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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어릴 적 상상하길 2020년 즈음에는 영양제 몇 알로 삼시 세끼를 대체하거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로봇들의 지배하에 숨죽여 살거나 하다못해 바다왕국이나 개미들의 세계에 살 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2020년이 2년 남은 지금도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지를 진지하고 고민하고(심지어 삼시 세끼 밥만 해먹는 TV프로그램까지 있다) 어찌보면 이전보다 더 먹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며 하늘을 날기는 커녕 전기자동차도 충분히 상용화되지 않았고 로봇에게 지배를 당하지 않은 대신 스마트폰 중독이 되었고 여전히 바다나 땅속에선 몇 분도 숨을 쉴 수 없다. 한 친구는 집에 있는 로봇청소기는 없는 것보다야 편하긴 하지만 사람의 손을 따라올 수는 없다고 말하며 그게 우리가 인간의 손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많은 근거 중 하나라고 말했었다. 하긴 여전히 종이를 넘겨 책을 읽고 그 책을 직접 타자를 쳐서 발췌하며 이렇게 타이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세상은 많이 변했고 동시에 그리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 난무하자 은결의 사고 회로는 그것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아무리 방대한 지식을 저장하고 매순간 새로운 학습을 진행한들, 감정의 문제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로봇의 미답지는 수면 아래 잠긴 빙하와 마찬가지임을 시호는 모르지 않는다. 발설되지 않은 의도를 은결이 미루어 짐작하기란 어렵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팔이 아프니 짐을 들어달라는 요청과는 차원이 다르며, 상대가 로봇 아닌 사람이었다한들 의미의 확장에 익숙지 않은 자라면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이란 때로는 상대방을 향해, 자신조차 그 독법을 알지 못하는 행간을 읽어내달라는 부당한 호소를 거리낌 없이 하는 존재 아닌가.
은결은 로봇이다. 모델명은 ROBO-a1318b. 아내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하나 있는 아들마저 앞세운 명정은 오래 전, 아내와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둘째가 생기면 짓자던 이름을 로봇에게 붙여준다. 명정이 세탁소를 운영하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은결은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세탁물을 거두고 계산을 하고 때로는 배달을 하고 훗날에는 다림질을 하고 세탁을 하는 일들을 배우게 된다. 은결은 누군가에겐 호기심이고 누구에겐 불쾌함이나 불편함으로 여겨지나 명정에겐 하나뿐인 말동무이자 뒤늦게 생긴 아들같은 녀석이고 초등학생이었던 시호와 준교에겐 낯설지만 신기한 오빠 혹은 형과 같은 존재다.
인간의 외형을 재현해낸 로봇의 이야기는 결국엔 크게 '인간을 뛰어넘는 로봇에게 위협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쪽이거나 인간보다도 인간적인 로봇에 대한 연민과 사람에 대한 자기 반성으로 완결될 가능성이 높다. 허나『한 스푼의 시간』은 어느 쪽도 아니다. 소설은 어떤 대단한 교훈이나 각성의 의도를 지니기보단 로봇이지만 사람과 같고 사람이지만 결국 로봇일 수 밖에 없는 은결이 살아가는 삶, 일테면 시간의 더께에 대한 이야기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또 갈아입고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갈 때까지의 시간. 명정이 세상을 떠나고 세주가 아이를 안고 돌아오고 시호와 준교가 선택과 책임에서 다치며 어른이 되는 동안의 시간은 은결의 메모리에 켜켜이 쌓여 그는 인간과 로봇의 어딘가에 머문 존재가 된다. 그 안에서 은결은 배우고 이해하고 적응하고 적용하며 발전하고 진화한다. 냄새와 색깔, 세탁물의 분류와 옷감과 이물질에 따라 바뀌는 세탁법과 인간의 감정과 삶에 대해, 관계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 성장과 퇴화와 쇠락에 대하여. 상실과 상처와 연민과 죄책감에 대해서도. 그렇게 사람처럼 나이를 먹어간다.
“비유법은 익혔지만 그 비유가 매번 적절한지는 제가 모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따뜻하면서 조금 어른스럽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좀...... 고독한 냄새, 슬픈 냄새입니다.”
언어체계가 엉킨다. 고독한 냄새가 인간 세계 어디에 질감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슬픈 냄새란 또 무엇인가.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난 어딘가의 좌표에 위치한 냄새를 표현할 언어가 그에게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슬프다니, 그에게도 정신이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딱 이런 상황일 것이다. 기계 안에 정신이 기거할 곳이란 없는데 이와 같은 착각은 어눈 사디에서 비롯하는가.
은결의 메모리 위에 인간 군상의 삶을 나열하는 구병모의 언어는 여느 때처럼 놀랍다. 의지와 실현 가능성을 구분할 줄 아는 은결처럼, 의지는 현재를 어떻게 꺾어갈 수 없는지 깨닫는 시호처럼, 어느 순간에는 형편없이 삶이 구겨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을 배웠던 세주처럼 그녀의 언어는 친절하고 꼼꼼하면서도 대담하고 서사는 고요히 흘러가며 정서는 슬프고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늘 약간의 슬픔을 동반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문장은 항상 슬프고 노상 아름답다.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은결은 아직 작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는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인간이 말하는 행복이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제 소모될 대로 소모된 내장 배터리가 태양열로는 더 이상 충전되지 않더라도, 플러그를 꽂은 채로 예전보다 전원 대기 모드가 턱없이 길어지더라도, 감사란 어떤 것인지 또한 알 것만 같다.
일전에 읽은 신문기사에서 향후 20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 전망하는 직업 중 하나로 번역가를 뽑은 것이 기억난다. 요샌 구글을 비록 각종 어플들도 음성인식을 잘하는데다 번역기 또한 성능이 좋은 편이라 그런 기사가 나온 맥락도 이해는 가지만 개인적으로는 번역이야말로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지 의미를 번역하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발화자 혹은 저자의 저의를 읽어내는 것, 이를테면 모멸과 수치 사이나 경멸과 혐오의 간극, 자기연민이 자기혐오로 뻗어가는 사이클을 기계도 읽어낼 수 있을까. 웃는 것처럼 보이는 입과 웃음기 없는 눈의 표정에서 나오는 언어를 기계는 무엇으로 해석할까. 온갖 것들이 혼재된 시장의 냄새와 사춘기 아이의 미묘한 심경과 선과 악에서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부끄러움과 그 모든 것을 듣고 기록하는 로봇이었던 은결이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로봇도 할 수 있을까. 세주를 쫓아온 전남편과 피가 나도록 시호를 때렸던 남자친구와 그녀의 불행을 충분히 연민하지 못하거나 경멸했던 가족들보다 은결이 더 사람같지 않다고, 말할 수 없듯이. 어쩌면 언젠가, 아주 훗날에는 그런 미묘한 차이조차 읽어낼 수 있는 기계가 발전할 지 몰라도 적어도 향후 20년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작가와 내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누군가의 손길을 빌리지 않고 오독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고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정확히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세상은 많이 변했고 동시에 그리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한 겻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