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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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근대사회가 타자(다른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한 부정, 공격과 방어, 경계, 울타리, 참호, 장벽 등등을 특징으로 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의 규율사회였다면 후기근대사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성과사회이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타자의 소멸과 무한한 긍정, 세계화, 탈경계, 보편적 교환과 교류 등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이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숨어있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은 규율과 통제로는 한계를 맞이 했다. 자연스레 사회는 성과를 중심으로 한 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문제는 이전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부정 속에 스스로를 지켜갔다면, 성과사회의 '긍정성'의 과잉은 모든 것을 아무 저항없이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이면서도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자기 세계에 고립되어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성과사회는 컴퓨터처럼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만들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이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질병들은 성과를 향해 달려가다가 탈진한 자아의 증상이다. 성과사회는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하는 "피로사회" 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는 더이상 규율과 통제가 없다. 이제 "복종적 자아"가 아닌 "자기주도적 자아"이고 스스로가 기업가이다.
이는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듯하지만 결국엔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구속'으로 이어진다.

성과사회는 "자기착취사회"이다.
성과사회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자아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한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의 자아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지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로 이어진다.

최근 공직사회에 성과주의를 도입한다고 한다.
대기업들이 30대 명퇴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다.


간혹 '나'는 없고 '거대한 기계의 소모품'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이 기계에서 이탈해 '나'를 찾고 싶다고 고민한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거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이 기계의 톱니바퀴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 더 이상의 '나'는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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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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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이다. 그러한 사람과 일들로부터 격리된 나만의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관계다'는 이유이다.


신영복교수는 젊은 시절 20년을 감옥에서 무기수로 복역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참 깊이 있는 인간 성찰의 결과물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고 그 결과물로 새로운 심리치료법으로 제시한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화장, 성형, 의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정체성이다. 그것은 노동과 삶, 고뇌와 방황에 의해서 경작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각, 자기 정체성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누구의 생각이 옳다는 보장은 없다. 모두가 수많은 삶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등산로는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님으로 길로써 만들어진다. 즉 길은 관계의 흔적이고 소통의 결과로 생겨나는 '주름'이다.
내 얼굴에 하나둘 생기는 주름들이 모여서 나의 정체성을 이루었고 지금도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우리의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이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이나 역사를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과 내가 맺는 관계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 함께 깨닫게 하는 것이다.

자연은 하나의 가치, 일정한 형식이 없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최고의 질서, 가장 근본적인 질서, 그래서 가장 안정적인 질서이다.
이러한 자연과 대면하고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 삶 가운데 변화의 질과 높이는 얼마나 대단해 질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자연과 진실한 관계 맺고자하는 것도 결국 우리 인간의 자고하는 욕심에 의한 것임을 생각할 때 자연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에는 우리의 그릇이 너무나 작다.


<인상적인 부분>

대전의 중동 창녀촌에 노랑머리라는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직자가 이 노랑머리에게 여성다운 품행을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여자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입니다. 그 여자를 돌로 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오만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무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선은 미덕으로, 위악은 범죄로 재단된다. 이것이 강자의 논리이다.

테러는 약자의 전쟁이고 전쟁은 강자의 테러이다.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모순된 조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명상은 현재의 공간을 벗어나는 '정신적 탈옥'이다.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고, 자기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자기를 칼같이 떠나는 것이다.

그다음이 '만나는 것'이다. 자기를 떠나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만나기도 어려운 법이다.

그다음은 '돌아오는 것'이다. 종착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변화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

내용도 없으면서 지나치게 꾸미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소 거칠더라도 진실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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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 - 철학자의 생활에서 진정한 삶을 엿보다
서정욱 지음 / 팬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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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들을 테마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특히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서의 철학자의 삶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제시하여 왜 그가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를 돕고 있다.

서양철학자들은 거의 16~19세기에 배출되어졌다. 이는 유럽이 각종 혁명등 계급간 종교간 갈등 속에서 새롭게 변화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고민한 지식인들의 산물이었다. 특히, 유럽이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교육을 강화하고 대학을 설립하였다는 것은 이런 지식인들의 고민을 더욱 자극하였을 것이다.

이런 철학적인 산물이 있었기에 문명발달이 늦었던 서양이 동양을 앞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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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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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아이히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떤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하여튼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 "그 일은 그냥 일어났던 일이다. ... 나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해야 한 적이 없었다."


예루살렘 법정에서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재판받고 있던 아이히만의 주장이다.


아이히만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었거나 '평범'했다.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나, 열광적인 반유대주의나 세뇌교육도 없었다.


우리의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아이히만의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충격적인 일이다.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입장에서는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아이히만은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의 행위가 수많은 유대인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잉태했지만 그는 결코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한 것도, 누구를 죽일 어떠한 의도를 가졌던 것도 아니며, 결코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당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최종 해결책(유대인 말살)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며,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할을 떠맡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 재판은 복수의 권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승전국의 법정에서 이루어졌고 때문에 여러가지 논란을 낳았다.
특히 생각할 볼 것은 '너도 마찬가지'라는 관점이다.
2차대전에서 많은 민간인 유대인이 죽은 것도 사실이지만 연합군의 원폭으로 인해 또다른 수십만명의 민간인들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갈리듯 영웅과 악당도 갈렸다. 이뿐 아니라 베트남전이나 다른 세계각국의 전쟁에서 민간인에 대한 불필요한 잔인함이 자주 발생하였고 우리나라도 가해자로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는 아이히만 재판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조차도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문제로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아이히만의 범죄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것만은 변함이 없다.


혹자는 삶이 전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터 어디엔가에 또다른 유대인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법제도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잔인한 굴레를 씌고 있을지 모른다.
비밀이 아닌 비밀이 되어버린 상위 1%의 그들은 각종 사회제도와 법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대다수의 일반대중은 아이히만처럼 생각없이 그냥 주어진 법제도안에서 그들이 정해준 목표만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이런 비상식적인 제도에서 발생한 부작용의 굴레를 쓰고 허덕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샤르트르가 지식인은 태생상 지배층의 제도안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지배층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피지배층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갈등상황에 있다고 했다. 지식인이 지배층에 붙어 피지배층을 도외시 하는 것은 어찌보면 직무유기이다.


얼마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풍요의 시대, 넘쳐나는 곡물이 일부 지배층의 식탁에 오를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고발했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일부 지식인의 고발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법제도 속에서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들의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이 시대의 아이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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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땅은 누구의 것인가 e시대의 절대사상 24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외 옮김 / 살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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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면적 기준 지니계수 0.89, 가액 기준 지니계수 0.79, 바로 우리나라의 토지 소유의 편중 실정이다.(지니계수가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9월말경에 정성호국회의원이 최근 10년간 전국 땅값이 68.5%가 올랐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지가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지니계수를 감안할 때 이 상승분이 모두 토지 소유자들의 불로소득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시 보게 한다.

헨지 조지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생산력이 증가하는 '진보'에도 불구하고 생존최저임금이라는 '빈곤'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였다.

헨리 조지의 활동시기인 당시 1820년대에서 1860년대까지 미국은 산업혁명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진보는 부작용을 낳았다. 빈곤과 실업이 대도시 지역에서 나타났고, 토지가치는 투기의 영향으로 상승했다.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집필하기 시작한 1877년에는 마침내 산업 불황이 찾아왔다. 극도의 사치와 비참한 빈민가가 공존하는 뉴욕의 대로에서 헨리 조지는 물질은 엄청나게 진보하는데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캐묻기 시작했다.

결론은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지대를 차지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토지사유제 때문이다. 즉 생산력의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함으로써 임금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크게 이루어져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부-지대=임금+이자)

빈곤을 타파하려면, 1.개인이 지대를 소유하는 것을 법으로 보장하는 토지사유제를 없애야 한다. 2.그러나 이미 토지사유제가 관습화된 나라에서는 토지를 공유화 할 필요까지는 없고, 단지 해마다 지대를 정부가 환수해 사회가 공유하고 그 대신 다른 조세를 면제하는 지대조세제를 실시하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제는 사유된 것을 상당 부분을 조세로 징수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유재산제에 어긋난다. 즉 현재 부과되는 조세는 인간의 노력, 근면, 기술,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철도를 개설하면 철도가 공해라도 되는 듯이 세금을 받으러 온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는 사람을 조세로써 처벌하며, 기계를 들여오고 늪을 농지로 바꾸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린다.

그러나 지대조세제는 불로소득인 지대를 조세로 징수하고, 그 대신 노력과 기여의 대가인 임금 및 이자의 완전한 사유를 보장한다.

또한 지대조세제를 통해 토지 세액이 실제 지대에 근접하는 경우에는 누구든 사용하지도 않을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토지는 실제로 사용할 사람에게 개방해서 더 많은 생산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노동소득은 그 스스로 창출한 부이며, 사회의 부의 총량을 증가시킨 부이다. 그러나 지대소득은 단지 이미 생산된 물자 중에서 취하는 것일 뿐이며, 그 대가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진정 정의로운 과세란, 노동 소득이 아닌, 사회가 창출하는 가치인 토지가치를 징수해 사회의 공공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사회가 지대를 징수해 공공의 용도로 사용하면 지대 상승분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산업혁명으로 경제구조가 재정립되는 시기에 바로 적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게 한다.  현대는 그 때보다 더욱 경제구조가 복잡해졌고 기존 기득권의 위치도 굳건해(?)졌다. 많은 책이나 언론이나 영화까지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그뿐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우리 모두가 의식을 가지고 동참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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