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괴담 ㅣ 스토리콜렉터 10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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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러 소설 작가다. ‘나’는 꽤 오랜 기간 괴담을 수집해왔기에 종종 자신이 겪은 괴이한 일을 들려준다며 그 해석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이번에 ‘나’는 다섯 명의 사람에게서 기이한 체험담을 듣는다. 일곱 살 때 시골집에 보내져 일곱 밤을 집안에 갇힌 채로 보내면서 겪어야 했던 이상한 체험, 남의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와 담임교사의 이야기, 어느 무명작가가 종교 단체 시설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다 경험한 설명할 수 없는 일화, 할머니의 부탁으로 타지의 저택을 찾았다가 알 수 없는 것을 불러내고 만 으스스한 일, 그리고 비 오는 날마다 나타나 괴담을 들려주는 한 가족을 만난 이의 고백 등이 그것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호러 세계를 구축해온 미쓰다 신조의 신작입니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데다 한국에 출간된 21편 중 딱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나름 마니아라고도 자처할 만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읽은 작품들은 살짝 ‘범작’에 가깝다는 인상만 받아서 ‘우중괴담’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엿볼 수 있듯 현실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현상과 그것이 몰고 온 공포가 ‘미쓰다 신조 스타일’의 서사를 통해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작가 자신이 ‘나’라는 화자로 등장하며, 그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체험담을 바탕으로 쓴 네 편의 이야기와 그 네 편을 아우르는 마무리 편까지 모두 다섯 편의 호러물이 수록돼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 본인을 ‘작가이자 화자인 나’로 설정한 작품이 여럿 있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은 독자가 느끼는 공포를 ‘작가이자 화자인 나’도 동일한 심정으로 겪는다는 점입니다. “괜히 이 이야기를 읽었다가 밤에 화장실도 못 가는 거 아닐까?”라는 일반독자의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괴담 수집가이면서도 정작 누군가에게 괴담을 들을 때면 모순된 감정에 빠지곤 하는 ‘작가이자 화자인 나’의 심정이 훨씬 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기대와 불안이 반반이었다. 전자는 어떤 괴이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그리고 후자는, 그 괴담이 뜻밖의 앙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이었다.” (p334)

 

수록작 가운데 타인의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을 그리는 초등학생과 그의 담임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예고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야기 자체도 서늘하고 소름 돋지만 막판 반전과 함께 미스터리 요소도 잘 갖추고 있어서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무척 재미있을 거란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이한 저택에서 1주일의 은거를 견뎌야했던 소년이 마물과 마주치게 된 이야기를 다룬 ‘은거의 집’과 자기도 모르게 봉인된 마물을 풀어놓은 탓에 끔찍한 공포에 빠지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부르러 오는 것’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도조 겐야 시리즈’나 ‘작자미상’-‘사관장’-‘백사당’으로 이어지는 ‘작가 시리즈’, 그리고 궁극의 호러물인 ‘노조키메’를 좋아하다 보니 대체로 눈높이도 높아지고 호러의 강도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 나머지 그의 다른 작품들이 다소 싱겁게 느껴진 게 사실인데, ‘우중괴담’은 굳이 분류하자면 딱 그 중간쯤 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미쓰다 신조 입문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지만, 제대로 된 섬뜩함을 맛보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만 9년 동안 한국에 감감 무소식인 ‘도조 겐야 시리즈’인데, 내년에는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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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처 ㅣ 나비사냥 2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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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경찰서에서 희대의 연쇄납치살해범을 체포한 공으로 광주 광역수사대로 발령받은 하태석 형사는 어느 날 옛 연인인 최지선이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을 알게 됩니다. 정치인이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불행한 이별을 겪어야만 했던 하태석은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관할서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수사에 참여하려 애씁니다. 그러던 중 범인이 체포되고 최지선 뿐 아니라 1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하태석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최지선을 공격했다고 자백한 범인에게 의심을 품습니다. 즉, 최지선을 공격한 진범은 따로 있으며 그 진범과 이미 체포된 범인 사이엔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태석 시리즈’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나비사냥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현직 형사가 집필한 범죄 스릴러로 소문이 났지만 워낙 묘사가 사실적이고 잔혹해서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허약한 서사에 묘사만 잔혹한 이야기’라고 예단하곤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우연히 읽은 시리즈 첫 편 ‘나비사냥’에서 기대 이상의 매력을 맛본 덕분에 내쳐 두 번째 작품까지 읽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좌천돼 고향인 전남 영광경찰서로 돌아온 하태석이 동료들의 무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쇄납치살해범을 체포하는 이야기가 ‘나비사냥’이라면, ‘시그니처’는 범인을 체포하고 기자회견까지 연 관할서의 수사결과에 반발한 하태석이 1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진범을 찾아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태석은 범인뿐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직(職)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나비사냥’에서 막판에 하태석을 폭발시킨 게 사랑하는 가족이 범인의 목표물이 된 점이라면, ‘시그니처’에선 한때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불행하게 헤어져야만 했던 옛 연인이 연쇄살인마에게 공격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점입니다. 가공할 연쇄살인마와의 대결, 자신을 짓누르는 내부의 적과의 충돌,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범죄 피해자가 된 점 등 두 작품은 큰 얼개에서 무척 닮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태석은 일반인이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 형사’입니다.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의 방식은 무척이나 아날로그적입니다. 예리한 촉을 갖고 있긴 하지만 수시로 ‘단순무식’한 스타일로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관할서나 상부와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독불장군이지만 심성 하나는 아주 따뜻한 인물입니다. 그래선지 명탐정이나 대단한 형사가 주인공인 스릴러와 비교할 때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리얼리티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막판에 진범을 체포하는 과정은 독자에 따라 약간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슈퍼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한국 형사의 사실감 넘치는 진면목’을 보여준 것 같아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희대의 살인마와 그의 범행 시그니처를 따라하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 엑스. 두 명의 사이코패스가 살인경쟁을 시작한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이 작품엔 두 명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합니다. 먼저 체포된 범인이 최지선 살해미수까지 자백하지만 하태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몇몇 단서 때문에 진범이 따로 있음을 확신합니다. 사실 관할서에서 기자회견까지 연 마당에 광역수사대 형사가 “진범은 따로 있다.”라고 주장하는 건 경찰 입장에서 보통 난감한 상황이 아닙니다. 결국 하태석에게 허락된 건 이미 체포된 범인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까지의 단 1주일. 하지만 범행수법을 수시로 바꾸는데다 흔적 하나 안 남기는 진범을 찾는 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에 다름 아닙니다. 옛 연인을 잔인하게 공격한 진범을 쫓는 동시에 관할서와 경찰 상부의 지독한 견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하태석의 행보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작에 비해 서사와 갈등 구조는 훨씬 더 풍부해졌고, 두 명의 연쇄살인마의 행각을 꽤나 잔혹하게 묘사한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긴 건 의식불명에 빠진 옛 연인 최지선과 하태석 사이의 애틋한 사연이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한 점입니다. 아무래도 감정이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슷한 장면을 거듭 배치한 것 같은데, 그런 탓에 전작인 ‘나비사냥’보다 무려 120여 페이지가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목마다 다소 느슨하고 지루함을 느낀 건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시그니처’ 이후 5년만인 올해(2022년),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소녀가 사라지던 밤’이 출간됐습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어 1~2권으로 분권됐는데, 늘어난 분량만큼 캐릭터나 사건 등 모든 것이 풍성해졌겠지만 ‘본론 외의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매력적인 한국 형사’ 하태석의 이야기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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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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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빈민가의 소아과 의사 데이비드 벡은 8년 전 여행 도중 납치된 뒤 참혹하게 살해돼 세상을 떠난 아내 엘리자베스의 이메일을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메일에 담긴 두 사람만 아는 암호 때문에 벡은 엘리자베스가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그녀의 경고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가 납치됐던 곳에서 두 구의 백골사체가 발견되는데, 문제는 이 일로 인해 FBI가 벡을 쫓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벡의 과거 지인마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FBI는 벡을 공개수배하기에 이릅니다. 위기일발의 도주극을 벌이면서 엘리자베스의 흔적을 추적하던 벡은 8년 전 자신과 엘리자베스에게 가해졌던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001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2005년 한국에 ‘밀약’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워낙 출간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번역제목도 원제(‘Tell No One’)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이런저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중고책 구하기가 주저됐는데 마침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돼서 얼른 찾아 읽게 됐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할런 코벤의 작품 15편 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까지 겨우 7편밖에 못 읽었고 그나마도 최고평점이 4.5점으로 만점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의 광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엔 할런 코벤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납치-실종 후 시신이 발견돼 장례까지 치른 아내가 8년 만에 연락을 해온다면 남편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내는 자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하필 그때 나타난 FBI는 남편을 살인용의자로 의심합니다. 아내가 납치된 곳에서 최근 발견된 백골사체는 물론 8년 전 아내의 죽음까지도 남편의 소행이라 여기는 FBI 앞에서 남편의 선택은 ‘일단 튀어!’ 외에는 달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 벡을 위기에 빠뜨리는 건 단지 FBI뿐만이 아닙니다. 8년 전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려던 악마와 그의 주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뭔가 결정적인 비밀들을 감추고 있는 벡과 엘리자베스 주위의 인물들도 알게 모르게 벡을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평범한 소아과 의사인 벡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엘리자베스에 관한 사소한 단서들에서 8년 전 진실의 작은 조각이라도 찾아내는 게 전부입니다. TV를 통해 전국에 공개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는 400여 페이지 분량 전체가 반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르고 과격하게 폭주하는 롤러코스터를 닮았습니다. 벡은 연이어 알게 되는 엘리자베스에 관한 진실 앞에서 때론 놀라고, 때론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닥친 사고가 깊고 복잡한 사연 속에서 벌어진 계획된 범죄라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자신과 엘리자베스 가족의 비밀까지 알게 된 벡은 바닥없는 심연에 빠진 채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까지 반전의 연속이라 서평에서 공개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보니 두루뭉술한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속도감 넘치는 짜릿한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가 선사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꼭 맛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처럼 2000년대에 출간됐다가 지금은 절판된 할런 코벤의 작품들도 새로운 개정판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아직 못 읽은 그의 작품들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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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
야요이 사요코 지음, 김소영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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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변호사인 이모부가 공원에서 살해당한 뒤 수사가 미궁에 빠진 상태에서 이모를 만난 유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모는 양아들인 시후미를 범인으로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절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며 유키에게 시후미가 범인이 아니란 걸 입증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탐정사무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유키는 시후미의 주변을 조사하면서 예상 밖의 단서들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또 다른 죽음 혹은 사건들이 시후미 주변에서 벌어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죽음과 사건들은 하나같이 사고로 처리됐지만 유키는 탐문과 조사 끝에 이면의 진실을 조금씩 파악합니다. 그리고 20여년에 불과한 시후미의 삶이 놀랍도록 많은 비밀과 수수께끼로 들어찼음을 깨닫고 충격에 빠집니다.

 

서평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용을 공개해도 좋을지 무척 애매해서 출판사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모두 찾아 읽었는데, 일단 “두 소년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죽음이 잇달아 일어난다.”, “죄와 벌, 그리고 평생 끝나지 않을 첫사랑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를 기준으로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등장인물도 꽤 많고 사건도 여러 개인데다 묵직한 심리스릴러 서사까지 갖추고 있어서 농도와 밀도가 꽤 진하고 높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추악하게 일그러진 가족사, 비정상적인 인간관계, 한 사람의 삶을 철저히 파괴시킬 정도로 잔혹했던 학대와 억압이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어서 유키의 조사가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독자는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속에 하나 둘씩 쌓여가는 기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은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왜?’와 ‘어떻게?’에 방점이 찍힌 미스터리입니다. 특히 ‘왜?’를 알아내기 위한 유키의 조사는 짧게는 1년 전, 길게는 시후미가 중학생이던 10년 전까지 거슬러 오르는데, 그 과정에서 유키는 시후미가 유일하게 친구로 삼았던 한 인물을 알게 되고, 그들 사이의 우정 이상의 감정이 현재의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어떻게?’라는 미스터리의 해법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왜?’라는 미스터리를 풀어낸 순간 유키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으며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팩트와 무관하게 진짜 가해자는 누구이고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가, 감히 누가 진실을 논할 것인가 등 신조차 단정할 수 없는 난제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미스터리답지 않게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비극을 암시하는 시적 언어로 지어진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듯 이 작품은 독자에게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감정을 남겨놓습니다. 그래선지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상처와 내면이 훨씬 더 기억에 깊게 각인되는데, 아마 이 지점에서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미련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게 탐문을 벌이는 유키의 행보는 아날로그 시대의 탐정을 떠올리게 하는 미덕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걸 기억하는 말 많은 관련자들’에 의지하고 있다는 아쉬움도 품고 있습니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뼈대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과 이미지를 통해 잔혹하지만 서정적인 미스터리를 자아냈습니다. 아마도 ‘바람아 우리의 앞머리를’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개성은 바로 이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취향에 잘 맞는 서사는 아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독특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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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우정으로 1 ㅣ 스토리콜렉터 10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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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독설가로 유명한 출판 편집자 하이케 베르시가 실종됩니다. 살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녀를 증오한 출판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일일이 그들을 조사하지만 좀처럼 혐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하이케의 시신이 발견되고 그녀의 동료였던 알렉산더마저 의문의 사고로 중태에 빠지자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을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하이케와 알렉산더를 포함하여 3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6명의 ‘영원한 친구들’이 직종은 달라도 모두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35년 전 프랑스의 한 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고가 현재의 사건과 연관된 게 확실하다는 점에 착안한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영원한 우정으로’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열 번째 작품입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본문 곳곳에서 과거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라면 보덴슈타인과 피아의 데뷔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부터 직전 작품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까지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과거에 잉태됐던 비극이 현재에 이르러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다.”는 ‘타우누스 시리즈’의 단골 설정입니다.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를 장식한 사건은 1983년, 그러니까 작품 속 현재 시점인 2018년을 기준으로 35년 전에 프랑스의 한 아름다운 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 7명이었던 ‘영원한 친구들’ 중 한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그 뒤로 그들의 삶은 제각각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사고로 인생의 순풍에 올라탔지만, 누군가는 폐인이 되다시피 독일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2018년 현재 편집자, 기획부장, 에이전트, 인쇄업 등 출판계에 몸담은 채 타우누스 일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두 명이 살해되고 나머지 멤버들 역시 35년 전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듯한 익명의 복사본 편지를 받으면서 혼란과 공포에 빠집니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언제나 그랬듯 과거와 현재의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엮는 것은 물론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던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누구도 예상 못한 30여 년 전의 참혹한 진상을 파악하는 이야기는 700여 페이지의 볼륨감을 더욱 탄탄하고 충실하게 만듭니다. 별개의 사건들이지만 실은 거대한 악연에 의해 지배된 한 개의 사건처럼 촘촘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덕분입니다.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수사를 이끌긴 하지만, 의외의 인물들이 ‘세컨드 탐정’ 역할을 펼치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전도유망한 젊은 편집자 율리아는 본의 아니게 35년 전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고의 진상을 그린 미완성 원고를 읽게 된 탓에 현재 벌어진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건 피아의 전 남편이자 뛰어난 법의인류학자인 헤닝입니다. 헤닝은 보덴슈타인과 피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범죄소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상태인데, 마침 율리아가 그의 담당 편집자라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말하자면 헤닝은 소설 속에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가’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발표한 작품도 실제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품과 이름이 같습니다.) 두 사람의 수사는 때로 선을 넘은 탓에 피아의 격분을 사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여 사건 해결에 큰 공을 세웁니다.

 

사건 외에 눈길을 끈 건 보덴슈타인의 불운한 결혼생활입니다. 58세의 보덴슈타인은 세 번째 결혼마저 파국 직전인 가운데 간암에 걸린 전처 코지마를 위해 자신의 간을 이식해주기로 결심합니다.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생활 이야기는 잔혹한 사건에서 잠시 눈을 돌릴 틈을 주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고통스런 내용이 대부분이라 아무래도 마음 편히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해리 보슈와 해리 홀레를 포함하여 제가 좋아하는 스릴러 주인공들도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걸 생각해보면 스릴러의 맛이 좀더 진하고 깊어지기 위해선 아무래도 주인공의 불행이 필수요소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2021년에 출간됐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2018년입니다. 아무래도 각각 58세, 51세에 이른 보덴슈타인과 피아를 한 살이라도 젊게 그리려는 의도로 추정되는데, 독일 경찰의 정년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시리즈 12~13편쯤에 보덴슈타인이 퇴직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우울해질 따름입니다. ‘잔혹한 어머니의 날’ 서평 말미에도 쓴 내용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가 시간을 거스르는 소재를 통해서라도, 아니면 보덴슈타인으로 하여금 탐정사무소를 차리게 해서라도 언제까지든 ‘타우누스 시리즈’를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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