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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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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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성장이 아닌 지속가능한 사회로...]

● 스마트폰의 유통기한은 2년이다?

“요즘 스마트폰이 이상해. 2년쯤 되니 교체할 때가 되나봐.”
“나 이번에 최신형 스마트폰 장만 했어”

고가의 스마트폰도 2년을 사용하기 힘들다. 기기 이상으로 또는 TV광고 속의 최신형 폰의 유혹에 넘어가 보통 2년에 한번씩은 기기를 교체한다.
기기 이상은 갑작스레 온다. 어느 날 배터리 충전이 급속히 풀린다던지, 통화 버튼이 눌러지지 않는다던지. 하지만 수리의 길은 험난하다. 근처 서비스센터를 찾아야 하고, 고가의 수리비를 지급해야 한다. 혹시 당일 수리가 어려울 경우 며칠간 생명 같은(?) 스마트폰없이 지내야만 한다.
이럴때면 TV 속의 최신형 스마트폰에 대한 욕망은 극에 달한다.

가끔은 멀쩡한 기기를 두고 단지 디자인이나 최신형 기기에 대한 소유만을 목적으로 교체하기도 한다. 최신형이라고 해서 특별한 기능이 달라진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잠깐이지만 힘든 일상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정도만큼의 작은 만족감이 있을 뿐이다. 솔직히 새로운 기기에 적응하는 것도 또다른 스트레스이다.

“~~~지 않을까?” 했던 의혹이 현실이 되었다. 애플이 아이폰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렸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이라고 공식 인정한 것이다. 소비자들의 분노가 만만치 않을뿐더러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이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년에도 몇 번씩 신형 스마트폰이 나오는 세상에서 소비자들이 구형폰을 계속 사용한다면 스마트폰 기업들은 모두 망할 것이다. 소비자들이 주기적으로 신형폰을 구매해야지만 지속적인 이윤 창출이 가능하다.

다른 경쟁사들은 애플의 위기를 기회로 새롭게 시장 확장을 계획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다를까하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최근 스마트폰 교체 시기는 일반적으로 2년 전후이다. 만약 성능개선으로 신형기기로의 교체주기가 3년, 4년으로 늘어난다면 과연 업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 저성장시대의 탈출구를 찾다.

요즘 나라 안팎의 핫 이슈는 저성장시대에서 살아남기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경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고도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나라들이 저성장의 위기감 속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고심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제한적인 생산과 생산된 제품에 대한 소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규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추가적인 시장 확대는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결국 기업들은 ‘인위적으로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여 신규수요를 만들게 된다. 애플의 사례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기업들은 유통기한, 하자보증기간, 할인약정기간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이미 곳곳에 상품들의 death date를 설정해 놓고 상품의 의도적인 수명단축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강요받는다. 성장이 느려지거나 멈추면 곧바로 위기가 찾아오고 모두들 패닉 상태에 빠진다.’
(낭비사회를 넘어서 중)

● 광고는 인간의 욕망을 먹고 산다.

소비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꺼지지 않는 불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는다. 소진되어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만족되어지지 않는다. 광고주는 지속적으로 넘치는 불만을 재료로 소비를 창조한다.

우리는 광고가 규정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광고를 연료로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목표를 향해 진군한다. 최신 광고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점이다. 광고가 만든 가상의 세계, 광고라는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엄청난 양의 광고를 퍼붓는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월부터 12월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끊임없이, 쉼 없이, 휴식 없이, 휴지 없이, 중단 없이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히고, 귀찮게 한다.’
(낭비사회를 넘어서 중)

광고는 욕망의 갈증을 상품 소비로 해갈하라고 한다. 하지만 상품 소비라는 생수는 또다른 욕망의 갈증을 유발할 뿐이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욕망하는 인간, 광고는 끊임없이 필요를 창조하여 소비자를 생산한다.

● 상품의 시체로 지구는 죽어가고 있다.

과학기술의 끝없는 발달에도 모든 제품은 시한부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불멸성을 추구하지만 반면 제품의 유한성을 인정한다.
제품의 불멸성은 생산의 종말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제품이 지속적으로 죽어야지만 생산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의 시체가 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재생 불가능한 광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인간에 의해서 고갈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생산된 제품들은 유통기한이 경과함과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고 쓰레기로 버려진다. 더 이상 수리하고 수선하지 않는다. 그냥 버린다. 이 시대는 수리하는 사람은 궁색해 보인다.

지난 2017년 10월 미국 트럼프대통령이 백악관 환경정책 수장으로 전형적인 환경규제 철폐론자인 캐슬린 하트넷 화이트를 지명해서 논란이 되었다.(출처 연합뉴스 2017.10.14.)

세계 주류 정치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더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며 성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환경에 대한 많은 우려와 논란 속에서도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변화보다는 기존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성장의 결과물인 제품의 시체들을 위한 지구상의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짧은 삶을 살다가 죽은 이후에도 편안한 쉴 곳이 없는 이들이 내뿜는 독기로 인해 지구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 인간도 상품이다.

이 시대는 인간도 상품이다. 인간은 젊었을 때에는 쉽게 수리가 가능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수리가 힘들고 결국 완전히 고장 나 버린다. 인간의 불멸성을 위해 연구를 진행한 AI, 로봇공학 등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도리어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인간이라는 상품의 존재가치를 희석시켜버릴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는 한물간 알고리즘이다. 인간이 닭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인가? 정보 흐름의 패턴이 닭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밖에 더 있는가. (......)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흡수하고 훨씬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창조한다면, 그 시스템은 인간이 닭보다 우월하듯 인간보다 우월하지 않을까?’
(유발하라리 ’호모데우스‘)

● 이제 성장없는 검소함의 시대로 전환해야 한다.

말단비대증(말단거대증), 일명 거인병이라는 질병이 있다. 손, 발, 턱, 코, 귀, 혀 등의 인체의 말단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만성 질환으로 뇌하수체 종양으로 인해 성장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발생한다.

지금까지의 성장은 우리사회에 큰 풍요를 주었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성장은 ‘질병’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성장을 통한 번영의 사회였다면 이제 성장 없는 검소함의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다양한 기능의 세련된 최신 제품보다는 지속 가능한, 수리 가능한, 재활용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공유경제도 대안이 되겠다. 자동차도, 가전제품도 함께 공유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우버택시나 에어비앤비 등은 추가적인 제품의 생산없이 기존의 것을 활용하여 성공기업들이다.

지구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살아가야할 터전이다. 소중히 관리해야 할 것이다.

500원을 주고 '막 쓰고 버릴 목적'으로 샤프를 구매했다. 생산자도 이미 내 생각을 예견한 것인지 막 쓰기 시작한지 얼마가 되지 않아 고장이 났다. 플라스틱과 약간의 철로 이루어진 제품이다. 지구와 미래세대를 위해 샤프 수리공이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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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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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위는 죽음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어니스트 베커)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예술, 종교, 언어, 경제, 과학의 발달을 이끌어 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공포는 인간 행동의 기저에 있는 주된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지성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시켰지만 인간에게 죽음을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인류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 예술 등을 통한 내세적인 불멸과 과학기술을 통한 현세적인 불멸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습니다.

특히 과학기술과 의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는 AI나 로봇 등을 활용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관련 기관의 한 관계자는 "21세기가 끝날 즈음이면 인간과 지금의 인간 사이에는 지금의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 존재하는 정도보다 더 큰 차이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종" 슈퍼맨이이 될 것이라는거죠.

걱정입니다.
새롭게 등장할 슈퍼맨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런 착한 정의로운 슈퍼맨일까요?

현대 자본주의는 극소수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지극히 탐욕스러운 욕망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불멸의 기술에 대한 수혜자도 결국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코 '착한 슈퍼맨'은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노예가 되던지, 아니면 미개인으로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멸종의 길을 걸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15~16세기 신대륙의 원주민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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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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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분위기와 환경에 따라 감정이 사회적으로 고착화된다. 바다가 정화되기 위해 폭풍, 태풍이 필요하듯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감정의 고리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혁명, 전쟁 등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다시 부패해 들어가는 알고리즘의 반복은 피할 수 없다.


어느 공동체에서는 노바디이지만 어느 공동체에서는 섬바디다. 즉 상황에 따라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눈치, 체면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만 결국 이도 상대방에 대한 예절이다.

요즘 눈치, 체면 없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행태로 인해 세계가 눈살 찌푸리고 있다.

상호간의 존중과 예절이 필요하고 이것이 눈치와 체면이다. 낮은 자는 높은 자의 눈치를 보고, 높은 자는 낮은 자에게 체면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복종과 위신의 문제가 아니라 상하간에 상호 존중의 문제이다. 이를 복종과 위신의 문제로 보는 우리의 시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조직생활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아닌 다수가 생각하는 가치를 눈치를 보면서 따라 간다. 이것이 옳은지 틀린지는 후차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분명이 따른다.

가치를 찾는 여행은 결국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자칫 잘난 체가 될 수 있다.

개인주의는 모멸감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세대의 개인주의의 만연은 그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즉, 각자가 다른 기준으로 존중받고 존중할 줄 아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면 소리치며 세상에 악을 쓰는 한없이 부담스러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해하면 갈등이 해소된다.

< 책을 읽으면 답 찾기>

 

1. 우리 한국사회에 만연된 모멸감을 주고받는 나쁜 문화는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해 의식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기준은 돈이다. 지금 우리 소속된 조직과 모임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삶의 진정한 근원적인 가치에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돈 이외에 근원적인 가치들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무심코 반복하는 언행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관행이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저마다 다 골방에 갇혀 지내면서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힘을 모아서 세상의 잘못된 점을 바꿔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요원해진다. 혼자서 끌어안고 마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유대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시도를 해야 한다.

 

내면이 풍부한 사람은 구차하게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스스로 드높은 세계에 충실한 사람은 타인의 평가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나 상대방의 언행이 나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여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별것 아닌 일들에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순간의 충동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멋있는 사람은 통상적인 감정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2. 한국사회가 모멸감을 주고받는 사회라고 하는데 이것은 옳은 주장일까?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를 단순히 모멸감을 주는 사회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설명할 수는 없다. 지나친 형식주의로 경직된 사회를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대의명분 중시가 나라를 바르게 이끈 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급격한 성장이 우리 삶의 여유를 빼앗고 빨리빨리와 서로간의 비교 의식을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이제 여유를 찾아야 할 시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1997IMF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과 미국식 성과주의는 점점더 여유를 빼앗고 있다.

3.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조직이 과연 있을까?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못난 모습을 드러내도 수치스럽지 않고, 뒷담화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간은 관계성을 지향하고 인간 개개인은 이기성이 지배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관계는 피곤하다. 관계는 여러가지 조건에 의해서 각종 룰이 정해진다. 서로간의 조건에 대한 정보부족 또는 룰의 차이는 종종 갈등을 유발한다. 만약 조건을 베일에 가린다면 ... 진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가면무도회, 가면을 쓰면 모두가 자유롭다.
서로의 조건을 모르니 불필요한 관심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이기주의에 근거한 욕심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 룰도 단순하다. 그냥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면 된다..조금 각박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모두가 평등해서 좋다.

4. 그런 공간, 모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 모임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기주의적인 욕심을 버릴 수는 없다. 모든 가치에 대한 평등한 인식과 존중할수 있는 수준의 의식이 필요하다. 뿌리 깊은 유교의식은 이런 의식의 성장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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