는 손」)을 담고 배우자의 죽음(「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을 가정해보고, 아이를 키우는 삶의 변화와 그 뿌듯한 경외감과 속된 희생정신(「입동」,「가리는 손)」)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자꾸만 상실을 되짚는다(「노찬성과 에반」). 아주 천천히, 나이 들고 있고 삶의 양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제는 학점과 학과와 고시원에서의 삶보다는 갚아야 할 빚과 건강과 부모님의 죽음과 아이를 키우는 삶에 대해 엿보고 그것을 더 큰 삶의 층위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처음엔 가난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삶과 시부모와 내 부모와 배우자의 사라짐에 대해서 생각한다(김애란 작가에게 아이가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연히 어디선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읽은 것 같다). 나는 감히 그녀의 실망과 권태와 환멸과 체념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불안과 불만과 음울과 슬픔을 위로한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함께 서서히 나이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 입동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눅누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 가리는 손
문학은, 글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예컨대 음악은, 노래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폭발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반면 글은 그렇지 않으니까. 140자의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해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내 기준에선 140자는 감정이나 사유를 담아내긴 너무나 빈곤한 그릇이었으니. 춤이나 연극이나 발레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데다 글자 사용률이 아무리 늘어도 책을 읽는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니까.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품을 들이고 시간을 소비하는 식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향유할 수 있으니까 등등.
때때로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자기 자신의 빈껍데기까지 적나라하게 안다는 이유로 마음껏 자기혐오를 하다 나마저 나를 너무 싫어한다면 그건 조금 가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연민한다. 그리고는 자기연민의 껍질을 입은 비겁함에 또 다시 스스로가 싫어지는 식이었다. 줄에 매달린 자석의 추처럼, 둘 사이를 왔다갔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비겁하고 저열하고 비참하고 졸렬해서 마지막엔 늘 도망치게 된다. 가끔씩, 도피와 도망의 끝에서 어떤 것을 만난다. 예를 들면 글과 같은 것들.
우리가 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있다. 우리가 글을 문학이라 부르고 문학이 예술로 포섭되는 이유가 있다. 글이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거나, 나 자신을 구원한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라 하더라도 맥이 탁 풀려 차라리 울어버리게 만드는, 그래서 또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순간들이 책 속에 존재한다. 위안인지 위로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그도 아니면 동지의식일지는 모르나 어찌됐건 글을 읽어서 다행이라고, 이런 글을 만날 수 있으니 앞으로도 책을 읽겠다고 스스로에게 탄식하는 순간들이 분명 있다. 그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이, 이 책을 읽을 때 일어났다.
두드러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줄어가고 간지러움도 한결 나아졌다. 나 자신과 의사의 진료 기록 외에는 누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병은 느릿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제의 진료시간에 의사는 여름은 자외선이 많은 계절이라 회복이 빠른거라는, 위로인지 격려인지 아니면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해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여름을 좋아해본 적 없는데 바깥이 여름이라 다행이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