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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평점 :
관계의 균열은 언제부터 시작될까. 1996년, 컬럼비아대 문예창작 프로그램에서 만난 '나'와 빌리의 경우라면, 감히 말하건대 처음부터 저울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같은 재능을 갈망하는 두 사람이 같은 장소를 공유한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특히 '나'가 빌리의 재능을 목격했고 그가 듣는 찬사를 들었으며 그에게 어떤 식이든 호감을 느꼈다면 말이다.
'나'와 빌리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비록 애정과 신뢰를 갈망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사람이 으레 그렇듯 '나'는 빌리와 자신 사이에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고 믿지만(부모의 이별, 아버지의 부재, 외동인 점 등) 사실 그들은 아주 다른 사람이다. 시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빌리에겐 조금 더 앞선 재능이 있었을 뿐이고 예술가가 될 준비가 된 '나'에겐 이는 사소한 차이에 불과했다. 그는 오히려 빌리와 자신의 공통점을 확대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했고 빌리에겐 없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금전적 여유가 있기에 처음에는 엇비슷한 정도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그가 나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인정하면서도 나는 질투나 열등감 같은 통상적인 감정에 빠져드는 대신 그가 프로그램의 모든 학생 가운데 도와주기로 선택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우쭐함을 느꼈고, 그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가 빌리에게 방 한 켠을 내준 건 있는 자의 자선, 공격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나'는 빌리의 착실한 계산과 부채감을 부담스러워하지만 사실 그건 친절과 호의라기보단 어쭙잖은 우월감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우월감은 빌리와 '너무 가까이' 있게 되면서 '나'를 점차 낮은 곳으로 있게 한다. 자신보다 수줍고 소극적이었던 빌리가 -자신은 실패한- 여성과의 원나잇을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작품이 썩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둘 모두 아버지의 부재에서 자랐음에도) 그는 직접 무언가를 손보고 고칠 수 있는 사람임을 알 때, 자신이 모르는 친구를 사귀었을 때, 육체노동을 하고 수입을 얻었을 때 등등. 그래서 '나'는 그럴 때마다 빌리에게 혹은 빌리의 앞에서 경제적 우위를 앞세운다. 그러나 실제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낸 적이 없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한편 빌리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러니 어쩌면 자신의 패배감도 그럴 만하다는 자위까지 하기 이른다.
그 이야기는 내가 기억하는 것만큼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았다. 유머감각은 절제해서 사용됐고, 문장은 날카로웠으며, 인물들은 매력적이었다. 반쯤 읽었을 때 나는 작가가 누구인지 거의 잊어버렸고, 결말에 이르렀을 때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애덤이 힘 있는 소설 한 편을 만들어냈고, 그가 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성공을 거뒀다는 걸 알게 되어 나는 더욱 화가 난다는 사실을.
그래도 그에겐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 빌리가 가장 원하는, 그리고 내가 갈망하는 마지막. 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마저 차츰 빛을 잃고 시들어가자 '나'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빌리는 물론 자신을 상처 입히며 결국 관계는 끝이 난다.
(전략) 그 결혼식 여행을 가지 말았어야 했고, 애초에 함께 들어와 살자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계속 혼자 살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한 학기 뒤에 컬럼비아를 떠났을 것이다. 나는 그를 감탄스러운 작품을 썼던, 잠깐 동안 알았던 동료 수강생으로 희미하게 기억했을 테고, 그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파트를 영구히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내 작은 세계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남았을 것이다. 그게 삶을 헤쳐나가는 더 쉬운 방법이었다-가장자리에서, 참여자라기보다는 관찰자로.
역자는 이 책을 1996년 미국, 그리고 어쩌면 현재의 미국에 대한 어떠한 은유라고 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책이란, 소설은, 예술은 하나만의 의미는 갖지 않기에. 그러나 내게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지독하게 개인적인, 그래서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자신의 재능을 진심으로 갈망했으나 타인에게서 목도한 사람의 이야기로.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을 지독하게 미워한다는 깨달음으로. 지나고 보면 그렇게까지는 아닐 일조차 그렇게까지 온 힘을 다해 원망하고 끝내는 망쳐버린 나이 든 이의 회한으로. 생애 가장 날것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어떤 순간으로. 내게 의미있었던 이에게 나는 그렇게까지 의미 있는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좌절로. 결국 제 손으로 관계를 파탄내면서도 들키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체면을 내세우고 싶은 옹졸함이나 차라리 내 손으로 망쳐버린, 스스로 놓아버린 그 후련함을. 시대를 반영한 메타적 소설로 읽기엔 너무 많은 부분이 '알 것 같았다'.
그러므로 끝에 끝까지 읽으면서도 어쩌면 나는 '나'는 재능있고 눈부신, 헐리우드 영화의 결말처럼 극적인 변화를 이뤄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기대했다. 그 기대는 '나'에 대한 연민이자 동정이었고 어떤 의미에선 대리만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평온하고 여유롭지만 동시에 여전히 외롭고 어느 면에선 비겁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그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나'가 더 이상 누구도 상처입히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고 더불어 미묘하게 상처받았다. '나'는 성장했으나 성장하지 못했고 성장했으나 성장하지 않았다. 몰래 빌리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가 느꼈을 부끄러움과 비참함과 안도를 곱씹었다. '나'에게 빌리는 마지막 뜨거움이자 오롯한 차가운 순간이었음을 돌이켜 생각하니 왠지, 그가, 그의 모든 열등감과 질투가,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가엾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나'를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새삼 소설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는 내게 출구를 마련해줬다. 내가 치졸했다고, 지기 싫었다고, 너에게 질투가 났고, 내가 못 받을 거면 너 역시 장학금을 못 받기를 바랐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 됐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좀 더 비참했다.
"네가 날 떠날까 봐 그랬어." 내가 말했다.
우리는 다시 서로 침묵했다.
아마도 빌리는 내가 말한 이유를 이미 의심스레 떠올려보았거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실 나는 일 년 내내 억누르고 있던 것을 나 자신에게 털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빌리가 내 안에서 다른 누구도 움직이게 한 적 없는 무언가를, 깔끔하게 정의된 범주에는 들어맞는 않는 무언가, 내가 명료하게 표현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무언가를 건드려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비록 이런 각각의 경험은, 누구간의 외로움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특정 범주에 넣기 불가능한 독특한 것으로 느껴지지 마련이라고- 타인의 경계가 그려내는 특별한 윤곽선은 우리 자신의 그것과 충돌하고,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지금의 나는 생각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