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2 - 상극 ㅣ 타카시로 시리즈
도바 순이치 지음, 한성례 옮김 / 태동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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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5살 중학생의 신고를 받은 실종자 수사과 3분실 형사 타카시로 켄고는 여중생 노조미 실종사건을 맡습니다. 애초 사건성 자체가 불분명했지만 가출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친구들의 진술과 딸이 사라졌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수사를 회피하는 듯한 부모의 태도 때문에 타카시로는 더더욱 사건에 매달립니다. 그러던 중 동료들이 진행하던 상해사건 목격자 실종사건과 노조미 실종사건 사이의 접점을 발견한데다 노조미의 아버지가 감춰온 가족의 비밀을 알아낸 타카시로는 유괴와 납치의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타카시로 시리즈’ 또는 ‘실종자 수사과 시리즈’로 알려진 도바 슌이치의 작품으로, 약혼자의 실종을 다룬 1편 ‘실종자 1 : 식죄’의 후속작입니다. 일본 원작과 국내 두 출판사에서 지은 번역제목이 모두 제각각이라 좀 복잡해 보이는데, 1편의 경우 일본 원제는 식죄(蝕罪, 죄로 인해 썩어 들어간 상처)지만, 한국에서는 ‘실종자 1’, ‘사라진 약혼자’로, 2편의 경우 일본 원제는 상극(相剋)이지만, 한국에서는 ‘실종자 2’, ‘사라진 여중생’으로 출간됐습니다. 이후 3편과 4편은 각각 ‘사라진 대학 이사장’, ‘사라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번역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판권 부분에 표기된 작가 이름은 Doba Shunichi인데, 한 출판사는 ‘슌이치’ 대신 ‘순이치’로 표기했으니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할 때 두 이름을 모두 찾아봐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잔혹한 ‘공중에 매달린 상태’”라는 점에서 실종은 생사가 확인되기 전까지 주위사람들의 모든 것을 잠식하는 끔찍한 범죄입니다. 특히 실종자의 가족은 좀처럼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찰의 초기대응 때문에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종은 그 어떤 강력사건보다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잘 모르겠지만) 45살의 베테랑 형사 타카시로가 속한 일본 경찰청 실종자 수사과는 마지못해 만들어진 전시행정의 산물이자 동료들로부터도 ‘짐짝’ 또는 ‘쓸모없는 맹장’ 취급을 받는 조직입니다. 실제로 구성원 면면을 살펴보면 상부에게 밉보였거나 나사 하나쯤 빠진 듯 문제가 있거나 몸에 이상이 있는 말년형사로 채워져 있는데, 평소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듯한 그들이지만 정작 실종사건 수사에 임할 때는 그 어떤 엘리트 팀보다 더 열정적으로 움직이곤 합니다.

 

타카시로가 뛰어든 여중생 노조미 실종사건은 애초 사건성 자체가 부족합니다. 부모조차 경찰의 수사를 회피하는 탓에 노조미에 관한 세세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타카시로의 탐문 행보는 속이 터질 만큼 답답하고 느리게 이뤄집니다. 어렵게 찾아낸 작은 단서들을 이어 붙여 사건의 큰 그림을 그려내고 별개처럼 보이던 상해사건 목격자 실종사건과의 연관성까지 찾아내긴 하지만, 거기에 이를 때까지 타카시로가 겪은 고난은 실종사건 수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또 집요함 이상의 사명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타카시로를 움직이는 힘은 절대 사명감이 아닙니다. 7년 전 행방불명된 당시 7살이던 딸 아야나는 아직도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고, 그 사건으로 인해 타카시로의 가정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술과 담배에 찌들어 경시청 수사1과에서 쫓겨난 타카시로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인 상태에서 실종자 수사과에 배속됐고, 이후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실종사건 수사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수시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야나의 망상은 지친 타카시로에게는 위안이자 격려이자 죄책감의 근원입니다. 사명감과는 전혀 다른 그 무언가가 타카시로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타카시로 외에 각자 사연을 가진 실종사 수사과 멤버들의 이야기도 눈길을 끄는데, 1편에서 타카시로와 묘한 케미를 발휘하며 수사를 이끈 27세의 묘진 메구미가 뒤로 한 발 물러선 대신 이번에는 전직 프로야구 선수였다가 부상으로 은퇴한 뒤 경찰이 된 35세의 다이고 루이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언제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현장을 누비는 말년형사 노리즈키 다이치와 실적을 올려 다시 한 번 조직 내 주류에 편입하려는 아비루 마유미 실장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사건 규모에 비해 45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좀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루할 정도로 집요한 탐문이 대부분이라 성질 급한 독자에겐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실종사건 수사의 교과서라고 해도 될 만큼 내실이 탄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사건 자체도 꼼꼼하고 정교하게 묘사됐지만 타카시로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의 심리와 내면을 섬세하면서도 찰지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사건보다 캐릭터에 더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랄까요?

 

도바 슌이치는 (2013년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는) 10편의 ‘타카시로 시리즈’를 포함하여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 소개된 건 4편의 ‘타카시로 시리즈’와 3편의 ‘나루사와 료 시리즈’, 그리고 스포츠소설 ‘오심’이 전부이고 2014년 이후론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대중성과 완성도를 겸비한 작가라서 출판사들이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그저 아쉽고 의아할 뿐입니다. 언젠가 그의 작품들이 한두 편씩이라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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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강 ㅣ 캐트린 댄스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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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 CBI 특별수사관인 캐트린 댄스는 경찰국과 마약단속국 베테랑까지 포함된 대책본부에서 갱단 수사를 벌이던 도중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탓에 서류 업무만 전담하는 부서로 좌천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첫 임무에서 사건성을 밝혀냈고, 동일범에 의한 동종수법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자 비공식적으로 수사권을 되찾아옵니다. 피해자들을 직접 죽이진 않지만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만들어 ‘알아서 죽게 만드는’ 가공할 범행수법에 댄스와 수사진은 경악합니다. 클럽, 카페, 병원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서만 사건이 일어난 탓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수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댄스는 누군가 피해자들의 비극을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음을 감지하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고독한 강’은 ‘XO’ 이후 5년 만에 출간된 ‘캐트린 댄스 시리즈’ 신작입니다. 현지 출간은 ‘XO’가 2012년, ‘고독한 강’이 2015년이니 한국 독자에겐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늦게 소개된 셈입니다. 그래도 기다렸던 만큼 신작 소식이 반가웠고 이른바 ‘인간 거짓말탐지기’라는 별명을 가진 캐트린 댄스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무척 기대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동작학, 즉 상대의 몸짓 언어를 통해 그의 진술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말하지 않은 사실들까지 파악해내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댄스는 이번에도 그녀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댄스는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걸맞게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인간 거짓말탐지기’ 재능은 용의자는 물론 동료, 연인, 가족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작동하게 됩니다.

 

메인 사건은 극도의 공포심을 조장해 사람들을 ‘알아서 죽게 만드는’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쫓는 것이지만, (좌천되기 전까지 댄스가 주력했던) 무기와 마약을 거래하는 대규모 갱단 소탕작전이 적잖은 비중으로 병행됩니다. 또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든 아들 웨스와 딸 매기와의 갈등, 재혼까지 고려중인 연인 존 볼링과의 관계 등 댄스 본인의 개인사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돼서 벽돌책에 가까운 분량을 지루할 틈 없이 꽉 채워주고 있습니다.

 

“스너프 필름 제작자와의 치열한 두뇌 싸움!”이라는 홍보카피가 붙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스너프 필름을 훨씬 뛰어넘는 잔혹한 사디즘 광신도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과 강간은 물론 전쟁터, 수술실, 대재난 현장 등 끔찍하거나 역겨운 상황을 담은 영상에 심취한 자들은 이미 업로드된 영상을 돈을 내고 다운받기도 하지만, 특정한 시나리오를 요구하며 사건을 일으킬 것을 의뢰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 장면을 고화질 카메라로 촬영하라.”는 것입니다. 이 가공할 범죄의 진범은 처음부터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주체할 수 없는 살인욕구에 휩싸인 지독한 소시오패스인 그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자신을 추격하는 매력적인 요원 캐트린 댄스입니다.

 

메인 사건이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대 통제 불능의 소시오패스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로 전개된다면, 나머지 사건과 상황들 - 갱단 소탕작전, 댄스의 아들과 딸의 갈등, 댄스의 로맨스 – 은 모두 막판에 짜릿한 반전을 이끌어내며 마무리됩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다소 사족처럼 읽혔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복선을 회수하며 반전으로 이어진 덕분에 새삼 제프리 디버의 정교한 설계도에 감탄하게 됐는데, 다소 단조로워 보였던 메인 사건의 아쉬움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인 구성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에 가깝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목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Solitude Creek’입니다. 첫 사건이 벌어진 클럽의 이름이자 그 일대를 흐르는 지류의 이름인데, 고유명사라는 점에서 원제를 그대로 썼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서 ‘고독한 강’이라고 언급되는 부분이 하필 일본 이민세대의 과거사와 관련된 대목 한 군데밖에 없는데다 작품 전체의 주제나 의미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어판이라면 모를까 한국어판에 굳이 고유명사를 번역까지 해서 제목을 붙인 점 때문에 재미있게 읽고도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낀 게 솔직함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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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가 모이는 밤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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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북상 중인 가운데 M대학 2학년인 마리와 소노코는 A고원에 자리 한 미노리 교수의 호화별장을 찾습니다. 하지만 교수 부부 대신 이오스미라는 청년 홀로 별장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산사태로 상하행길이 모두 막히자 마리와 소노코는 당황합니다. 더구나 폭우와 바람을 피하려는 낯선 자들이 연이어 별장을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자 어색한 분위기는 극에 달합니다. 그리고 깊은 새벽, 잠 못 들던 마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사고, 과실, 정당방위 등 갖가지 이유로 순식간에 도미노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와중에 함께 온 소노코가 누군가에게 살해된 걸 발견한 마리는 자신의 도미노 살인을 소노코 살해범에게 뒤집어씌우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리를 거듭해도 소노코를 죽인 범인은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2013년 ‘일곱 번 죽은 남자’를 읽은 뒤 홀딱 빠져 ‘닷쿠&다카치 시리즈’를 포함, 한동안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을 탐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출간 소식이 뜸해져서 무척 아쉬웠는데, 2019년에 나온 ‘끝없는 살인’은 재미있긴 해도 기대에 살짝 못 미쳤고, 다시 3년이 지나 만난 새 작품은 오랜만에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명품 미스터리를 제대로 맛보게 해줬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호화별장에서 엉겁결에 도미노 살인을 저지른 마리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울 소노코 살해범을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D경찰서의 중년형사 미모로가 (자신이 직접 목격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바로 체포할 수 없었던) 호스티스 살해범을 찾는 것입니다. 별개의 사건처럼 흘러가던 두 이야기는 중반부쯤 접점을 갖게 되고, 마리와 미모로는 마지막에 이르러 태풍이 몰아치는 호화별장 앞에서 극적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밀실이나 다름없는 호화별장에서 벌어진 연속살인을 다룬 마리의 이야기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팽팽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리가 자신의 범행을 뒤집어쓸 소노코 살해범을 찾아 급박하게 추리를 펼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와 코믹 코드가 한데 어우러져있어서 ‘닷쿠&다카치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또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를 응원해야 되나?”라는 딜레마와 함께 과연 소노코 살해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구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형사 미모로가 호스티스 살해범을 쫓는 이야기는 굉장히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트라우마, 욕망, 집착 등 어둡고 끈적끈적한 것들로 채워진 듯한 미모로의 캐릭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괴담 혹은 호러물의 색채를 더해 가는데, 마지막에 밝혀진 미모로의 진짜 속내와 정체는 호스티스 살인사건의 진실과 함께 짜릿한 반전을 이뤄냅니다.

 

후반에 실린 ‘작가 후기’가 무척 재미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이 작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짓, 품위 없는 작풍(作風), 결점투성이, 젊음의 소치”라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가장 니시자와 야스히코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실은 ‘살의가 모이는 밤’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통산 네 번째(1996년)이자, 대표작인 ‘일곱 번 죽은 남자’ 직후에 나온 작품입니다. 전작의 부담감에 짓눌렸던 심정, 하지만 전작을 능가하는 미스터리를 위해 고민했던 그의 노력과 자신감을 잘 대변한 ‘작가 후기’인 셈인데,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은 ‘일곱 번 죽은 남자’에 필적하는 재미와 완성도를 지녔다는 생각입니다.

 

다 읽고 나면 ‘살의가 모이는 밤’(원제 殺意の集う夜)이란 제목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적절한지, 또 우연과 필연이 겹쳐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도 황당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건들을 잘 집약한 제목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 “1페이지의 첫 줄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의 기술이 전부 복선이 되어, 마지막 한 줄에서 밝혀지는 것.”을 이상적인 미스터리로 여긴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논리 퍼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그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 적극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대한 저작에 비해 한국에서 출간된 건 이 작품까지 단 아홉 편뿐인데,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취향이 안 맞는 작품도 있긴 했지만, 앞으로도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이 꾸준히 한국독자들에게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혹시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맨 앞장부터 찬찬히 복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반전의 단서가 눈에 확 들어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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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ㅣ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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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1975년의 오슬로. 킬러 올라브 요한센은 보스인 호프만으로부터 아내 코리나를 살해하라는 뜻밖의 지시를 받지만 언제나처럼 묵묵히 임무에 임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감시하던 올라브는 품어선 안 될 감정을 품게 됐고,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맙니다. 어느 밤, 무엇 하나 추억할 것도, 간직할 것도 없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기로 한 올라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누구를 죽일 것인지,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어디로 도망칠 것인지...

 

‘블러드 온 스노우’는 2015년 출판사에서 보내준 교정지를 읽고 줄거리 하나 없는 짧은 서평만 남겼던 작품입니다. 이후 정식 출간된 책을 받았지만 다시 읽을 생각을 못하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거의 7년 만에 그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주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직후에 출간된 ‘미드나잇 선’과 함께 ‘오슬로 1970 시리즈’로 불립니다. 두 작품 모두 1970년대의 오슬로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스릴러로 ‘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그 어떤 스탠드얼론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풍미가 넘쳐나는 작품들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단 분량입니다. 매번 600~700페이지가 예사인 요 네스뵈가 200페이지에 불과한 스릴러를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만에 집필을 끝냈다는 점은 가히 전설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사심을 담아 해석하자면 그만큼 밀도도 높고 빈틈도 없으며, 주인공과 이야기를 향한 작가의 몰입도가 엄청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출판사 소개글대로 “그 짧은 분량 속에서도 고독한 분위기의 하드보일드에서 하드코어 스릴러로, 그리고 슬픈 로맨스로” 끊임없이 몸을 바꿉니다.

 

두 번째로 눈길을 끈 건 지독히도 시니컬하거나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는 인상을 풍기는 요 네스뵈답지 않은 문장들입니다. “마음껏 망가지려고 작정한 듯 펄프 픽션이 갖는 싸구려 정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개는 막장 같고, 분위기는 선정적이고, 피가 튀는 장면에서도 어쩐지 실소를 금할 수 없다”는 ‘옮긴이의 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시니컬함과 싸구려 정서가 묘하게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빈틈 하나 없는 냉정한 킬러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모지리’ 같은 주인공 올라브는 그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범한 운전엔 재주가 없어서 도주차량 운전도 못하고, 은행강도는 적성에 맞지 않으며, 셈이 약해 마약 판매 일도 못하는데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매춘부 관련 일도 하지 못하는 게 올라브의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오슬로 마약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호프만의 신뢰를 받는 킬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만의 특별하고 전문적인 재능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재능의 뿌리는 (요 네스뵈 주인공들의 공통점 중 하나인) 저주받은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난독증에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도 정작 원작의 지루한 부분들을 해체하고 대신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취미 역시 고독한 킬러인 그의 정신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킬러로서의 삶을 폐기하고 선택한 금지된 사랑은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7년 전에 교정지를 읽고 쓴 짧은 서평에 “영화 ‘L.A 컨피덴셜’과 홍콩의 느와르 영화들이 연상됐다. 한겨울 오슬로의 뒷골목을 무대로 한 비정한 액션과 애틋한 로맨스의 조화랄까?”라는 문구가 있는데, 딱 이만큼이 스포일러 없는 소개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가 공개한 “자신이 죽여야 할 보스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킬러”라는 카피와 조합하면 누구나 대략적인 줄거리는 쉽게 연상할 수 있겠지만, 요 네스뵈가 그렇게 허술하고 뻔한 이야기로 마무리했을 리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오래 기억에 남을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블러드 온 스노우’를 그저 그런 킬러 스릴러로 예단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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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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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위스콘신에 살던 18살 앨리스 리와 호주 여성 36살 루비 존스가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한날 뉴욕에 도착합니다. 앨리스가 절망뿐이던 과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과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뉴욕에 왔다면, 루비는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한 남자를 사랑했다가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자 불안감과 우울함을 못 이기고 도망치다시피 뉴욕으로 왔습니다. 화려한 대도시 뉴욕에서 상반된 행보를 보이던 두 사람은 한 달 후 기구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침, 허드슨 강 자갈밭에서 괴한에게 무참히 살해된 앨리스의 사체를 루비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루비는 경찰이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한 그 소녀가 누군지, 왜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던 건지 알아내지 않곤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집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종국엔 그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네 이름은 어디에’는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로 볼 수 없는, 여러 장르가 복합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범인은 누구?”보다 “피해자는 누구?”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데다, 살해된 앨리스의 ‘영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사랑과 영혼’ 스타일의 판타지가 전개되기도 하고, 사체를 발견한 충격으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루비가 위안을 찾기 위해 가입한 소모임 ‘데스클럽’ 멤버들의 대화는 마치 죽음에 관한 에세이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막판에 범인을 찾아내는 미스터리가 전개되긴 하지만, 살해당한 앨리스의 영혼이 바랐던 건 ‘범인 찾기’가 아니라 “내 이름이 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 미스터리 자체가 이 작품의 결정적 서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거의 100% 경찰이나 탐정이 신출귀몰하고 사악한 범인을 찾는 것이 기본 틀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소품이나 단역, 즉 범인의 잔혹한 범행수법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특히 계획범죄가 아닌 우발적인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엔 이름이나 나이 등 한두 줄의 정보 외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 앨리스의 영혼과 그녀의 사체를 발견한 루비가 번갈아 화자를 맡아 피해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 ‘네 이름은 어디에’는 무척 파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갖더라도 주인공인 앨리스가 ‘어차피 살해될 것’이란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를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단돈 600달러와 카메라만 갖고 뉴욕에 도착한 18살 앨리스가 새로운 삶의 단초를 찾아내고 난생 처음 행복이란 걸 맛보는 초반을 읽을 땐 더는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앨리스의 시신을 발견한 루비가 큰 충격과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앨리스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그녀의 분투가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궁금해졌고, 소멸되지 못한 채 루비 곁에 머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앨리스의 영혼이 애틋했던데다 루비가 가입한 ‘데스클럽’ 멤버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도 눈길을 끌어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소설이자 거리를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넓게 보면 이 작품은 성별을 떠나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작가가 곳곳에서 사회적 약자이자 성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인 ‘여성’을 강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별 논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과 함께 남성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보는 방식을 다룬 ‘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과 달리 ‘네 이름은 어디에’는 좀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란 뜻입니다.

 

“누가 범인?”에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소설 속에서 소품이나 도구로 등장했던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는 일반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상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범죄 피해자를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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