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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 인형에서 여성, 여성에서 사람으로 여성복 기본값 재설정 프로젝트
김수정 지음 / 시공사 / 2021년 10월
평점 :
어릴 때부터 유니섹스 스타일을 좋아했다. 프릴이나 레이스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애였을 때를 제외하곤 접한 적이 없고 고등학교 졸업 후 치마도 입은 적이 없다. n년 전부터는 청바지도 입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키도 크지 않고 골격도 작아서 좀 더 귀엽게 입어봐라, 치마를 입어라, 다른 스타일로 입어봐라 하는 충고 아닌 간섭을 들어왔다. 그렇다고 뭔가, 힙스터의 스타일을 추구하거나 의도적인 탈코르셋을 지향한 것도 아니다. 그저 허리가 들어가지 않고 하늘하늘하지 않은 샴브레이 셔츠나 명도 높고 채도 낮은 네이비 버튼다운 셔츠가 입고 싶었고 헨리넥 스타일이나 로만칼라에 골반까지만 닿는 라이더재킷, 팔이 가오리가 되지 않고 허리를 묶지 않은 맥코트나 괜찮은 슬랙스, 카센터 하는 삼촌 것을 빌려 입은 것 같지 않은 야상재킷을 원했을 뿐이다. 대개 내가 원하는 옷들은 남성복에는 분명 있었지만 키와 어깨너비 때문에 그래 이건데 싶어도 막상 입을 수는 없었다. 옷을 좋아하지만 정작 의류가 많지 않은 건 이렇듯 원하는게 구체적인데다 여성복에는 거의 없는 타입을 원해서였다. 어릴 땐 그래서 스스로가 까다롭다고 여겼고 그 다음엔 키가 작아서, 아니면 '여성적인' 스타일을 원하지 않았기에 혹은 골반과 엉덩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돈이 충분히 많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어떤 식이든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소셜미디어는 무수한 단점을 갖고 있지만 여론을 정립하기 좋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최근 몇 년 간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여성들이 여성복에 대한(더불어 생리, PMS, 탐폰과 생리컵 등)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다수의 여성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왜 상의는 이렇게 푸대자루 아니면 강아지옷 같은 사이즈인지. 비싼 브랜드에서 구매를 하더라도 왜 이렇게 구김이 많은지(나는 여전히 린넨의 단점을 상쇄할 장점을 찾지 못했다). 여성 바지는 주머니가 없는지. 분명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바지 벨트의 구멍조차 사라졌는지. 속옷은 삼각만 입어야하고 시중에 나온 대다수는 미디와 맥시는 없이 미니에만 집중해있는지 등등. 키가 큰 여성들은 남성 라인에서 차선을 택하고 키가 작은 여성들은 아동 라인의 가장 큰 사이즈를 입는 이 아니러니는 분명 정상적인 일은 아닐텐데.
몇 년 전부터는 그나마 사각트렁크 속옷이나 논와이어 브래지어, 브라렛 등등이 나오기 시작했고 치마와 스키니 라인이 전반적인 유행에서 멀어지고 비키니와 모노키니 대신 래쉬가드가 대세가 되고 애슬레져가 자리를 잡긴 했지만 여성들의 의문과 비판(그리고 분노)은 아직 사그러들지 않았다. 단추, 여밈, 주머니, 아니 단순한 봉제부터 여성복과 남성복 차이는 그대로인데 여전히 가격도 훨씬 비쌌으며 사이즈 역시 '프리사이즈'로 퉁치는 의류산업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의류계의 변화나 개혁이 아니라 유행이 바뀌거나 혹은 발 빠르고 눈치 빠른 사업가들이 새로운 사업을 하는 식 밖에는 되지 않았다.
퓨즈서울의 대표(본인이 책에서부터 자신의 브랜드 이름을 밝히길래 나 역시 쓰지만 광고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퓨즈서울이라는 브랜드가 있는 줄도 몰랐고 읽고 난 지금도 구매한 적 없다) 김수정은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나아가 구조적인 면에서 비판을 한다. 자신 또한 어떻게 한계를 느꼈는지, 직접 발로 뛰고 공장에 샘플을 보내면서 어떤 식의 거절을 당하고 왜 마음대로 옷을 만드는게 쉽지 않았는지 그렇게 공들여 만들었지만 왜 가격은 여전히 -같은 공정을 거친 남성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지 등등.
사실 수요자의 입장에서의 불편은 이미 인식하고 있고 들어온 적 있기에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공정과 공장 자체가 이렇게까지 다르고 그럼에도 가격 또한 구조적으로 '여성복이라서' 더 비싸게 받는다는 말은 어이 없는 감정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하다. 말마따나 소재에 성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쓰기로 결심했고(저자는 온라인에서의 조각 글은 뜻이 와해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워서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 책을 출판했고 누군가가 읽고 있다는게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류업계는 여전히 멀고 멀었지만 소비자가 바뀌었고 (최소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소비자를 잡기 위해 판매자가 변한다면 그래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 허무와 분노 대신 희망을 품어본다.
남성복은 1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획기적으로 발전했을까? 남성복 역시 거의 발전이 없다. 유행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디테일들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실루엣은 똑같다. 여전히 남성복은 여밈이 앞단추로 나와 있고, 불편한 라인들이 없고,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옷들이 많다. 남성복의 기본을 이루는 수트는 품에 여유가 있고 무채색 계열이 많다 보니 옷에 맞춰 체중을 무리하게 조절하거나 여러 벌 살 필요가 없다. 수트는 애초에 남성들의 사치를 줄이기 위해 탄생한 옷으로, 착용자는 넥타이 몇 개만 사서 돌려 입으면 단벌 신사'로 불리며 검소한 이미지까지 얻을 수 있다. 내가 퓨즈서울을 런칭하며 수트에 집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겐 단벌 숙녀'라는 단어가 너무나 생소하듯, 단벌이어도 충분한 여성복이 없기 때문이다.
이 굴레를 깨고자 품이 넉넉해서 편안하고, 주머니가 많아 기능적인 '여성을 위한 옷'을 공장에 제작 의뢰했다. 공장은 내 의도를 이해한 듯 보였으나 여타 여성복과 다를 바 없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다시 찾아가 몇 번이고 설명해도 “이거 여성복이잖아요?”라는 허무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심지어 완벽히 내 의도대로 만든 샘플을 들고 가보여주며 이렇게 작업해달라 요청해도, 여성복의 불필요한 요소를 다 넣어서 만든 옷을 건네서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이유를 물으면 답은 똑같았다. 여자들이 입는 옷이니까 '여성복처럼' 만들었다고.
개인적으로 타이트한 밑위 때문에 여성 질환으로 고생했던 터라 밑위가 길고 엉덩이가 끼지 않는 바지를 꼭 만들고 싶었다. 넘치는 의욕을 안고 찾아간 또 다른 공장에서 들었던 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자들은 이렇게 밑위 긴 바지 안 좋아한다.” “엉덩이 라인이 펑퍼짐하니 아무도 안 살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성복을 입어본 적 없고, 여성들의 고충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겼다. 소위 말하는 남성복 같은 여성복'은 아무도 안 살 거라며 단정 짓다니 어이가 없었다. 결국 다른 공장을 찾아가 밑위가 길고 엉덩이가 타이트하지 않은 슬랙스를 만들었다. 이 제품이 대박을 터트리는 걸 보며, 그동안 여성들이 이런 옷을 안샀던 게 아니라 못 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만든 슬랙스를 입고선 이제까지 바지의 편안함을 모르고 살았던 게 억울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엉덩이 라인을 우선해 뒷주머니를 없애버리거나 페이크 주머니를 붙인 여성복 바지 역시 허다한 수준인데, 남성복에는 페이크 주머니가 달린 제품이 거의 없다. 심지어 비치웨어에도 남성 비치웨어에서 발견한 실용적인 주머니가 달려 있을 미니 포켓 정도니 말 다했다. 양쪽에 달린 주머니뿐 아니라 동전이나 담배를 넣을 수 있는 미니 포켓이 허리춤에 달린 걸 보곤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
억울했다. 너무 억울했다. 여성복을 입고 자란 모두가 억울해할 일이다. 같은 값의 옷임에도 여성복이냐 남성복이냐에 따라 주머니가 붙거나 사라졌다. 기존 거래처인 여성복 공장에 연락해 재킷에 안주머니를 넣어달라 요청했더니, 공장에서는 질색하며 개당 추가 공임 8,000원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이 작업을 하느니 손이 덜 가는 다른 작업을 맡겠다는 소리다.
물론 다른 여성복 공장에 가서 비싼 공임을 지불하면 안주머니 달린 재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거절한다면? 공장을 찾는 데 드는 시간도 만만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남성복 공장을 찾아갔다. 남성복은 애초에 주머니가 기본값이니 추가한다고 한들 공임 변동이 크지 않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거절당할 일도 없을 거다.
남성복 공장에서는 작업지시서를 보더니 별다른 말없이 샘플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기본 공임은 여성복 공장보다는 비쌌지만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었고, 주머니를 추가할 때 별도 비용 없이 서비스로 넣어준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 주머니 없이 재킷을 제작하면 공임이 저렴해질까 싶어서 물어봤는데, 남성복 공임은 애초에 주머니와 안주머니가 모두 들어간다는 전제하에 책정되었기 때문에 여성복처럼 주머니를 없앤다고 한들 비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머니가 없는 것을 기본값으로 두고 주머니를 추가할 때마다 제작비가 올라가는 여성복과는 전혀 다른 체계였다.
슈트를 제작하기 위해 샘플실 실장님을 만난 날이었다. 내가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스와치(원단의 견본, 원단 샘플이라고도 한다)들을 보더니 이런 원단으로는 남성 슈트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가져온 스와치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용 의류에 사용되는 것이고, 밀도가 낮아서 금세 보풀이 나거나 해진다고 했다. 한마디로 '여성용' 원단이라는 거다.
놀란 내가 그러면 남성용 원단도 있냐고 묻자, 남성용 원단은 이것보단 가격이 조금 있지만 훨씬 밀도가 높아서 탄탄하고 보풀이 잘 생기지 않고, 워싱 가공이 되어 나와 오래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실장님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원단 시장에서 여성용과 남성용 원단을 구분해서 판다는 뜻인가? 내가 모르는 사이 원단에도 성별이 생긴 걸까?
블라우스니까 힘을 주면 바로 찢어질 것 같은 원단을 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1,600원짜리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서 품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여성복을 판매할 때 이런 원단이 여남 의류 할 것 없이 보세 의류 전반에 쓰이는 줄 알고 그저 저렴하다며 좋아했지만, 지금은 이런 싸구려 원단이 여성복에만 쓰인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얇고 하늘하늘하며 비침이 심한 원단으로는 남성복을 잘 만들지도 않는다. 세탁기 한번 돌리면 봉제선이 다 뜯어질 만큼 허술하니 의류용으로 제작된 원단도 아닌 것 같다.
2020년 초 A 브랜드에서 자사의 남성용 슬랙스를 구매하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여성용 슬랙스를 따로 출시했는데, 원단이 바뀌고 페이크 주머니가 달리면서 가격이 높아져 여성세(핑크텍스) 논란을 일으켰다. 여성용 슬랙스는 남성용보다 2,000원 정도 비쌌는데, 주머니를 없애 실용성보다 '스타일'에 중점을 뒀다는 피드백만 봐도 얼마나 여성복에 제대로 된 옷이 없는지 알 수 있다. 더 재밌는 것은 남성용 슬랙스는 폴리에스테르와 레이온, 스판이 혼방(성질이 다른 섬유를 섞어서 짜는 것)된 TR 계열 원단을 사용했지만, 여성용 슬랙스에는 폴리 100% 원단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TR 원단은 고밀도가 많아 성용 슈트나 슬랙스에 많이 사용하미, 퓨즈서울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슈트 원단들도 TR 원단이다. 그럼 폴리 100% 원단은 품질이 별로 좋지 않은 여성용 원단인 걸까?
아니다. 앞서 언급한 고축사 원단도 폴리 100% 원단이다. 다만 내가 사용한 고축사 원단은 일반 폴리와 다른 기능성 원단으로 가격도 TR 원단과 맞먹는다. 그럼 A 브랜드는 우리처럼 질 좋은 고축사 폴리 원단을 사용했기에 주머니를 없앴음에도 여성용 슬랙스 가격을 2,000원이나 더 올려 받은 걸까? 고축사 폴리 원단을 사용했다면 분명기능성 원단이라고 따로 표기를 했을 텐데, 별다른 고지가 없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여성용 슬랙스를 출시하며 왜 기능은 없어지고 가격은 더 비싸졌을까?
여성들도 제대로 된 원단으로 만든 제대로 된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 누군가는 여성복의 질이 낮아진 이유로 계속된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며 시장 원리를 운운한다. 애초에 저질로 제작된 옷들만 쏟아지고 마땅한 비교군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기존의 여성복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게 아닐까. 고밀도 원단으로 꾸즈히 여성복을 만들어 공급하면 소비자들은 더 이상 질 류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값을 주고 질 낮은, 사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시장 원리니까.
실제로 강연을 나가 보면 원단이나 주머니 등을 설명할 때보다 박음질 차이를 보여줄 때 호응이 더 좋았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품어왔던 여남 옷 퀄리티 차이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한번은 여남 옷 봉제 차이를 SNS에 올렸더니 여러 사이트에서 '비교 후기가 쏟아졌다. SPA 매장에 가서 커플룩으로 나온 옷의 봉제를 비교했는데 남성복은 쌈솔이고 여성복은 오버로크였던 것이다. 의류업계에는 “남성복 마진을 여성복에서 메꾼다"는 소리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넘길게 아니라 이게 여성복의 현실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