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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 희곡집
아서 밀러 지음, 김윤철 옮김 / 평민사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시련>은 세일럼의 마녀사냥 재판의 기록을 토대로 꾸며진 희곡이고 클래식 반열에 오른 값을 하고 강력하다. 조센징들도 즐겨하는 '공공의 적' 멍석말이를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고, 허영심과 공포와 무지,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하는) 거울 신경 세포를 콘트롤하는 유전자 개량이 되서 인류 종의 임계점을 넘지 않는 한 크게 달라지지 않겠다는 절망감을 품게 하지만 어짜피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일이 아니니 한 시름 놓게 된다. 아수라장으로 가는 길을 프리웨이로 포장하는 '선한 의도'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순수성을 가장하거나 그 대행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마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에는 좌우가 없고 남녀 노소도 없고 강자 약자도 없고 지역색이나 문화색에서도 치우침이 없이 고루 보편적인 현상이다. 적과 싸우는 고름주머니는 그때마다 다른 의장(意匠)으로 갈아입을 뿐.
<댓가>는 이름도 전에 들어본 적없고 전혀 기대를 안했는데 얼얼할 정도로 강렬한 작품이어서 의외. 부모가 남긴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구와 옷가지 등 재고 덩어리를 처분하는 과정에서, 파산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기 위해 꿈을 포기하고 살았던 둘째 아들이 처분한 지분을 나누기 위해 오랫동안 연락을 안했던 큰 형을 호출한다. 중고가구를 수매하는 노 업자와 두 형제의 캐릭터 컴비네이션과 충돌이 상당하다. 역시 본인 인생을 갈아 넣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기만과 그러한 기만이 외부를 응시하는 토대가 되는 잠재적 피해의식이, 가까운 이웃에서 이기적인 적을 만드는 반동적인 심리 기제를 다루고 있다.
<몰락 이후>는 표현주의 극이다. 여성편력의 몽환, 어린 시절의 생채기 사이를 기억의 논리로 오고 가는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펠리니의 <8과 2분의 1>과 유진 오닐의 <위대한 신, 브라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둘은 아주 재밌고 의심할 여지 없는 걸작들이지만, <몰락 이후>의 경우 자기 연민이 조금 지나쳐서 늘어난 괄약근 사이로 의도치 않은 액상 물질이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느낌이었다.
극중에서 이름을 바꾼 마릴린 몬로 얘기도 나오는데, 애정결핍과 경계선 성격장애의 기질이 있는 그 여자와의 결혼 생활에서 작가가 상당히 시달린 부분이 보이고 생활에서 추출해낸 묘사와 진단에서 정교하게 응결된 고통의 결정체가 보였다. 단기간에 인텐시브하게 몸으로 쓸고 지나간 다음 리액션으로 낳은 이런 호소력은 숨길 수가 없는 부분인가 보다. 결말부에서 전의 여자가 죽고 새 여자와 다시 시작한다는 식의 터닝포인트의 이정표는 안이해 보였다. 삼층 무대 너머에 있는,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탑으로 상징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려 했던 모양인데 성공적인지는 모르겠다. 범상한 단어들로 조합되어 있어서 흘겨 읽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아포리즘적인 관념 어구들도 단단하게 박혀있어서 눈에 띄었다.
번역도 상당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