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ㅣ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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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히다카의 젊은 아내와 함께 사체를 발견한 건 히다카의 친구이자 교사 출신 아동문학작가인 노노구치. 노노구치는 한때 같은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가가 교이치로가 담당 형사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가가는 노노구치가 작가적 호기심 때문에 수기 형태로 기록한 사건 당일의 정황을 참고자료 삼아 수사에 나서고 이내 그 수기를 바탕으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하지만 체포된 범인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하기만 할뿐 “왜 히다카를 죽였는가?”라는 동기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가가는 집요한 탐문과 증거 수집을 통해 범인의 동기를 파악하는데 성공하지만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음을 감지합니다.

 

‘악의’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완성형의 가가 교이치로를 만날 수 있으며, 교사였던 그가 왜 교직에서 물러나 경찰이 됐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형사로서 본 궤도에 오른 가가의 맹활약과 함께 전작인 ‘잠자는 숲’에서 독자에게 소개되지 않은 그의 ‘경찰이 되기 전의 이력’을 엿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급적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의 서평을 읽지 말 것을 권하고 싶은데, 비록 초반에 범인이 공개되고 이후 범인의 동기를 찾는 것이 주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범인이 누군지 알면 초반부가 다소 김이 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이 누군지 설명하지 않곤 작품을 소개하기 난감한 탓에 저 역시 두루뭉술한 인상 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어렵겠지만 역시 아무 정보 없이 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악의’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의 핵심은 ‘누가?’ 또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입니다. 체포된 범인은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동기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다무는데, 가가는 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범행동기 속에 사건의 진실이 있다고 확신하곤 집요하리만치 수사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기어이 범인의 동기를 알아내지만 수사를 마무리하기 직전 찰나의 순간에 눈에 들어온 어떤 ‘장면’ 하나 때문에 앞서 얻은 결과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범인과 피해자의 과거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사건 속에 깃든 진짜 ‘악의’와 ‘선의’를 파악함으로써 자칫 뒤바뀔 뻔한 두 사람의 운명을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이미 한 번 완주한 바 있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기억에 따르면 가가의 능력은 ‘물증과 단서를 통한 추리’보다는 사건 관련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미묘한 태도 변화에 주목하다가 그것들을 물증과 단서에 연결시키는 대목에서 더 빛났던 것 같습니다. ‘악의’는 그런 가가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으로, 어떻게든 범행동기를 감추려는 범인이 쳐놓은 교묘한 덫을 해제하고 그의 심리적 동요와 태도 변화를 지켜보던 가가가 오랜 시간 축적돼온 악의의 정체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야말로 와이더닛(whydunnit) 미스터리의 진수라고 할까요?

 

시리즈 첫 편 ‘졸업’에서 대학졸업반 시절이던 가가는 다음 작품인 ‘잠자는 숲’에서는 이미 7~8년 이상의 커리어를 지닌 30대 초반의 경시청 수사1과 형사로 등장합니다. 그 7~8년 가운데 2년 정도를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는 간략한 정보만 소개됐었는데, ‘악의’에서는 그가 교직을 접고 경찰이 된 사연이 공개됩니다. 힌트만 공개하자면 ‘학교폭력’ 때문인데, 그 사연은 이번에 맡은 소설가 살인사건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서 가가로 하여금 더더욱 진실 찾기에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는 교직 시절의 사건 때문에 가가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 품은 악의에 대해 더욱 분노하고 더욱 열심히 수사에 나선 셈인데, 그래서인지 다 읽은 뒤엔 통쾌함이나 시원함과는 거리가 먼 씁쓸한 여운이 더 깊고 짙게 남았습니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시리즈 4편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입니다. 독특한 결말이었다는 점만 기억에 남아있는데, 덕분에 처음 읽는 듯한 기대감과 함께 ‘완성형의 가가 교이치로’가 어떻게 더 진화하게 될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읽을 때와는 달리 주인공의 성장을 순서대로 읽으며 지켜보는 것은 역시나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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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들
제스 루리 지음, 안현주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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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네소타 주의 릴리데일에서 한 소년이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강간을 당했다고 수군거린다. 그리고 얼마 뒤, 또 다른 소년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12살 소녀 캐시는 납치당한 후 돌아온 소년들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이나 뒤표지의 카피만 보면 연쇄소년납치범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라고 예단하기 쉽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은 12살 소녀 캐시가 1인칭 화자를 맡은 지독한 성장소설이자 심리 서스펜스에 더 가깝습니다. 분명 소년들이 납치당하고 잔혹한 짓을 당하는 사건이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캐시의 눈에 비친 일그러진 세상의 단면들과 그것들이 내뿜는 악취나 공포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소년들을 노리는 외부의 괴물과 자신을 노리는 집 안의 괴물과 맞서야 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훌륭한 성장소설이자 범죄소설.”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범죄에 휘말린 희생자 대부분이 문제적 가정이 몰려있는 지역의 거친 소년들이다 보니 그 외 지역의 사람들은 물론 경찰마저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로지 캐시만이 릴리데일에 사는 괴물들 하나하나를 주목하며 범인을 찾아내려 애쓸 뿐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역시 캐시 눈에는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 도니와 공모하여 불온한 짓을 일삼는 괴물로 보일 뿐입니다. 사냥개를 풀어놓은 이웃의 고블린 역시 소년납치범이 되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캐시의 주목을 받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캐시가 상대해야 할 괴물은 집안에도 존재합니다. 조각가라고 자칭하지만 작품도 돈도 내놓지 못하는데다 스와핑을 연상시키는 역겨운 행위들이 거리낌 없이 벌어지는 파티를 수시로 열기도 하며, 가족들을 소유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친딸인 캐시와 언니 세피에게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 도니가 바로 그 괴물입니다. 말하자면 캐시에게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는 셈입니다.

 

“미국이 성범죄자 등록법을 시행하게 된 사건을 바탕으로 쓴 화제작!”이라는 카피와 연쇄소년납치범을 강조한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범죄 스릴러라는 기대를 잔뜩 품은 탓인지 12살 소녀 캐시가 끌고 가는 심리 서스펜스에 가까운 서사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막판에 캐시의 집요함 덕분에 범인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되긴 하지만 그 역시 통쾌함이나 징악의 쾌감보다는 소도시 릴리데일과 캐시의 집을 지배하고 있던 더럽고 역겨운 기운을 몰아냈다는 안도감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은 뒤에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건 괴물에 둘러싸인 채 홀로 외롭게 성장해야 했던 캐시의 캐릭터였습니다.

 

사족으로, 가장 아쉬웠던 점 하나는 번역입니다. 마지막 수정을 거치지 않은 듯한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보였는데, 같은 번역가의 작품 ‘낫씽맨’(캐서린 라이언 하워드)에서 번역의 문제를 전혀 못 느낀 걸 보면 원작 자체 때문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 더 문장을 다듬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여러 차례 든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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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ㅣ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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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학대와 폭력 속에 비뚤어진 성장기를 보내며 크고 작은 전과를 쌓아온 야가미 도시히코. 32살이 된 그는 뒤늦게나마 자존감을 되찾고 그간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골수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식 수술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야가미는 느닷없이 살인용의자로 몰린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어떻게든 추격을 뿌리치고 수술 병원에 도착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2중으로 추격당하는 야가미의 처지는 갈수록 위태로워집니다. 한편 30대 감찰계 주임 겐자키와 정년이 얼마 안 남은 기동수사대 최고참 후루데라는 하룻밤 사이 연이어 기이한 살인행각을 벌이는 일명 ‘그레이브 디거’를 수사하면서 동시에 야가미의 행적을 쫓던 중 상상치도 못한 진실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데뷔작인 ‘13계단’에 홀딱 빠져 뒤이어 출간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연달아 읽은 건 2000년대 중후반의 일입니다. ‘그레이브 디거’는 그의 두 번째 장편으로, 무척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숨 돌릴 틈 없는 도주극과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이 뒤섞인 (해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논스톱 서스펜스’였습니다. 속죄를 위해 골수 이식을 결정한 악당 주인공, 그를 추격하는 정체불명의 사내들, 중세 영국의 처형 수법을 모방하여 충격적인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그레이브 디거’, 그리고 상부를 속여 가면서까지 진실 찾기에 나선 젊은 감찰계 주임과 기동수사대 최고참 콤비 등 매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인물들이 12시간에 걸친 숨 막히는 추격전을 이끕니다.

 

야가미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무사히 병원에 도착하여 자신의 골수를 기다리는 백혈병 환자에게 새 생명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인용의자로 오인하는 경찰로부터, 또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을 붙잡으려는 정체불명의 사내들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도 야가미는 오로지 무사히 병원에 도착하는 것만을 원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모은 단서들을 통해 야가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조금씩 눈치 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악연 아닌 악연을 맺어온 후루데라 경장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이자 연쇄살인을 벌이는 그레이브 디거의 행각은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입니다. 사지를 묶은 뒤 끓는 물에 삶아 죽이고, 온몸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도록 추락시키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불로 태워 죽입니다. 수사진은 이런 기괴한 살해수법이 중세 영국의 처형 수법과 꼭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범인이 왜 그토록 무리한 방법을 구사하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그에게 살해당한 인물들의 접점을 가까스로 알아내긴 하지만 오히려 수수께끼는 더욱 복잡해질 뿐입니다.

 

야가미의 추격전과 그레이브 디거의 연쇄살인에 못잖게 흥미로운 대목은 경찰 내부의 알력입니다. 형사사건을 다루는 수사부와 테러 혹은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보안부 사이의 갈등이 꽤 비중 있게 그려지는데, 사건 자체와 무관해 보이던 이 갈등은 막판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설정이라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개인적으론 짜릿한 반전과 시간제한 미스터리가 잘 배합된 ‘13계단’에 좀더 높은 평점을 줬지만, 장르적 매력에 관해서만큼은 ‘그레이브 디거’가 압도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다양한 소재와 코드들을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판 위에 빈틈 하나 없이 펼쳐놓은 필력은 이후 출간된 ‘제노사이드’의 예고편처럼 느껴져 “역시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독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환불 보장’을 내세워도 좋을 걸작.”이라는 ‘해설’ 속 문구는 제겐 절대 과장광고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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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의 손길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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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대 중반의 다이라 유스케는 준세이카이의대 대학병원 흉부외과 8년차 의사입니다. 가혹한 근무환경과 열악한 처우 때문에 모두가 기피하는 흉부외과지만 유스케는 의대 시절부터 오로지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정진해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흉부외과 의사로서의 미래를 결정지을 파견 인사를 앞두고 유스케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입니다. 최고의 파견 자리 하나를 놓고 1년 후배인 하리야와 경쟁해야 하는데, 그는 다름 아닌 흉부외과 과장 아카시의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유스케는 아카시 과장으로부터 원하는 곳으로의 파견을 전제로 두 가지 요구를 받습니다. 하나는 신입 인턴 3명 중 2명을 흉부외과에 영입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아카시 본인의 논문 조작설을 주장한 괴문서 유포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치넨 미키토는 현직 의사이자 미스터리 작가지만 무척 특이한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읽은 작품만 따져 봐도 ‘가면병동’과 ‘시한병동’이 본격 미스터리와 의료 서스펜스를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라면, ‘리얼 페이스’는 성형의 빛과 그늘을 다루면서 거기에 연쇄살인사건을 접목시킨 작품이고, 최근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은 (메디컬과는 전혀 무관한) 신본격 미스터리의 부활을 선언하는 듯한 정통 미스터리입니다. 그야말로 장르를 불문하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의사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자의 손길’은 치넨 미키토가 자신의 본업을 소재로 집필한 메디컬 휴먼 드라마라서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로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은 의술과 인품을 골고루 갖춘 완벽한 인물이거나 의술은 뛰어나지만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는 괴짜 캐릭터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유스케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의사입니다. 물론 병원 내 권력다툼 같은 데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환자를 위한 순수한 헌신과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점에선 보통 주인공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지극히 속물적인 욕심(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파견 자리를 반드시 차지하고 말겠다!)에다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요령 없다는 평가와 함께 팔랑귀에 가까운 가벼운 처신도 수시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과장의 조카인 하리야에게 최고의 파견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에서 유스케에게 던져진 동아줄은 두 개. 하지만 어느 하나 쉽지 않습니다. 오래 전부터 흉부외과 지원자가 사라지다시피 한 현실에서 3명의 신입 인턴 중 2명을 반드시 잡아야 하고, 과장의 논문 조작설을 제기한 괴문서 유포자를 찾아내는 일은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리는 유스케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으로 보일 뿐입니다. 더구나 인턴들을 유혹(?)하기 위해 나름 고안해낸 배려가 오히려 날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괴문서 유포의 용의자가 흉부외과 내 고위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오히려 유스케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설정만 보면 미스터리가 곁들여진 꽤 시끌시끌한 소동극처럼 보이지만 ‘구원자의 손길’은 8년차 의사 유스케가 진짜 의사로 성장하는 이야기이자, 용감하게 흉부외과에 도전하는 신입 인턴들의 분투기이며 병원 내 권력투쟁의 단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정통 메디컬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또 생명과 직결된 흉부외과가 주 무대이다 보니 감동 코드도 풍성했는데, “마지막 1페이지에 반드시 눈물짓게 될 것이다!”라는 출판사 소개글과 달리 제 경우엔 최소 네 번은 울컥함에 눈가가 뜨끈해졌습니다. 그건 역시 욕심 많고 소심하고 요령 없는 팔랑귀지만 진짜 의사의 모습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 유스케의 캐릭터가 그만큼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내가 아플 때 이런 의사를 만날 수 있다면!”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스케의 엔딩은 일반적인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의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갔고, 응원하고 싶어졌고,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구원자의 손길’이란 제목 대신 ‘의사의 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의 엔딩은 “반드시 후속편을!!!”이란 간절한 바람을 갖게 만들었는데, 과연 치넨 미키토가 유스케의 ‘다음 이야기’를 독자에게 선사해줄지 너무나도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사족으로.. ‘옮긴이의 말’에 이 작품의 주요 조연인 스와노 료타가 ‘신의 카르테’의 주인공이라고 돼있는데, 그는 치넨 미키토의 작품 ‘기도의 카르테’의 주인공입니다. 중쇄를 하게 되면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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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러티
콜린 후버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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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직면한 무명작가 로웬 애슐레이는 어느 날 거짓말 같은 제안을 받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 크로퍼드 대신 그녀의 유명 시리즈 마지막 세 편을 집필해달라는 것입니다. 베러티의 명성에 부담을 느낀 로웬은 처음엔 제안을 거절하지만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가 엄청난 고료를 제시하자 자기도 모르게 수락하고 맙니다. 베러티가 남겨놓은 메모와 원고 등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베러티 부부가 사는 대저택에 도착한 로웬. 하지만 그녀는 베러티의 서재에서 미발표 자서전 원고를 발견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거기엔 베러티 본인 외엔 아무도 모르는 베러티 가족의 끔찍한 비극의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베러티’는 한 가족에게 연이어 들이닥친 비극과 그 진실을 다룬 심리 스릴러이자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그린 노골적인 성애 로맨스이기도 합니다. 로웬이 발견한 베러티의 미발표 자서전 원고는 그녀가 어떻게 제러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어떻게 3남매를 둔 가족을 일궜으며, 연이은 사건과 사고가 어떻게 가족을 붕괴시켜 지금에 이르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는데, 그 자체가 심리 스릴러이자 성애 로맨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안 그래도 몽유병, 광장공포증, 대인기피증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로웬이 제러미의 대저택에 도착한 이후 겪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감정적 동요와 갈등, 그리고 위태로운 로맨스까지 더해져서 평범한 도메스틱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결의 서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읽을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쓰인 내밀한 자서전에 담긴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의 충격적인 비밀과 그 가족에게 닥친 연이은 비극의 실체, 그리고 홀로 그 모든 것들을 알게 된 로웬이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에게 품게 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 - 연민과 동정에서 시작된 뒤 자신이 알게 된 비밀을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마는 - 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입니다.

 

마지막에 몰아치는 파국과 에필로그의 반전은 그 자체로는 큰 힘을 지니고 있진 않지만, 독자에게 “당신이 목격한 ‘진실들’ 가운데 어떤 게 참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라는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불편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독자 입장에선 로웬과 베러티를 통해 ‘목격한 진실들’ 가운데 어느 쪽이 참이라고 해도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진실은 어느 쪽이 더 비참하다고 판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의 비극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논쟁적 소설”이라는 평가는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콜린 후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베러티’가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무려 다섯 편의 작품이 출간돼있었습니다. 다만 다섯 편 모두 그녀의 ‘전공’인 로맨스 작품이라 장르물로서는 ‘베러티’가 처음인 셈인데, 스릴러와 로맨스를 절묘하게 결합한 필력을 감안하면 언젠가 ‘베러티’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별 5개를 주진 못했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치명적인 로맨스와 심리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딱 한 가지만 흠을 잡자면, 남자 주인공인 제러미는 대략 30대 후반인데 그의 대사는 모두 ‘하오~ 체’, 그러니까 “밥 먹었소?”, “편하게 생각해주시오.”, “금방 가져오겠소.” 식의 사극 톤으로 번역된 점입니다. 그가 딱히 고전적인 캐릭터도 아닌 상황에서 독자로 하여금 남자 주인공을 10~20년이나 늙게 느끼게끔 만든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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