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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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로타에게 

우리의 열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사랑하는 당신에게

해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원고를 당신께 바칩니다. 

행복을 기념하는 날의 선물로는 영 부적절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게 사랑에 대한 믿음을 주어 

마침내 죽은 가족들을 마주하고 이 극을 쓰게 해준 당신, 

고통에 시달리는 네 명의 티론 가족을 향한 연민과 이해, 

용서의 마음으로 이 극을 쓰게 해준 당신, 

당신의 사랑과 따스함에 고마움을 전하는 의미로 이 극을 바칩니다. 

내 소중한 사랑, 지난 십이 년은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였습니다. 

내 고마운 마음, 당신은 알겠지요. 나의 사랑도! 

1941년 7월 22일

타오 하우스에서 

진 

-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 중에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 극작가로 유진 오닐은 현대 극의 모든 형식을 시험하고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탐험한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가벼운 상업 극에 머물러 있던 미국 연극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미국 극작가라고 한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유진 오닐의 자전적인 요소가 이 작품의 바탕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아일랜드 이민 2세대로 불행한 가족 사와 함께 심연의 아픔이 비극적으로 녹아있다. 그리고 술과 약물, 질병에서 고통 받았던 모든 아픔은 당시 시대 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기존의 이민자와 새로운 이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인종, 종교 등 다양한 차별로 나타났다. 같은 백인일지라도 종교적 이유로 온갖 핍박을 견뎌야 했던 아일랜드인들은 기근과 질병의 악순환에서 힘겹게 적응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누가 백인인가?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에서  이민자의 아픔을 이미 접해서 인지 이 책에 녹아있는 아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등장 인물을 간략하게 이야기 한다면,

 

무신경한 아버지 티론, 

모두가 아버지 티론을 원망하고 욕한다. 

서른 세 살의 큰 아들 제이미,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상을 풍기며 술에 빠져 산다.

제이미 보다 열 살 어린 에드먼드, 

예민한 감수성과 섬세하다. 건강이 좋지 않고 어머니 메리를 닮았다. 

소녀 같은 메리, 

예민한 감수성으로 섬세한 그녀는 약물 중독에 빠진다.

 

 

아일랜드 기독교인 아버지 티론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갖은 노동으로 고된 시간을 보내고 힘겹게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리고 청년 시절 한 때 희극 배우로 유망주를 꿈꾸며 열정을 품었던 젊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티론은 메리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메리를 사랑하지만, 무심한 티론은 아내 메리가 외롭고 홀로 지내는 힘든 시간을 보지 못한다. 그 속에서 출산과 우울은 메리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티론의 직업상 호텔을 전전하며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작은 아들이 홍역에 걸려 죽게 된다. 작품에 나오는 큰 아들 제임스는 이 일로 인한 죄책감으로 술에 빠져 방탕하게 보낸다. 에드먼드는 형 제임스를 따르면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닮은 섬세하고 감수성 많은 에드먼드는 폐 결핵에 걸리고 만다. 극 중 에드먼드는 유진 오닐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다. 

 

 

유진 오닐의 피 땀 눈물이 섞인 < 밤으로의 긴 여로>는 한 장소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1912년 8월의 어느 하루'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 거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작품은 줄곧 어둡고 칙칙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족의 대화는 앞 부분에서 짧게 끝이 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차가운 비난과 질타 뿐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서로의 이야기는 이해 받지 못하고 집안에서 그저 빙빙 돌고 돈다. 


이처럼 <밤으로의 긴 여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극적인 사건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다. 톤도 없고 색깔도 없는 단조롭기 그지 없는 이야기에 쓴 맛만 느낄 수 있는 대화가 오고 간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지만, 눈에서 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공감 포인트를 찾을 때였다. 이 얄궂은 애증 관계에 얽힌 가족 이야기가 짜증 날 만큼 어둡고 지루하지만, 여느 가족의 이야기 한 편을 보는 것처럼 공감을 불러 일으킬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부모 세대, 그 시대를 겪고 견뎌 내야만 했던 세대를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어느 한 나라의 가족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리고 한 가족의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가족 사 만이 아니다. 불편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이야기로 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드먼드를 편애 하는 부모,  형제인 제임스와 에드먼드의 관계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랑은 제임스를 더 방황하게 만들었다. 제임스는 동생 에드먼드를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 사랑에는 질투 또한 무섭게 작용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힘들게 살아 온 아버지 티론의 구두쇠 기질은 과거 자신의 어머니의 두려움이 섞인 푸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색함은 그가 가족들에게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 메리의 약물 중독이 아버지 티론의 인색함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의 불운을 아버지 티론의 인색함 탓으로 돌린다. 이렇게 서로 지나온 과거를 들추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들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결국 가족은 가족이었다. 서로에게 아픈 상처를 주면서도 서로 미워할 수 없는 애증의 끈이 그들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 '돈의 가치'

아버지 티론이 아들들에게 잔소리로 퍼붓는 단어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후회에도 들어있는 단어다. 

이 단어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의미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밤으로의 긴 여로>>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너무 힘들어 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운한 가족 사를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진 오닐은 자신의 삶 밑바닥에 있는 아픔을 다시 꺼내어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사후 25년 간은 발표도 무대에 올리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에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 끔찍한 불행의 가족 사에 대해 적나라하게 녹아 있는 이 작품이 그에게도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오닐이 죽은 지 3년 만인 1956년 스웨덴 스톡홀롬의 왕립 극장에서 초연 되고, 그해 뉴욕 무대에 선을 보이며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밤으로의 긴 여로>>는 1957년 유진 오닐의 네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기록된다. 

 

 


 "인생 교훈에 너무 데여서 돈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건지도 몰라. 그러다 결국은 실수로 잘나가던 배우 인생까지 망쳐버리게 된 건지도. (슬프게) 전에는 누구한테도 이런 점을 인정한 적 없는데. 오늘은 마음이 너무 아파 그런가?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이런 마당에 자존심 세우고 허세 부린들 무슨 소용이겠니."

 

 -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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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3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길이 안 보이는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도 모르겠어.] 오닐이 살아생전에 이작푸 절대로 발표 안하고 사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죠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 이뿐 호빵님 덕분에 ‘밤으로의 긴여로‘ 다시 펼쳐 읽고 싶어집니다.^.^.
 

선물 주려고 샀다가 슬쩍 넘겼다ㅋ

앙증맞은 사이즈와 센스 넘치는 sns문구들
가볍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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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그것이 사람을 ‘만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사람은 사물에 에워싸여 살고 있다. 그것은 유용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물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동물인 것처럼.
이제 생각났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들쩍지근하고 메슥거리는기분이었다. 얼마나 불쾌한 기분이던지! 
그것은 그 조약돌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그 불쾌함은 조약돌에서 내 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 그거다,
- P27

바로 그거야. 손안에서 느끼는 어떠한 구토증.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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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시간을 사는 사람, 즉 존은 '시간 밖에서 사는 사람'이다. 유한한 우리의 시간에 비해 존의 시간은 우리와 달리 넉넉했다. 4천 년을 살아온 주인공 존은, 구석기 후반에 걸쳐 현재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맨 프럼 어스>는 현생 인류가 현재를 사는, 아주 아주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다소 획기적인 영화다.

 

 

2021년 나의 첫 영화다. 나는 또 이렇게 SF 장르를 벗어나지 못했다. 책 보다 영화의 편식이 유난히 심한 나를 질책하며 새해 첫 영화를 시청한다. 그리고 황당하게 <맨 프럼 어스> 2편을 먼저 보고 다시 1편을 찾아서 보고 있다.

 


<맨 프럼 어스> 1편은 SF 장르지만, 화려한 CG도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는 영화다. 소박하지만 아주 탄탄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반전의 재미로 이야기는 끝을 낸다. 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존과 그 이야기를 게임처럼 흥미롭게 토론하고 경청하는 사람들만 있다. 장소의 변화도 거의 없고 역동적인 사건도 없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보는 나도 이미 존의 이야기에 빠져 두 눈을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겨울 따뜻한 난로를 끼고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다운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의 이야기는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기고,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억지 같은 이야기다. 난로 옆에 앉아 덤덤히 이야기하는 존이 만 4천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때, 이들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편과 속편에도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은 그가 오랜 시간을 살았음을 증명한다. 한때 고흐의 친구였던 존은 오래된 우정을 간직하듯 고흐의 그림을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닌다.


존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모두 권위 있는 학자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 절실한 기독교 신자 등 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존의 이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들을 놀랍게도 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존은 교수로 아주 능력도 있고 인간성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편의 <맨 프럼 어스>는 그를 아는 동료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진지하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료들의 정을 느낀 존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죽지 않는 존의 시간은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과 연결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그의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한참 흘러 종교적인 인물에 관한 존의 이야기는 이들을 모두 충격에 빠뜨렸다.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사실을 모두 부정하는 획기적인 이야기는 영화 속 인물뿐만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도 아주 불편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반기독교적인 영화로 반감을 살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도 절실한 기독교 신자의 분노가 표출된다. 그들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렇게 이들의 질문과 이야기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듣는 동료들의 힘듦을 느낀 존은 모든 것이 그저 상상을 가미한 이야기라고 마무리 짓는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뭔가 허탈하지만,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안도하고 동료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떠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까지 나의 차분한 마음은 숨겨 둔 이 영화의 대반전에서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의 2편을 먼저 본 나는 허무한 결과를 보며 멍을 때렸다. 그때 쿠키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의미심장한 영화의 반전 수수께끼를 알기 위해 나는 2편을 접하고 1편을 더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 1편이 논리적인 이야기로 지식의 향연을 펼쳐나간다면, 2<맨 프럼 어스 2: 홀로신>은 약간의 스릴러 적인 면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1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편에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정체가 드러나자 떠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1편의 움직임 없던 공간은 2편에서는 조금 확장된다. 학교와 집, 그리고 1편의 연관된 인물의 장소의 공간 확장은 이야기의 범위가 더 다양하고 복잡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고 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존이 늙어 간다는 것이다. 홀로세 마지막을 산 존도 이제 최후를 맞이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이 약간 끊어지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1편보다는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1편의 조용한 전개를 생각하면 속편은 긴장감을 자극하지만, 그 긴장감이 주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학생들의 등장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들의 활동과 존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구조도 뭔가 어설프다. 존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또 그렇게 흥미롭지도 않다. 후반부로 갈수록 존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존의 실체를 알자 기독교적 광신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그에게 질문하며 흥분한다. 조금은 지나친 설정에 영화를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싶은 장면이 몇몇 있었다. 존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범법 행위가 결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먼 행동들은 점점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들의 행동은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분노를 일으켰다. 영화의 설정이 이런 의도였다면 성공이다. 2편의 다소 산만한 설정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나의 부족으로 영화의 충분한 감상은 떨어졌지만,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틀림없다.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나, 그저 이 감정을 놓치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근래 접하는 책이며 영화며 종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비종교인으로 나름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중립적인 편이라 생각했다. 종교가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지만, 근래에 부정적인 면을 너무 많이 접한지라 종교에 대해 자꾸만 편견이 생기고 있다. 본질이 흐려지는 종교의 순기능이 점점 더 왜곡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주인공 존은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다. 하지만 주변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존에게서 사람들은 비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도 느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은 존이 말했듯이 많은 경험에 대한 깨달음의 축적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랜 시간을 죽지 않는 존은 우리에게 선지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불멸의 힘은 마치 전지전능함으로 과대 포장된다. 그래서 그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고 위대함을 발견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존이 말했듯이 그저 자신은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아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지나온 시간을 공부했다고, 단지 오랜 경험의 축적은 우리가 몰랐던 진실에 대해 조금 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존에게 경험의 축적은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느긋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존의 여유가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질문이 제법 많은데,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한숨 짓게 된다.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긴 시간 끄적거려 본 적은 처음 같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도 영화처럼 계속 불편하다.

 


마침, 묘하게도 넘긴 책이 샤르트르의 <구토>


그의 글이 강하게 눈길을 끄는 건지금 나의 기분을 대변한 듯한 반가움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늘 있는 어떤 확신이나 뻔한 일과는 달리, 마치 질병에 걸리듯 닥쳐왔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나는 기분이 좀 이상하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뿐이다. 그것이 일단 자리를 잡고는 꼼짝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기에,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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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1-01-2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프롬 어스> 인생 SF죠. 2편은 평이 좋지 않아서 걸렀는데, 궁금하긴하네요ㅎㅎ
 
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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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라는 말장수가 살았습니다




16세기 중엽 하펠 강가에 미하엘 콜하스라는 말장수가 살았다.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이자는 당시 누구보다 올곧으면서도 무시무시한 인물로 손꼽혔다.


책은 이렇게 두 문장의 시작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16세기 독일 작센 지방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말 장수이자 상인으로 성공한 ‘한스 콜하제‘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는 가라말 두 마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진다. 말장수인 콜하스는 장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작센 지방의 드롱카 성의 융커의 횡포에 억울하게 가라말 두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  자신의 튼실했던 말들은  삐쩍 말라 비틀어져 죽도록 밭일에 이용되고 있었다.  이 억울한 상황을 콜하스는 법에 호소하기로 한다. 그래서 융커 벤첼 폰 트롱카의 모든 악덕을 법원에 소송하여, 법에 호소하고 부당함에 대해 알리려고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귀족들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융커의 집단은 콜하스의 고소를 모두 기각해버린 것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평소 발도 넓고 평판이 꽤 좋았다. 그의 정직성과 올곧음은 인간 관계에서도 호감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자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이런 든든함도 어쩌지 못하는 힘의 권력이 좌우한 것이다. 콜하스는 자신이 제기한 소송이 고위층의 개입으로 법원에서 아예 기각됐음을 알게 된다. 콜하스는 실망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인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 그는 선제후에게 청원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꾹 눌러 참으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총리실에서 보낸 결정문이 집으로 도착한다. ˝콜하스는 상습 소송꾼˝이 되어있었고, 자신의 말을 찾아가라는 통보와 함께 더 이상 총리실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충고가 들어있었다.


콜하스는 분노하였다. 그리고 억울했다. 심지어 선제후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러 갔던 아내가 죽기 직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한다. 콜하스는 이제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한다. 그의 생업인 장사는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인 말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었다. 콜하스는 자신의 재산과 불법적인 피해에 대해서 보상받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전 재산을 털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기껏 말 두 마리 때문에 무장봉기?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처음부터 무기를 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서 더 이상 억울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 그에게 최후의 방법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청원을 하러 갔던 아내를 잃고 법원의 위협을 받은 뒤에 일어난 일이다.
한 개인이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면, 무엇보다 공적인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도 생각하게 된다.


미하엘 콜하스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의 전 재산을 틀어 불법에 저항해 나가는 것을 접할 때는조금 무모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는 부분이 있기에 콜하스의 직진에 질책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드롱카 성의 횡포는 콜하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콜하스의 봉기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이 책은 루터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숨어있다. 그리고 <미하엘 콜하스>는 영화로도 상영되었다.
보통 법은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법은 정의와는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가끔 현실에서 우리는 느끼지 않을까. 사적 이해관계에 섞여 법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놀아나는 것을 말이다. 책 속의 못된 융커의 영향력을 지금 이 현실에서도 느끼는 씁쓸함이 있으니.


콜하스에게 남은 마지막 보류, 캡슐 속의 쪽지가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충분히 자신의 생명을 보장 받고 아이들에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콜하스는 절대 쪽지를 넘겨 주지 않는다. 미소를 띠면서 쪽지를 삼킨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의 고통만큼 드롱카 성의 융커 또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의 마지막 신념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정의감에 불탔던 미하엘 콜하스는 역사적으로 무시무시한 인물로 표현된다. 조금은 무모하다 싶은 정의감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지만, 현실을 따진다면 콜하스의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 앞에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콜하스는 자신의 죄를 법의 원칙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를 봉기하게 만든 부조리한 융커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감내해야 한다. 여기서 양심이라는 그 단어들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종이보다 가벼운 것이란 걸 아는 우리는, 이 단어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편할 수밖에 없다.



책은 8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졌다.
나머지 이야기도 꽤 담고 있는 의미가 많다.
그 중에서 두 편만 간단히 이야기 하면,


<O. 후작부인 >

천사같았던 이가 하루 아침에 악마처럼 보인다.

조금은 황당한 광고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짧지만 임펙트가 있다.
자신이 천사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가장 선량하고 순수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은 더 극에 달한다. 흰색의 오점이 더 크게 부각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소설이다.
조금은 황당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이야기다.


<칠레의 지진>

당시 시대상 스캔들일 수밖에 없는, 연인의 비극적인 운명
그들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희망의 밧줄 하나가 들어온다.
죽으려고 하는 순간 땅이 요동 친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연인은 각각 홀로 이 난리 속에서 기를 쓰고 버티고 살아 낸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들은 살아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살아있음에 신께 감사한다. 또한 눈에 들어 온 무시무시한 지진의 잔해를 보며 하느님의 능력에 무서움도 느낀다.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세상에서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를 보여준다.
인간사가 늘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늘 우리가 아는 아쉬움을 남긴다.

어느 정도 수습과 안정을 찾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이 모든 재앙의 책임을 따져 물어야 했다. 재앙의 원인과 하느님의 노여움 그리고 하느님의 관용을 말한다. 이 정도로 그친 것에 감사하면서 죄를 다시 묻는다.

이 연인의 불경스런 죄는 재앙의 불씨가 되고, 결국 이야기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듯 한 상황이 벌어진다.


클라이스트 소설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사람들의 이야기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거의 변화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 때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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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2 2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오에 겐자부로의 책에서
텍스트로 다룬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은데 제가
원전을 만났는지 헷갈리네요.

리뷰를 찾아 보니 한 십년 전쯤
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

종교개혁에 나섰던 루터가
뒤이은 농민전쟁에서는 농민들의
편이 아닌 제후 편에 선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뿐호빵 2021-01-03 00:02   좋아요 2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셨나요ㅎㅎ

책에서 중재자로 나선 루터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고지식한 성서주의와 교리주의 였다는 사실에 분명 한계가 있었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남은 휴일도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