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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평점 :
얼마 전 K를 만났다. 그녀는 돌쟁이 아이가 한 명 있다. 그 날 그녀는 몇 시간이나마 아이와 떨어진 것도 오랜만이고 기혼자가 아닌 사람을 만난 것도, 아기가 주제가 아닌 이야기를 한 것도 정말 간만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어지는 갖가지 대화 속에서도 우리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정체성에 엄마라는 위치가 추가된데다 현재 그녀가 아이를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돈 안다고 생각했다. 결코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어느 정도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 보이는 세상은 여태까지 알던 것과는 달랐다. 그건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다. 이 불가해하고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도덕은 과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 나눴다. 우리가 터득한 처세를 아이에게 가르칠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아이만 도덕적이길 바라는 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그래서 말을 아끼게 되고 나도 모르게 나쁜 어른이 되어 지름길 혹은 잘못된 길을 슬쩍 알려줄 때도 있다. 아이를 키우게 되는 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환희와 기쁨, 이루 말할 수 없는 긍정적이고 거의 성스러운 무언가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둠과 동시에 스스로 안에 잠들어있던 지독한 이기심과 저열함, 속물근성과 인내심 없는 괴물을 깨우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일원인 어른으로써 더 큰 책임감과 수치를 통감하게 된다는 것 또한.
아직 말도 못 할 아이를 두고 우리는 그 아이가 할 만한 질문과 그랬을 때 해야 할 답과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사회의 치안에 대해 이제는 전보다 더 강력한 태도로 규탄했으며 보호와 억압은 어떻게 다른지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기도 했다. 우리가 아이였을 적과 어른이 되었을 때 그리고 부모가 되었을 때의 입장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하고 고민하고 반려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었다. 대화의 끝물에 그녀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다며 사실 아이가 조금 버겁다고 했다. 언제가 내가 했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은 엄마가 되고 싶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고도. 그 말을 하며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고 마치 부끄러운 것이나 잘못된 것을 말하듯 조금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과연 태평양 건너의 이야기일까? 노예제처럼 인종차별의 역사가 선명한 나라에서만 다룰 주제일까? ‘여자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피켓을 들고 여성 혐오 범죄에 항의하는 사람들 옆에서 ‘남자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피켓을 든 한국사람들은 화성에서 왔던가? 경력단절의 태반이 여성인 현실에서 요즈음은 여자가 살기 좋아졌다고 하는 한국사람은 머나먼 행성에서 갑작스레 이주라도 했을까? 임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과 어떻게든 섞이지 않으려고 철조망을 치고, 심지어 아이들의 놀이터 이용도 사적 재산권 운운하면서 통제하는 사람은 미국 사람인가? 흑인 분장을 한 코미디언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깔깔거렸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인종이 ‘웃음의 소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면 ‘재밌자고 한 일인데 죽자 살자 달려든다’면서 비아냥거렸던 사람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 아니었던가. 한국은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부끄러운 살마이 그냥 많다. 그냥 많다는 말은 사회의 시스템이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곳에서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누구나 차별에 둔감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차별은 피해자가 느끼는 것이지 가해자가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는 괜히 예민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난에 대한 그릇된 사회적 고정관념과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여러 복지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응축되어 나타나는 ‘부정적 시선’을 어릴 때부터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런 시선들은 대개 편견으로 변해 특정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괴롭힌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이 차별의 공기를 제공한 주범인 걸 부정한다. 차별받는 사람만 있고 차별하는 사람은 없는 이유다.
며칠 뒤 이 책을 읽었다.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은 때로는 비웃음이고 가끔은 통쾌함이고 이따금 부끄러움이나 자조이기도 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여기 다 있네, 나만 예민한 게 아니었잖아,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다가 마지막 즈음엔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받기도 하며 멋쩍은 탄식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나는 늘 예민하고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물론 대개는 그런 면을 숨기거나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조금만 깊이 이야기해보면 늘 '그런 쪽'의 사람이라고 분류되는 걸 스스로도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말을 줄였고 좋아하는 것을 없앴으며 판단하고 충고하고 간섭하지 않으려 거리를 뒀고 믿는 것을 그만뒀다. 외로웠지만 후회하는 것보단 나았고 비열한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비겁함을 택하려는 차선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좋아하는 것, 의지할 수 있는 것이나 가치를 둘 수 있는 것을 잃어간다. 명작이라 여겼던 영화는 누군가의 성폭행과 폭행과 사고로 얼룩진 고통의 흔적이었고 좋은 평가를 하던 인권운동가는 알고보니 여성혐오자였으며 젠더이슈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던 이는 인종차별자였다. 게다가 몰지각한 이들은 아둔하기까지 해 학살의 피가 묻은 그림을 몸에 그리고는 피해 국가에 뻔뻔한 입장을 취했다. 여지껏 사생활과 커리어는 별개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수많은 이들이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이 권력을 쥐도록 만들어준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개 관객이나 시청자나 아니면 독자에 불과한 나 역시 그것에 일조한 게 아닌가 싶어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심히 괴로웠다.
솔직히 말해 억울하기도 했고 화도 났다. 그깟 영화 한 편 맘대로 좋아할 수 없다니. 호감 가는 배우, 주목하는 감독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니. 음악 하나 듣는데도 이렇게 많은 자기검열을 해야한다니. 그냥 무시하고 싶었던 때가 없진 않았다. 인간이란 결코 선하지도 무결하지도 않기에. 그들도, 나도 그렇기에. 하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를 상대하다 뉴스에 날 정도의 일생일대의 사건을 경험할 때 하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를 서민이자 심지어 민주 시민임을 자처하는 평범한 우리끼리의 일상에서 자신이 하는 말이자 듣는 말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내가 괜찮지 않고, 나의 무의식적인 생각과 행동 때문에 주변의 누군가가 괜찮지 않다.
평범한 게 죄는 아닌데, 이게 죽도록 노력한 대가라 생각하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라는 부끄러움만 생길 뿐이다.
저자는 이전에도 차별과 차등에 차이에 대해 짚어간 적이 있다. 『진격의 대학교』에서는 대학교를 토대로 한 우리 사회의 무가치함과 무의미함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차별과 차등을 헷갈려하며 연민과 공감이 사라지며 점차 몰이해의 괴물로 향해가는 현세대에 대해서 지적을 했다. 모든 것을 노력으로 치환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싫어하면서도 제가 가진 것은 노력의 대가라고 자위하는 이들에 대한 통찰이 인상적이었다. 대기업이 하는 것만 갑질인 줄 알았더니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갑질을 하고 있고 그럼에도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계급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으며 스스로도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나 반성하는 기회도 되었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에선 어떤가. 여성이 했다면 분명 욕먹었을 이야기를 남성인 그가 했다는 점은 이상하게 통쾌하고 그래서 씁쓸하다. 그가 이 책에서도 말했듯 자신이 하는 행동은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이지만 부인이 하는 것은 엄마로서 당연한 일들이라는 이야기처럼, 남자라서 인신공격을 덜 받았다고 스스로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의 다루는 이야기는 오래된 담론이지만 동시에 신선하고 무척 생동감있는 뜨거운 감자가 대부분이었다. 차별과 차등, 무배려와 무지함, 젠더이슈와 세대론까지. 누군가는 그가 답을 제시하기보단 현상만을 언급하기에 훌륭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답은 개개인의 촉구이자 시스템의 변화인데 그것이 쉬운 방법이 아니기에 결과적으로는 탁상공론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가 이야기한 것들조차 "이딴게 대체 무슨 문제냐? 세상엔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 북핵이라던가 대미관계, 경제, 최저임금..."하는 식으로 논지를 흐리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그가 제기한 이야기들은 언급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날이 좋아하는 것을 잃어가고 의지할 수 있는 것조차 사라져간다. 누군가에겐 까탈스럽고 예민한 사람, 유머가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깔아뭉개서 할 수 있는게 유머라면 그딴 건 필요없다고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괴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점차 내 의견을 진지하게 나눌 상대를 줄여간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럽고 답답한 찰나 저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들'은 알까.
하루, 한 주, 한 해가 지날수록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채근하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는 거다. 이건 효율의 문제이기도 하다. 표현이 속되지만 누군가의 슬픔에 최대한 공감하기 위해 오랫동안 함께 슬퍼할수록 자신은 정말로 잘 살 수 있다. 공감의 깊이가 깊을수록 문제적 원인이 정확하게 보여 실질적인 재발 방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다. 괜찮은 사람들만 괜찮지 않은 사회를 염려했고 정상적인 사람들만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메게 상처받는다. 성실한 사람들이 성실하지 못한 이들에 의해 다쳤고 아팠고 억울했고 힘들었다. 심지어 '예민하거나', '사회생활을 할 줄 모르거나',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한다'는 식으로 아픈데를 또 아프게 했다. 우습지 않은가.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을테고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이들만 이 책을 찾아 읽으며 위안과 공감을 하며 일말의 안도를 느낀다는 것이. 짐작컨대 이 책을 찾아 읽은 이들도 아마 지극히 괜찮은, 정상적인, 적어도 뭔가가 잘못됐다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란 사실이 아득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거다. 악기를 배워도 지겹도록 기초 과정을 반복하고, 수학 문제에도 단계가 있는데, 하물며 얽혀 있는 나와 사회의 실타래가 책 한 권 읽고 풀리겠는가. 고정관념은 오랜 시간의 결과물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그만큼의 시간 동안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대충 살면 된다고, 내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나 혼자 이렇게 어렵게 사냐고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내 안에서 움트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늘 길을 막았다. 착하게 살 순 없어도, 착한 게 늘 옳을 순 없어도 그래도 적어도 나쁜 짓은 하지 말자고. 쉽게 살려하면 안 된다고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었던가. 이 괴로움이, 만만찮음이, 고민이, 스스로가 그렇게까지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척도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조금씩은 견딜만해졌다.
얼마 전 K의 아이 생일을 축하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부모나 엄마에 대해 감히 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내 생각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지, 아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 아이가 할 수 있는 무수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보고 옳바른 시선과 정직과 도덕에 대해 고민하는, 네가 하고 있는 일들이 이미 그 요건에 포함되는 것 같다고 썼다. 차별과 차등, 옳고 그름, 도덕과 권리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부모가 있다는 건 그 아이에겐 좋은 일일테고 그러니 너는 지금도 열심히, 잘 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낸 후 문득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슬픔과 절망과 답답함이 그래도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안도라면, 아직은 잘 지내고 있다는 희망도 조금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